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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론(Nominalisme)
P. Gochet. Les Notions philosophique, Dictionnaire, PUF, 1992, p.1762-1764(P.3299)
고셰(Paul Gochet, 1932-2011), 벨기에 철학자, 논리학자. 리에쥬 대학교수
비아르(Joël Biard, 1952-) 프랑스 철학자. 생끌루사범출신, 중세-르네상스 전문가.
중세 유명론은 허구적인 관념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대상에 상응하는 개념을 인정하고 그 개념의 내포성(함의)을 다루고자 한다. 그런데 개념의 함의 범위가 여러 한정에서 무한정까지 여러 갈래이다. 개별화될 수 있는 점을 다룬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이후의 개인주의와 겹치는 듯하지만, 개인의 부분화를 정초하게 된다. 즉 개체의 성립은 분할된 부분의 성립으로 나간다. 사실 정치 경제학적으로 부분화는 통치(지배)의 논리의 포획된 것인데 말이다. 그 개념론이 자본주의의 사회와 국가들에서 유명론에 힘입어(?) 중요 논제로 다루고 있지 않는가? 개별화와 개체의 실재성을 강조하게 되면, 개인주의와 맞물려 들어가 가게 되고, 공동체에 관한 논의는 뒤로 밀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언어 논리철학이 자본탐욕과 국가주의, 그리고 교회의 순결주의와 맞물려서 관념을 다시 불러온 것은 아닌지, 가상적 관념도 용어의 지위를 넘어서 내포를 규정하면서 개념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개념론이 학문을 지탱해주는 장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의 규정 속에 비실재적 관념도 대상으로 삼으면서, 가상의 화폐를 먼저 인정하고 명령으로 실행하듯이, 공동체의 내용을 규정하면서 가상 관념을 개념으로 환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따라서 개념론은 유명론에 한 부분으로 성립으로까지 확장한 것이 아닌지.
유명론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공동체의 소통에서 그 용어를 쓸 수밖에 없기에, 그 용어의 한정된 범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용어가 개념론의 개념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 용어를 개념으로 환원하고 대화하는 공간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개념론에 끌려들고, 그 개념론은 또한 관념론에 포획된다. 즉 모든 용어가 공간의 사실에 기준으로 하는 경우에 관념론에 포획될 수 밖에 없다. 용어는 드라마같이 시간 흐름의 과정에서 마루와 골에 속하는 이중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공동체 안에서 진솔한 소통은 마루와 골의 용어를 시간의 과정에서 이해하고 소통하며, 그리고 과정 속에서 공감하고 공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 코로나19로 이익집단들이 자기들 이외를 파쇼라고 몰아붙이는 데,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이 파쇼에 길들여진 마루에 있었던 흔적일 것이다. 그 시절 교회나 그 이익집단이 박참주나 전참주에게 다른 ‘단어’ 하나라도 말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개념 없는 인간들이란 ‘단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과정에서 경험적 총체에서 나온다. 코로나 확산으로 전광훈과 미통당[국민의 힘]의 지난 과정의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골에서도 마루에서도 자신들의 광신을 장식하지 않았던가. 그들에 속하는 자들의 미투도 마찬가지이다. 조국을 비난했던 몇몇 유투버들도 마찬가지이다. 참주들 앞에서 주구(走狗)이었다가, 소통의 시대에는 자기들의 탐욕(그들은 욕망이라 부른다)에 부합하지 않는 대상들에게 왈왈대며 짖는다. 이들을 보고 읽는 이들의 호응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그들이 키운 또는 세뇌한 족속(꼴꽁)에 찬사와 환호를 받으면서 향유한다, 악순환(cercle vicieux)이다.
개념론이 유명론과 연관 덕분에 넘쳐나는 호감과 자신을 갖는 순간에, 그 관념에 그물에 잡히게 될 것이다. 유명론은 다양체라는 새로운 절편들과 만남에서 새로운 용어, 항목, 개념을 생성할 것이다. 말하자면 유명론은 개념론의 공간에 있지 않고 지속(시간)의 위상에 존속한다. 개념론자들은 위상이 다른 새로운 절편들이 관념론과 개념론의 분류와 분배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부당전제의 오류는 과정에서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자연은 과정을 겪으며 새로운 가지치기를 하고, 현실에서 이중화 현상을 내 보인다. 오늘 민주당에서는 이낙연을 대표로 선출하였다. 과정이 있는 저항이었다. 조국은 언론 꼴꽁들과 투쟁(la lutte)과 전투(le combat) 중이다. 투쟁과 전투는 전쟁이 아니며 우리는 이런 식으로의 저항을 노마드라고 불렀다. 우여곡절의 과정은 꼴꽁과 관념에 저항하는 다양체의 권능에서 나온 것이다. 철학사도 저항의 역사이다. 적폐청산도 저항의 역사의 과정이다. 이겼다는 개념은 없다. 교회와 자본이 이겼다고 하는 개념 없는 짓에 끌려드는 것이, 바로 관념의 완전성(순결성)을 믿는 악순환이다. 박홍규 말씀, 제대로 공부하는 학자가 없어서 군사부[군부+사법]가 들어선다고 했었다.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적어서 악순환에 빠져 있다. 열려 있는 세상에는 악순환은 없고, 권능과 능력의 노력이 있다. 그러나 그 노력을 하는 이가 드물고, 이 풍토와 생태에서 긴 과정을 거치기가 지난하다. 어렵고 드물다. (53SMI)
# 유명론(Nominalisme) ***
[개요]
유명론은 본질의 모든 실재론을 거부하고, 개체들에게 현존만을 인정한다. 유명론은 심지어 심성적 본징(l‘entité)의 형태로 있는 보편자의 현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1세기에 로스켈레누스(Jean Roscelin, 1050경-1121경)와 더불어 나타났으며, 12세기에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에 의해 다시 논의되었던, 중세 유명론은 14세기에 정점을 이루었다.
가정 덕분에 일반 항들(목소리 항들과 개념 항들)은 특이한[단일한] 실재성들(les réalités singulières)에 귀착하는 기호들(des signes)로 간주되었다. 신적 속성들의 다수성은 그 자체로 마치 기호들의 다양성들로 생각되었으며, 따라서 완전성들은 신 그 자체와 완전히 동하다고 여겼다.
개인주의는 경제와 정치의 영역에서 특권을 부여받았다. 유명론은 고전주의 시대에도 유지되었으며(홉스, 록크, 버클리, 꽁디약‥…), 그리고 20세기에서 다시 활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논리학에서 또는 수학에서, 모든 플라톤주의에 대항하는 반동으로서, 굿맨(Nelson Goodman, 1906-1998)과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 1908-2000)은 언어를 구축하였는데, 이 언어들은 그것들의 대상들을 마치 개별자(des individus)처럼 취급한다. 유명론은 개념들의 남용하는 현실화에 반대하여 항상 비판적 범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명론은 집합론과 무한의 용어들에 의해서 일어난 문제들에 대치하게 되었다. 실천철학[도덕론 포함]에서 유명론은 사회(계급 국가 등)을 구성하는 개별자들 바깥에 있는 사회에게, 사회 계급들에게, 민족(국가)에게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J. Biard)
[본문]
개체에게만 현존을 인정하는 학설의 범위를 평가하기 위하여, 학설의 범위가 무엇을 배제하였는지를 보아야만 한다. 유명론자는 ‘큰곰자리’에게 완전하게 현존을 인정할 수 있고, 거기에서 그 별자리를 구성하는 별들의 구별된 본징(une entité)을 볼 수 있으나,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하나의 불연속적 개체로서 취급해야 할 것이다.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시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성좌를 개체로서 취급하는 유명론자와 사회를 구체적 보편으로 취급하는 헤겔의 사이에서, 차이는 순수히 언어적(verbale, 대화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런 미망에서 깨어안 견해는 토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굿맨(Goodman, 1906-1998)이 이런 견해에 부여한 기계기술적 의미에서 유명론은, 부분들과 전체 사이에 부분론적(méréologique)관계를 이용하여, 소속 관계의 거부와 같은 길을 갈 것이다. 복합된 두 개체가 있다면, 굿맨은 이 둘을 도합(sommes)이라 부르고, 이 둘은 적어도 이들을 구성하는 원자들 중의 하나가 다를 경우에는 다르다.
예를 들어, 도합(아르헨티나 + 브라질)은 다른 도합(아르헨티나 + 칠레)와 다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라는 두 원자들을 가지고, 전체 셋을 보태기(더하기)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반대로 사람들은 개별자들(즉 아르헨티나, 칠레, 소속 관계)을 가지고 무한히 다른 분류들(classes, 층)을 형성할 수 있다. [우선] <아르헨티나, 브라질>, 즉 [<아르헨티나, 브라질>]으로 배열된 짝이 그 분류(층)의 구성원[부분]이라는 분류(층)이 있고, [다음으로] 앞선 것을 유일한 구성원으로서 포함하는 말하자면 [[<아르헨티나, 브라질>]]을 포함하는 분류(층)이 있고, [또 다음으로] [[[<아르헨티나, 브라질>]]]을 포함하는 분류(층)이 있고, 그리고 또한 무한히 계속하는 층이 있다. 유명론은 이러한 부풀리기(inflation)[무한 소급]를 멈춘다.유명론이 전혀 집합을 갖지 않은 상동관계[동족관계]인 개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n개의 원자들에서는, 더군다나 2n-1이라는 구별된 총체성들을 가질 것이다. 무한(l’infini)은 배제되지 않는데, 사람들이 n에게 구속[한계]를 부여하지 않은 한 그러하다.만일 유명론이 개별자들에게서만 현존을 인정한다하더라도, 유명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구체적 본징들을 위하여 추상적 본징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확실하게도, 굿맨은 성질들도 집합들도 더 이상 수집할 수 없으나, 그는 칼리(le quale)[본징]이라 부르는 성질에 대해 일종의 유명론적 등가([un] équivalent nominaliste)을 배치한다[다룬다]. “지성적” 술어에 의해 표현된 칼리는 반복하는 추상적 본징이며, 누구나 이것을[추상적 본징을] 인간들 a, b, c, 등등에서 재발견한다. 본징은, 그 본징이 굿맨의 유명론에 의해 개별자[개체]처럼 간주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성질들과 다르다. 이 개별자[개체]는 (부분론(la méréologie)의 의미에서) 인간들 a, b, c이라는 구체적 특수자들(particuliers)[특이자들]의 한 부분을 이룬다. 굿맨에게서 범주소적(catégorématique)표현들만이, 지시하는 표현들만이, 항상성들[상수들]이거나 도는 개별자들의 변이[변수]들이다. 진술을 형성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확실히 술어를 필요로 한다. 굿맨에게서 원초적 술어는 중첩(overlap; se superpser à)이며, 이어서 중첩의 도움으로 그는 “부분론적” 술어를 정의한다(의 부분이다, est partie de). 이 술어는 마치 종합범주소(un syncatégorème)처럼 [현재로서] 표현된다. 이 종합범주소는 따로 떨어진 의미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부분을 이루었던 구절[문장]의 의미화를 기여한다.
유명론의 의미는 방식(la manière)에 의존한다. 사람들은 이 방법으로 “개별자”와 “보편자”라는 보충적인 두 항목을 해석한다. 굿맨에게서는 집합들이 이미 보편자들이다. 반대로 코치아렐라(Nino Cocchiarella, 1933-)에게서, 보편자들은 개별자들과 다른데, 즉 이 보편자들이 개별자들에게 술어일 수(prédicables) 있다는 다시 말하면 속성일 수(attributables) 있다는 점에서 이다. 이런 정의(définition)에서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의 대조는 마치 프레게의 의미에서 포화된 표현들과 러셀과 콰인의 말한 불포화된 표현들 사이에서 존재론적 대응처럼 해석된다. - 프레게는 고유명사와 특이성의 항목들을 말하고 있으며, 러셀은 불포화된 표현을 “명제적 함수들”이라고 불렀고, 콰인은 그것을 “열린 문장(구절)”이라 불렀다. 비포화적 표현은 그것의 형식 자체 속에서 그것의 내재하는 불완전함의 표시(la marque)를 포함하고 있다. 이 표시는 형식적 또는 준(準)형식적(semi-formelle) 말씀 속에서 표시위치의 현전에 의해서 또는 변할 수 있는 것들의 현전에 의해서 표시된다.
예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장의 예를 들어 보자: “브루투스가 브루투스를 죽이다”, “카시우스가 카시우스를 죽이다”, “브루투스가 카시우스를 죽이다”. 첫 두 문장에는 공통하는 어떤 것이 있고, 셋째 문장에는 없다. 이 어떤 것, 그것은 예를 들어 동사(tue)와 같은 단어가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x)가 누군가(x)를 죽이다(x tue x)”라는 표현이다. 유명론자들은, 비포화적 표현에 연합하는 예외-언어학적(extra-linguistique) 실재성의 전형에 의해, 개념론자에게, 온건한 실재론자에게, 플라톤화한 실재론에 대립[반대]된다. 사실상, 유명론자는 이들 중에 어떤 자에도 연합하지 않는다.술어로 할 수 있는 것들(les prédicables)은 유명론자에게는 실재상으로 언어적인 것만을 갖는다.명제적 함수들은, 심지어 유명론을 주장하지 않는 작가들에게서 조차, 유명론적 프로그램을 부분적으로 실행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이리하여 러셀은 층위들(des classes, 계층)을 제거하기 위하여 명제적 함수들을 이용한다. 수학의 원리들(The Principles of Mathematics 1903)에서 러셀은 다음 사실로부터 논증을 끌어낸다: 즉 “x가 F[함수]인 z들의 계층[등급]의 구성원이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은, 만일 오직 만일 “x가 F”인 경우에 진리이다. 이 경우에 계층들이 불리어올 수 있었던 일들(les tâches)은 순수하게 상징적 대상들에 의해 채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상징적 대상들이란, 마치 우리가 어떤 공리를(환원할 수 없는 공리를) 인정한다면 “F이라는 모든 x” 계층적 추상과 같은 것이다.
콰인은 이런 회피적인 조정작업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 조정은 ‘퓌로스 1세의 승리’일 뿐이다. 러셀은, 명제적 함수들을 양화기호들(qualificateurs)에 의해 연결하면서, 그 명제적 함수들에 의하여 의도적 본징[본질]에 부정하게[은밀하게] 호소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콰인 자신은 학설적 유명론과 대립시키면서 방법적 유명론을 옹호한다. 그 생각[방법적 유명론]은, 유명론자가, 과학을 몇 가지 법칙들로부터 포기하더라도 그 과학을 빈약하게 함이 없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에서, 콰인은 잠재적 계층[등위]들의 이론을 정교하게 했다. 이 이론에서 계층들의 항목들은 신카테고렘(syncatégorème)처럼 취급된다. - 이러한 것은 항목들이 양화기호들에 의해 연결된 가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배제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이론은 계층들을 사물화하지 못하고 또한 러셀의 비집합이론(no class theory)의 불리한 점을 지니지 않는다. 이런 이론은 자연수들의 산술학적 필요에는 충분하지만, 그러나 실수들의 산술학적 필요들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형이상학적 토대(Metaphysical Foundations: Mereology and Metalogic, 1988)(유고)에서 마틴(Richard Martin, 1916–1985)은 일상적 개체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부분론(méréologie)[수리논리학, μέρος, «partie»]을 풍부하게 했다. 이것은 “xord. y, z”의 세 위치들에게 초기 술어의 도입을 요청한다. 요청들에 의해 한정된 이 술어는 자연 언어 속에서 “x는 어떤 질서(순서)에서 y와 z로 있다”로 해서 풀이될(paraphraser, 설명될, 환원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술어는 그 질서에서 양화하기를 회피한다. 이 풀이는 불완전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넓혀진 부분론은 충분한 힘[권능]이 있어서 유명론적 형식주의 안에서 자연수의 산술학 뿐만 아니라, 유리수, 실수, 복소수의 산술학도 탐구할 수 있게 한다. 마틴의 기획은 자리 잡아서, 보편자들을 명사들에 환원하는 유명론으로 이어가기보다, 오히려 굿맨의 유명론을 이어 간다. 유명론의 전자의 경향에 반대하여, 러셀은 하나의 반대를 나의 철학적 발전(My Philosophical Development, 1959(fr. Histoire de mes idees philosophiques, 1961, p. 215)에서 드러낸다: 즉 한 단어(mot)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다라고 한다. 단어 “고양이”에는 수많은 표본들이 있다. 그럼에도 러셀이 고려하는 것과 다른 명증함을 고려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완전하게 인정할 수 있다. 즉 “고양이”의 첫 출현은, 유형의 유사성(la similitude de type)을 실체화 또는 사물화를 하지 않는고 하더라도, 둘째 출현과 동일한 유형이라는 것은 진리라고. “a는 b와 닮다”라는 문자의 진리는 마치 분리된 본징[본질]로서 유사성의 현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유사성을 불러오지 않고서 이 문장의 진리 조건들을 줄 수 있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문장 “a는 b와 닮다”는 진리이다. 즉 만일 이러한 질서에서 a와 b로 구성된 개체 z가 명제적 함수 “x는 y와 닮다”를 만족시킨다면 오직 그럴 경우에만 진리이다. 그러고 나서 질서에 관해 양화하는 것을, 따라서 그것을 사물화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마틴의 제가지 지위에서 술의 도움으로 이런 절(節)을 환원할 것이다.
논리적 원자론의 철학(The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 1918)에서, 러셀은 원자적 사실의 개념을 도입한다. “이것은ㆍ썰매(Ceci, un traîneau)는 저것ㆍ얼음(cela, la glace)위에 있다”는 원자적 사실을 묘사하는 문장이다. 유명론은, 원자적 사실이 외래언어적 실재성과 문법적 구조의 요소들로부터 생산된, 절충[잡종]의 본징이라는 것을 반대할 것이다. “얼음 위에 썰매”에 의해 묘사되는 상황과 같은 객관적 상황들이, “얼음 위에 있는(est) 썰매”에 상응하는 사실들의 현존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감이 없이도, 있다(exister)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할 수 있다. 유명론자에게서, 계사(le copule) “est(있다)”는 술어화 작업의 메카니즘에 속한다. 계사는 마치 위에(sur)라는 전치사가 관계 하는 것처럼, 관계를 표현하지 않는다. 사실상 계사는 신카테고렘(syncatégorème)이다. 유명론자가 경제[아낌]를 행하고자 시도할 다른 하나의 본징[본질]은, 마치 다음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 명제인데: 아마도 “진(vrai)”과 “위(faux)”라는 술어들의 주체[주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간주된 명제, “믿다(croire)”와 “인식하다(connaître)”라는 동사들에 의해서 표현된 명제적 태도들의 대상[목적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간주된 명제, 한 말씀의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번역되었을 때 운반된 내용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간주된 명제이다. 장애물들이 의도성(지향성)의 언어적 이론에 대한, 특히 처치(Church, 1903-1995)에 의해 드러난 사실처럼, 구성작업을 못하게 할 것 같이 보인다. 처치가 드러낸 그 사실이란, 마치 “그는 ‘눈은 희다(la neige est blanche)’라고 썼다”라는 인용을 포함하는 한 문장을 번역할 때, 인용된 그 문장은 번역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또한 유명론의 보다 정교한 판본들(versions)이 이런 문제들의 해결을 가능하게 했다. (P. Gochet) (6:35, 53TLI)
# 인명록 ********
전318 퓌로스 1세(Pyrrhus Ier ou Pyrrhos Ier, Πύρρος, 전318경-272경)[주도권 306-302, 재위 397-272] 몰로스 종족에 속하는 에피르(Épire)왕조의 왕. 마케도니아 왕위 계승전쟁에서 일시적으로 마케도니아 왕을 맡기도 했다. 그는 로마인들과 전쟁에서 이겼지만 너무 비싼 비용을 들였다고 하는데, 이로부터 “퓌로스의 승리”(« victoire à la Pyrrhus »)라는 말이 나왔다.
O
1050 로스켈레누스(Jean Roscelin, Roscellinus, 1050경-1121경), 프랑스 스콜라 철학자, 유명론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1079 아벨라르(Pierre Abélard, (Petrus Abaelardus), 1079-1142) 프랑스 철학자, 변증론자, 신학자. 개념주의 발명자(inventeur du conceptualisme). Epistolae duorum amantium (Lettres des deux amants), 1115 La romance d'Héloïse (1113-1115). 긍정과 부정(Sic et non, 1122), 불행한 이야기(Historia calamitatum 1132), L'Histoire de mes Malheurs), 편지 「Historia calamitatum. Epistola I) (« Histoire de mes malheurs. Lettre I », vers 1132)」
1285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Guillaume d'Ockham, 1270/85경-1349) 영국 태생 프랑스에서 활동, 유명론자. 프란체스코파,
1588 홉스(Thomas Hobbes, 1588-1679)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영국에서 일어난 시민전쟁으로 정치적 글을 쓴다.
1632 로크(John Locke, 1632-1704) 영국 철학자로서 전통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목사직과 의사직 사이를 주저하였다. 그는 정치적 입장으로 프랑스를 전전하다가 1668년 명예혁명이후에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1685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 영국계 아일랜드의 성공회 주교, 철학자, 과학자. 『시각신설론(視覺新說論, An Essay Towords a New Theory of Vision, 1709』, 『인지원리론(人知原理論,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1710』
1715 꽁디약(Etienne Bonnot de Condillac, 1715-1780) 프랑스 감각론자.
1848 고트로브 프레게(Friedrich Ludwig Gottlob Frege, 1848-1925) 독일 수리 논리학자.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의 수리논리학적 탐구(Die Grundlagen der Arithmetik: eine logisch-mathematische Untersuchung über den Begriff der Zahl, 1884), Écrits logiques et philosophiques(trad. Claude Imbert, Points essais Seuil, 1971) contenant : 1892 paper, "On Sense and Reference" ("Über Sinn und Bedeutung"),
1872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사회 비평가. 수학의 원리들(The Principles of Mathematics 1903). 프린키피아 마테마티가(Principia Mathematica, 1910–1913)(with Alfred North Whitehead). 3 vols. 1910–1913 / 나의 철학적 발전(My Philosophical Development, 1959(Histoire de mes idees philosophiques, 1961), 논리적 원자론의 철학(The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 1918)
1903 처치(Alonzo Church, 1903-1995) 미국 수학자, 논리학자. 정보이론의 정초자 중 한사람.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Logic, 1964
1906 굿맨(Nelson Goodman, 1906-1998) 미국의 철학자. 사실, 허구 그리고 예측(Fact, Fiction, and Forecast, 1955), 그가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가르칠 때(1946–1964), 제자로서 촘스키(Noam Chomsky, 1928-)와 퍼트남(Hilary Putnam, 1926–2016) 등이 있다. 1968년 이후 하버드대 교수.
1908 윌러드 밴 오먼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 1908-2000) 미국 언어 철학자. 하버드대 교수(1956-1978).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1953, Word and Object, 1960(MIT Press) 1. The closest thing Quine wrote to a philosophical treatise. Chpt. 2 sets out the indeterminacy of translation thesis. 콰인의 저작 중 가장 철학 논문에 가까운 것이다. 책 2장에서 그는 번역 불확정성 논제를 제시하고 있다.
1916 마틴(Richard Milton Martin, 1916–1985) 미국 논리학자, 분석철학자. 피치(Frederic Fitch, 1908–1987)의 제자. 부분론(méréologie: 수리논리학, μέρος, «partie») 형이상학적 토대(Metaphysical Foundations: Mereology and Metalogic, 1988)(유고).
1932 고셰(Paul Gochet, 1932-2011), 벨기에 철학자, 논리학자. 리에쥬 대학교수
1933 코치아렐라(Nino Cocchiarella, 1933-), 미국 인디아나 대학 교수 형식논리와 존재론 연구자. Logical Investigations of Predication Theory and the Problem of Universals (1986)
1952 비아르(Joël Biard, 1952-) 프랑스 철학자. 생끌루 사범출신, 철학으로 교수자격. 중세와 르네상스 전문가.
(8:25, 53TLI)
# 덧글:
들뢰즈의 주름은 바로크 예술 전반에 나타난 사건들을 라이프니츠의 개념주의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개념주의의 개념화작업(la conception)은 개념의 정립과 정립된 개념의 내용을 다룬다. 개념은 아데아나 에이도스처럼 한정된 동질적 범주를 갖는 개념과 다르다. 말하자면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페이론이 주어져 있다면, 이 양자는 극한에서 두 관념이다. 그런데 이 양자 사이에 층위 또는 정도의 차이를 갖는 다양한 모방체들이 있을 수 있다. 이 모방체에 맞는 개념작업이 있고, 그 개념작업에 따라 개체들은 개념으로 성립할 수 있다. 게다가 그 내용과 범주(유형)이 정해진 방식으로 일정하게 유지한다면 그 개념은 명제로서 다룰 수 있는 대상화 또는 사실들로서 또는 상태들로서 다룰 수 있다고 한다.
존재의 논의가 아니라 현존하는 세계에서 논의를 한다면, 시간성을 부여해서 길게 그리고 공간상으로 범위를 넓히면, 모든 것은 사실들이라는 단편도 그리고 의식에 의해 관여하는 범주도 아닌 전체로서 온사건(Evénement)이 있을 수 있다. 온사건은 기나긴 과정과 거의 무한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온사건의 안에는 분류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고 또 있을 수 있다. 이 여러 다양한 사건들(les evénements)은 각각이 자신에 맞는 내용과 범위(외연)을 가지고 있다. 사건들의 과정과 내용의 강도(속도, 경향)들을 일시적으로 단절하여 단면들 또는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때, 각 단면들과 각 단편들은 각각이 자기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개별자(한정된 방식으로 불가분이라는 의미에서)로서 개념이 성립할 수 있다. 이 성립된 개념들은 일단 이데아도 아니고 아페이론도 아니다. 그리고 개념들이 여러 정도의 차이와 내포성(강도)의 차이를 갖는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의미에서(현존 세계에서) 1과 0사이에 있는 제3의 무수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제3자들은 현존에 관한 논의이지 존재의 문제를 벗어났다. 즉 이데아 존재라는 것은 유명론 차원에서 목소리처럼 소리로서 있는 것이지 그 실재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개념론은 이데아를 버리지 않고, 제3자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온사건(우주의 과정)의 부분이듯이, 이데아와 같은 대상을 지향하고 또는 설정(가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관이 있음을 부인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개념의 다양한 정도의 차이에서 가장 포괄적 개념은 우주가 되고, 가장 미세한 개념은 먼지 또는 미세한 방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개념들 각각은 자기 자신을 인지하는 지각이 있다고 하게 되면, 모든 개념들은 한정된 자기 동일성(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개념들은 내용을 설명하는 명제들의 주어도 되고, 술어들을 포함할 수 있다. 이 개념들은 시공간을 넘어서 초월적인 것과 연관이 없다는 점에서 유명론의 일부를 수용하고 있지만, 유명론처럼 초월적 존재를 소리와 대응하는 기호일 뿐이지 내용이 없다는 부정의 입장에까지는 가지 않는 중간적, 즉 실재론과 유명론의 중간참에 위치한다.
개념들이 사건들처럼 여러 방식으로 여러 과정을 가지고 있고 또한 여러 다른 성질들을 내포하고 있다. 단지 개념들은, 사건들처럼 과정의 변화와 방향, 강도와 속도들을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한정된 시공간에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대상화가 되고 또는 물리학과 화학 게다가 생물학(유기체학)에는 적용될 수 있다. 돌이나 물이나 또는 식물이나 곤충은 일정한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명제로서 술어적 설명을 할 수 있고, 나아가 학문적 체계를 갖는 기나긴 담론을 이룰 수 있다. 존재가 아닌 현존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개념은 이미 경험적인 영역을 존중하고 있다. 그럼에도 실재론의 이데아를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영혼 때문이다. 영혼은 시간과 공간에서 수시로 변화하고 활동하며 나가가 자기 성장과 완성의 길로 나가가는 방향성과 경향성 또한 의도성과 의욕 또는 욕망을 포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 개인을 개념을 삼아,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 그 소씨의 개념화 작업을 통한 개념으로 논문도 쓰고 대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소씨라는 말과 기호와 소씨의 내용성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또는 소씨를 잘못알고 있다(소씨는 플라톤의 제자이다)고 하는 것에서, 게다가 현존하는 소씨가 없다고 소씨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소씨는 실재론이 말하는 원형의 소씨는 허구이지만, 유명론이 말하는 소씨라는 단어가 소리와 기호일 뿐이라고 하는 것은 현존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학문적 또는 경험적 확장과 발견 또는 발전과 발명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그럼에도 영혼은 무엇인가?
소씨의 영혼은 소씨 친구 안티스테네스와 아가톤이나, 제자인 알키비아데스, 플라톤, 크세노폰이나 이들이 말한 개념을 통한 소씨의 영혼을 알아차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문헌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과정의 온생(sa Vie)은 그 총체적 경험을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씨(so씨)라기 보다 소크라테스(Socrates)라고 말한다. 그 대명사는 술어로 표현되는 내포성과 강도에 따라 온소씨가 되거나 엉터리의 내용을 서술하면 거의 무(無)-소씨가 된다. 그럼에도 소씨라는 개념은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소씨에서 보듯이 총체적 삶을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소씨의 이데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총체적 삶을 소씨의 이데아처럼 여긴다. 분명한 것은 총체적 삶의 소씨와 이데아로서 소씨는 다른 것이다. 즉 유명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데아로서 소씨는 없다, 즉 소리와 기호일 뿐이다는 성립한다. 그러면 당시 현존했던 소씨의 총체적 삶에서, 소씨는 그 서술에서 또는 표현에서 소씨가 있는 것은 소씨라는 양태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양태들에 대해 이름을 부르거나 대상화하는 것을 누가 말하겠는가! 유명론은 실증적으로 대상화와 구체화를 다루는 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이런 의미를 존재의 극한을 신이라고 보았던 파르메니데스에게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겉으로는 크리스트교의 유일신이라는 유명(唯名)을 신앙으로 갖는 종교를 생각하게 되면, 실재론, 개념론, 유명론이 각각 학설을 말하고 있기보다 삶의 태도와 도덕과 종교에서 차히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름 뿐인 관념에 신앙을 거는 것도 아니고, 아페이론과 같은 흐름에 경험총체를 찾는 것도 아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0과 1 사이의 정도의 차이들에서 삶의 분배와 개념들을 찾을 것이다. 개념의 용도를 확장하여 0과 1 그리고 그 사이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설정한다면, 전체와 무 그리고 제3자로 무한정한 것들 모두 개념으로 성립할 것이다. 운동과 정지, 그리고 돌의 운동 나무의 자라는 운동, 곤충의 나는 운동, 송아지가 걷는 운동, 형체를 잘 알 수 없지만 영혼의 활동성의 운동 등으로 운동과 정지 사이에 다양한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개념론은 인식론이란 영역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 바로크는 현대에도 그리고 계속된다고 하는 것은, 개념을 통한 학설(이론)과 발명(창안)이 확장되기 때문일 것이다. (53TLIJ)
덧: 그럼에도 개념을 통한 사고를 넘어서 실재성에 이르고자하는 욕망의 사유는 이어질 것이다. 이 사유는 아제에도 지속하지만 확장하여 모든 중생(인민)에게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점에서 기대와 아제는 같은 의미일 것이다. 모든 이에게 불성이 이루어져 화엄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가자 가가 저 만디를 전자서! (53UMC)
#참조# catégorématique: [범주소(의)]
프랑스 사전에서 catégorématique: adj inv. (philosophie), relatif à un catégorème, un terme ou une expression ayant un sens propre, hors contexte
- catégorématique: catégorème, -at- et –ique 마치 système에서 systématique처럼
그리스어 catégorie에서 카테로렘(catégorème). [언어학에서 범주소를 의미하는가?]
한편 명제에서 카테고렘은 주어와 분리할 수 있는 성질들을 지칭한다. 그는 산보한다, 또는 그는 전제군주[참주]다 라고 할 때, 동사적으로 ‘산보하다’와 명사적으로 ‘참주’로 따로 떨어진 범주적요소가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즉, 개체의 설명에서 술어적이다).
카테로렘(catégorème): 어원적으로 카테쿠메누스(catechumenus: 예비신자, 입문자. gr, κατηχούμενος)에서 나왔다는 설명이 있는데, 이것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교리교육(catéchisme)과 같은 어원일 것이다.
사용법(catégorématique, adj.): 이 개념은 벨(Bayle)과 볼테르(Voltaire)에서 사용되었다.
Qui est de la nature du catégorème.
Un père ou un frère se retirent bien plus contents lorsque l'écolier distingue entre l'infini catégorématique et l'infini syncatégorématique, Bayle, article Zénon, rem. G.
Il y a une différence essentielle entre catégorématique et syncatégorématique, Voltaire, Dial. XXIV,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