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 사랑의 고뇌 -
태양에게
이해성
한때는 당신도 별이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별은 당신이 지구의 반대쪽을 비추는 시간에
또는 달이 당신을 가리는 이상한 시간에
지구의 어두운 면에 서 있는
내 눈에만 보이는 거였다
한낮의 햇빛으로 세상을 보려고 할 때는
보이지 않는 거였다
미안하다. 내 오랜 사랑이여
나는 별에게 영혼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
해바라기처럼 당신을 쫓아 지구를 빙빙 돌지 않고
부드럽고 아득한 밤의 유혹에 빠진 적이 있었다
미안하다 내 사랑아
나는 매일 밤 별을 그리워한다
태양계 바깥 수억 광년 떨어져 있어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별빛을
어쩌면 별은 그대, 태양을 만난 것보다도 더 오래전에
기억도 나지 않는 수억 광년 전에
내 곁을 스쳐 지나간 적이 있는 모양이다.
*이해성 : 문학 살롱, 마법 학교를 표방하는 아지트 카페 ‘지금부터 판타지’ 운영 (산청읍 덕계로 13-14. 카페, 서점, 출판사), 번역작가 (역서: ‘매혹의 조련사 뮤즈’ ‘가이아의 정원’ 등), 경남 마을공동체지원센터 공동체협력지원가(미디어 분야), ‘지금부터 판타지’에서 타로이스트로 활동 중. 현 필봉 문학회 회원.
그녀의 울음이 그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물의 의미와 그녀의 속뜻을 알고 싶었다. 그녀가 내게 한 말은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녀의 남편도, 약혼자도 아닌 그저, 불륜의 상대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간 우리가 쌓아온 사랑이 구태여 인간이 만들어놓은 제도에 국한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나는 그저 한숨만 나왔다. 나 역시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는 날 찾아왔다. 그리고 아직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게 미안함을 표시했고, 나로 인해 자신이 괴로웠다고 울고 있다. 마침내 눈물을 그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다녀간 사실을 그날 밤에 알았어요. 동생이 말해주더군요. 그래서 경비실로 다시 내려갔죠. 경비 아저씨가 장미꽃을 갖다 준 사람의 인상착의를 말하더군요. 단번에 아저씨인 줄 알았어요.”
그녀는 천천히 내게 말했다. 표정은 침착했고 예의 큰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게 전화를 하지 않았지?”
“할 수가 없었어요.”
“왜?”
“…….”
일순 그녀는 이것까지 말해야 하나 싶은 얼굴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전화하면 아저씨와 대판 싸울 게 뻔했거든요.”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경비 아저씨의 말로 제가 아파트에 들어왔을 때, 아저씨가 화단 옆에 서 있었다고 했어요. 그건 다 봤다는 거잖아요.”
나도 미처 생각을 못 한 바였다. 그때 나는 그것이 내게 너무 끔찍한 장면이어서 경비원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부터, 유희가 재차 경비실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건 그렇다 쳐. 그런데 그 남자는 누구야?”
“솔직히 말해도 돼요?”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것, 숨길 게 뭐 있어?”
그녀는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저씨보다 훨씬 앞에 만난 사람이에요. 서울에 있을 때 같은 직장에 있었구요.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나 봐요. 그 사람도 절 무척이나 좋아했고 아꼈어요. 우린 결혼까지 생각하고 교제를 했지만, 알고 보니 그는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가 둘이나 있었어요. 할 수 없이 저는 절교를 선언했지만, 그 사람은 날 잊을 수 없다며 계속 제게 다가왔죠. 그래서 제가 조건을 걸었어요. 그건 그가 아내와 이혼을 한다면 수락하겠다는 거였죠. 그러던 중에 아저씨를 만난 거였어요. 그 과정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그자가 결국 이혼했단 말이지?”
“네. 그래서 제가 서울에 올라갔던 거예요.”
나는 입이 바짝바짝 탔지만, 그녀는 오히려 담담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거였어요. 물론 간간이 전화통화는 했지만요.”
나는 대충 감이 잡혔다. 일전에 한수가 한 말과 비교를 하니 거의 정확했다. 이미 아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서 그 남자와 결혼할 거야?”
“…….”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고민 중이에요.”
“왜 고민 중이라는 거지?”
“아직 확신이 안 서요. 그는 깨끗하게 이혼했다고 했으나, 어딘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요. 제가 보기엔 서류상 이혼한 건 맞지만, 그도 그의 아내도 아직 미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이제 나는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현실에 관해 내게 상의하는 것 같았다. 나는 왜 내가 그녀의 결혼문제에 끼어들어 고민해야 하는지 내가 생각해도 멍청했다.
“그럼 나는?”
나는 이상하게도 용기가 생겼다.
“아저씬 뭐요?”
“앞으로 그대와 난 어떻게 되는 거냔 말이야?”
그러자 그녀는 생글 웃었다.
“그건 나도 몰라요.”
나는 그녀의 대답에 모골이 송연했다. 나는 이토록 괴로운데 그녀는 어쩌자고 이런 표정을 짓는지 정말 나로선 모를 일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
나는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짐짓 화를 내었다. 그녀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다가는 내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의 돌발행동이 나왔다. 갑자기 그녀가 내게 다가서더니,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아저씬, 이런 순진한 게 매력이에요. 자주 올 테니 몸조리 잘하세요.”
그녀는 장미꽃 한 다발을 내게 안겨주고 손까지 흔들면서 병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야말로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
잠시 뒤,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갔던 외삼촌이 병실로 돌아왔다. 그는 누워있는 날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왜 한 번도 오지 않지, 하고 생각했는데 오늘에야 왔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의아했다.
“누가요?”
“시치미 뗄 거야?”
그제야 나는 외삼촌이 유희에 관해 말하는 줄 알았다.
“봤어요?”
“그래 병원 입구로 들어서는데 멀찌감치 그 애가 걸어오더구나. 멀리서 봐도 난 그 아이인 줄 알았지. 아주 고운 자태였거든. 그래, 좋은 이야기 많이 했냐?”
“유희도 삼촌을 알아보던가요?”
“그럼. 내게 깍듯이 인사했어. 지리산에 꼭 한 번 더 가고 싶다고 말도 하던걸. 보면 볼수록 귀엽고 예쁜 아가씨야. 네가 반할 만했어.”
나는 외삼촌의 말에 머리가 더 아팠다.
그날 밤, 그녀로부터 장문의 문자가 왔다. 대충의 내용을 추려보면, 아저씨를 만나 무척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는 것, 또한, 나를 만나 굉장히 방황했다는 것, 자신도 우리가 있는 빌딩 안에서 우리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는 것, 내 아내의 추궁에 무척 힘들었다는 것, 하지만 지리산에서의 밤은 결코 잊지 못한다는 것, 아직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았으니 이대로 만남을 계속하고 싶다는 것, 등등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나는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유하 감독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떠올렸다. 친구의 결혼식 사회를 보는 대가로 소개팅을 하게 된 감우성은 지적이고 세련된 대학 강사이다. 그가 소개팅을 받는 여자는 섹시하고 당돌한 디자이너 엄정화. 둘은 왔다 갔다 택시비보다 모텔비가 더 싸다는 결론 내고 모텔로 직행한다. 이후 서로 다른 꿍꿍이를 갖고 연애를 시작하는 두 사람. 결혼은 조건 좋은 사람과 하고, 연애는 감우성과 하고 싶은 엄정화, 그녀는 연애지상주의자이다.
나는 다리가 후들거렸고 가슴이 떨렸다. 그렇다. 그녀는 영화 속 ‘연희(엄정화)’처럼, 결혼은 결혼이고 연애는 연애다, 하고 생각하는 여자가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도 나는 한쪽 가슴이 쓰리면서 아련했다. 나는 결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바보같이 모든 수컷의 바람처럼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녀의 문자에 힘입어 오랜만에 문자를 보냈다. 단, 그녀와 같은 장문이 아닌, 짧은 글이었다.
‘보고 싶다.’
‘아까 봤잖아요.’
‘그대가 옆에 있어도 나는 언제나 그대가 그립다.’
‘아까 화낼 때는 정말 무섭더라. ㅋㅋ’
‘아직 안 자요? 지금 갈까요?’
‘내일 출근 안 해? 괜찮겠어?’
‘택시 타면 금방인데. 대신 전화하면 아저씨가 병원 밖으로 나오세요. 야간엔 면회 금지잖아.’
‘좋아.’
나는 전화를 끊고 혼자 ‘야호’를 외쳤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조금 안 되었다. 나는 세면대로 가서 간단히 세수하고 그녀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생각해도 내가 우스웠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를 의심하고 미워하면서 결별까지 생각하지 않았던가. 역시 사랑은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가는 존재였다.
병원 밖, 주차장 옆 야외 휴게실이었다. 이곳은 면회객도 환자도 아무도 없었다. 봄밤의 그윽한 벚꽃 향기가 코를 찔렀다.
택시가 들어왔다. 그녀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택시에서 내렸다. 나는 목발을 짚고 있었지만, 기꺼이 불편한 몸을 이끌어 주차장 쪽으로 다가섰다. 놀란 그녀가 날 부축하여 재차 야외 휴게실로 왔을 때 나는 온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나는 조금 전의 내가 아니었고 그녀 또한 그랬다.
“그냥 부르면 제가 갈 터인데, 뭣하러 힘들게?”
그녀가 가볍게 내 가슴을 토닥일 때 나는 그녀를 꼭, 안았다. 그녀는 이런 나의 행동에 처음엔 가볍게 반항하더니 이내 순응했다. 오랜만에 그녀의 향기를 맡아 본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안돼요. 환자가.”
그녀의 거부에도 나는 그녀의 고운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재스민 향과 벚꽃 향이 어우러지면서 나는 마치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다.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거쳐 하얀 귀 쪽으로 옮기다 나는 그녀에게 내 심정을 고백했다.
“그대가 어떤 상황이든, 난 그대를 사랑해.”
그녀는 한동안 안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후로 그녀는 이틀이 멀다 하고 밤마다 내 병실에 찾아왔다. 우리의 사랑은 완벽하게 복구되었으며, 나는 사랑의 기쁨에 눈이 멀어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 병원에 있으니 직장 일은 그저 남의 일이었다.
한 달 후, 나는 담당 의사에게 사정하여 그만 퇴원을 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 계획한 외삼촌의 지리산, 펜션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되면 자연 유희와의 물리적 만남을 멀어지지만, 그녀와는 문자 혹은 통화를하면 되었고 때에 따라선 그녀가 지리산으로 올 수도 있었다. 나는 이 기회에 완전히 지리산으로 정착하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내겐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내 의도는 추후, 그녀와 함께였다. 그새 친구 한수와 연희도 병원에 다녀갔다. 그들은 내가 유희를 그만 잊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연, 빌딩 안의 그녀와 나에 대한 소문을 서서히 사라졌다. 우리는 철저히 남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이어갔다.
퇴원하는 날, 아내와 아이들은 오지 않았다. 대신, 친구 한수와 연희가 짐을 챙기며 도와주었고, 외삼촌이 병원 앞에 차를 대기해 놓고 있었다.
“잘 쉬고 와. 내 안 바쁠 때 찾아가지.”
친구, 한수였다.
“과장님. 지리산에서 몸과 마음을 완치하고 돌아오세요. 그동안 업무는 걱정하지 마시고요. 제가 있잖아요.”
연희는 못내 섭섭한지 아직 목발을 짚은 내게 안기기까지 했다. 그녀는 아마, 내가 사고가 난 것이 그날, 양산에서 그녀가 했던 모진 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없더라도 옆 사무실 유희랑 여전히 잘 지내야 해. 여긴 타향이잖아. 내가 없으면 유희도 좀 외로울 거야.”
나는 농담 삼아 말했건만 연희는 입을 삐죽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그 애 이름이 나와요?”
그러자 한수가 거들었다.
“사랑이 그리 쉽게 잊히지는 않지. 그래, 내가 보살펴 줄 게. 한때 네가 사랑했던 여인은.”
한수의 말에 모두 웃고 말았다. 나는 나와 그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넉넉히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지리산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