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월 중순(10수)
하루시조101
04 11
꽃 속에 잠든 나비야
무명씨(無名氏) 지음
꽃 속에 잠든 나비야 네 평생(平生)을 물어 보자
네가 장주(莊周)의 전생(前生)이냐 장주(莊周)가 너의 전생(前生)이냐
우리가 장주(莊周) 되고 장주(莊周)가 우리 되니 분명(分明)히 몰라
평생(平生) -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생(一生). 한살이.
나와 만물(萬物)이 하나일는지 모른다는 의심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의 호접몽(胡蝶夢)에 나오는 대로 사람과 나비의 존재론적 차별성을 무너뜨리는 내용인데, 종장에서는 다시 장주와 우리 역시 경계가 모호하다고 읊고 있습니다. 장주의 호접몽 비유는 일반적으로 인생무상(人生無常)으로 귀결되어집니다만, 이 작품을 대하고 보니 일단 존재론(存在論)에 대한 어떤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만물(萬物)은 변화(變化) 속에서 하나로 얽혀 있음을 풀어 놓은 작품이라고 할까요.
나를 우리 속에 들이밀고 여럿인 양 밀어부치는 서술 형태를 발견하고는 슬몃 웃음이 나옵니다.
또한 전생 – 현생 – 후생으로 이어진다는 오래된 존재론이 새삼 계묘년 정초의 마음가짐을 돌아다보게 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102
04 12
기어들고 기어나는 집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기어들고 기어나는 집에 핌도 필사 삼색도화(三色桃花)
어론자 범나비야 너는 어이 넘나는다
우리도 남의 님 걸어두고 넘놀아 볼까 하노라
기어들고 기어나는 집 – 게 딱지만한 오두막집
어론자 – 얼씨구.
삼색도화(三色桃花) - 조선시대 인조(仁祖) 때 이조판서(吏曹判書) 남이웅(南以雄)이 관리를 천거(薦擧)함에 있어 서인 남인 북인 곧 삼색인(三色人)을 삼망(三望)에 올렸는데, 당시에는 이를 일러 삼색도화라 하였음.
삼색으로 아름다운 복숭아꽃은 여인네를, 범나비는 사내를 갖다붙여 풀어볼까요. 복사꽃에 노니는 나비를 빌려, 자기도 너처럼 남의 님을 탐내 볼까 한다고 사내의 탐심(貪心)을 드러냈군요.
다만 게딱지 만한 가난한 집의 여인네인지라 처음부터 얕보았을 거라 생각하면 그 탐심은 더욱 야비(野鄙)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03
04 13
두견화 만산하여
무명씨(無名氏) 지음
두견화(杜鵑花) 만산(滿山)하여 춘풍(春風)에 흩날릴 제
청려(靑驢)에 술을 싣고 산수간(山水間)에 노는 맛과
초당(草堂)에 명월청풍(明月淸風)이야 어느 그지 있으리
두견화(杜鵑花) - 진달래.
만산(滿山) - 온 산에 가득 피어남.
청려(靑驢) - 검푸른 빛 털의 나귀.
산수간에 유람하는 일과 청풍명월을 즐기는 심정을 노래한 작품입니다. 농가(農家)의 봄노래가 아니라 사대부(士大夫)나 선비님들 봄 유람 이야기입니다. 중장의 산수 유람과 종장의 청풍명월 곧 음풍농월(吟風弄月)이 ‘그지 없다’고 했으니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다로 읽힙니다. 비교 불가, 막상막하라는 말이지요.
탐매(探梅)부터 시작하여 산수유꽃과 동백꽃에 이르도록 올봄도 시작과 함께 꽃 찾아다녔으니 이 작품의 주인공 만큼은 아닐지라도 ‘봄맞이’는 잘한 것 같습니다. 눈길 닿는 곳마다 꽃이 피고 지고 하니 바야흐로 중춘(仲春) 가절(佳節)이네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04
04 14
두 눈에 고인 눈물
무명씨(無名氏) 지음
두 눈에 고인 눈물 진주(眞珠)나 될 양(樣)이면
청(靑)실홍(紅)실 길게 꿰어 한 끝 보내련만
거두지 미처 못하여 사라짐을 어이리
청실홍실 - 혼례에 쓰는 남색과 붉은색의 명주실 테.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혼인을 청할 때 청홍(靑紅)의 두 끝을 따로따로 접고 그 허리에 색깔이 엇바뀌게 낀다.
이별의 슬픔을 노래했습니다.
초장에서 눈물이 곧 진주라면이라고 전제하는 것이 조금 비현실적이긴 해도 중장과 종장의 참신한 시상 전개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장치입니다.
중장에서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俗談)을 바탕으로 하되, 기왕에 꿸 것 같으면 청사(靑絲) 홍사(紅絲)로 얽히게 하여 님과 연결하는 기교가 놀랍습니다.
종장에서는 ‘미처 거두지 못하여’를 음수율을 맞춰 도치(倒置)해 놓고 보니 운율이 생생하게 살아나네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05
04 15
듣는 말 보는 일을
무명씨(無名氏) 지음
듣는 말 보는 일을 사리(事理)에 비겨 보아
옳으면 할지라도 그르면 말을 것이
평생(平生)에 말씀을 가려내면 무슨 시비(是非) 있으리
사리(事理) - 일의 조리(條理).
비겨 보다 — 비추어 보다. 맞는지 아닌지 살피다.
말을 조심하라는 경계의 내용입니다. 초장은 말을 하기 전에 가다듬어야 할 생각을 읊었습니다. 든는 말은 내 귀에 들리는 남의 말이고, 보는 일은 내가 직접 보는 일이군요. 중요한 건 들리거나 보이거나가 아니라 그것들이 과연 사리에 맞는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입니다. 중장의 할 것이나 말 것은 모두 ‘말’입니다. 종장에서는 이런 말씀 가려내기는 평생 동안 지켜야 한다는 내용인데, 시비(是非)는 옳고 그름이라는 1차적 어의(語義)를 넘어 그것을 따지는 다툼이나 송사(訟事)까지 확대가 가능한 단어입니다. ‘말’이라 하지 않고 ‘말씀’이라고 했으니 ‘옳은 말’을 이른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런 경계의 내용을 다룬 시조들은 많습니다. 그래서 읽는 이에게 주는 감동은 그다지 많지 않지요. 그래도 이런 뻔한 내용이라도 책상 머리에 붙여두고 보고 읊으면 곧 생각을 붙들어 매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06
04 16
들입다 바드득 안으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들입다 바드득 안으니 당싯당싯 우슨구나
어깨 넘어 등을 긁으니 점점(漸漸) 나아 나를 안네
저 님아 하 간간(侃侃)히 안지 마라 가슴 답답하여라
들입다 - 세차게 마구.
바드득 - 단단하고 질기거나 반드러운 물건을 되게 문지를 때 되바라지게 나는 소리.
당싯당싯 – 방긋방긋.
하 – 많이, 너무.
간간(侃侃)히 – 강하게.
남녀간의 포옹(抱擁)을 작품으로 그려냈습니다. 단어 풀이를 미리 하고 보니 더 필요한 설명이 없는 듯하군요.
서양에서 건너온 풍속으로 ‘프리 허그’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지요. 저도 인사동에서 웬 낯선 여인네의 무작정한 포옹을 견뎌본 기억을 이 작품이 소환하는군요. 어떨떨하면서도 아하 안으면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있구나 생각했더랍니다. 나를 안았던 여인네도 그랬겠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07
04 17
등잔불 그물어 갈 제
무명씨(無名氏) 지음
등잔(燈盞)불 그물어 갈 제 창전(窓前) 짚고 드는 님과
새벽달 지샐 적에 고쳐 앉고 눕는 님은
진실(眞實)로 백골진토(白骨塵土)된들 잊을 줄이 있으랴
그물어 – 꺼져.
창전(窓前) - 창턱.
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초장과 중장에 등장하는 님은 같은 사람입니다. 그 님이 나에게 올 때는 등잔불이 꺼져갈 무렵인 이슥한 밤이요, 밤새 안고 지냈음에도 새벽달 지워질 무렵에 다시 고쳐 안아주는 님이니, 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것인가. 죽어서 육신이 백골로 진토로 변할 때까지 사랑하리라.
평시조 한 수로 엮은 짧은 고백이지만 더 길어서 무엇하겠습니까. 다만 이 작품 속의 님은 남의 눈을 피해 든 님으로 보여 정인(情人)이지 낭군(郎君)님은 아닐 거라는 점이 조금 겸연쩍네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08
04 18
마음이 지척이면
무명씨(無名氏) 지음
마음이 지척(咫尺)이면 천리(千里)라도 지척이요
마음이 천리오면 지척도 천리로다
우리는 각재천리(各在千里)오나 지척인 양 살리라
지척(咫尺) - 아주 가까운 거리.
천리(千里) - 아주 먼 거리.
각재천리(各在千里) - 각각 멀리 떨어져 있음.
아주 평이한 듯한 생활의 철학이 담긴 작품입니다. 지척과 천리가 번갈아 서로 비교하며 등장하는데, 통신(通信)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을 반영하여 읽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통신의 발달과는 상관없이 그 말은 맞습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그렇습니다.
작가는 초장과 중장에서 일반론을 끌어와 생활의 진실을 밝히고는, 종장에서 두 사람 사이의 사랑하는 마음의 확인과 다짐을 합니다.
~이면, ~이니 의 현대 표기가 여기서는 ~오면, ~오니 로 되어 있는데 입말로서의 느낌이 훨씬 정중하네요. 현대인들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힘입어 각재천리(各在千里)의 삶을 주말부부로 기러기 아빠로 잘도 살아갑니다. 이 작품 한 수 베껴 어디든 붙여 놓아도 좋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09
04 19
말 없는 청산이요
무명씨(無名氏) 지음
말 없는 청산(靑山)이요 태(態) 없는 유수(流水)로다
왕교(王喬) 적송(赤松) 외(外)에 날 알 이 없건마는
어디서 망령엣 것은 오라 말라 하느니
왕교(王喬) - 왕자교(王子喬).
적송(赤松) - 적송자(赤松子).
왕교와 적송은 옛날의 중국 역사에 나오는 두 선인(仙人)으로 도가(道家)의 호흡법을 수련하였으나, 독서(讀書)로써 병을 치료할 수 있으니 부질없는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평시조로서 자연에 묻혀 사는 사람의 자존심을 노래한 것입니다. 초장에서 산과 물은 ‘없다’라는 서술어가 같은데 절묘한 대구를 이룹니다. 산은 말이 없고 물은 태가 없다. 도가의 선인을 설명하는 배경으로 이 만한 표현이 있을까요.
자기가 자연에 묻혀 사는데, 자기를 알아볼 수 있는 이는 옛사람 선인 두 명 정도인데도, 왕실에서 벼슬을 주니 어쩌니 하며 불러대니 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이냐. ‘망령엣 것’은 곧 정치하는 사람들이고, ‘오라 말라’하다니 자존심 건드리지 말라고 단호히 자르고 있습니다. 초연(超然)한 상태와 단호(斷乎)한 거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10
04 20
말은 가자 울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말은 가자 울고 님은 잡고 울고
석양(夕陽)은 재를 넘고 갈 길은 천리(千里)로다
저 님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
상황이 참 딱하기도 하네요. 님과 이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울고 붙잡는 님에게 말 탄 님 하는 말은 냉정하고 매정합니다. 불가능한 일을 내세워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네요. 지는 해가 잡힐 수 있겠습니까.
작품에 집중하고 보니, 말 울고 님 울고, 떠나는 작중화자(作中話者)는 분명 ‘꽃에 들어 자고난 나비’일 터, 어차피 석양이면 하룻밤 더 자고 갈 일 아닌가요. 아니 아니, 간다 못 간다 실랑이하느라 하루가 다 갔을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지는 해를 잡으라니요.
요즘에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해서 작품 내용이 얼른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무명씨의 시조 속에 들어 있는 솔직한 심경 토로는 뭇 가인들의 사랑을 받아 요즘말로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종장 끝구 세 자가 생략된 작품들은 그런 류에 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