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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 제2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231-462
제2장 옛[초기] 스토아주의 L'ancien stoïcisme 253-294
[개관]
사람들은 그리스 문화가 지중해 모든 나라들의 공통적 선이 되었던 시기를 헬레니스트[그리스] 시대(âge hellénistique)라 부른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죽음에서 로마의 정복까지, 사람들은 그 문화가 이집트와 시리아로부터 로마와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귀족사회 속에서처럼, 계명된 유태인 환경 속에 조금씩 부과되는 것을 본다. 그리스 언어, 즉 코이네(κοινή) 즉 공통 방언의 형식으로 쓰여진 그 언어는 이 문화의 기관(l'organ, 논리)이다. (253)
몇 가지 관점에서 이 시기는 우리의 서구 문명의의 역사에서 가중 중요한 시기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 영향들이 극동에까지 느껴지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거꾸로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서부터 우리는 서방이 동방과 극동의 영향들에 열려져 있음을 본다. 여기서 우리는 서방의 성숙과 현저한 쇠퇴에서 하나의 철학을 따라간다. 이 철학은 정치적 선입견들을 멀리하고 인간적 품행의 보편적 규칙들을 발현하고자, 그리고 의식들은 잘 인도하고자 열망한다. 우리는 이 쇠퇴하는 동안에 동방의 종교들과 크리스트교의 점진적인 상승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야만인들의 쇄도와 더불어, 제국의 해체가 이루어지고, 근대 문화를 준비하는 길고도 조용한 묵상이 이어진다. (253) (48UKH)
제1절 스토아학자들과 그리스주의 Les Stoïciens et l'Hellénisme 253
관념론의 거대한 도약과 자기로 향한 인간의 회귀, 이러한 것이 기원전 4세기, 즉 아테네 철학의 위대한 세기의 총결산이다. 관념론의 거대한 도약이란 문명 전반에 철학적 사유가 스며들었으나 곧바로 멈춰서 결정체처럼 되는 독단들로서 죽어버렸던 것을 의미하며, 자기로 향한 인간의 회귀라는 노력을 통해 펼쳐지는 인간의 의지 속에서, 또는 인간의 인상들의 무매개적인 향유 속에서, 자기 자신 속에서만 지지점을 찾기 위하여 문화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순간부터 철학으로부터 추방당한 과학들은 자기 방식대로 자치의 길을 계속해서 간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경은 유클리드(Εὐκλείδης, 전330-270), 아르키메데스(Ἀρχιμήδης, 전287-212), 아폴로니오스(Ἀπολλώνιος, 전262경–전190경)의 세기였으며, 수학과 천문학에서 위대한 세기였다. 반면에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에서, 지리학자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ène, Ἐρατοσθένης, 전284-전192)은 도서관장이었으며, 관찰의 과학들과 철학적 비판은 나란히 발전하고 있었다. (254)
철학에 관해서 말하자면, 철학은 완전히 새로운 형식을 취하였고, 소위 말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서술했던 방향들 중에 어떤 방향으로도 계속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 당시에 생겨났다고 보는 거대한 독단주의들,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는, 이것들에 앞서서 있었던 것들과 아무것도 닮지 않았다. 접점들이 무수히 많이 있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정신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두 가지 특징들이 이 정신을 특성화하였다. 첫째 특징[도덕 윤리적 특성화], 그것은 인간에게서 품행의 규칙들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는 이법에 의해 규정된 우주의 개념작업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신념이다. 그래서 사물들의 자연에 관한 탐구들은 지적인 호기심의 만족에서 그 자체들로서 탐구의 목적이 아니었다. 또한 그 탐구들은 실천이 불가피 했다. 둘째 특징은[과학적 특성화] 게다가 많으나 적으나 목표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그것은 학파의 학문 경향일 뿐이다. 젊은 철학자는 자기 이전에 발견되었던 것을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이법과 추론은 그 학파의 독단들을 학문 속에서 견고하게 하는데 쓰일 뿐이며, 그 독단들에게 흔들리지 않은 안정장치를 부여하는데 쓰일 뿐이다. 그러나 이 학파들에서 진리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 무관심하고 제한 없는 탐구가 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발견되었던 진리와 그 탐구 자체를 동화시켜야만 했다. (254)
이 특징들의 첫째 특징에 의해, 새로운 독단주의들이 소(小)소크라테스 학파들의 비문화적인 것과 단절했으며, 철학 속에서 추론된 인식의 고민을 재도입했다. 둘째에 의해서, 이 새로운 독단주의들은 플라톤적인 정신과 단절했다. 게다가 이들은 소크라테스적인 플라톤처럼 자유로운 탐구의 애호가들도 아니었고, 법률편 제10권의 저자처럼 권위자들도 조사관들도 아니었다. 이것은, 합리주의인데, 말하자면 문제들을 닫아 놓은 학설적인 합리주의이며, 플라톤에서처럼 문제들을 열어 놓는 방법적 합리주의가 아니었다. (254)
매우 새로운 이 두 특징들은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우리가 곧 보게 될 것인데, 이 거대한 독단론들 그 밑에는 기원전 3세기의 소크라테스학자들의 전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255)
이 두 특징들의 범위와 가치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이 새로움을 도입한 인간들이 어떤 인간들인지를, 그리고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마케도니아의 주도권에 의해서 생겨난 새로운 역사적 상황들에 반작용했는지를 자문해보는 것이 좋겠다. (255)
아테네는 여전히 철학의 중심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철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도 아테네인은 아니었고, 심지어는 그리스 대륙인도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에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스토아학자들은 헬레니즘의 변두리에 있는 나라들의 재외거류민이며, 그 나라들은 위대한 시민 전통 바깥에 있는 나라들이고, 헬레니즘의 영향과 다른 영향들, 특히 셈 종족에 이웃하는 민족들의 영향들을 겪었던 나라들이다. 퀴프로스(Κύπρος)의 한 도시인 키티온(Κίτιον)은 스토아학파의 창설자인 제논이, 그리고 그의 제자 페르사이오스(Περσαῖος, 전307-전243)가 출생한 도시이다. 이 학파의 둘째 학당장인 된 크뤼시포스(Χρύσιππος, 전281-205)는 킬리키아(Κιλικία, 터어키에 있는)지방의 타르소스(Ταρσός) 또는 솔로이(Σόλοι)에서 태어났고, 그의 세 제자들인, 타르소스의 제논(Ζήνων Ταρσός, 전성기 전200), 안티파트로스(Ἀντίπατρος, 전성기 전150-129), 아르케데모스(Άρχέδημος, 전140경 활동)도 타로스 출신이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셈계의 나라로부터 온 이들로는 제논의 제자인 헤릴로스(Ἥριλλος, 전250경 활동), 크뤼시포스의 제자인 보에토스(Βοηθός, 2세기경 활동) 등이 있다. 가장 가까운 지방으로부터 온 이들은 아이올리스(ᾈολίς, 이오니아 위쪽 지방) 지방의 아소스 출신인 클레안테스(Κλεάνθης, 전331경-전232)가 있고, 제논의 두 제자로서 보스포로스(Βόσπορος) 출신의 스파이로스(Σφαῖρος; 전285경–210경)와 흑해 연안의 비튀니아(Βιθύνια) 지역에 있는 헤라클레이아(Ηράκλεια)의 디오뉘시오스(Διoνυσιoς, 전351경-306)도 있다. 크뤼시포스를 따랐던 세대 중에서, 바빌론의 디오게네스(Διογένης, 전240-전150)와 셀레우케이아(Σελεύκεια)의 아폴로도로스(Ἀπολλόδωρος)는 머나먼 칼다이아(Χαλδαία)에서 왔다. (255)
대부분의 도시들은 도시들 뒤에, 그리스 대륙의 도시들처럼, 길고도 독립적인 전통들이 없었다. 그리고 상업의 필요들 때문에, 이 도시들의 주민들은 훨씬 더 먼 나라들에까지 여행하도록 각오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키티온의 제논의 아버지는 퀴프로스의 상인이며, 사업상 아테네에 갔으며, 거기로부터 소크라테스학자들의 책들을 가져왔고, 그것을 읽은 그의 아들에게는 스승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갈 욕망이 솟았다. 그러나 이 반쯤 야만인들은 그리스 도시들의 지역적 정치에는 아무래도 무심한 채 있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전323)에서 기원전205년경에까지, 즉 그리스 국정들에 로마인들의 개입이 있기까지 거의 한 세기동안에 학파의 주인공들의 정치적 태도가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256)
사람들은 이 시기에 그리스의 정치사의 여러 중요한 특징들을 알고 있다.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의 계승자들 사이에, 특히 마케도니아 왕들과 프톨레마이오스 가문들 사이에 대치해 있는 폐쇄된 영역이 있었다. 도시들 또는 도시들의 동맹은 다른 권력에게 지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두 권력들 중의 한 권력에게만 의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도시국가들의 헌정질서는 그 당시의 지배자들의 기호에 따라 변했는데, 경우들에 따라서 지배자들은 과두제 정당들 또는 민주제 정당들을 지지하곤 했다. 특히 아테네는 동방 전체에서 확장되었던 분쟁들의 결과물들에 수동적으로 감당해야했다. 아테네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허망한 시도를 한 후에, 아테네는, 이 도시의 연설가이며 대사인 데마데스(Δημάδης, 전380-318)의 평화조약에 의해, 마케도니아 장군인 안티파트로스(Ἀντίπατρος, 전397–319)에게 넘겨졌다. 이 장군은 아테네에 귀족정 정부를 세웠고, 그리고 그리스 전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한 순간 이 마케도니아의 섭정관을 계승한 폴뤼스페르콘(Πολυσπέρχων, 전394-303경)은 아테네와 동맹을 안전하게 하게 위하여 아테네에 민주정을 회복시켰다(전319년). 그러나 안티파트로스의 맏아들인 카상드로스(Κάσσανδρος, 전358-297)는 폴뤼스페르콘을 축출하고,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Δημήτριος ὀ Φαληρεύς, 전360경-전282) 지도하에 아테네에 귀족정 정부를 다시 세웠고, 그리고 다른 왕위 계승자들, 즉 아시아의 안티고노스(Ἀντίγονος, 전382-301)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Πτολεμαῖος, 전368/366경-전283)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에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두 장군은 그[카상드로스]에 반대하여 아이톨리아(Αἰτωλία)지역 도시들의 동맹에 지지를 받고 있었다. 기원전 307년에,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아테네 연설가인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는 아시아 통치자인 안티고노스의 아들, 즉 데메트리오스 1세(Δημήτριος ο Πολιορκητής, 전336-283)에 의해 아테네에서 축출되었다. 이 데메트리오스 1세는 아테네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그리스 전체를 마케도니아에서 떼어냈으며,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의 해방자라고 선언했습니다. 그에 의해 포기되었던 아테네인들은 충분히 강해져서 아이톨리아(Αἰτωλία) 지역 동맹과 협력으로, 마케도니아의 카상드로스의 지배를 멈추게 하였다. 카상드로스는 기원전 300년에 테르모퓔라이(Θερμοπύλαι)의 해상통로를 해방시키고, 그리스 중부 지역의 엘라테이아스(Ελάτειας)에서 전투를 치렀다. 몇 년 후에 카상드로스가 죽고, 데메트리오스 1세는 전295년에 마케도니아의 왕관을 유지할 것이며, 그 후손들이 통치할 것이다. 이때부터 아테네에서 마케도니아 영향은 거의 평형추 없이 지낼 것이다. 데메트리오스 1세의 아들인 안티고노스2세(Αντίγονος B΄ Γονατᾶςs, 전319경-239)의 지배 하에서 단지 기원전 263년에만 프톨레마이오스 3세(Πτολεμαῖος Εὐεργέτης, 전282경-222)가 아테네와 펠로포네소스의 보호자로서 선언했다. 그리고 아테네는 자국민과 라케다이몬(스파르다)의 지지를 받아, 자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헛된 노력을 했다(크레모니데스(Χρεμωνίδης, 전3세기경)의 전쟁[전268년]). 이 찰나로부터, 아테네는 사건들에서 무관심하게 남아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에 대한 저항이 펠로포네소스에서는 아직도 매우 생생하게 이어졌다. 왜냐하면 마케도니아는 펠로포네소스 반도에서 도시들의 참주들에게 그의 영향을 미치고자 애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기원전 251년에 시퀴온의 아라토스(Ἄρατος, 전271–213)가 자기 조국에 민주정을 확립했는지를, 그리고 펠로포네소스 반도 북부지역의 아카이아(Ἀχαΐα) 동맹을 주도하여 마케도니아인들을 거의 펠로포네소스 반도 전체에서 몰아내고 코린토스를 장악했는지를 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 그가 아틱지방의 마케도니아 통치자들을 돈으로 매수하고자 시도했을지라도, 그는 아테네인들을 동맹에 끌어 들일 수 없었고,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에 의지했다. 사람들은 독립을 위한 그리스의 이 최후의 노력의 슬픈 종말을 알고 있다. 아라토스는 자기 앞에 그리스인 적이 하나 있었는데 스파르타의 왕인 클레오메네스 3세(Κλεομένης, 전260-219)이었다. 그 스파르타의 왕은 스파르타의 옛 헌법의 개혁자로서 펠레포네소스 반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이 적에 반대하여 아라토스는 마케도니아 왕들의 동맹에게 호소했는데, 이 왕들은 데메트리오스 1세가 죽은 이후에는 그리스 자유회복에 대해 전통적인 적대방식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안티고노스 3세(Αντίγονος Γ΄ δώσων, 재위 전229-221)와 그의 계승자 필립포스 5세(Φίλιππος, 전238-179)는 클레오메네스 3세를 물리치는데 아라토스를 도왔다(전221년),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 끝에서 코린토스까지를 다시 장악했다. 아라토스는 그의 보호자의 희생자였다. 그 보호자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국민들에게 과도하게 기뻐하는 연설을 하는 아테네의 두 연설가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제 마케도니아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전200경에 로마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아테네를 독립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257)
이러한 것이 고대 스토아학파의 역사가 전개되는 환경의 틀이었다. 이 시기에 세 사람의 중요한 학자, 키티온의 제논(Ζήνων Κίτιον, 전335-264), 클레안테스(Κλεάνθης, 전331경-전232), 크뤼시포스(Χρύσιππος, 전281-205)이 있다. 이러한 간단한 상기는 그들의 정치적 태도를 잘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이 태도는 깔끔하다. 자신들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하여 마지막 노력을 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든 공감으로 왕위계승전쟁에서 특히 마케도니아 왕들에게로 갔다.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왕과 퀴로스왕의 찬미자들인 퀴니코스학자들의 전통을 이어갔다. 제논과 클레안테스는 자신들을 위하여 아테네 도시의 권리를 결코 묻지 않았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제논은 키티온의 자기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왕들은 그들에게 조언들과 아첨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이 학파들에서 사람들이 무시할 수 없는 도덕적 힘을 느낀 것 같다. 안티고노스 2세(Αντίγονος B΄ Γονατᾶς, 전319경-239)는 제논의 굉장한 찬미자였다. 그가 아테네 갔을 때 제논의 강의를 들었고, 또한 나중에는 클레안테스의 강의도 들었으며, 그는 그들 각각에게 후원금을 보냈다. 제논이 사망했을 때, 그를 존경하여 도자기 무덤은 세울 것을 아테네 시에게 요구하는 발의를 하는 것도 안티고노스였다. 또한 그가 중요한 인물이기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아테네에 대사들을 파견하였으며, 이들로 하여금 제논을 방문하게 했다. 안티고노스는 철학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궁전에는 아라토스(Ἄρατος ὁ Σολεύς, 전315-245)가 있었는데, 그는 시집 현상들과 예측들의 저자인데, 이 시집에서 에우독소스(Εὔδοξος ὁ Κνίδιος, 전408–355)의 천문학이 진술되어 있다. 왕은, 제논 자신을 자문관이며 의식의 지도자 자격으로, 궁정에 오도록 하고자 원했다. 제논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 거절했고, 그는 그 왕에게 제자들 중에 두 명을, 필로니데스(Φιλωνίδης, s.d.)와 페르사이오스(Περσαῖος, 전307-전243)를 보냈다. 이 후자는 제논의 고향인 키티온에서 온 젊은이로서 그의 시종이었는데, 그가 그에게 철학교육을 배우게 했다. 그 페르사이오스는 궁정 인물이 되었다. 그의 영향은 상당히 컸으며, 만일 회의주의 학자인 티몬(Timon de Phlionte, Τίμων ὁ Φλιάσιος, 전325경-235)의 풍자시를 믿는다면, 페르사이오스는 아라토스(Ἄρατος ὁ Σολεύς, 전315-245)의 아첨들을 받을 정도였다. 수년이 지난 후 기원전 243년에, 우리는 그가 아크로코린토스의 마케도니아 수비대 대장으로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때 성채는 시퀴온(Σικυών) 출신인 아라토스(Ἄρατος, 전271–213)에게 함락되었다. 이 함락 때에, 그리스 해방에 반대하여 마케도니아 법률 사안의 옹호자로서 그는 죽은 것 같다. 우리는 그가 협상들에 개입한 것을 보게 된다. 이 협상들에서 다른 한 메가라 철학자이며 에레트리아(Ερέτρια) 출신인 메네데모스(Μενέδημος ὁ Ἐρετριεύς, 전345/4–전261/0)는 자기가 태어난 도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는 참주들의 나라인 에레트리아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안티고노스와 함께 와서, 거기에 민주정을 세웠다. 페르사이오스(Persée)는 단지 도처에서 참주들을 지지했던 마케도니아의 정치를 도왔던 것 같고, 이때에 그는 안티고노스가 메네데모스의 요구사항들 채워주지 못하게 하기를 바랐다. (258)
제논이 안티고노스에게 페르사이오스를 보냈듯이, 클레안테스는 프톨레마이오스3세(전285/275-284/282)에게 스파이로스(Σφαῖρος; 전285경–210경)를 보냈다. 이 스파이로스는 스파르타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스승이었고, 여러 다른 제자들 중에 스파르타의 왕인 클레오메네스 3세(Κλεομένης, 전257-222?)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 전설의 입법가인 뤼쿠르고스(Λυκούργος, 전900경-800)의 헌법을 회복하고자 하였던, 클레오메네스 3세는 아마도 스토아학설에 영감은 받는 정치적 개혁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자면, 그도 어느 스파르타인도 이 그리스적 정신을 갖지 않았다. 이 그리스적 정신은 그의 적인 아카이아(Ἀχαΐα) 동맹의 맹주인 시퀴온의 아라토스를 좋아했다. (258)
따라서 스토아학자들의 정치적 세계는 플라톤의 정치적 세계와 상당히 다르다. 만일 그들이 아테네 도시에서 상당한 지위를 유지했다면, 그러한 것이 정치적 조언자들의 자격으로는 더 이상 아니었을 것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VII, 10)는 이것들을 뒤섞으면서, 두 가지 명령을 우리에게 남겼다. 이 명령에 따라, 아테네 인민은 황금관과 도자기 무덤을 제논에게 승인했다. 그런데 이렇게 적혀있다. “키티온 출신 제논, 므나제아스(Mnaséas, Μνασέας, s.d.)의 아들, 우리 도시에서 여러 해 동안 철학을 가르쳤다. 선한 인간이었으며, 그를 찾아온 젊은이들에게 덕목과 절제로 초대했다. 그는 이들을 선한 길로 들어서게 했고,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표본으로 제공했다. 그 삶은 그가 제시한 이론들에 부합하였다.” 그의 도덕적 성품을 위한 가장 큰 찬사가 있을지라도, 그의 정치적 역할의 흔적은 없다. (259) (48ULE)
제2절 어떻게 우리가 옛 스토아주의를 인식 하는가 Comment nous connaissons l'ancien stoïcisme 259
제논과 크뤼시포스의 교육에 대하여 우리는 간접적으로만 알고 있다. 즉 제논은 수많은 논문들, 그리고 크뤼시포스의 750편의 논문들 중에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의해 전해진 일부분의 제목들과 불완전한 조각들만 남아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스토아 작품들, 즉 세네카(Seneca 전4-후65), 에픽테토스(Ἐπίκτητος, 50-125/3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의 작품들은 로마제국 시대, 즉 스토아학파의 확립 후 4세기가 지난 것이다. 이들 속에 또는 다른 작가들 속에 있는 옛 스토아학파가 남긴 흔적들을 탐구하면서, 사람들은 스토아학파의 교육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런데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 중요 자료들은 매우 후대 시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키케로(전106-전43)와 같은 절충주의자들의 것도 있다. 키케로의 철학적 저작들은 기원전 1세기 중반의 것이다. 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전20경–후45)의 것은 기원 후의 초기의 것이다. 또는 플루타르코스(46-125)처럼 반대자들도 있다. 그는 1세기 말에 스토아학자들에 반대하여, 스토아학자들의 모순들이라는 작품을 썼다. 또한 회의주의자인 섹스투스 엠피리쿠스(160경-210)가 있는데, 그는 기원후 2세기 말의 학자이다. 또한 의사인 갈레노스(Κλαύδιος Γαληνός, 129경-201)는 엠피리쿠스와 같은 시기에 크뤼시포스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 마지막으로 크리스트교 교부 중에서 특히 3세기경에 오리게네스(Ὠριγένης, 185경-253경)가있었다. 부분이 삭제되었거나 악의적으로 쓰여진 이 진술들 속에서, 만일 그 학설의 가치 있는 초기 근원들을 따로 떼어 놓아야 한다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전하는 스토아학파의 논리학의 요약이 있는데, 그는 그의 저술 제7권(49단락-83단락)에서 이 논리학을 마그네스 출신 디오클레스(Διοκλῆς, 전2세기-전1세기)의 철학자들의 요약에서 끌어냈다. 디오클레스는 기원전 1세기 초에 활동했던, 풍자시인 멜레아그로스(Μελέαγρος, 전140경-전60경)의 친구였다. 이 예외적인 것을 제외하고, 이 모든 문학은 기원전 2세기부터 현존했던 스토아의 독단론과 아카데미아 또는 회의주의 학자들 사이의 충돌들로부터 나왔다. 예를 들어, 인식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학설에 관한 중요한 근원은 키케로의 아카테미 학자들에서 온 것이다. 이 작품은 스토아의 학설과 싸우기 위하여 아주 고의로 쓰여졌다. 이런 논쟁적 정신은 정확한 보고서로서 고려하기에는 호의적이지 못하다. 특히 플루타르코스는 스토아학자들의 사상을 그 자체적으로 모순을 만들기 위해, 그 사상에 대해 여러 번 거짓말을 했다. 게다가 이 작품들은 시기적으로 나중에 나온 것이며, 적어도 이 학설들의 옛 저자들이 그들 자신의 이름으로 쓰이기에는 부적합하였다. 그래서 기원전 3세기의 옛 스토아학자들과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의 중기 스토아주의의 견해들 사이에서 출발점을 삼는 것은 종종 어렵게 된다. 게다가 옛 스토아주의의 강의에서도 마찬가지로, 대체로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세부적인 면에서 많은 분화들이 있다. 따라서 아주 빈약한 자료들로써 구축했던 스토아주의 일체의 진술들에서 약간 인위적인 특성을 감추지 않아야 한다. 제논의 학설로부터 출발하면서, 우리는 그의 계승자들인 클레안테스 또는 크뤼시포스가 그 학설을 변형시켰거나 포기했던 경우를 지적할 것이다. (260) (48ULF)
제3절 스토아주의의 기원들 Les origines du stoïcisme
키티온의 제논(Ζήνων, 전335-264)은 퀴니코스 학자인 크라테스(Κράτης, 전365-285년)의 제자였으며, 메가라학파의 스틸폰(Στίλπων, 전360경-280)의 제자, 아카데미아 3대 학장인 크세노크라테스(Ξενοκράτης, 전396-전314)의 제자, 아카테미아 4대 학장인 폴레몬(Πολέμων ?-전269)의 제자이기도 하다. 제논은 게다가 “옛 문헌들을 [거의 다] 읽었다”라고 자랑했고, 그의 학설은 몇 가지 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주의의 개혁으로서 간주되었다. 그러나 고대 역사가들에 의해 - 특히 제논에 관하여란 책에서 아폴로니오스(Ἀπολλώνιος, 50년경 활동)에 의해 - 알려진 영향들은 스토아학파의 부화기에 대해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아마도 그는 메가라 학자들에게서 변증법의 취향을, 즉 옛 스토아주의 교육을 특징 지우는 메마르고 추상적인 변증법의 취향을 받아들인 것 같다. 게다가 그가 가장 자주 만났던 자로서 스틸폰은 퀴니코스학자들과 꼭 마찬가지로 편견들에 대한 경멸을 가졌으며, 무감동의 영혼 안에다가 최고선을 두었다. 아카데미아학장인 크세노크라테스는 자기 측면에서, 그에게 보이는 이 덕목의 역할을 덕목이 행복의 조건인 것으로서 이 점을 과장했으리라. 폴레몬은 퀴니코스학자들처럼 순수 변증법적 교육에 관해서 고행(l'ascèse, ἄσκησις, 훈련)의 우월성을 가치 있는 것으로 취급했으며, 그는 완전한 삶을 자연에 부합하는 삶이라고 정의했다. 더군다나 스페우시포스(Σπεύσιππος, 전407-전339)는 거의 안티스테네스만큼이나 맹렬하게 쾌락에 반대하는 플라톤의 제자가 아니었던가? 알렉산드리아 시대에 여러 학파들 속에 일반화되어 있던 엄격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이 모든 운동은 퀴니코스학자인 (제논의 스승인) 크라테스의 영향을 긍정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래도 이 영향은 아카데미아의 가장 부드러운 학설들에 의해서 순화된 영향이다. (261)
그러나 이 일반적인 영향들은 스토아 학설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스토아 학설은 도덕적 교육에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에 대한 거대한 통찰이었다. 그 통찰은 고대 전체와 근대 시대의 일시 동안에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사유를 지배할 것이다. 거기에는 죽어 가고 있던 소크라테스학파들의 연속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있다. (261)
우리는 이 학파의 기원을 그리스적 토양 위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렇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이러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개념주의에 의해서도, 소크라테스학자들에 의해서도 소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유는 훨씬 더 다양하다. 의학학파들이 번성했으며, 이 학파들은 영혼의 자연과 우주의 구조의 일반적 질문들에 깊이 전념했다. 그러한 것을 사람들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편에서(이 책, 74쪽 참조) 그리고 특히 티마이오스편에서 의학의 예기치 않은 출현을 상기하게 된다. (261)
의사인 갈레노스(Κλαύδιος Γαληνός, 129경-201)는, 스토아주의 역사에 관한 최상의 자료들 중의 하나인 그의 율리아누스에 반대하여라는 책 속에서, 우리에게 다음을 가르쳐 준다. 제논, 크뤼시포스, 그리고 다른 스토아학자들은 질병에 관해 길게 글을 썼으며, 적어도 의학학파 또는 “방법적” 의학은 제논으로부터 주장되며, 결국에는 스토아학자들의 의학적 이론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이론과 동일한 이론들이었다. 갈레노스는 이것을 이렇게 요약했다. 살아있는 신체 속에는 두 항 대 두 항의 대립으로 된 네 가지 성질들이 있다. 즉 열기와 냉기, 건조와 습함 이다. 이 성질들은 네 가지 체액의 기반인데, 즉 담즘[화증], 흑담즙[우울증], 림프산[무감동], 림프염[신경증]이다. 건강은 이 네 가지 성질들의 조화로운 혼합에 기인하며, 질병(적어도 식이요법의 질병)은 이 네 가지 성질들의 과도함 또는 모자람에 기인한다. 반면에 다른 질병들은 신체 부분들의 연속성의 단절에서 온다. 또한 스토아학자들의 이런 자연학적 견해들은(심장 속에 영혼의 자리가 있다는 견해, 소화에 관한 견해, 임신의 지속기간들에 관한 견해)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에 의해 자연학자들에 의해 의사들에게서 빌려온 견해들처럼 형식적으로 인용되었다. (262)
사람들은 디오클레스(Διοκλῆς ὁ Καρύστιος, 전375경–295경)의 작품들에서 남아있는 조각글들 덕분에 인용된 것의 범위를 정확히 할 수 있다. 디오클레스는 의사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인용되었다. 우리가 스토아학자들에 속하는 것으로 좀 전에 보았던 생리학적 학설에 따르면, 디오클레스는 동물생명들의 모든 현상들은 열기와 냉기, 건조와 습함에 의해 지배되며, 살아있는 각 신체에는 타고난 열기가 있으며, 이 열기는 먹어서 흡수한 영양들을 변질시키면서 네 가지 체질들을, 즉 피, 담즙, 두 림프들을 생산한다고, 이 네 가지의 비례들로서 건강과 질병을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보기에, 그가 목구멍, 기도, 허파꽈리들을 통하여 들어온 외적 공기가 일단 심장에서 심적[영혼] 숨결이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심적 숨결 속에 지성이 있으며, 이 숨결은 모든 신체 속으로 퍼지면서, 신체를 만들고 지탱하게 한다. 결국 의지적 운동들은 그 숨결로부터 운동의 기원을 삼는다. 디오클레스가 말하기를 “살아있는 신체는 이처럼 운반하는 것과 운반된 것이라는 두 가지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운반하는 것은 잠재성[권능]이고 운반되는 것은 신체이다.” 많은 질병들은 숨결과 동일한 이 권능의 장애를 받는데서 기인하며, 체액들의 축적 때문에 체액이 통과하는 도관들 속에 순환이 막히는데 오는 것이다. (262)
거기에는 살아있는 존재에 관한 스토아학자들의 이론들 자체가 있다. 그러나 설명은 일반화되어 있다. 그들에게서 모든 물체는 생명이 있든 없든 생명의 방식으로 고려되었다. 물체는 자기 속에 숨결(πνεῦμα)을 가지고 있다. 숨결의 긴장이 부분들을 유지한다. 이 긴장의 여러 정도들이 불의 단단함을 마치 돌의 고체성처럼 설명한다. 긴장의 집합 속에서 우주는(의학적 관념들이 매우 스며들어있는 티마이오스편에서처럼) 또한 생명체이다. 그 생명체의 영혼은 모든 사물들을 관통하여 퍼져 있는 불의 기운으로서 부분들을 유지한다. (262)
따라서 소크라테스이전 시대의 자연학으로부터 나온, 그리고 자연학과 우주론에서 새로이 체계화되었던 의학적 관념들은 우주에 대한 스토아 이미지의 기원에 있는 것 같다. 덧붙이자면, 아마도 스토아학자들이 이 시기에 의학적 이론들로부터 출발하여 생기론적 우주론을 가르쳤던 초기 학자들은 아닌 것 같다. 기원전 4세기에 후반에는 또한 피타고라스학자들도 있었다. 아리스톡세노스(Ἀριστόξενος ὀ Ταραντίνος, 전375경-330년 활동)는 아리스토텔레스 제자였으며, 영혼은 신체의 조화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스토아학자들과 자주 교류했다. 그가 이들 중에 4명의 이름들 우리에게 남겼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 폴뤼이스토르(Ἀλέξανδρος ὁ Πολυΐστωρ)는 기원전 1세기의 박학 다식자인데, 그는 그의 퓌타고라스의 주석들에서 피타고라스 우주론의 요약을 우리에게 남겼다. 이 우주론은 세부적인 면에서 마지막 세기의 이오니아 자연학들의 견해들 - 알크마이온(Ἀλκμαίων, 전 5세기중엽)과 디오게네스(Διογένης, 전5세기경) - 그리고 전4세기의 의학자들의 견해들과 겉보기에 닮았다. 즉 열기와 냉기, 건조와 습함이라는 두 가지 짝을 이룬 힘의 이론이다. 그것은 불균형한 분배가 세계에서 계절의 차이들과 신체에서 질병들을 생기게 한다. 열의 신적 특성은 생명의 원인이며, 태양에서 발산하는 그 열의 광선들은 사물들의 생명을 생산한다. 영혼은 차거움이 섞인 따뜻한 에테르의 조각이며, 열기의 특성을 발산하는 존재처럼 불멸인데, 그 영혼은 피의 활기로부터 영양을 얻는다. 이러한 이유로 감각들이 퍼져나간다. 지금까지 그렇게 했던 것처럼, 기원전 2세기 또는 기원전 1세기의 피타고라스학자들에 끼친 스토아학자들의 뒤늦은 영향에 의해 이렇게 많은 특징들을 설명하는 것은 필수적이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들 특징은 모두 스토아주의보다 앞선 시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법(raison, φρένες), 지성(intelligence, νοῦν), 심장(coeur, θυμόν)이라는 영혼의 삼분할처럼, 몇몇 특징들은, 이 색체가 사용되는 초기 표현에 의해, 매우 고대적인 색체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학과 의학의 관념에 물든 이 퓌타고라스주의는 스토아주의에 앞서 있었다. 게다가 아리스톡세노스의 조화로운 영혼의 이론은 의학적 사상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런데 운유를 통한 음악적 특성은 거의 사라진다. 이때 조화는 신체의 건강에 비교 되었고, 그리고 네 요소들은 신체의 삶에 속한다고 하여 동일한 몫으로 남아있다. 거꾸로 보면 이것은 알렉산드로스 폴뤼이스토르의 생명의 의학이론이며 우주론이다. (264)
이리하여 의학적 생기론이 재구성되었다. 이 생기론은 플라톤이 펼쳤던 수학적 메카니즘으로부터 매우 깊이 분화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오니아 전통에 속하는 데(게다가 티마이오스편에서 살아있는 존재로서 상정했던 플라톤의 수학적 세계에까지 볼 수 있다), 스토아학자들이 신에게 부여한 지위에서, 이들이 신과 인간 그리고 신과 우주의 연관을 고려했던 방식에서, 우리가 그리스인들에게서는 결코 마주칠 수 없는 새로운 특징들이 있다. 그리스 신, 민중 신화의 신,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등과 같은 모든 것은, 말하자면 따로 생명을 가진 한 존재이며, 그것의 완전한 현존에서 흔들림들도 모르고, 세계의 영고성쇠와 같은 인류의 악들도 모르는 존재이다. 인간과 우주의 이상인 신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끌림에서만 우주와 인간에게 작동한다. 신의 의지는 거기에 아무 책임도 없다. 그리고 플라톤은 기도들을 통해서 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비난했다. 사실상 플라톤은 또한 질투하고 특권을 지닌 신을 인정하는 옛 믿음들을 단죄했다. 그러나 그가 이 질투에 대립시켰던 선성(la bonté)은 지적인 완전함이고, 세계의 질서는 마치 빛살처럼 그 완전함으로부터 온다. 이 선성은 도덕적 선성이 결코 아니다. 또한 아마도 올림포스 신들 이외에도, 그리스 인들은 디오니소스를 한 신으로 인식했다. 주기적인 죽음들과 탄생들을 통해 그 신의 리듬이 그 신자들의 삶에 부여되었다. 그 신자는 신의 드라마에 연합되어 있다. 신의 정념을 어느 정도로 체험하고 역할을 수행하는 그 신자는 신비적 디오니소스 제의를 통해서, 그 신과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그 신과 합일된다. 신은 디오니소스 숭배에서 인간에까지 내려오지 않듯이, 인간을 자신에게까지 올라오게 하지 않는다. (264)
그러나 스토아학자들의 신은 올림포스의 신도 아니고 디오니소스의 신도 아니다. 그 신은 인간과 이성적인 존재들과 더불어 사회에서 사는 신이다. 그리고 그 신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자기의 이익에 따라 처리한다. 신의 권능은 모든 사물들에게 침투하며, 또한 어떠한 세부사항도, 그것이 아무리 하찮을 지라도, 그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은, 신과 인간의 연관 그리고 신과 세계의 연관을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한다. 그 신은, 신 자신의 선함에 의해 끌어당긴 세계에 연관하여, 고독한 이방인이 더 이상 아니다. 신은 세계의 노동자 자체이며, 신은 자기 사유 속에는 자기 세계의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자의 덕목은 플라톤이 꿈꿨던 신과 동화작업도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고자했던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단순 덕목도 아니다. 이 덕목은 신적 작업의 받아들이는 것이고, 현자가 파악하는 지성 덕분에 이 작업에 협력하는 것이다. (265)
거기에는, 고대 그리스적 개념작업과 아주 다른, 인간과 사물들의 숙명을 지배하는, 전능한 셈족의 생각이 들어있었다. 페니키아인 제논은 헬레니즘에게 음색을 불어넣으러 갈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리스 사상에 갑작스런 수입은 아닐 것이다. 티마이오스편에서 플라톤의 신은 데미우르고스인데, 법률편에서 그 신은 인간에게 전념하고, 우주를 모든 인간적 세부사항 안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크세노폰에서 소크라테스의 신은 인간들에게 인간들의 의미들, 경향들, 지성을 부여했으며, 또한 그 신은 신탁들과 예견에 의해 인간들을 인도한다. 이처럼 데미우르고스의 주제와 섭리주의자의 주제는 이미 예고되었다. 제논과 더불어, 이 주제는 철학의 지배적인 부분이 되었다. 우리는 이 일련의 역사에서 셈계와 헬레나계열의 두 개념작업들을 보게 될 것인데, 때로는 혼융되는 경향이 있고 때로는 양자의 발산으로 가득 찬 의식에서 서로 대치된다. 아마도 우리는 동시대에까지 이들이 충돌하는 다양한 형식들 아래서 인간적 자연의 가장 깊은 대립들 중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65) (48UMB)
제4절 스토아의 합리주의 Le rationalisme stoïcien 265
이 근본적인 주제에 학설의 나머지 부분이 종속된다. 제논은 무엇보다도 로고스(Λόγος)의 예언자이며, 철학은 단지 의식일 뿐인데, 그(의식)에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며 또는 오히려 그(의식)에게 아무것도 따로 현존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다루는 의미에서 의식이다. 철학은 “신적이고 인간적인 사물들에 대한 과학”이며, 다시 말하면 모든 합리적 존재의, 즉 만물의 과학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 자체로 신적 것들 속에 흡수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임무는 이때부터 완전히 그려져 있어서, 논리학, 인식 이론 또는 도덕 이론이, 자연학 또는 심리학이 중요하다. 이 과학은 모든 경우에서 비합리적인 것을 제거하는데 있으며 품성 속에서처럼 자연 속에서 단지 순수 이법이 작동하는 것을 보는데 있다. 그러나 로고스의 합리주의는 당연히 착각하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떠한 방식에서는 지성의 합리주의의, 즉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지주의의 계승자가 아니다. 이 주지주의는 지성에 인접한 형상들 또는 본질들에 도달하기 위하여 감각적 자료를 넘어서게 했던 변증법적 방식에서 모든 실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토아학파의 독단론 속에서 이런 종류의 어떠한 방법적 철자도 없다. 무매개적이고 감각적인 자료(la donnée)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반대로 온이법(la Raison [φρένες])이 거기에서 형체로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떠한 진보도 감각적인 것을 이성적인 것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 플라톤은 우리에게 동굴에서 나오게 하기 위하여 차이들을 축적하는데, 그 스토아학자는 동일성들만을 본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전설들은 인간의 역사 밖에 남아있는 것처럼, 중동경전에서는 인간의 역사 그 자체가 신적 드라마인데, 플라톤에서는 지성은 감각적인 것 밖에 있는데 비해, 스토아주의에서 온이법은 감각적 사물 속에서 자기실재성의 충만을 획득한다. (266)
이로부터 철학의 3부분들인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의 필연적 연대성이 나온다. 플라톤주의자들의 예시에서, 그들은 이 세 가지 속에 철학적 문제들을 분배한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서는 그 부분들의 각각으로부터, 각 대상의 다양성 덕분에, 어떤 자치가 간직될 수 있을 지라도(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도덕론이 특성들에 대한 일종의 서술에서, 즉 철학의 나머지와 독립적인 서술에서 특성들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할지라도), 반대로 부분들은 해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변증법에서 앞선 명제들의 귀결인 명제들을 이어가는 것[논리학], 자연 속에서 모든 원인들을 잇는 것[자연학], 품성 속에서 작동들 사이에서 완전한 일치를 확립하는 것[윤리학], 이것은 유일하고도 동일한 이법이기 때문이다. 착한 인간이 자연학자가 아니고 변증론자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세 가지 영역에서 따로 합리성을 실현하는 것, 예를 들어 동시에 이법을 자신의 고유한 품성으로 실현함이 없이, 우주의 사건들의 진행에서 이법을 전적으로 파악하는 것, 그것은 불가능하다. 진보의 가능성도 개선의 가능성도 없이, 착한 인간에게 자연과 인식의 어떤 개념작업을 부여하는, 일종의 덩어리 철학은 가장 새로운 사물들 중의 하나이다. 이 새로운 것은 그리스에서도 있고, 그리고 동방 종교의 대중적 신념들을 상기하게 한다. (266)
이로부터 시작되는 난점이 나오고, 또한 위계질서를 발견할 수 없는 부분들의 질서에서 우유부단함이 나온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단번에 그것들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논리학에 의하여 시작하는데 일치된다면, 때로는 자연학이 둘째 줄에 설 것인데, 왜냐하면 자연학은 도덕론을 도출하는 자연의 개념작업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연학이 셋째 줄에 설 것인데, 왜냐하면 자연학은 왕관으로써 신학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며, 크뤼시포스의 형식적 원전에 따르면, 신학은 불가사의이며, 철학의 기능은 우리에게 그 불가사의를 전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스토아주의가 때로는 도덕적 실천을 향해 끌려 들어가고, 때로는 신의 인식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주저함이 있는데, 사람들은 훨씬 더 나중에 그 주저의 의미와 범위를 볼 것이다. (267) (48UMC) (57VMA)
제5절 고대 스토아주의의 논리학 Logique de l'ancien stoïcisme 267
인식이론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각할 수 있는 것 속에다가, 플라톤이 조심스럽게 인식과 간격을 두었던 확실함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을, 다시 들어가게 하는 데 있다. 진리와 확실함은 가장 공통적인 지각작용들 속에 있고, 그리고 이것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무지한자들에게 속하는 자질들을 넘어서는 어떠한 자질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학은 사실상 현자에게만 속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과학은 공통지각들에 매여 있는 채 있으며, 과학은 그 지각작용들의 체계화 작업일 뿐이다. (267)
이 때문에 인식은 표상 또는 이미지(une image, φαντασία)로부터 출발한다. 판타지아(표상)는 영혼 속에 실재적 대상을 만드는 인상이며, 제논에게서는 밀랍 위에 인장을 찍는 인쇄상에 닮은 인상이며, 크뤼시포스에게서는 공기 속에 색깔 또는 소리를 만드는 변조(l'altération)에 닮은 인상이다. 이 표상은 또한 사람들이 원한다면, 사물들에 관한 초기 판단과 같은 것(이것은 희고 또는 검다)이다. 이 인상이 영혼에 제시되며, 영혼은 이 인상에게 자기의 동의(l'assentiment, συγκατάθεσις)를 의지적으로 승인하거나 거절한다. 만일 영혼이 잘못하여 동의하였다면, 그때에 영혼은 오류에 빠지고, 거짓 견해를 갖는다. 만일 영혼이 정당하게 동의했다면, 그때에 영혼은 표상에 상응하는 대상의 이해 또는 지각작용(perception, κατάληψις)을 갖는다. 그런데 잘 보아야만 하는데, 이 경우에 영혼은 이미지의 대상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이 무매개적으로 그리고 완전한 확실함으로 대상을 파악한다. 영혼은 이미지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파악한다. 그러한 것은, 단어의 고유한 의미에서, 감각작용이고, 이미지와 매우 구별되는 정신의 작동이다. (267)
그러나 동의가 잘못되지 않고서 지각작용으로 이끌리기 위하여, 이미지는 그 자체로 믿을 만(충실)해야 한다. 이때부터 이 충실한 이미지가 진리의 기준 또는 기준들 중의 한 기준을 구성하며, 그 유명한 내포적 표상(la représentation compréhensive, φαντασία ϰαταληπτιϰή)이 된다. 여기서 내포적 이란, 다시 말하면 그 자체로 내포할(이해할) 수 또는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어떠한 의미도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표상은 순수 수동성이지 능동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실한 동의와 지각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어 내포적(compréhensive)[표상]은 기능을 지칭하는 것이지 이미지의 본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제논이 이것을 “영혼 속에 각인된 표상이라 정의할 때, 즉 실재적 대상으로부터 이 대상에 부합하는 표상이라 정의할 때, 그러한 것이 만일 이것이 실재적 대상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면. 이것은 현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을 때”, 그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말함이 없이, 이것의 역할을 만을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내포적 표상이라는 진실한 지각을 허용하게 하는 표상이며, 또한 무게가 저울의 접시를 낮추게 하는 것과 동일한 필연성과 함께 지각을 생산하는 표상이다. 그러나 무엇이 이것을 비(非, non) 내포적 이미지와 구별하는가? 자, 여기에 한 의문이 있다. 아카데미아 학자들에 따르면 스토아학자들은 이 의문에 대답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고, 이런 이유로 대답을 발견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포적 표상이 우리에게 한 대상과 다른 대상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그것도 표상이라고. 이 표상에서 고유한 그리고 어느 정도로는 인격적인 자질(la qualité, 특성)이 통과하는 표상이라고 말해야 한다. 스토아학자들은 이 자질을 항상 대상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 구별하며, 섹스투스에 따르면, 이 자질은 고유한 특징(un caractère propre, ἴδιωμα)을 소유한다고 하며, 자질은 그것을 다른 모든 것으로 구별된다고 한다. 또는 키케로에 따르며 이 자질은 이것이 표상하는 사물들을 개별적 방식으로 표출한다고 한다. (268)
현자에게도 무식자에게도 공통하는 내포적 표상은 이렇게 우리에게 확실함의 첫 단계를 부여한다. 현자에게 알맞은 학문(과학)은 이 확실함의 증가일 뿐인데, 이 확실함은 영역을 변하게 하지 않게 하고, 그러나 완전히 견고한 것이다. 과학[학문], 그것은 “견고하고 안정된 지각작용, 이성에 의해 흔들릴 수 없는 지각작용이다”. 과학의 견고성은, 현자에게서는 지각작용들이 서로 서로 기대면서 확정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는 것, 현자가 지각작용들의 합리적 일치를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인 것 같다. 기술은 이미 공통 지각작용과 과학 사이에서 매개적이기도 하고, 기술은 이 양자(지각작용과 과학)에서 “생활에 유용한 개별적 목적을 향하는 경험에 의해 수집된 지각작용들의 체계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이법이 지각작용들 중에서 찰나적으로 따로 분리되어 있던 확실함들을 서로 서로를 통해 그룹으로 모으고 강화하는 것을 본다. 과학(학문), 그것은 확신하는 지각작용인데, 왜냐하면 이 지각작용은 총체적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것은 지각작용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269)
제논은 그림같은 방식으로 이 모든 확실함의 이론을 요약했다. “그는 자기 손을 펴서, 손가락들이 뻗어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것이 표상이다’ 라고 말했다. 그 다음으로 가볍게 손가락들을 접었는데 ‘이것이 동의’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고 나서, 주먹을 쥐면서, 그는 이것이 지각작용이라고 말했다. 결국에는 왼손 속에 주먹 쥔 오른 손을 감싸면서, ‘이것이 현자에 속하는 과학이다’라고 말했다.” 만일 사람들이 키케로의 이 구절을 잘 읽는다면, 이것이 말한 것은 내포적이든 아니든 표상은 전혀 파악되지 않는 다는 것, 동의는 지각작용을 준비한다는 것, 결국에는 지각작용만이 대상을 파악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과학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269)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또한 매우 제한적 의미에서, 스토아 학자들은 감각주의자들(des sensualistes)이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을 본다. 감각적 실재성들의 인식들 이외에 다른 인식들은 없다는 것,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이 그 시작에서부터 이법으로 관통되어 있어서, 이법의 체계적인 작업에서 유연하게 대처할 준비가 전적으로 되어 있었다. 공통적인 또는 타고난 용어들(les notions), 선, 정의, 신들과 같은 용어들, 모든 인간들에게 14살의 나이에 형성되는 용어들, 이런 용어들은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감관들(des sens)과 구분된 인식 근원으로부터 전혀 도출되지 않는다. 이 모든 용어들은 사물들의 지각작용으로부터 출발하여 자발적인 추론들로부터 도출된다. 예를 들어 선의 용어는 이성에 의하여 선한 것으로 무매개적으로 지각된 사물들(des choses 사태들)로부터 비교에 의해 나온다. 신들의 용어는 결론적으로 사물들의 미의 광경으로부터 나온다. 단지 추론들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고 자발적이다. (269)
이로부터, 여러 스토아학자들은 서로 모순됨이 없이 매우 다른 진리들의 기준들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크뤼시포스처럼 내포적 표상일 수 있고, 보에토스처럼 지성, 감각, 과학일 수 있다. 또는 크뤼시포스처럼 감각과 예견용어(prénotion) 또는 공통용어일 수 있다. 모든 기준들은 그 바탕[심층]에서, 서로 소통하고, 서로 연쇄되어 있고, 서로 동등하다. 왜냐하면 여전히 중요한 것은 지각작용에 필연적으로 데려가는 이미지이든지, 또는 지각작용과 다른 지각들과의 그것의 연결이든지 이다. 지적 활동성은 단지 감각적인 대상을 파악하는 작동들에서만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감각적 자료들로부터 결코 나오지 못하면서도 추상하고, 첨가하고, 구성하고, 옮겨놓을 수 있을 뿐이다. (270)
감각적 사물들 이외에도,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언어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 한마디로 말하면, 표현 가능한 것(l'exprimable, λεκτόν)이 있다. 한 사물의 표상은 사물자체에 의해 영혼 속에서 생산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사물이 영혼에서 생산한 것 더 이상 아니다. 거기에는 스토아학자들에게서 변증법의 범위를 이해하기 위하여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 구별이 있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사물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들에 관련있는 진실한 또는 거짓인 진술들(les énoncés)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또는 거짓인 진술들 중에서 또는 가장 단순한 진술들 또는 판단들(jugements, ἀξιώματα)은 실사 또는 대명사에 의해 표현된 주어와 동사에 의해 표현된 속사로 구성되어 있다. 속사(l'attribut, κατηγόρημα)는 그 혼자만으로는, “산보하다”처럼 주어를 요구하는 불완전한 표현(‘표현가능한 것’, l'exprimable)이다. “소크라테스는 산보한다”처럼 주어와 속사 한 벌(한 문장)은 완전한 표현(l'exprimable complet, αὐτοτελής) 또는 단순한 판단을 형성한다. (270)
스토아학자들에 의해 사용된 명제들의 전형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전형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이 명제들은 개념들 사이의 연관을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명제들의 주어는 항상 단수이고, 게다가 주제는 한정되거나(défini, celui-ci), 정해지지 않거나(quelqu'un), 또는 반쯤 정해지거나(Socrate)이다. 속사는 항상 동사이며, 다시 말하면, 주어에 도달하는 어떤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논리학은 이렇게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주장하는 가능성에 관한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학자들이 일으킨 모든 난점들을 회피한다. 그리고 이들(소피스, 소크라)이 사용하는 개념들의 내포와 외연을 가지고 명제들의 전환가능성을 무시하는 스토아의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의 복잡한 메카니즘을 내팽겨 쳤다. 변증법의 재료란, 단수 주어들로 진술된 사실들이다. (270)
이들이 또한 삼단논법을 간직하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결론의 근거(la raison)는 범주적 판단에 의해 표현된 개념의 포함 연관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들 사이에서 연관이다. 그것의 각각은 단순 명제(밝다, 낮이다)에 의해 표현되었고 또 그 연관은 마치 이런 판단처럼 - [밖이] 밝다면, 낮이다 처럼 - 구성된 판단에 의해(οὐχ ἁπλά ἀξιώματα) 표현되었다. 스토아학자들은 구성된 판단들의 다섯 종류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첫] 가설적인 것(l'hypothétique, συνημμένον, 가정법)이 있는데, 그것은 앞선 문장[명제]와 귀결 문장[명제] 사이의 연관을 표현하며, 우리가 조금 전에 막 인용했던 문장과 같은 것이다. [둘] 연접인데, 이것은 사실들을 연결한다. 예로서 ‘낮이다 그리고 밝다’이다. [셋] 이접인데, 이것은 문장[연결들]은 둘 중의 하나는 진리이다는 방식으로 따로 떼어놓는 것이다. 예로서, ‘낮이거나 또는 밤이거나’이다. [넷] 원인(le causal, 인관관계)인데, 이것은 .. 때문에라는 접속사에 의해서 사실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예로서 ‘낮이기 때문에, 밝다’. [다] 더 많고 더 적음을 진술 하는 판단[비교문장]이다. 예로서 ‘밤보다 낮이 더 길다(더 짧다)’ (271)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항상 ‘낮이면 밝다’와 같은 이런 종류로 구성된 명제이다. 예를 들어 낮이면 밝다. 그런데 소전제는 귀결의 진리를 진술한다. 즉 ‘낮이다’ 그리고 결론은 이로부터 앞선 명제[대전제]의 진리를 끌어낸다. 따라서, 즉 ‘밝다’. [낮이니 밝지] 디오클레스에 따르면, 적어도 여기에서 크뤼시포스가 인정했던 환원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삼단논법들의 다섯 법들 또는 식들에서 첫째 법[식]이 나온다. 둘째 법[가설]은, 대전제로서 ‘낮이라면, 밝다’와 같은 가설법(l'hypothétique)을, 소전제로서 ‘그런데 밤이다’와 같은 귀결의 반대를, 그리고 결론으로서 ‘따라서 낮이 아니다’라는 앞선 것의 부정을, 갖는다. 셋째 법[연접]은 대전제로서 ‘플라톤이 죽었다 와[et 동시에] 그가 살아있다’가 사실이 아니다 라는 연접판단의 부정을 갖는다. 소전제로서 ‘이 사실들 중에 하나는 진리이다’이며 ‘그런데 플라톤은 죽었다’는 갖는다. 결론으로서 ‘따라서 플라톤은 살아있지 않다’이라는 다른 쪽의 부정이다. 넷째 법[선접]은 대전제로서 ‘낮이거나 또는 밤이다’라는 선접이다. 소전제로서 두 가지 중의 하나, 즉 ‘낮이다’라는 긍정이다. 결론으로서 ‘밤이 아니라’라는 것과 같은 다른 것의 반대이다. 거꾸로 다섯째 식에는 선접으로부터 출발하여, 소전제에서 가지들 중의 하나를 부정한다. ‘밤이 아니다. 그래서 다른 것이라 결론지으며, 따라서 낮이다.’ 이 증명할 수 없는 법들 중에다가 반대되는 법들이거나 반대되는 법들로부터 유래된 주제들(thèmes θέματα)이 덧 보태진다. 즉 구성된 추론과 같은 것으로, ‘만일 A가 있다면, B가 있다, 만일 B가 있다면, C가 있다 등등으로; 그런데 C가 있다, 그러면 A가 있다’같은 것이다. (271)
사람들은 언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기초하고 있는 판단들과 삼단논법들의 두 분류방식들의 임의성(l'arbitraire, 자유재량)을 쉽게 본다. 또한 크뤼시포스의 제자인 크리니스(Crinis, Κρὶνις, s.d.)는 다섯 판단들 대신에 여섯 종류의 복합 판단들을 인정했다. 그리고 만일 디오클레스가 우리에게 크뤼시포스가 증명할 수 없는 다섯 삼단논법을 인정했다고 말한다면, 갈리아노스는 그 중에서 셋만을 크뤼시포스에게 부여했다. (272)
진실로 말하자면, 이 변증법의 관심은 메카니즘 속에 있지 않다. 그 관심은 대전제의 본성에 있다. 대전제는 항상 사실들의 연결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앞선 것[전제]과 귀결 사이의 연결을 표현한다. 그러나 어떤 조건에서 가설적 판단이 유효하고 건전(sain, ὑγιής)한가? 그러한 판단은 증명의 결론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결론은 항상 단순 판단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판단은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주목하자. 다른 한편으로 그런 명제들의 외적인 국면이 있다. 만일 그런 사실이 있다면, 다른 사실도 있고, 그 명제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제들과 - 징후와 기호의 위대한 관찰자들인 의사들 또는 천문학자들이 경험에 의하여 질병의 진단과 숙명의 예언하기 위하여 확립한 명제들과 - 닮았다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귀납적 논리학자들의 언어이다. 이 언어는 우리를 서로 서로 연쇄되어 있는 사실들에 의해 구성된 세계의 관점에,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와 매우 다른 세계의 관점에 이르게 한다. 스토아학자들 자체는 증명 속에서 단지 일종의 기호(signe)만을 보았다. (272)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제의 외적 형식으로부터 명제의 가치가 확립된다는 방식을 따로 떼어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논리학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 논리학은 가까이서건 멀리서건 귀납법에 의한 증명에 닮았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만일 우리가 판단들이 예로서 주어진 것을 판단들의 내용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내용이 판단들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귀결은 앞선 것과 논리적 연결로 항상 이어져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 판단들이 가설적 판단으로 제시하는 것이 유일한 정당화이다. ‘만일 낮이라면 밝다’, 이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귀결의 반대는, 즉 ‘밝지 않다’라는 것은, 앞선 것과 모순이다. 그리고 기호(le signe) 그 자체에서, 다시 말하면 다음과 같은 “만일 그가 상처가 있다면, 그는 부상을 당했었다” 판단에서, 동일한 종류의 연결을 재발견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기호는 현재의 실재성을 과거의 실재성에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두 언술들이기 때문이며, 이 두 언술은 이 두 개 모두가 현재적이며, 지성(l'intelligence, νοητά) 속에서 현재적이며, 이 두 언술은 근저에서 논리적으로 동일하다. (272)
요약하자면, 만일 논리적 연결이 항상 감관[의미]에 의해 확정된 사실들과 언어의 언술들 사이에 연결에 의해서 표현된다면, 사실들의 연결은 이들을 통합하는 논리적 연결 덕분에서만 가치를 지닌다. 가설적 판단은, 이 판단이 동일한 것에서 동일한 것으로 이행하는 판단에 더욱더 접근되는 만큼이나, 그 만큼 더 많은 가치를 갖는다. 즉 “Si lucet, lucet"(낮이면, 밝다), 따라서 스토아학파의 변증법은 인식이론과 동일한 이상을, 즉 이성에 의한 사실의 완전함 침투라는 이상을 지녔다. 그리고 사람들은 곧바로, 어떻게 변증법의 기관(l'organe)인 가설적 명제가 사물들에 대해 사실들의 통찰(관점)을 표현하는데 적합한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처럼 그들에게서는 논리학이 단순한 기관이 아니라 철학의 부분 또는 일종의 철학이다. (273) (48UMG) (57VME)
제6절 옛 스토아주의의 자연학 Physique de l'ancien Stoïcisme 273
스토아학파의 자연학은 우리들에게 이성에 의해 지배된 총괄적 세계를 상상을 통하여, 어떠한 비이성적 찌꺼기도 없이, 표상되게 하도록 목표로 삼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서처럼, 아자르(le hasard 우연) 즉 무질서를 위한 어떠한 영역도 없다. 모든 것은 우주적 질서로 되돌아간다. 운동, 변화, 시간은 기하학자 플라톤 또는 생물학자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불완전의 지표도 완성되지 못한 존재의 지표도 아니다. 항상 변하고 운동하는 세계는 매 순간마다 자기 완전성으로 충만 되어있다. “운동은 순간들의 매 순간에 작동(un acte 현실태)이지, 작동으로 이행이 아니다.” 시간은 장소처럼 실체도 없고 실재성도 없는 비형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내적인 힘 덕분에, 한 존재가 변하고 지속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능동적으로] 행하고 또 [수동적으로] 감수하는 것이 때문이다. 그것의 완전성을 구출하기 위하여 영원한 세계를 선언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계승자들처럼, 뒤따르는[계열에 의해] 어떠한 배열도 없다. 스토아의 세계는, 그것의 완전함이 도달됨이 없이, 태어나고 해체되는 세계이다. 세계의 합리성은 물질이 질서를 허락하는 만큼이나 그 질서에 반사되는 불변의 질서의 이미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자신의 능력에 종속시키는 이법의 활동성으로 이루어진다. (273)
이법의 활동성을 자연적이고 물체적인 활동성처럼 동시에 상상해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서 스토아학자들에게서 또한 플라톤이 소피스트편에서 질책한 땅의 아들들에게서처럼 신체들은 현존한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것, 그것은 [능동]행하고 또는 [수동]겪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신체들만이 이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신체적(비물체적)인 것들을 스토아학자들은 또한 가지적(인식가능) 것이라고 불렀는데, 이 비신체적인 것들은 전적으로 비활동적이고 무감동한 환경들로서 마치 장소, 공간, 시간과 같은 것이며 또는 동사를 통해서 표현 가능한 언표된 것들인데, 이 언표된 것들은 존재의 활동성에서 나온 사건들 또는 외적 측면들이며, 한마디로 사람들이 사물들이 아니라 사물들을 기회에 맞게 생각하는 모든 것이다. (274)
이법, 왜냐하면 그것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신체(un corps)[σώμα]이다. 그리고 그 행동을 감당하고 [수동으로] 겪는 사물도 또한 물체이며, 그리고 물질[ὕλη]이라 불린다. 이법 또는 신으로서 능동자(un agent), 그리고 신적 작용들에 완전히 온순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성)질 없는 물질로서 수동자(un patient)가 있으며, 다시 말하면, 수동으로 결코 겪음이 없이 항상 작용하는 능동적 물체(신체)와 결코 능동으로 작용함이 없이 겪는 물질이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자연학에서 인정한 두 원리들이다. 원리들 중에 하나는 원인이고, 심지어 모든 다른 원인들이 이끌려지는 유일한 원인이며, 또한 자기 운동성에 의해 작동하는 유일한 원인이다. 다른 하나는 저항 없이 이 원인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물질]이다. (274)
이런 운동역학은 이들 원리들 중의 하나의 원리에 의해(반작용없이 실행이 이루어지는 행동의 원리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남아있다. 그러나 다른 원리에 의해(운동하는 제일 원리와 구체적 물체로 이루어진 물질-사물의 원리에 의해) 완전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에 반대편에 있으면서, 스토아주의에서 가장 낯설기도 한 또 가장 필수불가결한 자연학적 도그마 덕분에 - 총체적 혼합의 도그마 덕분에 - 운동역학의 충만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 두 물체는, 매우 다양한 곡식들이 섞일 수 있듯이, 병치(juxtaposition)에 의해서 서로 통합될 수 있고, 금속의 합금(un alliage)처럼 하나로 뒤섞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서로 늘려지는 방식으로 서로는 실체와 속성을 상실하지 않고서, 비록 같은 공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두 물체를 어떤 몫(비례 부분, en quelque portion)으로 발견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의 총체적 혼합물(un mélange)처럼 혼합될 수도 있다. 이처럼 공기 중에 퍼지는 향처럼, 사람들이 물의 덩어리(la masss d'eau) 속에, 또는 바닷물과 같은 속에 통과하게 하는 포도주도 있다. [능동]작용하는 물체가 수동체를 관통하여 퍼지는 방식으로, 온이성(la Raison)은 물질을 관통하여 퍼지고 영혼은 신체를 관통하여 퍼진다. 자연적[신체적] 행동은 불가침투성의 부정적 정식 덕분에만 생각될 수 있다. 한 물체가 자기와 다른 물체에 침투할 수 있는 작용(l'action)이 있고, 이 물체의 작용이 자기 속에 도처에 현재하고 있다. 이것은 스토아학파의 유물론에 이런 매우 특별한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특성이 스토아의 유물론을 유심론에 가깝게 한다. 물질에 생명성을 불어넣기 위하여 물질을 관통하는 물질적 숨결(un souffle, πνεῦμα)은 순수 정신이 될 준비가 잘 갖추어진 것이다. (275)
그리스 우주론은 항상 주기 또는 대년(大年)의 이미지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대년의 끝에서 사물들이 출발점에 되돌아오고 무한히 새로운 원환을 다시 시작한다. 이러한 것은 특히 스토아학자들로부터 나왔다. 세계의 역사는 교대하는 주기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주기들 중의 하나에서 불 또는 활동적 힘과 동일한 최고신, 즉 제우스가 모든 사물들을 그 자신 속으로 흡수하고 환원한다. 반면에 다른 하나에서 그 신은 정돈된 세계(διακόσμησις)를 생명화하고 지배한다. 따라서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대로, 신적 실체 속에 완전히 되돌아가는 대화재(une conflagration, 분쟁)에 의해 완성된다. 그러고 세계는 동일한 인물들과 동일한 사건들과 함께 과거에 있었던 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다시 시작한다. 이 엄격한 영원회귀는 어떠한 발명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275)
자연학 또는 우주론은 이 역사의 세부사항일 뿐이다. 원초적 불로부터(우리가 그 원초적 불을 지상에서 이용하는 파괴적인 불로써가 아니라, 하늘의 빛나는 광채로서 불로서 생각해야만 한다) 일련의 변환들에 의해서 모든 네 가지 요소가 생겨난다. 불의 부분은 공기로 변형되고, 공기의 부분은 물로, 물의 부분은 땅으로 변형된다. 그리고 세계가 태어난다. 왜냐하면 열기 있는 숨결 또는 신적 공기는 습한 것 속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원문들이 우리에게 완전히 불확실하게 남겨진 방식으로, 유일한 세계에 연결된 개별적 존재들이 이 작용방식으로 진행한다. 각 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자기 존재만큼이나 지속하는 환원할 수 없는 개별성을 지닌다. 이 개별성들은 겉보기에는 원초적 숨결(프네우마)의 파편화된 것들일 뿐이다. 왜냐하면 땅 또는 물에 의해서 새로운 존재들의 생식활동은 그것이 사물들의 형성 작업에서 간직했던 숨결의 할당에 의존하든지, 또는 아마도 인간의 경우에서는 그의 영혼을 형성하는 하늘에서 온 불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275)
이 개별자들의 구체화된 작용으로부터 우리가 보는 세계의 체계가 형성된다. 그 체계는 고정된 것들의 공에 의해 공간 속에 의지적이고 자유로운 운동으로 순환하는 행성들과 더불어 제한되어 있다. 공기는 보이지 않는 생명 있는 존재들로 또는 다이몬들로 심어져 있고, 땅은 중심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구중심적 체계는 겉보기에는 우리가 이미 인식한 체계들과 닮았을 뿐이다. 우선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근거들(les raisons)은 동일한 근거들이 아니다. 프로클로스가 말하기를 “플라톤 자기 모델의 통일성에 근거하여 세계의 통일성을 확립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의 통일성과 자연적 장소들의 결정성에 근거하여 세계의 통일성을 확립한다. 스토아학자들은 물체적 실체로부터 통일하는 힘의 현존에 근거하여 세계의 통일성을 확립한다.” 만일 세계가 하나라면, 세계를 침투하는 숨결 또는 영혼은 그 세계의 부분을 보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긴장(τόνος)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 긴장은 살아있는 작은 모든 존재들이,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부분들이 분산되지 못하게 막기 위한 어떤 것을 독립적으로 갖는 모든 존재들이, 소유하고 있는 긴장과 유비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긴장은, 즉 중심에서 주변으로 주변에서 중심으로 왕복운동은 존재가 현존하도록 해준다. 여기서 플라톤주의자들의 표본[이데아]의 무용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 장소의 무용론이 나온다. 신이 세계를 포함하는 것은 그 자체 안에 있는 힘, 즉 사유이며 동시에 이법이라는 힘에 의해서 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세계는 흩어진다고 걱정함이 없이 무한히 빈 것 가운데 현존 할 수 있고, 반대로 그 자신은 자기 속에는 어떠한 빈 것도 없다. 왜냐하면 힘이 미치지 않은 장소와 같은 어떠한 자연적 장소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일 세계가 단일한 영혼에 의해 포섭되어 있다면, 세계를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에 공감이 있었다는 것이 필연적이다. 이 때문에 각 동물은 자기 자신과 이런 공감을 갖는데, 부분들 중의 몇 가지의 배열에 따라서 사람들이 다른 부분들의 배열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공감을 갖는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운동들은 거리가 멈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작용을 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능동자들로부터 수동자들에 옮겨진 유일한 삶이 있기 때문이다”. “전체가 은연중에 협력하는” 세계에 대한 보편적 공감은 스토아학자들의 세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위계적 세계를 근본적으로 구별해준다. 그 세계에는 보편적 순환(un circulus universel) 같은 것이 있다. 땅과 모든 거주자들은 천체의 영향들을 받는다. 이 천체의 영향들은 계절들의 일반적 효과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적 숙명에까지 확장된다. 천문학에 따르면 그 영향들의 확산은 기원전 3세기경부터 거대했으며, 스토아학자들에 의해 완전히 수용되었다. 게다가 요소들을 생산하는 변환과는 역전하는 변환에 의해서, 땅에서 오는 건조한 유출들(les émanations)과 강과 바다로부터 나오는 습한 유출들은 다양한 기후들을 생산하며 천체들에게 영양의 구실을 한다. 결국 스토아학자들의 천문학은 이런 것으로부터 특별한 표시(une marque)를 받아들인다. 수학적 천문학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은 그들은 하늘에서 순환운동과 등속운동을 인정할 필요가 없다고 상상하기에 이르렀던 천구들 또는 주전원들(周轉圓, les épicycle)을 내버려 두었다. 이로부터 압축된 불로 만들어진 각 행성은, 자기의 고유한 영혼의 방향에 따라서 자기 행로를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따른다. 그리고 행성은 하늘에서 비등속 운동들이다. 순환하며 변화하는 행성의 운동은 행성의 생명화의 증거자체이다. 다른 한편 중심에 지구(땅)를 두는 입장은 역동적인 이유들로부터, 즉 마치 둥근 주머니(囊, 낭)속에 위치한 좁쌀처럼, 땅이 공기에 의해 전적으로 옆면으로 눌려있다는 것으로부터 나왔다. 이 주머니를 사람들이 부풀렸을 때, 이 주머니는 중심에서는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 또는 이 땅 덩어리가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세계의 나머지의 덩어리와 동등한 값을 지니며, 이 나머지 덩어리와 균형을 이룬다.
이러한 것이 지구 중심주의인데, 수학적 가설만을 인정하기에 적합한 플라톤의 것과는 매우 다르다. 반면에 스토아학자들의 것은 그들의 신념에 확고하게 연결된 하나의 독단이다. 클레안테스(Κλεάνθης, 전331경-전232)는 지구의 운동을 인정한 사모스 출신의 아리스타르코스(Ἀρίσταρχος, 전310경–230)를 정의롭게 충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이 이런 생각을 불경건한 범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세계는 신적 체계이며, 세계의 모든 부분들은 신의 뜻에 따라 분배되어 있다. “세계는 완전한 물체이다. 그러나 그 부분들은 완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부분들은 전체와 어떤 관계를 갖고있으며, 그 자체로서는 현존하지 못한다.”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세계로부터 생산된다. (277)
사물의 질서는 영원하지 않다. 세계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소요학파 학자들에 반대하여, 제논은 지질학적 관찰들을 평가했다. 관찰들을 통하여 우리는 땅이 한결같이 수평을 이루고 바다는 물러간다는 것을 안다. 만일 세계가 영원하다면, 따라서 땅은 평평해야만 하고 바다는 사라져야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자양분을 통해서 회복될 필요가 있는 천체의 불을 포함해서, 우주의 모든 부분들이 스스로 붕괴되는 것을 본다. 어떻게 이것들의 일체가 파괴되지 않았을까? 결국 우리는 인간 종이 아주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 종에게 필수불가결한 많은 기술들은 그 종이 아직 초기였을 때와 동일한 시기에 생겨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78)
우리는 세계의 탄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았다. 대년(大年)의 끝에서 행성들이 최초의 위치들로 회귀에 의해 정해진 세계의 목적은 불 속에서 모든 사물의 우주적 대재난 또는 흡수에 있다. 제논과 크뤼시포스는 이 대재난을 세계의 정화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셈족의 옛 신화들에서 발견했던 대홍수들 또는 불의 돌풍들의 방식으로 완전한 상태의 회복이 거기에 있었다고 이렇게 이해했다. 크뤼시포스는 대재난은 세계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조심스럽게 제기하였다. 왜냐하면, 죽음은 영혼과 물체의 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세계의 영혼은 영혼과 물체의 분리가 아니라, 자기희생을 치르고서 영혼이 모든 물질을 흡수했던 것에까지 연속적으로 커나갔다.” 거기에는 자연에 부합하는 하나의 변화가 있지, 폭력적 혁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278)
전체적으로, 우주는 수학적 질서로부터 이루어지는 다소 불완전하고 우연적이며 불안한 현실화가 아니다. 어떤 사건이 효과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달리 일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필연의 법칙에 따라서 작용하는 원인의 결과이다. 신, 제우스의 영혼, 온이성, 사물들의 필연성, 신적 법칙, 운명(le Destin), 이 모든 것이 제논에게서는 하나이다. 운명(destin, εἱμαρμένη)의 이론은 우리가 스토아학자들에게서 보았던 전반적인 합리주의의 분명한 표현일 뿐이다. 운명은 처음에는 그리스 사유에서는 인간들에게 각자의 몫을 분배하는 완전히 비합리적인 힘이었는데, [나중에는] 보편적 “이법”이 된다. “이 이법에 따르면, 과거 사건들은 이미 일어났고, 현재 사건들은 일어나고 있고, 미래 사건들은 일어날 것이다.” 보편적 이법은 제우스의 지성 또는 의지인데, 제우스는 우리가 자연에 반대라고 부르는 질병들 또는 상해들이라 사실들도 명령하고, 또한 우리가 자연에 부합하는 건강과 같은 사실들도 명령한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보편적[우주적] 자연에 부합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에 반대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할 때는, 일체로부터 분리된 개별적 한 존재에 대해 자연에 비추어 상대적으로만 말할 뿐이다. (279)
이 운명을 우리의 과학적 결정론과 혼동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스토아학자들에게서 법칙의 과학들에 닮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회의주의자들의 학설들과 같은 아주 다른 학설들 속에서 법칙의 과학들의 관념을 발견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생각하는 바대로 원인의 필연성인데, 이 필연성은 관계의 필연성이며, 관계는 필연성에 복종될 수 있는 현상들의 경우의 수를 완전히 비결정적인 체로 남아있게 된다. 반대로 우주의 운명은 인격의 운명과 마찬가지다. 이 운명은 한 개별적 존재인 우주에게, 즉 시작과 끝이 있는 우주에게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플루타르코스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는 한 논문에서 스토아학파적인 작가가 말한 것과 같다. “법칙도 이법도 신적인 어떤 것도 무한일 수 없을 것이다.” 이 개념작업은 그 권위를 천문학 또는 의학과 같은 진실한 과학들뿐만 아니라, 점성학, 몽상들에 의한 점(예견술)과 같은 미래 예견술의 모든 양식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스토학자들은 이 후자들에 심취되었고, 크뤼시포스와 바빌론의 디오게네스는 이 후자들에 관해서 관찰들을 통한에 치밀한 수집들로 글을 썼다. 키케로는 그의 저술 예언에 관하여(Sur la Divination)에서 이 관찰들의 몇 가지를 보존하여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279)
한 마디로 운명은 원인들과 결과들의 연쇄와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원인들을 동시에 연결하는 유일한 원인에 훨씬 더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운명은 각 개별적 존재가 전개되도록하는 씨앗 같은 모든 이유들을 그 자체의 통일성 속에 포함하는 것이다. 로고이(logoi, 로고스들) 즉 이법으로 이루어진, 이 연결된 세계는 일종의 힘들의 우주를, 또는 만일 원한다면 능동적인 신적 사유들의 우주를 구성한다. 이 우주는 이데아들로 된 플라톤의 세계의 자리를 차지한다. 로고이의 중요사항은 땅과 바다의 현상들을 주제하는 원칙들이며, 헤스티아(Ἑστία)와 포세이돈(Ποσειδῶν)과 같은 신화들에 의해 알려진 민중적 신성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스토아학자인 코르누투스(Cornutus, Κορνοῦτος, 후60년경)가 보존했던 한 해석된 학설에 의하면, 스토아학자들은 민중적 신화들의 최소한의 세부사항을 마치 자연적 사실들의 알레고리처럼 설명하려 매우 힘썼다. (28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명론(ce fatalisme)은 체계의 내부에서 한 난점을 만났다. 왜냐하면 운명론은 인간 자유의 신념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어렵사리 겨우 몇 개의 논증작업을 우리에게 남겼는데, 그 논증에 의하면 크뤼시포스가 이것들을 일치시키고자 애썼다고 한다. 어떻게 자유로운 작동[자유의지]이 동시에 운명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지, 그러한 것은 진솔한 문제제기였다. 왜냐하면 운명에서 배제되는 어떠한 경우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크뤼시포스는 원인의 여러 종류들을 구별하면서 풀어갔다. 원통의 회전 운동은 사람들이 앞선 원인이라고 부르는 외적 충력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자유 작동과 마찬가지이며 완전하고 기본 원인인 원통의 형태에서도 설명된다. 합의로써 자유작동은 앞선 원인이라는 내포적 표상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인을 수용하는 정신의 창도력에 의해 설명된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이런 해결방식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마치 운명의 권능이 외적 상황들에까지 또는 우리들의 작동과 기회가 맞는 원인들에까지 펼쳐져 있는 것과 같다. (280) (48VKE)
제7절 스토아학파의 신학 La théologie stoïcienne 280
세계의 교대되는 리듬은 스토아 신학의 범위를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하여 필수적이다. 사람들은 자기 관점에서 내재성과 심지어 범신론이란 단어를 발설하지만, 그런데 크리스트교 작가들은 우주의 가장 불구적인 부분들 속에서 현재 있는 이 신을 조롱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세계는 신의 실체로 이루어졌고 또 거기에 흡수되었다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당한 관념을 남용하지 않아야 한다. 스토아주의에서는 신적 초월성 개념의 씨앗들이 있고, 그리고 또한 이 초월성은 본성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신의 초월성과 아주 다르다는 것은 진실이다. 이런 이유로 신의 초월성은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세계의 영원성을 주장하지 않고서는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을 주목해보자. 플라톤주의자들이 싫증날 정도로 우리에게 반복하는 데, 신이 완전한 영원성의 세계를 생산하는 지를 스스로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세계의 현실적 현존은 신적 완전함의 측면들 또는 조건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스토아학자들에서는 이와는 아주 달랐다. 대재난 덕분에, 스토아학자들의 제우스 또는 최고의 신은 세상과 어느 정도로는 독립적인 생명을 가졌다. 그런데 “자연이 현존하기를 그만 둘 때, 신은 자신의 유일한 사유들에 전념하여 자신 속에 머문다.” 다른 한편, 만일 신이 사물의 내부적 힘처럼 상상된다면, 즉 “사물들의 생산에 방법적으로 진행하는 예술가의 불처럼” 또는 “벌집들을 가로질러 흐르는 꿀”처럼 상상되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스토아학자는 마치 섭리적 존재와 같은 신에게, 즉 이성적 존재들을 이용하여 세계에서 모든 것을 규제하는 인간들의 아버지인 신에게 전한다. 그리고 “법칙을 가지고 모든 사물들을 지배하는 자연의 두목인 전능한 존재에게, 즉 땅의 주위를 도는 이 세계 전체를 신에게 복종하게 하는 존재에게 전한다. 그 존재 자신이 세계를 어디엔가 데리고 가서는, 그 자신에 의해 기꺼이 지배되도록 내버려둔다.” 크리스트교 작가들은 스토아학자들에게 신의 개념 안에 일종의 내적 충돌이 있다고 경고했다. 오리게네스(Origène, Ὠριγένης, 185경-253경)가 말하기를, “스토아학자들은 섭리적 존재가 스스로 지배하는 존재와 똑 같은 실체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체에 대하여 스토아학자들은 그래도 그 존재가 완전하다고 말하고자 하며, 또한 그 존재가 지도하는 무엇과는 다르다고 말하려 한다.” (281)
따라서 만일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과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이 지식적인 신학을 초월하는 신이라면, 스토아학자들의 신은 보다 인간적인 경건의 대상이다. 스토아학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시인하기 위하여, 민중의 신앙심이 신들의 관념에게 부여한 모든 기원들을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 기원들이란, 기상학의 관점과 세계 질서의 관점, 즉 인간에게 유용하거나 또는 해로운 힘들의 그리고 우리를 넘어서는 힘들의 의식, 마치 사랑의 정념 또는 정의의 욕망처럼 우리를 지도하며 우리에게 내재하는 힘들의 의식, 결국에는 시인들의 신화들과 자비로운 영웅들의 추억 등이다. 신의 현존에 대한 그들의 증거들은 세계의 건축가를 인정한다는 필연성 위에 근거하며, 유사한 이유와 더 고급적인 이유에서 인간들의 이유에까지 이 증거들은 동일한 선상에 있다. 이 모든 민중적 신학은 신과 인간 사이에 직접적이고 특수한 연관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신학은 신과 세계 질서와 사이에 일반적인 연관에만 관여하지, 인간과 개별적인 관계에 관여하지 않는다. 세계는 무엇보다도 “신들과 인간들의 거처(居處), 신들과 인간들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사물들의 거처이다.” 이 마지막 장에서 사람들은 스토아학자들이 외적 목적성의 주장을 어떤 우스꽝스러운 점에까지 밀고 갔는지를 안다. 예를 들어 벼룩들에게도 우리에게 너무 긴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기능을 부여하고, 생쥐들에게도 우리에게 우리 업무들의 선량한 질서를 각성하게 강요하는 행복한 효과를 부여하기에 이른다. (282)
크뤼시포스는 자기의 반대자들에 대한 비판을 토대하여 변신론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는데, 게다가 아주 부드러운 변신론으로 우주 속에서 잘못(le mal, 악)의 현전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우주의 구조에 필수불가결한 잘못을 제시하는 두 개의 논증이 있다. 크뤼시포스가 말하기를 “만일 잘못들이 동시에 있지 않았더라면, 선행들이 [보다 먼저] 있어왔다고 믿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선은 잘못의 반대이고, 그것의 반대 없이는 반대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논증에 따르면, 신은 자연적으로 선하고, 그리고 거기에 신의 중요한 발상이 있다. 그러나 그 발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이 수단들을 사용하도록 되었지만, 그 수단들이 그 자체로 작동하기에 불편함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두개골의 얄팍한 뼈들은 인간 유기체에서 필수적이지만 자기의 안녕을 위하여 위험이 없지 않다. 이때에 잘못은 선(잘)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셋째 논증은 클레안테스가 제우스에게 찬미가를 부른 말투들에서 밝혀진다. “나쁜 자들이 그들의 광기 속에 완수하는 작동들을 제외하면, 당신 없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도덕적 잘못 또는 악습(le vice)은 신적 법칙에 반대로 고양되는 인간의 자유에 기인하였고, 반면에 첫째 논증에서는 도덕적 잘못은 조화로운 평형의 필연성에 기인하였다. 그런데, 스토아학자들은 모순적인 두 설명들 사이에서 결코 선택할 수 없었다. (48VLA)
제8절 옛 스토아학파의 심리학 La psychologie de l'ancien stoïcisme 282
스토아학자들에게서 개별적 영혼은 세계영혼이론에서처럼 합리주의적, 역동주의적, 정신주의적(유심론)인 것과 같다. 이들은 식물 속에는 영혼이 현존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만 동물들에게는 영혼을 부여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게 격조 높은 존엄성을 구해내면서 그들은 짐승들에게는 이성을 완전히 거부했다. 첫째로 표상에 의해 진동이 시작되는 성향으로부터 도출되는 자발적 운동이 있는 거기에서만 영혼이 있다. 표상과 성향과 같은 것들은 식물들에게는 없지만 동물들이 소유하는 총체와 연결된 두 역량들이다. (283)
반대로 동물들은 아직은 어떠한 이법도 갖지 않고 있다. 호기심 많은 관찰자들이 수집한 겉보기에 지성적이고 본능적인 작동들(마치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의 동물론에서 스토아적으로 표현한 저술과 플루타르코스의 동물들의 민감성에 관해서의 저술에서 보듯이), 즉 우정, 적대성, 정치성 등의 특징들은 그 자체 속에는 어떠한 이법도 가정할 수 없으나, 그래도 자연 속에서 도처에 퍼져있는 보편적 이법을 도출할 수 있다. (283)
인간의 영혼에 속하는 개별적 이법은, 표상과 경향 또는 성향 사이에서 도입되는 동의라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합리적 영혼의 고유한 특성, 이것은 이런 이유로 경향의 활동성이 표상에 의해 직접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혼이 이법에게 자발적으로 찬성과 동의를 부여하는 후에 생겨나는 것이다. 영혼이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행동을 막는다. (283)
스토아학자들은, 표상, 합의, 성향, 이러한 부분을 영혼의 주도권 부분 또는 지도적 부분이며, 나아가 또는 반성이라 부른다. 그들은 이 부분을 마치 심장 속에 위치된 불처럼 타는(igné) 숨결처럼 표상했다. 이 부분으로부터 일곱 가지 불의 숨결요소가 나온다. 이들 중 다섯 가지는 감각적 인상들을 받아들이고 또 중심으로 전달하는 [신체] 기관들에 퍼져 있다. 여섯째 숨결은 음성기관에 의해 전달되는 목소리의 숨결이다. 일곱째 생식의 숨결은 생겨난 것[자식]에게 아버지 영혼의 미세한 것을 전한다. 게다가 이 숨결들은 하부 부분이라기보다 신체를 통하여 퍼지는 인도하는 영혼 자체이다. (283)
이 영혼의 기원에 대한 주제에서 옛 스토아학자들은 아버지에 의해 전수된 불타는 숨결은 우선 영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식물처럼 배아를 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탄생의 순간에, 공기에 의해 냉각화 되는 불타는 숨결은(스토아학자들은 숨결에 의해 허파 속에 들어간 공기의 부분이 심장의 우심실에서 받아들여진다고 가정했다) 담금질된 쇠처럼 단단해 지며, 동물의 영혼이 된다. 따라서 스토아학자들은 이 학설을 받아들인 것 같고, 사람들은 이것을 나중에 영혼 출생설(le traducianisme)이라 부를 것이다. 신적 에테르의 조각으로써 간주하는 영혼 기원에 대한 전도된 학설을 누구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다. 에테르 설은 로마 제국 시대의 스토아학자들에서 발견되며, 이 학설은 인간의 특권을 강조한다. 인간 영혼은 어째거나 순수 이법이며, 어떻게 악과 망상이 여기에 도입되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다. (284) (48VLC) (57VMJ)
제9절 옛 스토아학파의 도덕론 Morale de l'ancien stoïcisme 284
운명(le destin), 신, 영혼의 개념화작업에는 현자의 품행(la conduite)의 규칙들과 연결되어 있다. (284)
우리는 이 도덕론을 제시하기 위하여,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VII, 84)에 의해 개략적으로 그려진 도식을, 즉 크뤼시포스와 그 계승자들로부터 포세이도니오스(Ποσειδώνιος, 135경-60경)에까지 도식을 따라가 보자. (284)
그 도덕주의자는 성향들(les inclinations, ὁρμαί)의 관찰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이러한 것들이 인간에게서 탄생에서부터 또는 이 성향들의 부화(l'éclosion)의 정도에 따라 확정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성향들은 자연으로부터 받아들여진 것이고, 타락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초기 성향은 우리자신 스스로 보존하는 데로 우리를 밀고 나가는 것인데, 자연은 기원에서부터 우리에게 감정과 우리 자의식을 부여하여서, 마치 자연이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위임해 놓은 것과 같다(왜냐하면 이 성향은 자의식과 구별할 수 없고, 그 자의식에 앞서 있지도 않다). (284)
따라서 살아있는 존재는 시작에서부터 자연에 부합하는 것과 자연에 반대되는 것을 구별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에 부합되는 초기 사물들’(πρώτα κατά φύσιν)을, 건강, 안녕과 같은 초기 성향들의, 즉 이것들에 이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의 대상들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상들은 아직은 선함들(선행들)이라는 이름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선이란 자연적으로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족적인 것이고, 유용함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는 것이다. 스토아학자들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의사의 선, 건축가의 선 등을 구별했던 것과 같은, 상대적 선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말했던 자연에 부합하는 사물들은, 이것들을 욕망하는 살아있는 존재들에 상대적이기 때문에, 선함들이 아니다. 성향들에 맞는 자발적 합의의 공통적 이유를 반성하면서, 그리고 이 성향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우리는 선의 개념을 파악한다. 우리의 자발적 합의는 삶의 여명기에 이미 이성으로 기초한 합의였으며, 심지어는 이성의 합의였다. 왜냐하면 그 합의는 자연에 의해, 다시 말하면 운명, 즉 보편 이법에 의해 생산된 존재들을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선의 개념은 어떤 정도로는 이차적 등급에 속하는 이법[이치]으로부터 온다. 이 이치는 총체적 자연이 보존해왔던 의지 속에서, 우리 자신에 맞는 우리 집착의 심층적 동기를 파악한다. 우리는 총체적 자연의 일부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보편적 자연을 생각하는 선은 성향의 원초적인 대상들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원초적 대상들은 우리의 개별적 자연에만 연관되어 있을 뿐이다. 이 선은 원초적 목적들의 단순한 증가에 의해서 얻어질 수 없다. 예를 들어 마치 선이 건강, 재산, 이런 종류의 다른 목적들이 그것들의 최대치로 밀고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선은 다른 종류의 것이며, 상위의 크기가 아니다. (285)
그 증거란 것은, 칭찬이 건강에 호소하는 것도 부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며, 칭찬이 선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실상 선이 그 자체로서 칭찬받을 만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칭찬받을 만한 덕 있는 작동과 그 작동이 완성된 선 또는 행복 사이를 구별한다. 왜냐하면 “선이라는 의지의 대상이다. 이 대상은 누군가 그것으로 즐거워하는 그 무엇이다. 즐거워하는 그 무엇인 것이 칭찬받을 만하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통감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즉 정직하고 아름다운 행동만이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그 다음에 구성된 추론을 완성하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칭찬받을 만한 일은 정직하다(καλόν, honestum). 따라서 정직함만이 선이다.” 매우 건조한 변증법 아래서 사람들은 도덕론의 이 깊은 변형을 느낀다. 그 도덕론은, 성향들의 대상을 이루고 있는 것들 무차별적인 것으로써 포기하면서, 우리 자신의 의지에 의해 실현할 수 있는 것만이 선으로써 인정하는 데 있다. (285)
따라서 덕목과 선은 동일시되었다. 이 둘은 서로서로 값지고, 칭찬할 만하고, 유용하며, 심지어는 필수불가결하다. 그 선 또는 그 행복은 덕목(탁월함)에 보태진 신적 선물과 같은 것이 더 이상 아니다. 따라서 덕목은 목표를 향하여 펼쳐지는 어떠한 외적 대상도 아니다. 덕목은 그 자체에 머문다. 덕목은 그 자체를 위하여 욕망할 수 있는 것이다. 덕목은 그것의 가치를, 그것이 도달할 목적으로부터 끌어내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덕목은 그자체로 목적이기 때문이다. 덕목은 다른 기예들처럼 낯선 목적을 향하여 방향을 돌리지 않고, 전적으로 그 자체로서 방향을 잡는다(in se tota conversa). 반대로 덕목은 다른 모든 기예들처럼 진행방식을 허용할 수 없다. 덕목은 단번에 완전하며, 모든 부분들에서 완성된다. (286)
이 때문에, 전체 내부에서 덕목은 안정된 자질(une disposition)이며 자기와 일치의 자질이다. 무엇보다도 자기와 일치한다는 것은, 이법과 동일한 확고함과 끈질김에서 이며, 제논은 이법에게 신중(prudence, φρόνησις)이란 이름을 부여했다. 만일 다른 덕목들이 있다면, 이 덕목들은 그에게 있어서 근본적 덕목의 여러 측면일 뿐이다. 용기란 지탱해야할 것으로써 신중함이고, 절제란 사물들의 선택에서 신중함이며, 정의란 몫들의 분배에서 신중함이다. 사람들은, 마치 남자의 덕목과 여자의 덕목뿐만 아니라 부자의 덕목과 가난한 자의 덕목을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하듯이, 덕목들을 따로 떼어 놓고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제논이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안다. 사람들이 덕목들 속에서 보편적 이법만을 보게 되자마자, 이러한 종류의 어떠한 구별도 없다는 것을 안다. 신 자신도 인간과 다른 덕목을 갖지 않는다. 클레안테스는 아마도 자기의 스승보다 이 이법의 능동적 측면을 더 많이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긴장(une tension, τόνος)을 중요 덕목으로 정의했는데, 그 긴장은 지탱하는 것이 중요할 경우에 용기이며, 분배하는 것이 중요할 경우에는 정의이다. 크뤼시포스는 제논의 주지주의로 귀착하여, 긴장 속에서 덕목들의 동반이외 다른 것을 보는 것을 거부했다. 즉 덕목들 그 자체로서는 학문들(과학들)이며, 신중함이라는 행해야할 것들 또는 행하지 않아야 할 것들의 학문이고, 용기란 지탱해야할 또는 지탱하지 않아야 할 것의 학문이며, 등등으로 이처럼 죽 이어진다.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목과는 다른 의미에서 덕목들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덕목들이란 해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덕목을 지닌 자는 모든 덕목들을 지닌다. 그래도 각 덕목은 구별된 행위 영역에서 실행되고, 따로 분리되어 배워야 한다. (286)
모든 성향들이 순진무구한 올바른 원초적 상태로부터, 이 성향들이 반성적 의식과 덕목에 의해 대체되는 상태로 이행이 있다. 이 이행은 우리들의 진술이 그것을 믿게 내버려두는 만큼이나 편안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덕 있는 삶을 열망하는 하는 자들은 순진무구한자들이 아니라 타락자들이다. 원초적 성향들은, 특히 어린이를 타락시키는 사회적 환경의 영향 아래에서, 왜곡되고 과장되면서 오래 끌고나가지 못한다. 이 성향들은 정념들, 비탄, 두려움, 욕망 또는 쾌락이 된다. 이것들은 영혼을 뒤흔들어 놓고 덕목과 행복에 장애물을 설치한다. 정념의 현존은 스토아학파의 심리학에서 해결해야할 많은 난제들 중의 한 문제를 제공한다. 만일 영혼의 실체 전체가 이법이라면, 어떻게 그 속에서 비이법적인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왜냐하면 정념은 실재적으로 지성에 반대로 나가기 때문이고, 또한 정념은, 반성적 인간에게는 실재로 선도 잘못도 아닌 것을, 선행들인 것처럼 욕망하게 또는 잘못인 것들처럼 달아나게 하는 데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 속에서 비합리적인 한 부분 또는 여러 부분들을 인정함으로써만이 난점을 회피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스토아학자들의 총체적 합리주의에 충격을 주는 것이 이외에도, 정념의 몇몇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게 한다. 이런 이유로 인간과 같은 합리적 존재에게서, 만일 인간이 성향에게 그의 동의 또는 찬동을 부여하지 못한다면, 그 성향이 가능하지 않다고 떠올려야만 한다. 성향 일반이 진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정념이라는 것이 과장되고 과도한 성향이라는 것도 진실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혼이 우리에게 현재로 잘못이 있다고 판단(심판)에 찬동할 경우에만 비탄이 있다. 그런데 모든 정념은 이처럼, 쾌락 속에서 현재적이고 욕망 속에서 미래적인, 선에 관해 하나의 판단을 포함하듯이, 또는 고통 속에서 현재적이고 걱정 속에서 미래적인, 잘못에 관해 하나의 판단을 포함하고 있다. 정념의 생성은 동의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발전도 또한 동의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왜냐하면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은 상례의 비탄에 조문하기에 알맞다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의는 합리적 존재의 사실이며, 그에게 만에서 사실이다. 신체적 고통(la douleur physique, ἄλγος)을 느끼는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에 의존하는 고뇌(la peine, λύπη)를 체험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이법이 박탈된 역량에게 정념을 부여하는 것으로는 정념을 설명하지 못한다. (287)
따라서 정념은 크뤼시포스가 말한 것처럼 이법이며, 판단이다. 그러나 “비합리적 이법”이며 이법에게 불복종이다. 정념은 말하자면 이법으로 환원할 수 없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크뤼시포스는 이 요소에게 외적인 기원을 부여했다. 이것은 추위, 굶주림을 회피하기 위해 어린이들에게 주어진 습관들이며, 즉 모든 고통은 잘못이라고 꼬마들에게 설교한 한 습관들이다. 이것은 꼬마들이 교육을 받는 동안에 그들 주위에서 설명하는 것을 들었던 견해들이다. 유모들에게로부터 시인들과 화가들에까지 꼬마들은 쾌락과 부유함의 찬사만을 들었다. (288)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판단들이 영혼 속에 접근하고 있다고 해야만 한다. 그런데 크뤼시포스가 멈출 수 없는 달리기 선수의 도약(l'élan)에 유사한 현상에 의해서 경향의 과장을 설명한다. 그러고 나서 크뤼시포스는 비탄과 같은 정념의 증가 또는 축소가 어떤 점에까지는 사람들이 그 대상에 근거하는 판단과는 독립적이라 한다. 왜냐하면 판단이 최근 일수록 비탄은 매우 강하기 때문이고, 거기에는 전적으로 영혼의 내부에 있는 비합리적 요소들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와 또 다른 것이 있다. 정념의 초기 원인은 “영혼의 연약함”이며, 정념은 “연약한 믿음”이다. 더하여 정념은 판단들과 동화하기에는 아주 불가능한 사실들에서 태어난다. 즉 여기서 판단들이란 고뇌 속에서 영혼의 쥐어짬과 환희에서 영혼의 활짝핌과 같은 것이다. 결국, 본성상 덧없고 불안정한 정념들은 영혼의 질병으로 변형된다. 야망, 인간혐오 등과 같은 것은 고착되어 뿌리 뽑히지 않게 된다. (288)
망상의 현존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아학자들은 얼마나 정념이 우리에게 의존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판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크뤼시포스는 부모의 죽음에 비탄에 빠지는 것이 착하고 정당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믿게 하는 선판단과 같은 적합한 판단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연결고리가 끊긴 정념에 대치하는 저항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판단들에 관해 예방적인 성찰에 의해, 그리고 추론된 격률들에 의해, 스토아학자들은 정념들을 우리가 추출해 내기를 바랐다. (288)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적 이법이 선과 덕을 자발적 성향들로부터 분간해 내는지를 보았다. 그 동일한 합리적 정교화작업에 의해 인간은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자신이 행하기에 맞는 모든 행동들이 이룬다. 도덕적 삶의 토대는 일종의 자발적 선택이며, 우리의 성향들이 우리 보존에 유용한 것들과 더불어, 이 선택을 우리에게 행하게 한다. 목적, 그것은 반성적이고 의지적 선택으로 우주적 자연에 부합하는 사물들을 선택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제논이 목적을 정의하면서 말하고자 원했던 것, 즉 합의로 사는 것 또는 만장일치로(ὁμολογουμένως)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산다는 것, 그것은 이법에 따라 산다는 것이며, 이법 앞에 어떠한 대립상황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그것은 클레안테스와 크뤼시포스가 말하고자 원했던 것인데, 목적으로써 자연에 부합하여 사는 것(ὁμολογουμένως τή φύσει)을 제안하였다. 다시 말하면 크뤼시포스는 자연에 의해 일어나는 사물들에 대해 학문적 인식을 사용하면서 주석을 달았다. 이 학문적 인식이란, 자연학이 우리에게 주는 인식이다. 모든 것은 보편적 이법, 즉 신의 의지 또는 운명에 의해 일어난다. 이 때 부터 목적이 오직 의지의 내부적인 태도를 구성할 것이다.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운명에 복종한다. 그러나 길 잃은 이법은 거기에 저항하고자 시도하고, 보편적 선에 대해 건강, 부, 명예와 같은 고유한 선의 유령을 대립시키고자 할 것이다. 반대로 현자는 반성과 더불어 운명으로부터 결과로 되는 사건들을 수용한다. 그런데 나쁜 이가 강압적으로 부추겼던 거기에서, 그는 의지적으로 이끌려지게 된다. 만일 그가, 운명이 그의 신체를 손상하게 하거나 빈약하게 하고자 원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이 손상과 빈약함을 받아들인다. 세네카가 말하기를(편지, 97), “Non pareo Deo sed assentior”, 즉 “나는 신에 복종하지 않지만, 나는 신이 결정했던 것에 동의한다.”고 한다. 스토아의 체념은 부득이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있는 그대로 그 세계에서 긍정적이고 즐거운 자기만족(une complaisance, 배려)이다.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우리의 성향에 속하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자기의 의지를 사건들과 일치하는 것으로 놓아야 했다.” 자연을 따르는 것, 이법을 따르는 것, 신을 따르는 것, 이것들은 삼원적 이상이다. 스토아학자들에게서 하나일 뿐인데, 우리는 삼원적 이상이 나중에 해체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289)
이런 배치가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떻게 이 배치가 행동을 초대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에는 가장 중요 점들 중의 하나가 있는데, 우리는 스토아주의의 본질 자체에 도달한다. 스토아의 도덕론은 행동으로 초대한다. 스토아학파의 창설자들은 그들의 제자들 그 넘어서까지도 시민의 기능들을 완수하는데 참여했다. 훨씬 더 나중에, 에픽테투스는 그의 교육을 공공적인 직업들에 맞는 진실한 준비로서 고려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너무 오랫동안 학파의 그늘에 머물고자 원하는 젊은이들을 비난했다. 인간의 정상적 삶은 부부의 삶, 시민의 삶, 행정직의 삶이다. 그들에게는 사변적 삶과 실천적 삶 사이에서 구별이 전혀 없으며, 마치 확립된다고 위협하는 자, 그리고 효과적으로 확립되었던 자처럼, 사람들이 곧 보게 될 것이지만,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학설들의 귀결처럼 이런 구별이 있다고 믿는 자 가가 있다. 자연의 인식은 행동의 준비에 있다. (290) .
몇몇 의미에서 잘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스토아학파의 도덕론 속에는 넘을 수 없는 난점이 있는 것 같다. 그 난점은 도덕론을 완전한 인간의 정적주의에 이르도록 강요한다. 그 완전한 인간은 좋거나 말거나 간에 모든 사건들에 무감동하게 참여하는데 말이다. 모든 스토아학자들은, 지혜라는 내적 배치의 바깥에서, 모든 것이 무차별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에서 우리에게는 착함도 잘못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동의한다. 어느 하나라기보다 반대되는 다른 하나를, 즉 가난이라기보다 부를, 건강이라기보다 질병을 원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러나 분석을 좀 더 멀리 밀고 나가보자. 만일 우리가 불완전한 상태를 고려한다면, 건강과 부는 그 인간에게 질병과 가난보다 더 값지고 가치 있다. 왜냐하면 건강과 부라는 것은 자연에 더 잘 부합하고 성향들을 더 잘 만족하게 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인간에게서 건강과 질병은 그가 탐구하는 것과 동일한 질서로 되어 있지 않다. 즉 자연에 부합하는 올바른 의지에 동일한 질서로 되어 있지 않다. 올바른 의지는 이 양자[건강과 질병]에게 완전히 독립적이며, 그리고 그 의지는 이 둘 속에서도 영속한다. 따라서 의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이다. 그렇다고 다음과 같은 결과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즉 완전한 인간에서라 하더라도, 만일 함께 비교해본다면,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완전한 인간을 구별하는 것, 그것은 그가 이 하나보다 다른 하나를 더 많이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특히 그가 무조건적인 집착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예를 들어, 만일 질병이 운명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가 안다면, 질병을 선택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게다가 모든 사정들이 동일하다면, 그는 오히려 건강을 선택할 것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가 선을 원하듯이 이것들[사정들]을 전적으로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건강과 부와 같은 선호할 수 있는 것(préférables, προηγμένα)으로써 자연에 부합하는 대상들을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 반대되는 것들을 선호하지 않는 것(non préférables, ἀποπροηγμένα)으로써 고려할 것이다. (290)
따라서 스토아학자들은 이 처럼 알맞은 행위들(les actions convenables, καθήκοντα, officia)의 목록을 세울 수 있다. 이 행위들은 합리적 존재의 기능들과 의무들과 같아서 자기 자신의 삶과 자기와 닮은 자들의 삶을 간직할수 있다. 즉 신체의 배려들, 우정과 관대의 기능들, 가족의 의무들, 정치적 기능들이다. 이 기능들의 완성은 선도 악도 아니며, 모든 인간들에게 있을 수 있으며, 그리고 이처럼 2차적 도덕을, 즉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불완전한 자들의 도덕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이 실천적 도덕은 - 충고(conseil)의 도덕, 즉 권고(parénétique) - 훨씬 나중에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고, 그리고 그 도덕에 의해 스토아주의는 공통의 삶에 스며들었다. 현자와 불완전한자는 정확히 동일한 의무들을 지닌다. 현자가 매우 완전하고 행복하다고 할지라도 이런 점에서 현자는, 만일 그가 자신의 자연에 반대되는 사정들을 과도하게 감당하게 된다면, 자살을 통해 삶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들의 품성은 현상에서 그리고 외적으로만 동일한 품성일 뿐이다. 불완전한 자가 단순한 의무(le devoir, καθῆκον)를 완수하는 거기에서, 현자는 보편적 자연과 더불어 의식적 일치 덕분에 완전한 의무(un devoir parfait, καθῆκον τέλειον) 또는 올바른 행위(une action droite, κατόρθωμα)를 완수 한다. 더하여, 그는 이 의무가 그럴듯한 가치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자신에 속하는 가족과 행정의 의무들을 더 잘 거부하고자 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291)
따라서 의무 또는 기능은 범주의 형식이 결코 아니다. 이것으로부터 모든 권고 문학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이 권고 문학은 추상적 원리들을 한 곁으로 젖혀두고서 개별적인 경우들을 검토하고 무게를 달며, 가끔은 의도적 진리를 제공한다. 사회적 의무들을 고려해서 초기 스토아학자들의 정신의 자유는 사실상 충분히 중대하였기에, 사람들은 스토아학자들에게서 매우 급진적인 퀴니코스주의를 상기하게 하는 특징들을, 예를 들어 여성들의 공동체에 게 설교하는 특징들을 찾을 수 있었다. (291)
그러한 것이, 현상에서 매우 모순되는 행위에 대한 스토아의 이론이다. 그런데 사물들의 고려에서 차이는 연약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강건함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보아야만 한다. 그 의지는 행위의 선택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지, 그것을 제한하고자 원하는 것도 그것을 고정시키려 원하는 것도 아니다. (291)
스토아의 도덕은 자기의 원리로부터 행위하는 인간에 대한 서술을 결코 떠난 적이 없다. 그 도덕은 의지적 기질의 바깥에서 선을 전혀 찾지 않는다. 이어서 그 도덕은 덕목을 소유하는 존재의 서술에 의해서만, 즉 현자의 서술에 의해서만, 전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뿐이다. 현자는 자기 영혼 안에서, 전적으로 이법적인 것 이외에 더 이상 어떠한 것도 간직하지 않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는 어떠한 오류도 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미래에 행할 것 모든 것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의 최소한의 작동들이, 그의 품행 전체만큼이나 지혜를 포함할 것이다. 그는 후회도, 슬픔도 걱정도, 어떠한 종류의 혼란도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완전한 행복을 얻을 것이다. 현자만이 자유를, 진정한 부를, 진솔한 왕권을 소유할 것이다. 현자만이 신들을 인식할 것이고, 진실한 성직자가 될 것이다. 그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현자만이 가정을 또는 도시를 다스리게 될 것이고, 친구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목록을, 즉 현자의 인격 위에 모든 완전함을 차곡차곡 채운 목록을 줄줄이 나열할 수 있을 모든 역설들을 안다. 이것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현자가 아닌 자는 불완전한 자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혜의 관점에서 이 모든 불완전한 행위들은 동등하다는 것을 덧붙여야만 한다. 모든 현자가 아닌 자는 바보들과, 가득한 불행 속에 빠져있는 정신 나간 자들과, 가정 없이도 도시도 없이 진실로 추방된 자들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현자의 올바름은 뉘앙스들도, 정도의 차이들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거기에 빠진 자는, 그것이 깊은 물에 빠졌건 거의 표면이 얕은 물에 빠졌건 간에, 거의 질식되어 있는데, 마치 활쏘는 자가 화살이 과녁에서 가까이 또는 멀리 이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살이 그 과녁에 여전히 미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292)
지혜가 덩어리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자연스럽고, 또한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는 스토아주의를 배웠다는 점에서 부합하는 것이다. 지혜는, 철학 전체가 그러하지 않듯이, 진보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옛 스토아 학자들이 원했던 것, 그것은 정확히 도덕적 진보가 아니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경–220경)가 말하듯이, 그것은 인간을 전적으로 순수 이법[섭리]으로 변화시키는 일종의 변환이다. 이것은 또한 도시의 시민을 세계의 시민으로,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민들에게 감당하게 했던 정치적 변형에로 정신의 질서를 향하는 것과 유사한 변환이다. (293)
플루타르코스(46-125)가 말하듯이, “제논은 매우 찬양받을 만한 공화국을 썼는데, 그 책의 원리는 인간들이 도시국가와 분리되지 않아야 하며 또한 각각이 자신들의 특별한 법률들 가지고 있는 인민들과도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동향인들[코스모폴리탄]이기 때문이며, 그들에게는 유일한 삶과 사물들의 유일한 질서, 즉 코스모스(cosmos)가 있기 때문인데, 마치 공통법칙의 규칙아래 통일된 무리와 같기 때문이다. 제논이 꿈에서처럼 썼던 것, 그것을 알렉산더가 현실화 했다.… 그는 전 세계의 모든 인민들을 하나의 분화구 속에서처럼 통합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지구를 그들의 조국인 것처럼, 그의 군대를 그들의 아크로폴리스인 것처럼, 선한 시민들을 부모처럼, 나쁜 녀석들을 이방인들처럼 생각하게 포고했다.” 사람들은 스토아의 도덕론이 새로운 시대의 도덕론이라고 더 좋게 말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빗장이 풀리고, 또한 이때부터 도덕적 삶의 근원과 지지점이 될 수 없는 도시들에서 새로운 도덕론으로 인류를 지배하고자 열망하는 거대한 군주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법은, 즉 보편적 법칙 또는 자연은, 어떤 점에서는 군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법은, 정념들, 관습, 법률들과 같은 사실(fait)이라는 심리학적 또는 사회적 실재성들에서 출발했다. 이법은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이러한 것들을 완화시키고 조직화하기를 시도했다. 여기서 이법은 전체로서 지위를 차지하고, 그리고 이법은 그 자체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추방한다. “덕목은 유일한 이법 속에서 자리 잡는다.” (33:25 48WKH) (31:01, 57W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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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Ravaisson(1813-1900), La métaphysique d'Aristote, tome II, Paris, 2 éd., 1920.
G. Rodier(1864–1913), Histoire extérieure et intérieure du stoïcisme (Etudes de philosophie grecque, 1926, p. 219-269.
Barth(1858-1922), Die Stoa, Leibzig, 1908; 2e éd., 1924; 2e éd., 1941.
M. Pohlenz(1872-1962), Die Stoa, Goettingen, 1948-1955.
C. J de Vogel(1905–1986), Greek philosophy, III, Leyden, 1959, p. 44-183.
E. Bréhier(1876—1952), Chrysippe, 1910; 2e éd. 1951 (Chrysippe et l'ancien stoïcisme).
____, Études de philosophie antique, Paris, 1955, section C.
E. Bréhier(1876—1952) et P.-M. Schuhl(1902-1984), Les stoïciens, Paris, 1962.
G. Verbeke(1910-2001), Kleanthes van Assos. Bruxelles, 1949.
R. Hirzel(1846-1917), Untersuchungen zu Cicero's philosophischen Schriften, 1883, 2e partie, 1re division: Le développement de la philosophie stoïcienne.
R. Bevan(1870–1943), Stoïcien et Sceptiques, tr. fr. Paris, 1927.
Actes du VIIe Congrès Budé d'Aix-en-Provence, 1963
A. Bridoux(1893–1982), Le stoïcisme et son influence, Paris, 1966.
V.
V. Brochard(1848-1907), De assensione Stoici quid senserint, Parisiis, Berger-Levrault, 1879, [박사학위 부논문].
*
281 크뤼시포스(Chrysippe de Soles, Χρύσιππος, 전281-205), 스토아 철학자. Fragments de so traité sur l'âme, traduits par G. Blin et M. Keim dans Mesures[잡지명], 15 avril, 1939.
- 블랑(Georges Blin, 1917-2015, à 97 ans) 프랑스 문학비평가, 꼴레쥬드프랑스 교수, 젊은 시절 두 작품 번역 Traité de la monarchie divine de Philon le Juif, 1939 De la partie hégémonique de l'âme de Chrysippe, 1939 / 깽(M. Keim, s.d.)
106 키케로(Cicéron, Marcus Tullius Cicero, 전106-전43), 로마 철학자. Des fins[De finibus bonorum et malorum (Sur la fin des bonnes et mauvaises choses) 45], III, IV권
O
1813 라베송(Félix Ravaisson-Mollien, 1813-1900), 프랑스 철학자. La métaphysique d'Aristote, tome II, Paris, 1920(초판 2 vol., 1837-1846) [Essai sur le stoïcisme, 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 Paris, 1857]
1821 드니(Jacques-François Denis, 1821-1897) 철학으로 교수자격, 문학박사, 캉 대학 그리스 문학교수 .
1835 막스 하인쩨(Franz Friedrich Maximilian Heinze, 1835-1909), Zur Erkenntnislehre der Stoiker. 1879(1886) 독일 철학자. 고전에는 스토아철학과 아낙사고라스, 근세에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 연구.
1846 히르젤(Rudolf Hirzel, 1846-1917), 독일 고전 문헌학자. Untersuchungen zu Cicero's philosophischen Schriften(3 Bde. Hirzel, Leipzig 1877–1883) 1883, 제2부, 제1단원 “Le développement de la philosophie stoïcienne.
1848 오즈로(François Ogereau, 1848-19..), 프랑스 철학자(?) Essai sur le système des Stoïciens, 1885.
1848 빌라모비치-묄렌도르프(Ulrich von Wilamowitz-Moellendorff, 1848-1931), 독일고전 문헌학자. Hellenistische Dichtung in der Zeit des Kallimachos, 1924(2권), 제1권 1장 참조.
1848 브로샤르(Victor Brochard, 1848-1907), 프랑스 철학자. De assensione Stoici quid senserint, Parisiis, Berger-Levrault, 1879, (박사학위 부논문).
1856 아믈랑(Octave Hamelin, 1856-1907), 프랑스 철학자. Sur la logique des Stoïciens, (Année philosophique, 1902, p. 23.)
1857 캐르스트(Julius Kaerst, 1857-1930), 독일 역사가, 헬레니즘 전공, Geschichte des hellenistischen Zeitalters, 1901
1858 바르트(Paul Ernst Emil Barth, 1858-1922), 독일 철학자, 교육자. 스토아학파(Die Stoa 1922)(1908년 초판)
1859 아르님(Hans von Arnim, 1859-1931), 독일 문헌학자. (Stoicorum Veterum Fragmenta, 1903–1905)(4권, 4권은 인덱스이며, 1914년 출간)
1859 본회퍼(Adolf Friedrich Bonhöffer, 1859-1919), 독일 신학자, 고전문헌학자, 철학사가. Zur stoischen Psychologie, Philologus, vol. LIV, 1895.
1859 슈타인(Ludwig Stein, 1859–1930), 헝거리-스위스 철학자. Psychologie der Stos, Berlin, 1886.
1863 벨만(Max Wellmann, 1863-1933), 독일고전 문헌학자, 의학사가. Die Fragmente der sikelischen Ärzte Akron, Philistion und des Diokles von Karystos (Berlin 1901) [아크론(Acron): 케니니엔 왕(roi des Céniniens) 로마에 전쟁을 걸었고(전748경), 로물루스가 그와 싸워 이겼다. 필리스티온(Philistion von Lokroi, 전427경-전347경) 그리스 의사. 디오클레스(Diokles (∆ιοκλῆς) von Karystos (Κάρυστος) auf Euboia 전4세기경) 그리스 의사, 제2히포크라테스("zweite Hippokrates" ὁ δεύτερος Ἱπποκράτης)라는 별명.]
1864 모어(Paul Elmer More, 1864–1937), 미국 기자. 비평가, 크리스트교 호교론자. Platonism (1917), The Religion of Plato (1921), Hellenistic Philosophies (1923)
1864 호디에(Georges Rodier, 1864-1913), 프랑스 철학자, 그리스철학 전문가. Histoire extérieure et intérieure du stoïcisme, (Etudes de philosophie grecque, 1926, p. 219-269).
1866 디로프(Adolf Dyroff, 1866–1943), 독일 문헌학자. 옛 스토아학파의 윤리학(Die Ethik der alten Stoa, 1897), L'origine de la morale stoïcienne(Archive fu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tome XII, [s.d.])
1870 비반(Edwyn Robert Bevan, 1870–1943) 영국 철학자, 철학사가. Stoïcien et Sceptiques, tr. fr. Paris, 1927.
1871 카펠레(Wilhelm August Cornelius Friedrich Capelle, 1871-1961), 독일 고전 문헌학자. Zur antiken Theodicee, Archiv fü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1903.
1872 폴렌쯔(Max(imilian) Hugo Pohlenz, 1872-1962), 독일 고전문헌학자. 스토아학파(Die Stoa, 1959)(Göttingen, 1959, t. I.)
1875 프르지뤼스키(Jean Przyluski, 1875-1944), 폴란드 오리엔트 연구자(orientalista), Les Mages et les Mèdes, Revue d'Histoire des Religions, sept-oct, 1940, p. 94.
1876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크뤼시포스(Chrysippe, 1910)(2판 크뤼시포스와 옛스토아주의(Chrysippe et l'ancien stoïcisme, 1951))
1878 레비(Adolfo Levi, 1878–1948), 이탈리아 철학자. Sulla psicologia gnoseologica degli Stoici, (Athenaeum, juillet et octobre 1925)
1888 예거(Werner Jaeger, 1888-1961), 독일 고전 문헌학자, 디오클레스: 그리스 의학과 아리스토텔레스 학파(Diokles von Karystos. Die griechische Medizin und die Schule des Aristoteles, 1938, Berlin
1893 브리두(André Bridoux, 1893–1982), 프랑스 철학자. Le stoïcisme et son influence(스토아주의와 그 영향), Paris, 1966
1898 페스튀지에르(André-Jean Festugière, Jean Paul Philippe Festugière, 1898-1982), 프랑스 철학자, 도미니크 수도사, 문헌학자, 네오플라토니즘 특히 프로클루스(Proclus) 전문가. Les mémoires pythagoriques cités par Alexandre Polyhistor, Revue des Etudes grecques, 1945, pp, 1-65, [알렉산드로스(Alexandre Polyhistor, Ἀλέξανδρος ὁ Πολυΐστωρ, Lucius Cornelius Alexander Polyhistor) 기원전 1세기경 로마 역사가. 폴리히스토르는 별칭이다.]
1900 모로(Joseph Moreau 1900-1988), 프랑스 철학자. 플라톤 전문가. 플라톤에서 스토아학자들에 이르는 세계의 영혼(L'Âme du monde de Platon aux Stoïciens, 1939)
1900 삼부르스키(Shmuel Sambursky, 1900-1990) 이스라엘-프러시아 역사가, 과학사가. 예루살렘대학 교수, The Physics of the Stoics, Londres, 1959, 소크라테스 이전과학자에서 양자역학자에까지 물리학적 사상(Physical thought from the Presocratics to the Quantum Physicists, 1974)
1902 그뤼마흐(Ernst Grumach, 1902–1967), 독일고전 문헌학자. 언어학자. 옛스토아에서 자연과 훌륭함(Physis und Agathon in der Alten Stoa. 1932)
1902 디아노(Carlo Alberto Diano, 1902–1974), 이탈리아 철학자, 그리스 고전 문헌학자. Forma ed Evento, Venise, 1952.
1902 쟈그(Amand Jagu, 1908–1999), 프랑스 고전 문헌학자, 철학자. 키티움의 제논, 스토아 도덕의 확립에서 그의 역할(Zénon de Cittium, son rôle dans l'établissement de la morale stoïcienne, 1946)(Paris, 1946).
1902 쉴(Pierre-Maxime Schuhl, 1902-1984), 프랑스 철학자. Le dominateur et les possibles, 1960).
1905 포겔(Cornelia J. de Vogel, 1905–1986) 「후기 플라톤주의에 관한 문제들(Problemes concerning later platonism」 in Mnemoyne, 1949. ,
1908 모미글리아노(Arnaldo Momigliano, 1908–1987) 이탈리아 고대 역사가. Atene nel III Secolo A.C. etc. Rivista storia italiano, LXXI, 4, Naples, 1959, p, 529 sq. 마케도니아의 필립(Philippe de Macédoine. Essai sur l'histoire grecque du IVe siècle av. J.-C., 1934)(Combas, 1992, prima edizione Firenze, 1934)
1910 비리외-헤몽(Antoinette Virieux-Reymond, 1910–1992) 스위스 여성 철학자. 스토아학자들의 논리학과 인식론(La logique et l'épistémologie des stoïciens, 1949).
1910 베르베케(Gerard Verbeke, fr. Gérard Verbeke, 1910-2001) 벨기에 철학사가. 아소스의 클레안테스(Kleanthes van Assos. 1949), Augustin et le stoicisme, in: RA 1 (1958) S. 67-89.
1912 밀톤 발랑뜨(Padre Milton Valente, 1912–1989), 프랑스 철학자. Les sources de l'éthique stoïcienne chez Cicéron, Paris 1956. - L'éthique stoïcienne chez Cicéron (1958 Prix Broquette-Gonin (philosophie)상 수상),
1914 골드슈미트(Victor Goldschmidt, 1914-1981), 프랑스 철학자. 브레이어 제자 스토아의 체계와 시대관념들(Le système stoïcien et l'idées de temps, 1953)(Vrin, 1953, éd. augm. 1979).
1919 기유에르미(Louis Guillermit, 1919-1982), 프랑스 철학사가. 플라톤과 칸트 전공. Le sens du destin, 1948(avec Jules Vuillemin), - 비이유망(Jules Vuillemin, 1920-2001) 프랑스 인식론자.
1922 마리 시몬(Marie Simon, Marie Jalowicz, 1922-1998)과 하인리히 시몬(Heinrich Simon 1921-2010), 마리는 고대 문헌학자. 하인리히는 유대계 독일인, 오리엔탈리스트. Die alte Stoa und ihr Naturbegriff. Ein Beitrag zur Philosophiegeschichte des Hellenismus, 1956), 둘은 1948년 마리와 결혼했다.
?-? 간터(F. L. Ganter, s.d.), 독일 문헌학자(?) Das stoische System der αἴσθησις, Philologus, vol. LIII. Zur Psychologie der Stoa, Philologus, vol. LIV. 1895. (57VMB)
(35:03, 57WK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