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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9월 4일 수요일. 덥다, 35℃, 밤에 소낙비.
아침은 케로우안 호텔에서 맞는다. 고요한 새벽,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긴 야자수가 정원과 하늘을 지키고 있다. 소철 같이 생긴 작은 야자수와 함께 가족 같다. 초록색이 정겹다. 갑자기 새들이 공중에 날아오른다.
아마도 까마귀들 같다.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전 6시 30분이다. 은은한 조명에 고급스럽게 준비된 분위기다. 다양한 음식들과 예쁜 차림이 보기만 해도 좋다. 흡족하게 잘 먹었다.
호텔 수준에 맞는 아름다운 식사인데, 손님이 적은 것이 아쉽다. 체크아웃을 하고 이제는 루아지 터미널로 걸어간다.
아랍풍의 예쁜 집이 빛난다. 루아지 터미널은 어제 방문했던 이발사 모스크 뒤에 있다. 튀니스 행 루아지 표를 샀다.
금방 8명이 모여 차는 출발했다. 이제는 처음 출발지였던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로 가는 것이다. 아침 8시 30분이다.
시골이 느껴지는 국도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차를 올린다. 고속도로에서 약 140km를 달린다고 표시되어있다. 벌판에는 황무지에 올리브 나무가 보인다.
주변 환경이 30km를 남겨 놓고 초록색으로 바뀐다. 산에도 나무가 자라고 있고 들판에도 초록색 채소와 올리브 나무들이 보인다.
커다란 바위산도 하나 지나간다. 튀니스에 오전 10시 30분에 도착했다. Moncef Bay 루아지 터미널이다. 동쪽 해안 가까이에 있고 시내 중심가 바로 남쪽이다.
엄청 넓고 규모도 크다. 주변이 온통 상가로 사람들과 차량도 많다. 걸어서 숙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등에 짊어진 배낭이 조금 무거워 보인다.
지도를 보며 걷는다. 직선 길로 바로 올라간다. 작고 가난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전절역도 있다. 선인장 열매를 하나 사서 먹어본다.
달콤한 과육에 씨만 잔뜩 있어 먹을 것이 별로 없다. 얼음에 재워 깎아서 팔고 있다. 처음 먹어보는 것이다. 시내 중심가 시계탑과 분수대가 있는 커다란 로터리가 나온다.
기마상도 하나 있다. 부르기바의 동상이다. 수스에서 처음 만난 기마상과 같다. 튀니지의 아버지, 튀니지 국민들에게 '최고의 전사'로 알려진 하비브 부르기바라는 인물이다.
식민지 지배자인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위한 튀니지의 투쟁을 이끌었던 대통령이다. 우리나라 이승만 대통령 겪이다.
높은 시계탑과 둥근 분수대, 붉은 깃발과 기마상에 넓고 길게 이어지는 보행자 도로, 여기가 튀니지의 중심이다. 근처에 우리 숙소가 있다.
우리 숙소는 건물 속에 있는 아파트 형태다. 숙소 주인 만남이 어려워 고생스럽다. 언어도 안 되고 상주하는 곳도 이곳이 아니다.
주소를 보고 숙소를 찾아갔으나 역시 주인이 없다. 같은 건물에 있는 1층 카페 First Cup에 가서 도움을 청했다. 카페 사장이 연락을 해서 주인과 통화가 되었다.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했다. 시간이 남아 시내 구경을 한다. 배낭을 카페에 맡겨두고 나왔다. 카르타고(Carthage) 유적지를 찾아가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가려고 Marine역을 찾아간다. 전철 매표소에서 표를 두 장 샀다. 그런데 기차는 다리가 수리중이라 운행을 안 한다고 버스를 타란다.
바로 옆 큰 길 가에 버스가 대기해 있고 사람들이 서둘러 타고 있다. 우리도 얼른 올라탔다. Salammbo에서 내릴 것이라고 맘속에 정류장 이름을 외워두고 주변 사람에게 말해두었다.
버스는 튀니스 호수를 가로질러 신나게 달려간다. 엄청 큰 호수다. 카르타고 마을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친절하게 내릴 곳을 알려준다. 아내와 둘이만 내렸다.
버스가 떠나고 나니 좀 조용하다. 코린트식 대리석 기둥이 하나가 도로 가운데 세워져 있다. 돌아볼 유적들이 생각보다 넓게 펼쳐져 있다.
주로 자전거나 차로 돌아보는데, 우리는 걸어서 찾아보기로 했다. 길에서 셀렘(Selim)이라고 자기 이름을 써 주는 젊은이를 만났다. 한국어를 제법 잘 한다.
한국에 취직하려고 부지런히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단다. 튀니스에 있는 한국 식당도 알고 김밥도 잘 먹는다고 한다. 함께 마을을 걷다가 약속이 있다고 가버렸다.
카르타고(Carthago)는 현재 튀니지 일대에 위치해 있던 페니키아인 계열의 고대 도시다. 이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으로서 페니키아어(語)로는 콰르트하다쉬트(새로운 도시)이며,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814년경 현재의 튀니지 영토에 세워진 도시국가이다. 처음에는 페니키아 도시 국가 티레의 종속 도시였다. 카르타고는 디도(Dido)라는 여왕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한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로마와 패권 다툼을 벌였으며,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에 패배하여 로마 공화정의 아프리카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으로도 불린다. 유명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 3차 포에니 전쟁에 돌입했다.
카르타고 시민들도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활시위로 쓰도록 할 정도로 로마에 거세게 저항했다. 이후 완전히 파괴된 도시를 기원전 46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건하여 북아프리카 일대 상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르타고는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기독교의 3대 본부 중 하나였고, 로마 제국 초기에 숱한 순교자를 낳았다.
258년 카르타고의 저명한 주교이며 뛰어난 학자인 키프리아누스가 처형당했고, 기독교인들은 검거되어 족쇄를 찬 채 끌려갔고, 그들 중 상당수가 처형됐다.
5세기경에는 반달족의 침입을 받았다가 698년 다시 아랍인들에게 파괴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현재는 고대 카르타고인의 묘지와 카르타고 항구의 유적 및 원형극장과 공중욕탕 등 로마 식민지 시대의 유적과 기독교 유적이 있을 뿐이다.
카르타고의 폐허는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중 하나이다. 토펫(Topheth)은 카르타고에서 발견된 종교적 장소로, 여기에는 어린아이의 유골과 함께 신에게 바치는 제사 의식을 치른 흔적이 남아 있다.
바실리카는 로마가 카르타고를 재건한 이후 지어진 로마식 공공 건물로,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다. 바실리카는 당시 카르타고가 로마 제국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카르타고 항구(Port punique de Carthage)라는 이름이 붙여진 호수를 바라본다. 이곳이 페니키아 전함들 200여척이 정박하던 그 장소란다. 우리가 보고 있는 동그란 부분이다.
그런데 솔직히 그때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바닷물이 들어와 만들어진 호수다. 살람보 토펫 유적이 뒤에 있다. 유적이 크게 9번까지 안내된 지도가 보인다. 번호를 따라 구경하기로 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7번이다.
호수 주변은 고급 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다. 먼저 1번을 찾아간다. 가는 길에 고기독교 유물의 고고학 박물관(Bib Knissia Basilica)을 지나간다. 발굴 현장과 함께 있는 작은 박물관인데 터가 넓다.
초기 기독교 박물관(paléochrétien) 건물도 있다. 표시가 주로 프랑스어로 기록되어 있다. 고목들과 소나무들이 많다. 걸어서 1번 유적지 로마식 온천 유적(안토닌스 목욕탕)에 도착했다. 안토니우스의 공동 목욕탕이다.
8군데 유적을 들어갈 수 있는 통합 입장료가 12유로(16,800원)이다. 카르타고가 로마 제국에 흡수된 후, 로마는 이 지역에 대규모 건축물을 세웠다. 그중에서도 안토닌스 목욕탕은 로마식 공중목욕탕의 대표적인 예다.
당시 로마인의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다. 로마 통치 시기 145년~165년에 지어진 목욕탕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워터 파크 같은 곳이다.
목욕탕에 사용하는 물은 60km 떨어진 돈살레 산맥에 위치한 자그완에서 수로를 이용하여 카르타고 내의 저수지로 갖고 왔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5세기 반달족의 침입으로 1차 파괴되었지만 670년 마그레브에 들이닥친 아랍군은 도시(케로우안)을 만들기 위해 전국, 내로라하는 로마 도시 건축물에서 나온 수많은 대리석 기둥들과 반듯하게 다듬어진 돌을 공급했다.
이때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곳이 이곳 카르타고였다. 로마의 건축 기술과 사회적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이곳은 고대 도시 발전 과정을 잘 보여준다.
바닷가에 세워진 넓은 유적의 규모가 정말 크다. 아직도 버티고 있는 건축물 사이를 걷는데 엄청 뜨겁다. 그늘에 앉아서 잠시 쉰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구경을 한다.
단체로 버스를 타고 온 것이다. 페니키아 사람들의 터전과 묘지(Punic Necropolis)가 있는 유적지도 둘러보고 나왔다. 입구에는 단체 버스가 있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석고로 만들어진 마스크와 기둥, 모자이크 작품과 석상들을 팔고 있다. 두 번째 유적지를 찾아간다. 로마 빌라(Roman Villas)다. 로마 사람들의 정착지에 세워진 집들의 흔적이다.
언덕에 자리 잡은 주거들이 모여 있다. 토굴도 있다. 고급 주택 바닥에는 대리석 바닥으로 모자이크 장식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성당 터도 보인다. 모자이크 속에는 말과 개 그리고 공작과 닭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지역은 휴양지를 끼고 있는 고급 주택지라 넓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버티고 있는 유적 속에서 곧게 자라는 사이프러스 나무만이 살아있는 것 같다.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다리가 아프다. 세 번째 고대 원형극장으로 가본다.
박물관 앞에 전시된 포스터에서는 이곳에서 뮤직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홍보를 하고 있다. 무대에는 많은 의자들이 쌓여 있다.
조명 장치는 그대로 설치되어있다. 고목들도 있어 이런 멋진 유적지에서 행사를 벌이는 그들의 수준이 부럽다. 돌로 만들었으니 화재의 위험에서도 안전하다.
우리같이 목조건물이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돌로 만든 튼튼한 건축물들이 한없이 부럽다. 지어진지 1,800년 가까이 된 이 원형극장은 최대 1만여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건물 한쪽이 무너져 오천여명 정도만 수용한다 하니 로마인들의 건축기술은 대단하다. 시간이 있다면 이곳에서 열리는 음악제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비르사 언덕'(Byrsa Hill)에 있는 로만 카르타고의 유적지군으로 간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둥근 지붕의 세인트 루이스 성당을 보며 계단을 올라간다.
로마시대의 유적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성당 첨탑에는 십자가가 없다. 성당을 들어가는데 안내해 주는 젊은이가 지하 모습을 보여준다.
지하에는 나체의 석상 두 개가 마주보고 있다. 아담과 하와의 석상 같다. 십자군 원정 중에 카르타고에서 병사한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1270년에 서거한 자리에 1884년에 기념하여 만든 성당이다.
고고학 박물관 뒷마당에는 루이 9세의 무덤과 동상이 있다. 성당으로 들어서니 좀 엉성하지만 옛 모습 그대로 잘 보관되어 있다.
견고한 고딕식 양식의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성당이다. 천장이 수평의 사각형의 목재 장식이다. 화려하고 예쁘다. 제단에는 대리석 기둥이 아름답게 버티고 있다.
지금은 성당의 기능은 없어지고 공연장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단다. 성당을 둘러본 후 나와서 카르타고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카르타고 국립박물관은 규모가 크다. 카르타고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대 페니키아 문명에 대한 다양한 유물을 볼 수 있다.
건축물의 모형 ,도자기, 무기류 등 생활상과 군사력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전시실에 보면 당시에 사용하던 토기들과 생활도구들, 어린이가 사용했음직한 조그만 새를 닮은 토기나 이집트 스핑크스 모양의 토기 주전자 등 당시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전시물들이 있다.
로마시대의 것도 많고 이후 기독교에 대한 유물들도 많다. 야외의 전시장도 넓고 다양했다. 로마시대의 기둥들과 조각난 석상들과 건축물들이 뜨거운 태양아래 뒹굴고 있다.
이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시내와 바다는 정말 멋지다. 박물관 건물은 성당과 붙어있다. 고목나무 그늘이 좋다. 박물관 야외 전시장 아래에는 페니키아 인들의 주거지 터가 있다.
페니키아인의 거주지 흔적이다. 거의 3,000년이 다되어 가는데 보존상태가 훌륭하다. 듣자하니 먼 곳에서 수로를 이용해 수돗물을 사용했고 수세식변기의 흔적도 있다고 하니 참 대단하다.
한니발의 집터도 있다고 한다. 카르타고의 위대한 장군 한니발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당시 카르타고를 포위한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도시를 건설할 때 자연 방수물질인 역청을 사용한 도시가 파괴되면서, 불붙은 화재에 무려 17일 밤낮으로 불탔다고 전해진다.
그 후 로마는 보복으로 파괴된 도시에 풀 한 포기도 자라지 못하도록 소금을 몇 겹이나 뿌렸단다.
로마는 카르타고라면 두렵기도 하고 이를 갈아 주민이 살지 않는 지역으로 만들었지만 지중해 무역과 군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다시 카르타고 자리에 도시를 건설하였다. 분명 카르타고에 소금을 뿌린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나중에 지진이 일어나 건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지금 보는 대부분의 유적지는 지진으로 무너진 로마 도시의 흔적들이다. 로마는 항구를 중심으로 도시계획을 하여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포럼(Forum)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는 신전 같은 공공건물을 짓고 아래쪽에는 주택지를 만들었고, 바닷가에는 항구를 만들었다. 아프리카에서 로마가 본격적으로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튀니지에서다.
페니키아의 카르타고와 리비아는 멸망하고 그 대신 로마가 지배하는 아프리카가 탄생했다. 북부 튀니지는 고대 세계의 곡창이며, 올리브기름의 주산지였다.
그곳에서는 올리브유를 이탈리아보다도 더 많이 생산했으며 이런 추세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세계 3위의 올리브 생산을 자랑하고 있으니 튀니지의 올리브가 얼마나 많이 생산되었을지 짐작이 간다.
박물관 앞 광장으로 나왔다. 세인트 루이스 가게에서는 장미석도 팔고 있다. <Desert Roses, 사막의 장미꽃>이라고 불리는 이 암염은 소금 사막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다.
현지 가이드는 컴퓨터나 TV에서 나오는 전자파를 억제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소개한다, 1개당 1달러에 팔고 있었다, 한니발 석상과 모자이크 장식도 보인다.
향기가 진한 흰색 꽃, 플로 메리아 비슷한 식물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이제 걸어서 숙소를 가려고 트램(메트로) 정류장으로 갔다. 너무 목이 말라 물을 하나 사서 마신다.
정류장 이름이 카르타고 한니발 역이다. 기다리고 있는 청소년들과 사진을 찍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트램이 오지 않는다.
역시 아침과 같이 다리고장으로 운행이 중단되었다고 알려준다. 다시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시디부사이드 마을을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내일은 저기를 가봐야지. 한참을 기다린 버스가 온다. 반갑다. 사람들이 엄청 타고 있다. 젊은이들이 많다. 주변에 대학이 있단다. 마린역이 종점이다. 모두 내린다. 숙소 주인을 만났다.
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오후 4시가 넘어 도착해 미안했다. 그래도 웃는 얼굴로 맞아준다. 숙소는 오래되고 어둡고 허름한 건물 2층에 있는 작은 아파트다.
내부는 예쁘게, 새롭게 수리해 놨다. 주인장은 40대 정도로 보이는 미남이다. 태권도도 잘 하고 하나 둘 셋, 한국어도 제법 알고 있다. 우리는 이틀을 묶기로 했다. 인터넷 번호는 hakim1234다.
하킴은 주인장의 이름이다. 짐을 대충 풀어놓고 샤워를 했다. 물은 잘 나온다. 에어컨도 시끄럽지만 시원하다. 슈퍼를 찾아간다. 숙소 뒤편에 백화점 같은 M쇼핑센터 지하에 큰 슈퍼가 있다.
요플레와 물 그리고 주스 등을 사가지고 나왔다. 소낙비가 엄청 내린다. 도로에 물이 흐를 정도다. 사람들이 서둘러 대피를 한다. 우리도 가지 못하고 건물에서 서성거렸다. 저녁을 먹고 가기로 했다.
2층 식당 코너로 올라갔다. 다양한 메뉴를 자랑하는 식당들이 보인다. 치킨을 주문했는데 치킨 너겟이 나온다. 실망이다. 그래도 슈퍼에서 주문한 레몬 음료(Cit Boqueria Citronnade)와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
튀니지에서 즐겨 먹는 음료수다. 프랑스에서는 탄산수로 만든 건 리모나드(레모네이드)라고 부르고, 탄산수가 아니면 시트로나드(Citronnade)라고 따로 분류하는데, 프랑스어로 레몬은 시트롱(Citron)이다. 비가 그쳤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날이 어두워졌다.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여 라면을 먹는다. 포도도 함께 먹는다. 내일 모레 도착 예정인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의 숙소를 검색해서 예약을 한다.
*9월 4일 경비 – 튀니스행 루아지 29.2, 선인장 열매 0.5, 입장권 24, 버스비 4, 물 1, 슈퍼 14.53, 치킨 16, 숙박비 이틀 현금 55유로(77,000원). 계 112,692원. 누계1,59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