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여행 이틀째, 오늘은 초원의 시크릿 가든으로 간다. 비밀의 정원, 즉 비원(秘苑)은 추억의 장소를 일컫는다. 그곳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나만의 공간이다. 언제 찾아가도 설렘이 있고 말 못할 희열이 있는 곳이다. 비원에선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잊어버린 너를 만난다.
초원의 시크릿 가든을 둘러보고 숙소인 유목민들의 게르가 쳐져 있는 바양골 캠프까진 260㎞를 달려야 한다. 고속도로라면 두세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초원은 빠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티베트에서의 시간은 말과 야크가 걷는 속도로 흘러간다지만 몽골에서는 고비사막의 낙타와 초원의 양들이 걸어가는 속도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일까.
우리 일행 10여 명이 움직이는 데 오토바이 두 대, 미국제 포드회사의 SUV차량 두 대가 동원됐다. 선도차가 수렁에 빠지면 다른 차가 끄집어 내야 하고 오토바이들은 차간 거리 유지를 위해 수시로 연락하는 임무를 맡는다.
몽골의 초원은 민둥산으로 이어진 풍경이 지평선까지 연결되어 있다. 쭉쭉 뻗은 전나무 숲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구릉은 10㎝ 내외의 난쟁이 풀들이 융단을 깔아 놓은 듯 연이어 펼쳐져 있다. 시크릿 가든으로 가는 초원에는 이정표 하나 없다. 몽골 오토바이 선수 출신인 선두 가이드 뭉크 바타 군에게 물어보면 “그냥 헨티 아이막(道)이지요”라고 답한다. 우리의 경상도에 해당하는 지역을 뱅뱅 돌고 있다는 뜻이다.
몇 시간을 달려도 풍경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시간의 태엽이 멈췄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구약성서 시대로 들어온 것 같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게르 한 채를 지어놓고 양치는 일가가 일하고 있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내가 아브라함의 집을 엿보고 있는 느낌이다.
흰옷을 입은 몽골 영감이 양 한 마리의 뿔을 붙잡고 무리 속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또렷하게 보인다. 내 의식은 바로 성서 속으로 빠져든다. 내가 보고 있는 이 장면은 하나님께 제사 지내러 가는 아브라함이 마땅한 제수 물품을 구하지 못해 사랑하는 아들인 이삭을 죽여 하늘에 바치려는 것과 흡사하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미쁘게 여겨 아들을 치려는 아브라함의 칼을 거두게 한다. 대신에 인근 풀숲에 뿔이 걸려 있는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도록 가르쳐 주는 창세기의 이야기가 몽골 초원에 펼쳐져 있다. 여행을 하면서 사물이나 현상을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유추짐작을 통해 소설 쓰듯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면 지루하지 않고 너무 재미있다.
우리는 몇㎞씩 길게 뻗어있는 야생화 군락지를 지칠 정도로 보고 또 보았다. 야생화 단지에는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미나리아재비, 바이올렛 색깔의 패랭이꽃, 꽃 한 송이로 꽃반지를 만들면 딱 좋을 꽃다발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이 화원의 정원사는 성은 하 씨요 이름은 나님이라는데 꽃씨를 뿌린 적도 없고 물뿌리개로 물주는 일이 없어도 해마다 철마다 꽃은 피고 진다.
우리가 달리는 이 초원은 몽골 사람들도 쉽게 들어오지 않는 난코스다. 멀리 유목민들의 게르가 다문다문 보일뿐 하루 종일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이런 축복을 내 생애 중에 내가 직접 받을 수 있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영광이다. 간밤의 와인 축제가 길어 잠이 모자랐지만 졸음은 오지 않았다. 잠시 눈을 붙이면 이승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풍경들을 놓치기 때문이다.
몇 군데 시크릿 가든을 찾아갔으나 시절이 일러 꽃들은 피지 않았다. 꽃무리 속에서 너울대는 전설 같은 야생화의 춤사위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듯 마지막으로 찾아간 유목민 캠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둔덕 위의 시크릿 가든은 제대로 격식을 갖춰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곳에는 붉은색의 애기중나리, 노란 색깔의 땅나리, 야생 양귀비, 자색의 엉겅퀴를 비롯하여 이름 모를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녹색의 장원 속 꽃들의 천국, 바로 우리가 찾던 시크릿 가든이다.
동행 중 한 분이 시크릿 가든을 찾은 감격과 흥취를 추스르지 못하고 깊게 숨겨둔 와인 두 병을 꺼내 축배를 들자고 제의했다. 그 와인은 ‘온다 도로’와 ‘샤또 라뚜르’란 최고급 술이었다. 브라보 시크릿 가든, 짝짝짝.
우린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병대원들처럼 차의 덮개 위로 기어 올라가 깃발 대신 두 손을 흔들며 어둑어둑해진 언덕길을 내려와 캠프로 들어갔다. 이럴 땐 루이 암스트롱의 쉰 목소리로 ‘성자, 마을에 들어가다’란 노래를 불러야 한다. ‘Oh, wend Saint, go marchin’ in.’
수필가 9hwal@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