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2코스 -②
성산리 광치기 해변에서 출발하여 식산봉, 고성, 대수산봉, 혼인지를 지나 온평리 바닷가까지 이어지는 올레. 물빛 고운 바닷길부터 잔잔한 내수면을 낀 들길, 호젓한 산길까지 색다른 매력의 길들이 이어진다. 대수산봉 정상에 서면 시흥부터 광치기 해변까지 아름다운 제주 동부의 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제주 '삼성신화'에 나오는 고,양,부 삼신인이 벽랑국에서 찾아온 세 공주를 맞이하여 혼인식을 치렀다는 혼인지(연못)도 지나게 된다. 혼인지를 지나 온평포구 해안으로 들어서면 올레길 2코스가 마무리된다.
◆일자 : 2021년 9월 26일
◆코스 : 광치기 해변 - 내수면 둑방길 - 오조포구 - 식상봉 - 오조리 마을 - 성산하수종말처리장 - 제주 동마트 -
고성리 경로당 - 성산읍 노인복지회관 - 대수산봉 - 혼인지 - 온평 환해장성 - 온평포구
【② 제주 동마트 ~ 온평포구】
◆거리 : 15.65km【누계거리 : 42.54km】
◆시간 : 4시간 7분 【누계시간 : 13시간 05분】
▶제주 동마트에서 중간 스템프 인증후 약 10분정도 걸으면 나오는 고성리 경로당(성산읍 고성리)
◆고성리 경로당 맞은편에 있는 성산읍 노인복지회관
▶대수산봉으로 오르는 등로 입구
▶대수산봉으로 오르는 숲길
▶대수산봉(大水山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위치한 측화산이다(고도:137m). 산사면이 완만한 기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 부분에는 산마루가 길게 이어지면서 중간쯤에 얕게 패인 타원형의 분화구가 형성되어 있다.
과거 이곳 분화구에 물이 있어서 '물뫼/물메'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에 이 오름 정상에 봉수대(수산봉수)가 있어 북동쪽으로 성산봉수, 남서쪽으로 독자봉수와 교신했는데, 봉수대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산(水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읍치 동쪽으로 24리에 있다."고 했다. 『탐라지』에는 '수산(首山)'으로 기재되어 있다. '물'에 해당하는 훈차 표기가 '수(首)'로 되어 있다. 『탐라순력도』(한라장촉)에는 '수산망(首山望)', 『제주삼읍전도』에는 '수산봉(首山烽)'으로 기재했고 봉수 표시도 보인다. 이처럼 '수산'이라 부르던 오름의 이름은 후대에 동쪽에 이웃한 '작은물뫼[小水山峰]'와 구분하여 '큰물뫼[大水山峰]'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분화구에 샘물이 나오는 못이 있었는데, 송나라의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섬의 산맥 수맥의 기운을 눌러 버리고 갔을 때 이 오름의 수맥도 끊겨 샘이 마르고 물도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대수산봉에서 내려다 본 섭지코지
▶대수산봉에서 내려다 본 성산일출봉
▶대수산봉 정상에서...
▶대수산봉을 내려서며...
▶대수산봉을 내려와 혼인지 방향으로...
◆혼인지
혼인지 안에 시설물들은 관리사무실, 화장실 두 곳, 정자 한 곳. 전통혼례 시 예식장, 준비실, 식당이 있으며 온평리 동동네 사람들이 음용수로 사용했던 암반위에 고인 물통(20평 남짓), 혼인지, 분수광장, 탐방로가 있다
◆혼인지 전통 혼례관
◆혼인지내 동굴(신방굴)
이 동굴은 혼인지에서 동쪽으로 약 30m 지점에 위치하며 용암 암반이 발달된 완만한 구릉지대에 형성된 탐라시대 유적이다.
고(高),양(梁),부(夫) 삼신인(三神人)과 벽랑국의 세 공주가 이곳에서 첫날밤을 보냈다고 하여 '신방굴' 이라고도 불린다.
▶신방굴 안에서 담아본 내 모습
▶아내도 같은 포즈로 담아보고...
▶혼인지 수국, 간간이 수국이 피어 있긴 하지만 지금은 꽃이 시들어 버렸다. 수국이 절정일때는 전국의 사진 작가들이 몰려
들어 장사진을 치는 수국 촬영 명소이기도 하다
◆혼인지(婚姻池)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7호로 지정.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마을 서쪽 지경의 숲에 자연적으로 생성된 약 500평 정도의 큰 연못이다.
이 연못에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삼성신화에 등장하는 3신인(神人)과 3공주(公主)가 혼인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연못 남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된 현무암 비(碑)가 세워져 있다.
아득한 옛날 모흥(毛興)이라는 곳에서 고을나(高乙那)·양을나(梁乙那)·부을나(夫乙那)라는 3신인(神人)이 솟아 나왔다. 이들은 수렵과 어로를 하며 생활 하였다. 하루는 이들이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동쪽 바다 위에서 오색찬란한 나무상자가 떠내려와 해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보였다.
3신인이 내려가서 목함을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는 알 모양으로 된 둥근 옥함(玉函)이 있고 관대(冠帶)를 하고 자의(紫衣)를 입은 사자(使者)가 있었다. 사자가 나와 옥함을 열었는데, 그 안에는 푸른 옷을 입은 15∼16세 가량의 3공주와 우마(牛馬) 및 오곡(五穀)의 종자가 있었다.
사자가 3신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의 사자요. 우리 임금께서 이 세 분 공주를 두셨는데, 혼기가 차도록 배필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게 여기고 계셨소. 그러던 중 서해 높은 산에 3신인이 있어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마땅한 배필이 없다는 걸 아시고, 신(臣)에게 명하여 3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 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버렸다.
3신인은 나이 순에 따라 3공주를 각각 배필로 정하고, 이들을 맞아 이 연못에서 혼례를 올리고, 그 함 속에서 나온 송아지·망아지를 기르고 오곡의 씨앗을 뿌려 태평한 생활을 누렸다. 이로부터 제주특별자치도에 농경과 목축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3공주가 들어 있던 목함이 발견된 곳은 속칭 '쾌성개'라고 불리는 곳이며, 이것이 도착한 해안은 '황루알'이라고 불린다. 지금도 여기에는 3신인이 바닷가에서 처음 디딘 발자국이 암반에 남아 있다고 한다.
▶혼인지를 배경으로...
▶혼인지를 나와 혼인지 마을(온평리)에 들어서며...
▶온평리 마을의 개인 주택인데...무속인의 집인듯하다
▶담위에 이쁘게 쌓아놓은 돌탑을 담아보다
◆온평 환해장성
환해장성은 제주도 해안선 300여리(약120km)에 쌓은 석성을 뜻한다. 고려 원종 11년 몽고와의 굴욕적인 강화에 반대를 하는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가 용장성을 쌓아 항거하다 함락되자 탐라로 들어가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조정에서 영암부사 김수 와
고여림 장군을 보내어 쌓은 것이 그 시초이다. 고려왕조 말까지 보수, 정비를 하면서 왜구 침입을 방어하였으며 현재 양호하게
남아 있는 곳 10여개소(온평,신산,곤흘,별도,삼양,북촌,동복,행원,한동,애월)를 제주도 지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2코스 종료 스템프함이 있는 온평포구 온평리 마을
▶온평포구(온평리)에서 2코스 종료를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