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업에서 ‘주택’ 개념
장애인자립생활주택 혹은 장애인지원주택 사업에서 ‘주택’의 개념을 명확히 합니다.
사회사업적으로 ‘주택’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장애인을 위한 주택 서비스. 이때 집이 필요한 장애인을 사회복지사(social worker, 사회사업가)가 지원한다면,
물리적 공간의 확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택을 기반으로 한 둘레 관계, 즉 사회적 관계까지 거드는 일임을 잊지 않습니다.
노숙인을 영어로 홈리스homeless라고 합니다. 하우스리스houseless가 아닙니다.
노숙까지 이른 처지가 단순히 집이 없어 주거를 지원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집만 지원한다면 그들을 ‘무주택자’라 부르는 게 맞습니다.
노숙 뒤에는 그를 붙잡아줄 관계가 없는 겁니다.
삶을 이어가며 이르고자 하는 표상이 없습니다. 그런 홈그라운드, 홈이 없는 겁니다.
그들을 홈리스라 부르는 건 주거 공간 제공과 함께 어제든 기댈 언덕, 홈을 만들겠다는 뜻도 담아 부르는 말입니다.
장애인주거서비스 또한 사회복지사의 일이라면 주거 공간 제공(하드웨어)과 함께 이를 기반으로
지역사회 속에서 여느 사람처럼 다양한 관계를 이루고 생동하고 누리며 살아가는 관계망(소프트웨어)까지 거들기를 바랍니다.
장애인주거서비스가 빽 없는 사람에게 홈이 되어주는 일이면 좋겠습니다.
완전한 자립은 의존이 많을 때 가능
장애인주거서비스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합니다.
물리적 공간을 제공하는 일과 사회적 관계를 지원하는 일. 사회적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물리적 공간만을 제공한다면,
심하게 이야기하면 보호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탈시설 패러다임 속에서 집단거주시설 밖으로 나온 사람이 다시 ‘1인 시설’로 입주하는,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거주 공간을 마련하고 난 뒤를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꿈꾸었던 ‘여느 사람처럼 살아가는 삶’의 기반을 마련한 겁니다.
거주 공간을 기반으로 둘레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어갈 때, 평범한 삶이 완성됩니다.
사회복지사로서 주거서비스를 지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다양한 관계는 집을 알아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집을 선택하고, 계약을 맺고, 이사센터를 알아보고, 전기 가스 케이블티브이를 수소문하여 연락하는 일.
이런 일들을 당사자가 이루고 누리게 도와가는 가운데 역량이 생기고 이런 구실들이 이웃을 알아가게 합니다.
이사 뒤에는 평소 알던 사람을 초대하여 집들이 하고, 이를 위해 동네 마트나 시장에 갑니다.
이 가운데 옆집에 인사하기도 하고 그릇을 빌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동네를 알아가는 가운데 가고 싶은 카페가 생기고 등록하고 싶은 헬스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쉬어 가고 싶은 공원을 만나고 책을 빌릴 도서관을 알게 됩니다.
역시 그 속에서 인사하는 이웃이 생깁니다.
이렇게 점차 시간이 갈수록 지역사회에 아는 이들이 많아지고,
때로는 아주 간단한 일부터 시작하여 무언가를 부탁할 수 있는 이들이 늘어날 때,
사회복지사로서 주거지원서비스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자립을 꿈꾼다면 부탁할 수 있는 관계, 즉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 때 가능하다는 진리를 기억합니다.
나아가, 당사자 또한 무엇인가로 보답하는 상호의존관계가 주거지원서비스 담당 사회복지사의 이상입니다.
주거지원서비스는 지역사회 인식을 바꾸는 일
이렇게 하는 일이야말로 지역사회 인식을 변화하는 일입니다.
지역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캠페인 같은 일로 바뀌지 않습니다.
‘장애인의 날’ 같은 때 진행하는 거리 캠페인 따위가 아주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거의 의미 없는 건 사실입니다.
장애인주거지원서비스로 우리 동네에, 내 옆집에 장애인을 이웃으로 맞이했을 때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하고 두렵기까지 할 겁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특별한 곳이 아니라 시장이나 문화센터나 도서관 같은 평범한 곳에서 자연스레 만나는 가운데
조금씩 이해하며 알아갑니다.
따라서 장애인주거지원서비스로 지역사회 속으로 이사한 장애인 당사자의 등장은
지역사회를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곳으로 일구어갈 좋은 기회입니다.
다음 두 그림은 한국사회가 낯선 이웃에 대하여 상당히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자주 만나거나 접해 본 적이 없는 동성애자에 관해 이웃으로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이들이 77.6%에 이릅니다.
이슬람 문화 영향으로 다양성에 대하여 매우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터키 다음으로 부정적 의견이 높게 나타났습니다.
OECD 14개국 중 동성애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제6차 세계가치조사, 2010~2014)
*‘알릴레오 북스’ 화면 갈무리
OECD 14개국 중 AIDS 환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제6차 세계가치조사, 2010~2014)
*‘알릴레오 북스’ 화면 갈무리
두 질문의 부정적 응답 평균값이 20% 정도인데, 한국의 부정적 의견은 80% 이상으로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모습이나 다채로운 삶에 경직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장애인 운동 참여 경험에 관한 질적 연구>(이완영, 가톨릭관동대학교 학술연구교수)에서는
사회학적 관점을 중심으로'는 장애인의 체육활동 참여 동기와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탐구했습니다.
장애인들이 지역사회 속 평범한 체육시설을 이용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낯선 시선’이었습니다.
"연구 참여자들은 자신들이 체육시설에서 운동을 할 때면 근처에 운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다고 말한다.
비장애인들은 자신과는 다른 몸을 가진 장애인들과 한 공간에서 운동하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말은 하지 않더라도 비장애인들의 시선은 장애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마치 있으면 안 되는 공간에 와 있는 ‘낯선 출입자’가 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제 이런 지역사회 안으로 장애인 당사자를 이사하게 도왔습니다.
사회복지사로서 주거공간의 안정적 운영만이 길이 아님을 생각합니다.
거친 세상 속에 나온 당사자를 위하는 일이 ‘서비스랜드’일 수 없습니다.
또다시 별도의 제도나 조직을 만들어 특별하게 지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가 그 속에서 여느 사람처럼 어울려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사람과 상황과 사안에 맞게 사회적 관계를 이루어갈 수 있게 지원하면 좋겠습니다.
사회복지사의 실천 방식은 당사자가 자기 삶을 살고, 둘레 사람과 어울리게 돕는 일입니다.
장애인 당사자가 자기 삶을 살려면 당사자에게 설명하고, 도전하게 제안하며 부탁하고, 이를 거듭니다.
그 과정에서 실패하기도 하고, 다시 힘을 내기도 합니다. 실수 실패 끝에 상처를 만나기도 합니다.
지원자로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어울리게 돕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울려야 하니 지역사회로, 여느 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가운데 마주하는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벽을 느끼고, 욕을 듣기도 하며, 존재를 부정당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지원자로서는 당사자의 기능을 높이는 일처럼 당사자 쪽을 지원하는 일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낍니다.
당사자가 어떠하든, 그를 품어주게 지역사회 변화가 함께해야 함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하고,
당사자는 '내가 아니라 지역사회가 우리를 받아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걸 알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도전 가운데 조금씩 힘이 생기고, 요령도 알고, 재미도 느낍니다.
서로가 변하고, 귀인을 만나기도 하고, 관계의 실마리를 찾기도 합니다.
이 같은 뜻 깊은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회복지사를 응원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5.03.30 22:53
첫댓글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이 장애인용으로 되어 있지 않으니 장애인은 의존할 수 있는 것이 무척 적습니다. 장애인이 너무 의존하는 게 아니라 의존할 게 부족하기 때문에 자립이 어려운 겁니다. 인간은 약함을 서로 보충하고 의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서 강해졌어요.”
-「돌봄이 돌보는 세상」가운데
장애인 지원 이전에 그 사람의 삶이 있고, 거기에서 이후의 지원을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5.03.31 1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