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정사
매헌정사는 울주군 웅촌면 웅촌초등학교 교문에서 지방도로를 따라 서남쪽으로 십리쯤 가면 고연리에 연답 마을이 있다. 주소는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1184번지이며, 마을 입구의 언덕에서 동향으로 훤히 보이는 우람한 자태의 기와집이 충숙공(忠肅公)의 7세손인 겸익(謙益)공을 추모하기 위한 정사(精舍)다.
뒷산은 천성산(千聖山)의 줄기로, 향로(香爐)같이 생겼다 하여 향로봉이라고도 하며, 연꽃이 반쯤 핀 모양이라 하여 연화봉(蓮花峰)이라고도 한다. 산 아래에 앞은 확 트인 넓은 논 자락이 펼쳐져 있고, 좌.우는 청용백호가 선명하며, 멀리는 붓끝같이 생긴 문필봉(文筆峰)이 우뚝하여 언뜩 보아도 정기(精氣)가 가득한 좋은 곳이다.
이곳은 성지대사<국풍>가 점지했다는 명당으로 겸익공의 묘소가 있으며, 묘소 아래 공의 사후(死後) 360년 뒤 2004년 11월 후손의 정성으로 복원(復元)된 매헌정사가 있다. 500여 평의 넓은 대지에 30평의 정사와 관리사인 운고재(雲孤齋)와 대문인 인의문(仁義門)으로 조화를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公의 자는 자부(子裒)요 호는 매헌(梅軒)으로, 직장(直長) 벼슬을 지낸 우춘(遇春)의 아들로서 1575년(선조8) 웅상읍 주남리에서 출생하셨다. 5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고, 임란을 발생하자 병중의 모친을 업고 원적산으로 피신하셨다. 이때 평소와 다름없이 지극한 정성으로 병간호를 하여 뒷날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이(李)효자곡이라고 불렀다.
임진란으로 형을 따라 왜적을 무찌르는데 참여한 공로로 나라에서는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으로 제수(除授)하였고, 승진하여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증직(贈職)되었다. 백형 겸수(정주 판관)의 주선으로 나주)의 임관해(林觀海) 문하생(門下生)으로 3년간 9경을 독파(讀破)한 수학기(修學期)는 공의 인품으로 녹아내렸다.
또한 매헌정사는 최초의 족보를 의논한 산실이자 학성이씨 5파 계행(系行)이 확정된 역사적인 성소(聖所)이다.
공은 18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형(伯兄)과 의병(義兵)으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육의사가 되었고,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성(孝誠)을 다하는 충효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매헌정사는 2004.11.17일 낙성식을 가졌다. 이 정사(精舍)는 매헌공의 강성문씨 후손과 밀양 일직손씨 후손이 공동으로 건립하였다. 대지 500여평에 건평은 30평의 규모로 팔작지붕 형태인데 공사비는 모두 5억여원 정도가 소요되었다. 부속 건물로는 대문인 ‘인의문’과 관리사인 ‘운고재’가 있는데 이 또한 20평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 건물은 연답 마을 입구 언덕에서 동향으로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이곳에서 후손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조인 매헌공을 기리고 있다.
공은 선조 25년 4월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였다. 우연히 벌목을 나섰다가 왜병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때 기지를 발휘하고 싸워서 큰 칼을 빼앗아 그 왜병을 죽였다. 그 칼은 한동안 종가에서 보관해 왔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다. 이 공로로 나라에서는 공을 군자감 참봉으로 제수하였다.
공은 어릴 때부터 기국(器局)이 크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또한 매우 깊었다. 일찍이 관해공 임회 선생에게 글을 배워 경서에 통달하였다. 선조 26년 4월 명왜(明倭)간 강화교섭으로 왜군은 후퇴하여 남해안 일대에 둔거하였고 울산은 서생성의 적과 대치하여 시시로 국지전이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이때 공은 백형인 주부 겸수가 강화사가 되자 그를 호위하고 전도하는 등 중임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후일 육의사 중에 한 분으로 선정되셨다.
※ 육의사: 겸수, 겸익, 한남, 봉수, 열, 경연
백형 겸수의 주선으로 나주의 임관해 문하생으로 3년간 9경을 독파하였다. 매헌정사는 최초 족보를 의논한 산실이자 학성이씨 5파 계행이 확정된 역사적인 성소이다(복원 기문에서).
공은 노후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매헌정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독서와 시를 짓고, 꽃을 키우며 소일하다가 향년 71세로 돌아가셨다.
문집은 전하지 않지만 다수의 서적과 서첩이 아직도 전해오며, 가장(家狀)과 행장(行狀)으로 공의 업적과 행적을 알 수 있다. 아들은 7형제를 두었으며, 후손은 부산, 울산 웅상 등 여러 곳에 3천여명으로 번성하였다.
공의 5세손 반계공 양오(養吾)는 문학의 큰 태두(泰斗)가 되셨고, 2004년도에 전국시가협회에서 석계서원 경내에 반계공 문학비를 세운 바 있다. 5세손 근오공은 대과급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벼슬을 하였고, 9세손 석진(錫瑨)공도 대과급제(大科及第)하였고, 진사 생원과에 입격자인 문구(文耈, 손자-성균 생원) 장찬(璋燦 7세손-의금부도사), 규노(奎魯 8세손-진사), 규용(奎龍 8세손-진사) 등의 많은 선비와 학자가 배출되었고, 문집이 있는 후손이 많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