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숙이네신문 2006/1/8(일) 05:45 (MSIE6.0,WindowsNT5.1,SV1,.NETCLR1.1.4322) 61.85.130.139 1024x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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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안에 갇혀 있는 허준 선생(미완)
2005년 추석 연휴가 끝난 어느날이었다. 새벽 한시에 잠이 깨었다 더 이상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에라 이왕 깬거 지금 길을 떠나자)
국방부에서는 해마다 추석을 전후해서 민통선 안에 있는 산소에 성묘를 허락 했다. 덕분에 작년엔 경순왕릉과 허목 선생의 산소를 다녀 왔는데 같은 민통선 안에 있는 허준 선생의 산소는 여태까지 성묘조차 못 해왔다.
두달동안 미국에 가 있다가 추석 직전에 귀국 하면서도 이번엔 꼭 허준 선생의 산소엘 다녀 와야지 했는데 이참에 그걸 꼭 실현에 옮겨볼 생각이었다.
서둘러 내 우거인 몽각산방(천안 시 오지에 있다)을 떠나 북으로 차를 몰았다. 허준 선생의 묘소는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에 있고 통일대교를 건너야 한다고 하니 일단 판문점 초소를 통과해야 했다.
(가만있자 이 속도로 가면 세 시간이면 도착 하는데 그러면 네시에...히야 이건 너무 일르다. 차라리 어느 휴게소에서 더좀 눈좀 붙이다 가자)
그런면에서 내 차는 전천후였다 아무데서나 잠을 잘수 있고 또 아무데서나 끓여 먹을수가 있다. 물론 노트북까지 장착 되어 있으니 아무데서도 작업을 할 수가 있다. 일단 안성 휴게소에 차를 세워 놓고 잠을 청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앗 너무 잤구나) 날이 부옇게 밝아 있었다. 서둘러 차를 달리면서 소설 동의보감을 쓴 작가 이은성을 생각 했다.
그와는 KBS 문예계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가 1967년 전후 KBS 신춘 연속극 모집에 <칼 마르크스의 제자들>이란 작품을 들고 등단한 직후였을것이다. 이후 그는 <대원군> <세종대왕> <충의> <집념>등 많은 사극을 썼다. 특히 허준의 일생을 그린 <집념>은 1976년 MBC에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했고 1977년 제16회 대종상에서 우수작품상 각본상을 받기도 했다.
줄거리는 조선 중기에 용천부사 허륜과 종의 신분인 손씨 사이에서 태어난 허준이 신분의 제약을 비관 새로운 삶을 찾아 집을 떠난다. 경상도 산청에서 조선 제일의 명의 유의태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가 된 허준은 온갖 모함과 질시에도 불구 하고 조선 제일의 명의가 되고 선조의 어의가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숨을 다해 선조를 보필하고 의학서적들을 안전하게 옮기는가 하면 광해군때는 동의보감을 집필했다. 흑사병이 유행하자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보다가 자신도 그 병에 걸려 죽음 을 맞는다.
물론 허준이 서출이라는것과 동의보감을 썼다는것만 빼면 모두가 작가의 허구이다. 두산세계백과사전의 기록을 옮겨 보자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岩)이다. 선조 때 내의(內醫)가 되어 왕실의 진료에 공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어의(御醫)로 왕을 끝까지 호종(扈從)하고 돌아와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고, 1606년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졌다. 후에 대간의 반대로 직위가 취소되고, 1608년 선조가 죽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한때 파직당했다.
1610년(광해군 2) 16년의 연구 끝에 완성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조선 한방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淸)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저서에 《벽역신방(폄疫神方)》 《신찬벽온방(新纂폄瘟方)》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 《맥결집성(脈訣集成)》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등이 있다.
그러나 허준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것은 현실에 있을법한 이야기를 진실성있게 다루어온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1988년 1월 어느날, 친지가 상을 당했다고 해서 내가 서울대학병원에 문상을 가 있는 그 시간에 그는 같은 병원에서 심장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 일설에는 수술이 잘 되어 절개 해놓은 심장을 갈아 끼우려고 보니까 이미 심장이 죽어 있었다는것이다. 드라마 <집념>을 바탕으로 유작으로 <소설 동의보감>이 나왔다.
(이 글을 올려는 이 시점에서 보니 작년(2005년)5월부터 7월까지 베트남 중앙방송 (VTV3)에서 작가 최완규가 쓴 <허준>이 방영되어 동의보감을 베트남어로 번역하는 문제가 활발히 논의 되고 있다고 한다. 한류열풍의 일환이라고 했다.)
판문점 경비 초소에 도착 하니 이미 아홉시가 넘어 있엇다. “어떻게 오셨죠?” “허준 선생 묘소에 성묘를 갑니다” “신분증좀 주실까요?” 주민등록증을 내 보였다. “고인과는 어떤 사이십니까?” “네?” 병사의 물음에 나는 당황했다. 어떤 사이라니? 가장 정확한 표현은 역사적인 인물과 그를 존경하는 후학과의 사이가 될것 같은데 그 말을 믿어 줄까? 그래서 나는 장황하게 취재에 대한 변을 늘어 놓았다. 병사는 주민들록증을 가지고 초소로 다가가가서 상급자인듯한 군인과 상의를 하고 왔다. “직접 후손이 아니면 안되겠습니다.” 아니 ,새벽부터 별러서 여기까지 왔는데 안되다니?
나는 운전석에서 내려 초소로가서 거칠게 항의를 했다. “아니 직접 후손이 아니면 안된다는게 말이 돼요? 성씨가 다른건 사위도 있고 외손도 있을것 아뇨?” 쇠귀에 경읽기였다 한번 안된다면 안되는게 군대였다. 그런걸 알면서도 나는억지를 써 봤다. “이거보슈 내가 허준 선생 외손이요 외손, 그러면 되겠소?” 그러면서 속으로는 웃었다. 내가 아는 우리 족보엔 <양천허씨> 할머니가 안 계셨기 때문이다. 물론 병사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이거보슈 사실은 내가 취재를 왔는데...” “안됩니다 그러구서 민통선에 들어가 무슨일을 하는지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아니 안내병을 딸려 주면 될것 아뇨?” “안내병요?” 듣고 있던 다른 병사들까지 웃음을 터뜨렸다. 작년의 경우엔 분명히 안내병을 딸려서 도아 주었는데 올해는 그런 지침이 안 내려온것 같았다. 이쯤해서 손을 들 수밖에... “당신네들 보다 상급자는 어디 있소?” “사단 정보처에 문의 해 보십시오” “몇사단이요?” “1사단입니다”
어쩔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합동참모부 공보실장에게 전화를 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더니 공보실장이 웃었다. 민통선을 개방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손들이 성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취재>는 별도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했다. 별도의 절차라..그야말로 부지하세월이 걸릴것이다.
궁즉통이라구 했던가? “그러면 후손을 한 사람 대동 하면 되겠군요?” “아 그러면 되지요”
나는 청주에 사는 구우 허근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였다. 친구는 내 얘기를 듣더니 모든 약속을 뒤로 미루고 바로 응해 주었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판문점 경비 초소로 갔다. 교대를 했는지 처음 보는 병사였다. “나는 운전기사로..” 말도 끝 나기전에 그 병사가 통행증을 내 주었다. (제엔장 이렇게 간단 한걸)
통일대교를 건너면서 첫 표지판이 눈에 들어 오자 감개무량했다.
(개성이 18키로 밖에 안되는구나!) 반세기 동안 막혔던 이길이 남북관계의 호전으로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는것이다. 아직은 한산 하지만 언젠가는 이길로 북을 향해 달리는 차들이 빼곡이 들어서겠지.... 그런데 길과 표지판만 있지 도대체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가다보면 군인이 나오겠지)
첫 번째 표지판에서 무작정 우회전을 해서 달려 갔다. 부대인듯 정문 초소가 나왔다. “허준 선생 묘소가 어디요?” “모르겠는데요”이런 제엔장... 다시 차를 돌렸다. 도라산 역 간판이 나왔다. 맞은편에서 군인을 실은 츄럭 두 대가 나오길래 무작정 손을 들고 세웠다. “허준 선생 묘소가 어디요?” “모르겠는데요” 설듯 하던 차가 다시 쌩 하고 달려갔다 어쩔수 없이 우리도 다시 차를 돌렸다.
“앗 저기 사람이..” 논두렁에서 일하는 농부가 보였다. “어? 군인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진짜 사람이네?” 우리는 폭소 하면서 그 농부 곁으로 가 차를 세웠다. “허준 선생 묘소요? 아 그러면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애당초 서울에서 자유로 로 진입하여 통일 전망대를 지나 문산 읍 당동 IC로 나갔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적성 연천방면으로 5 키로쯤 가면 화석정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1 키로쯤 가면 좌측에 군 전용다리인 전진교가 나온 다고 했다. “전진교 검문소로 들오셔야지요. 거기선 허준선생 묘소가 2.5키로 밖에 안됩니다” “그럼 여기서 다시 판문점 경비소로 나가야겠네요?” “글쎄요 나가지 않고두 가는 길이 있긴 있는데 좀 복잡해서....” 한번 들오기도 힘든데 나갔다가 다시 들오는건 더 복잡할것 같았다. 복잡 하더라도 그길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시멘트길로 접어 들었다.
내 겔로퍼는 4륜 구동을 넣고도 헉헉 대며 비탈길을 끝없이 오르락 내리락했고 ..... 인가는 물론이고 병사 막사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 저기...> 정상에 있는 막사였다. 무조건 차를 그리 몰았다. 놀란것은 우리가 아니라 .내무반에서 쉬고 있던 병사들이었다. “아니 여긴 어떻게 올라 오셨어요?” 흡사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도 만난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기를 한시간 여... <아 찾았다>
우리는 가까스로 표지판이 제대로 서 있는 길을 찾았다. 농부가 말하든 전진교, 허준묘소... <이리 들어 왔어야 되는걸 거꾸로 들어 왔어.> <아차피 잘 됐지 뭐야 안 그랬으면 합법적으로 민통선 안을 누비고 다닐수 있겠어?> <하하> 허준 묘소에 도착한것은 판문점 경비소를 통과한지 거의 두 시간만이었다.
허준 선생 묘소는 큰길에서 1 키로쯤 떨어진 신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차장에 내리니 그동안 묘역 정화사업에 힘쓴 기관 단체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석비가 나타났다.
여기서 1키로쯤 걸어 올라가면 허준선생의 묘소에 이른다.
묘소에 도착 하니 우람한 중건비가 나를 반기는듯 서 있다. <산돼지들이 파 놨구먼...> 허근형이 여기 저기 파헤쳐진 주변의 상처를 보고 끌끌 혀를 찾다.
선생의 묘소는 1950년 한국 전쟁때 실전되었다. 그러든 어느날, 작전 순찰중이던 성명 미상의 한 병사가 흙속에 묻힌 1미터 크기의 비석을 발견 했다. 몸체가 포탄에 파손되어 "陽平○○聖功臣○浚‘이라는 글자를 겨우 알아볼수 있었다. 그때부터 막연히 이곳이 허준 선생의 묘라고 구전해 오던중 1991년 9월 27일 고문서 연구가인 이양재 교수가 양천허씨 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 확인함으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나와 허근 형은 문산읍의 수퍼마켓에서 사온 소주를 부어 놓고 재배를 마쳤다.초입의 안내판의 문귀가 떠 올랐다.
경기도에서는 1992년 6월 경기도 지정문화재 제 128호로 등록하고 1994년 파주군문화공보실과 가락허씨 서울 종친회 그리고 한국의 침구사대표들의 후원을 얻어 묘역 전화사업을 마쳤다. 현재는 사단법인 의성 허준 기념 사업회가 맡아서 관리를 하고 있다.
묘 앞에서 내려다보니 제각 옆 안내판을 열심히 읽고 있는 허근형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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