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성북구 안암동의 유래
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명지 一
안암동安岩洞은 문현상 나타나는 서울의 동명 중에 가장 오래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성계는 한양 정도 이듬해인 1395년(태조 4)부터 수릉壽陵, 즉 자신의 만년유택을 정할 만한 산지를 찾아 과주果州(현 과천시果川市), 광주廣州 등 산수가 좋은 곳을 왕래하였다. 태조는 안암동에 거동하며 수릉을 정할 만한 곳을 구경하고, 또 인정人定을 만드는 주종소鑄鐘所를 거동하였다. 이는 이곳이 산수가 아름답고 풍수지리적으로 산릉터에 가합하게 여겨진 데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문현상의 기록으로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안암동 지역의 노인들에 의하면 안암동 3가에 있는 대광아파트 단지 가운데 큰 바위가 있어 20여 명이 앉아 편히 쉴 만하여 그 바위 이름을 '앉일 바위'라 하였으며 이것을 한자로 고쳐서 '안암'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55년에는 안암동이 동암, 남암, 서암 등 세 곳으로 구분되었는데 이는 앉일 바위를 중심으로 그 동남서의 방위를 중심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후 안암 1·2·3동으로 고쳐졌다가 안암동으로 조정 통합되었다.
안암동 3가의 궁말
그중에도 지금의 안암동 3가에 있는 마을은 세종의 제 5자인 광평廣平 대군 및 그의 아들 영순군永順君이 대를 이어 살고 있던 마을로 제 22대 왕 정조正祖의 후궁인 원빈元嬪 홍洪씨의 묘소 영명원永明園이 있었기 때문에 궁말로 물려졌으며 또한 광평 대군 일가의 사당이 있음으로 하여 사당말로도 불리어진다. 궁리宮里 또는 중리中里는 광평 대가의 세거지世居地였을 뿐만 아니라 태조의 제7자인 무안군撫安君 방번과 그의 부인 정양定陽 대군 우瑀의 딸 개성 왕王씨를 위시하여 광평 대군과 그 부인 신추씨 및 광평 대군의 아들 영순군과 그 부인 최崔씨 등 3세를 봉사奉祀하는 사당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리園里는 정조의 후궁인 원빈 흥씨의 묘소인 영명원이 있던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종실록』에 보면 광평 대군은 1425년(세종 7)에 태어났는데, 1437년(세종 19)에 왕이 동교에 나가 농사 현황을 구경하고 거가車駕를 보제원普濟院 북쪽 광평 대군의 새 집에 멈추었다고 한다. 이때 대군은 13세요 대군이 무안군의 후사로 되던 해이다.
1437년 광평 대군은 이곳 안암동 궁먈에서 양부養父인 무안 대군의 사당을 짓고, 그 후 7년간을 거처하였으며, 동지중추부사 중 좌의정 신자수申自守의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 영순군 부溥를 얻었다.
광평 대군은 2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아들 영순군 이후로 자손이 번창하여 이씨 왕족 중에서도 후손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광평 대군의 시호는 장의章懿요, 묘소는 광주 서촌 학당현學堂峴(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릉 부근에 있었다. 51년 후인 1495년(연산 1)에 성종 왕릉을 그 자리로 정하면서 영순군의 묘는 광주 대왕면大旺面 광수산光秀山(현 강남구 일원동)으로 이장되었고 이하 후손들의 묘소도 대개 같은 산록에 있다. 묘하에는 세장비가 있으며 광평 대군 묘역은 지방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