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때 대검에 가슴찔린 여고생 소문은 사실이다
전남대 오봉석 교수의 실제 증언 동영상 링크 - "http://www.youtube.com/embed/I5cm2LqvLHY"
"대검에 가슴찔린 19세 소녀 치료했다"
광주일보 1989/01/14
5·18당시 부상자 밤샘치료 두 의사가 말하는 「병원상황」
수납 창구까지 「환산환해」
국회 광주특위는 16일 전대병원 적십자병원 기독병원과 통합병원에 대한 문서 검증작업을 편다. 광주시내 종합병원은 80년 당시 광주의 처절함을 그대로 입증해 주는 역사의 현장. 끊 임없이 밀려드는 환자들과 열흘밤낮을 꼬박없이 새며 수술을 계속했던 의료진들. 피가 부족 하다는 방송이 나가자 수백명의 자원자가 나서는 시민정신이 꽃피기도 했다. 당시 부상시민 들을 수술했던 의료진에게 80년 병원 상황을 되돌아 본다.
당시 전대흉부 외과의사 오봉석씨
『한마디로 전쟁터의 중간에서 있다는 기분이었다』 5·18당시 전대병원 흉부외과 레지던 트로 근무하고 있었던 오봉석씨(당시 29세·현전남대교수) 는 「5·18」을 이렇게 회상한다. 『공수부대와 시민간에 접전이 치열했던 19일부터 22일까지는 병원 응급실은 물론, 1층 환 자대기실 수납창구의 복도까지 매트리스나 보조침대를 깐 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응급실은 물론 수술실도 24시간 수술을 해댔다. 환자 들어오는 대로 처방전을 나누어주고 생명이 위급한 사람은 즉시 수술실로 옮겼다.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그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밝혔다. 오씨는 당시 의료 진들이 겪었던 가장 어려웠던 것으로 수술기구의 부족과 5·18발생 초기의 인력부족을 든 다. 『당시 하나밖에 없었던 흉부외과 수술기구로는 사실상 밀려드는 환자를 수술하기에 역 부족 이었다.
의료진들은 하루 2∼3시간 정도밖에 자지않으면서도 서로를 격려해 가면서 당 시를 견뎌냈다. 발생 초기에는 피가 부족했으나 나중에는 전 시민이 헌혈에 호응, 혈액 부족 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광주항쟁이 끝난뒤 못쓰게 된 혈액의 폐기 문제로 병원이 골머리를 앓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교수는 다른지역에서 광주항쟁 당시의 따스한 인 간애가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않다고 안타까와했다. 『흉부외과의 특성상 병원에 도착한뒤 사망한 환자를 보지는 못했지만 안타까운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면서 지난번 민화위에서 증언한 김내향양의 경우를 듣는다. 채소장사를 하는 부모화 함께 총격을 받아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김양은 반신불구가 되어버린 것.
김양을 최초로 진료했던 오씨는 『어린 애가 군인의 총에 맞는 것을 보고 의료진이나 환자 모두가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안타 까워했다. 전대병원에 환자가 몰려오기시작한것은 18일 오후부터였으나 피크를 이룬 것은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된 21일 오후부터 22일 사이라고 기억을 더듬는다.
외과의사들은 18일 사건발생 초기부터 27일 이전까지 전혀 퇴근을 할수 없었으며 내과·피부과등 외과파트 이 외의 의사들도 19일 부터 응급실에서 일을 도와줬다고 회상했다. 당시 간호사들도 시내일원 이 막힌것도 이유가 있겠지만 누구하나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씨가 세인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공수부대가 처녀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소문과 관련 대검으로 가슴을 찔린 여자환자를 치료한 것 때문이다.
오씨는 『가슴부위와 등을 대검에 찔린 최미자양(당시 19세) 이 실려온 것은 19일 오후라고 생각됩니다. 최양이 찔린 정확한 부위는 겨드랑이와 젖가슴 사이로 계엄군이 젖가슴을 목적으로 찔렀는지는 이 상처부위만 갖고 쉽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당시 최양이 다친 경위를 얘기하지 않아서 이를 확인하지는 못했어요. 나도 이후 이 문제가 확대되자 최양을 수소문해 봤지만 찾지 못 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계엄군의 「유방난자」로 말썽이 많았던 이 부분은 당시주치의를 통해서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진입할 때 병원 11층 레지던트 숙소 에서 동료들과 침대 밑등에 엎드려 숨을 죽이면서 있었다는 오씨는 이날 아침 병원 건물에 나있는 무수한 총탄 자국에 다시 한번 치를 떨었다고 말했다.
『저항능력이 없는 병원에까 지 총을 쏠 필요가 있을 까요』라고 반문했다. 오씨는 광주항쟁은 보다더 정확한 진실이 규 명돼 광주시민의 명예가 회복 되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기사 끝)
전남대 병원 기록에도 최미자씨가 등 부위와 가슴 부위에서 대검에 찔려 치료받은 기록이 존재한다. 의사가 19일로 기억하는 것과 달리, 부상일자가 20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여고생이 대검에 가슴을 찔렸다는 것이다
첫댓글 죽일넘들...
안현태 이넘 국립묘지에 안장한다는데 오공세력들 특히 전두환 노태우죽으면
국립묘지로 가기위한 수순아니겠는가?
보수란이름하에 극우가판치는 새상이아닐까?
하니 통탄할 일이아니겠는가?
언제까지 이꼴을 봐야하는지...
미친개또라이 새끼들이네요.
저런 짓을 저지른 놈들과 전두환같은 놈이 아직 버젓이 살아있다니
정말 열받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