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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12:1-8) “러닝머신의 삶, 무빙벨트의 삶
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6.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오늘 말씀중심으로 “러닝머신의 삶과 무빙벨트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러닝머신의 삶과 무빙벨트의 삶’
헨리 포드가 자동차 왕 아닙니까? 그 분이 컨베이어벨트를 창안하게 됩니다.
20,000가지에 달하는 자동차 부품들을 벨트위에 나열해 놓고 벨트가 움직이게 하고, 알맞은 시간동안 그 자동차 부품들을 조립할 수 있게 함으로서, 자동차를 처음으로 대량생산체제로 생산해 내게 됩니다. 바로 그 컨베이어벨트 위에 사람이 올라서게 되면 두 가지의 벨트가 됩니다.
러닝머신이 되거나 무빙벨트가 됩니다.
러닝머신이 무빙벨트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벨트가 움직이는 방향의 역방향으로 서서 내가 뛰고 달리지 않으면 떨어져 나갑니다. 자빠지고 넘어집니다. 반면에 무빙벨트는 벨트가 움직이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향해 있으면서 내가 움직여 갑니다. 벨트가 움직이는 것만큼 저절로 마치 배가 순풍에 돛을 달고 움직이듯이 그렇게 슥- 하고 움직여 갑니다. 거기에 진전이 있습니다. 러닝머신은 그 자리에서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넘어지고 자빠지게 되지요.
오늘 말씀에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또 청년이 아니라도 사람이 어느 때든지 창조주를 기억하지 않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러닝머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창조주를 기억하면 어떻게 됩니까?
무빙벨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인터넷을 통해 접하게 된 들은 얘기입니다. 어느 20대 임시직을 전전하던 한 젊은이가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좀 여러 가지 조건이 불편하지만 중동의 이란으로 근로자로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슬람 국가들의 특징이 술집 같은 곳이 없습니다. 젊은 사람이 일하다 힘들면 믿지 않는 사람이니까, 술이라도 마시면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지치고 피곤한 몸을 쉴 수도 있겠건만 그런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 젊은이가 택한 여가선용, 또 자기 심신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택한 것이 바로 러닝머신입니다. 러닝머신에서 열심히 뜁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어렵고 힘들고 또 내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불안하고 걱정스러우면 지친 몸을 (벨트위에서 뛰지 않으면 안 되니까) 1시간 뛰고 2시간 뛰고 이런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20대 나이에.
어디서 죽었는지 아십니까? 러닝벨트 위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상한 표현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3절에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요”
이 말은 사람이 늙어서 노인이 되었을 때에 신체의 부분부분마다 일어나는 노화현상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석가들이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라'라고 하는 것은 다리가 몸을 지탱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리가 후들 후들거린다는 얘기고,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다.”라는 얘기는 이빨이 다 빠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 질 것이다.”라는 말은 시력이 노화돼서 시력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또 "노래하는 여자들의 소리가 쇠하여 진다"라고 하잖아요. 이 말은 귀, 청각이 흐려진다는 것이고 “머리위에 살구꽃이 핀다.”라는 말은 머리가 희어진다는 겁니다.
이렇게 인체의 노화현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노화돼서, 노인네가 되기 전에 내 인생에 아무 낙이 없다고 하기 전에, 청년의 시절에 창조주를 기억해서 무빙벨트의 삶을 살라는 겁니다. 청년이 아니더라도 창조주를 기억하면 무빙벨트의 삶이 됩니다.
그런데 왜 구태여 청년이라고 말을 했습니까?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과, 청년이라는 말이 의미상 아주 잘 맞물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청년이 어떤 시기입니까?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부모 밑에서 양육 받고 교육 받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청년이 되면 비로소 사회인으로서 독자적인 삶을 꾸려 나가야 될 입장이 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제는 부모가 해 주는 대로 수동적으로 받고 살던 삶에서, 이젠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골라내야 되고 채택해야 되고 계획해야 되고, 이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내 삶에 대해 대처해 나가야 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젊은이들 중에 가장 큰 과제가 뭐예요. 스펙을 늘리는 것 아닙니까?
스펙이 뭐지요? 학력, 학점, 영어 자격증 외에 하고 싶은 일과 관계된 자격증들을 스펙이라고 하잖아요. 자격증 같은 것들. Specification의 준말이지요. Speck.
나를 소개할 만한 여러 가지 자격증, 재능들을 늘리는 것이 부담입니다.
왜 그것을 늘려야 합니까? 이제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바로 그 청년의 시절에 적극성을 띠고 삶을 대처해야 하고 내가 스스로 책임을 져야할 그 때 그래서 책임감과 적극성이 가장 강하게 요청되는 청년의 시절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겁니다.
자, 이제 창조주를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다. 창조, 조성하셨다.'
나는 창조주를 기억하자마자 나에 대한 자아의식이 분명해 집니다. 자아의식은 어떤 자아의식이 생깁니까?
'피조물이다. 조성되어졌다.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역류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청년의 때에.
‘내가 내 삶을 책임져야 한다. 이제 내 인생을 좀 더 잘 나가게 하기 위해서 내가 스펙을 준비해야 되겠다. 영어공부를 해야 되겠다. 제2 외국어 일어나 중국어를 해야 되겠다. 학점을 올려야 되겠다. 취직시험을 봐야 되겠다. 토익점수를 늘려야 되겠다.'라는 노력을 능동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하려고 할 때에, 나는 하나님 창조주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갑자기 능동적인 성향에 대해 완전히 anti를 걸어버리는 겁니다.
‘어,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 졌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다시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의 삶이 끝나게 됩니다.
'시작도 피동적이고 끝도 피동적이다. 시작과 끝, 둘 다 피동적인 지점을 이어가는 벨트가 인생의 시간벨트로 돌아가고 있다면 그 시간벨트 위에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모든 기계가, 만든 사람이 그 기계의 용도를 결정하듯이 내가 만들어진 존재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이유가 있을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의 날아다님과 떨어짐을 결정하신다면, 내 인생의 구간구간과 순간순간을 결정하실 텐데. 그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시고 이 인생의 재량권을 나에게 맡겨 두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간섭해 들어오시고 개입해 들어오시고 나를 이끄시고 목자가 되셔서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나를 이끄시려고 한다면, 도대체 나는 인생의 벨트가 움직여 나갈 때 어떻게 자세를 취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기서 두 가지 인생의 스타일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러닝머신의 스타일이 있고 또 하나는 무빙벨트의 스타일이 결정됩니다.
여러분! 무빙벨트 경험해 보셨습니까? 인천공항에 가면 공항 게이트까지 가는 길, 아니면 게이트에서 나와서 출구로 나오는 길이 머니까, 노인 분도 계실 수 있고 비행기를 오래 타다보면 다리가 불편할 수도 있고 하니까, 무빙벨트를 만들어 놓았어요. 컨베이어벨트를 바닥에 깔아놓고 자동차 부품대신에 사람이 올라서면 그냥 쭉 가는 겁니다.
이와 반대로 러닝머신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올라서면 내가 막 뛰지 않으면 자빠지게 됩니다.
자, 시작을 피동적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끝이 피동적으로 끝날 것입니다.
내 능동성과 상관없이 내 적극성과 상관없이 시작과 끝이 결정되었습니다.
그 사이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창조주의 섭리하심의 벨트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벨트위에서 내가 내 스스로 꿈과 비전을 갖습니다.
‘내 인생은 이렇게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하자마자, 나는 이 벨트의 역방향으로 서게 됩니다.
역방향으로 서게 되면, 내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뒤로 물러나거나 아니면 떨어져 자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게 됩니다. 이렇게 평생을 제자리걸음을 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다가 끝나는 것이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을, 인생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규정하느냐 하면, "던져진 존재" 라고 규정을 합니다. 던져진 존재(Geworfenheit). 던져졌다. 던져졌어요.
내가 한 번도 내 생애를 내가 이제부터 태어나서 저 세상에 나가서 살아야지라고 결정한 적이 없어요. 던져진 존재에요.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온 단어가 투기라는 겁니다. 투기.
Geworfenheit, 던져진 사람이고 그 다음에는 투기, 투기(投企)라는 말이 '기'자가 기획할 (企)자입니다. 그러니까 계획을 던진다. 던져진 존재는 던져진 존재로서, 내가 이렇게 생긴 것도 내가 결정한 게 아니지요. 내가 그 부모 밑에 태어난 것도 내가 결정한 게 아니지요. 던져졌어요.
그러나 던져졌지만 던져진 이후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내가 투기, 내가 계획을 던져가면서 내가 창조적인 주체가 되어서 내 인생을 살고, 내 자식 놈의 앞날이 이렇게, 이렇게 돼야 되겠다. 아니면 내 사업을 이렇게, 이렇게 이끌어 가야 되겠다. 몇 년도까지는 매출액 얼마? 이렇게 기획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투기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기획을 던지며 산다는 겁니다.
교회가 말합니다. 청년들에게 꿈을 가져라. 비전을 가져라.
꿈과 비전을 내가 갖자마자, 우리는 시간의 벨트위에서 역방향으로 서고 능동적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뛰는데 뛰고 뛰어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행복이 진전이 안 돼요. 보람이 진전이 안 돼요. 기쁨이 진전이 안 돼요.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애쓰는데도 행복이 마음에 주어지지 않고, 마음에 평강이 주어지지 않고, 한 번 활짝 웃어 볼 때가 없습니다. 술이나 먹어야 웃지요.
'꿈과 비전을 가져라.' 이거 위험한 말이에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창조주를 기억해서 피조물 됨을 인식하라는 게 아니라, 네 스스로 창조주가 되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투기하는데 내가 기회를 던지며 내 인생을 이끌고 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요소로 등장하고 불러 들여지게 됩니다. 창조주가 아니라 내 인생에 대해서 창조주 적 위치는 내가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인 나에게 끌려 들어오셔서 헌금이나 좀 받으시고 제사나 받으시고 나면 헌금 받으신 김에 그저 그 값하시느라고, 아니면 교회 봉사한 내 봉사의 값어치만큼 되돌려 주셔야만 하는 분으로서 찾아와서, 내가 세운 인생의 비전을 성취해 주시는 능력자로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이러다가 이란에 간 불쌍한 젊은이처럼, 그냥 러닝머신 위에서 다 죽는 거예요. 제자리걸음하는 겁니다. 제자리걸음이 뭐라고요? 행복이 나타나지를 않아요. 돈 벌고 싶은 사람들이 돈 벌어서 잠깐 기뻐요. 그러나 행복합니까? 마찬가지로 돌아가는 겁니다.
여러분! 피동적이다. 수동적이다. 라고 하는 말?
'수동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동작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창조주를 기억해서 내가 피조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그러면 이 수동적인 존재로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동작을 받는 겁니다.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받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이제 이런 일을 이루고 싶은데. 우리 아이가 대학을 들어가야 되는데. 지혜가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에게 능력을 주세요. 우리 아이에게 지혜를 주세요.'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아이가 능동적으로 대학을 위해 준비를 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대학과 연관된 문제가 하나님의 동작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마치 캔버스가 있지 않습니까? 화포가 있어요. 그 화포에 화가의 손이 받아들여지면서 그림이 형성되어 가듯이, 하나님의 동작을 내 인생의 화포에 그대로 그 동작을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자체를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자신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동작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자체는 멀리 떨쳐 놓고, 하나님께 능력을 받으려고 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려고 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은혜요. 하나님 자신이 지혜의 본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이 얘기를 좀 더 실감나게 느끼기 위해서 에피소드를 한 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어떤 할머니가 수십억의 재산을 유산으로 상속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속자가 누군가 하면 데리고 기르던 개입니다. 개한테 수십억의 재산을 상속시켰습니다. 제가 들어도 피가 거꾸로 솟아요. 아니 좋은 곳에 쓸데도 많을 텐데...
외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외아들과 며느리가 소송을 겁니다.
어떤 소송을 거느냐? 어머니가 수십억의 재산을 개에게 물려줄 때에 그 유산의 내용은 어머니의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이 어머니의 유산상속에 대한 유서는 무효라는 판결을 받기 위해 법원에 소송을 겁니다. 판사가 아들과 며느리를 불러서 이제 심의를 합니다. 판사가 묻습니다.
"어머니 생일이 언제입니까?"
그러니까 아들이 "여보, 어머니 생일이 언제야?"
"난 모르지."
모르겠는데요.
"아, 예. 그러면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이 뭡니까?"
"여보,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지?"
"당신이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아, 알겠습니다. 어머니에게 언제 전화를 하십니까? 일주일에 몇 번 전화를 하십니까?"
"여보, 전화했어?"
"아니, 당신은?"
"난 안 했는데."
"나도 안했어."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전화를 안 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판사가 결론을 내립니다. 할머니가 수십억의 재산을 개에게 유산을 상속시킨 것은 합당하다. 합당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개에게로 돌아가고 그 유서에 따르면 ‘개가 죽으면 그 모든 재산을 사회의 어느, 어느 자선단체에 다 넘겨주세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어머니를 기억한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를 기억만 했더라면 전화만 해 드렸다면 생일 날 그저 마음에 없어도 하다못해 꽃다발이라도 갖다 드렸으면 배달해서라도 드렸다면, 수십억의 재산이 아마 아들에게로 왔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조차도 창조주로 기억하는 게 아니에요. 창조주는 이미 내가 창조주가 되었습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창조주에요. 내가 원하는 바가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내 나름대로 내가 원하고 있고 그 원하는 것들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내가 세우고 있고 하나님은 힘을 주시면 돼요. 막히는 일이 있으면 해결사처럼 뛰어넘게 해 주시면 돼요. 하나님은 창조주가 아닙니다. 해결사로 기억되고 계시고 능력을 공급하는 자로 기억되고 계시고 우리의 하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에요. 언제나 기억되는 것은 나 자신이 창조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 교회 안에서.
그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 되는 나에게 허락하시려는 수십억의 은총들이 다 개한테 가버리고 맙니다. 다 유실되고 말아 버립니다.
태어난 게 내 힘으로 태어난 게 아니고, 수동적으로 태어난 것이면, 사는 것도 수동적로 살면 됩니다.
수동적으로 산다는 게 뭐예요? 예를 들어 돈이 없다. 내가 가정에서 책임감을 지고 있는 입장에서 걱정이 되잖아요? 이게 벌써 러닝머신위에 올라간 겁니다. 피동적으로 흘러가는 내 인생의 타임벨트위에서 역방향으로 선 겁니다. 당신이 뭔데 책임을 집니까?
제가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 이미 고인이 되신 아버지하고 대화를 하면서 ‘아, 이제 장가를 가게 되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할 텐데...’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야, 네가 무슨 책임을 지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굉장히 기분이 나빴어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뒤끝이 길거든요.
나를 무시하시는 것인가? 아버지도 가정을 꾸리며 살고 계시는 분이. 그럼 책임을 안 지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그런데 이제 그 말씀의 의미를 아는 거예요. 책임은 무슨 책임?
자식은 저절로 크는 거예요. 밥 해주는 것을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냥 빚 갚는다고 생각하면 돼요. 어머니, 아버지에게 얻어먹은 밥대로 자식에게 해 주는 것 정도지요. 그걸 뭐 책임이라고 까지 할 수 있어요? 무슨 책임을 져요?
자식이 아파서 열이 40도로 올라가면 어쩔 줄 모르는 게 인간인데. 대신 아파주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는데. 무슨 책임을 진다는 겁니까? 아내의 그 속을 어떻게 압니까? 남편의 그 속을 어떻게 알아요? 돈? 내 맘대로 됩니까? 무슨 책임을 지겠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러닝머신 위에서 날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죽기 살기로 뛰고 있는데 제자리걸음 하고 있는 거예요. 제자리걸음.
좀 무빙벨트위에서 smooth하게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 행복해지고 이틀 지나면 이틀 지난 것만큼 행복해지고, 행복이 증진되고 보람이 느껴지고 자꾸자꾸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커지고 좀 이런 삶 없을까요? smooth하게 넘어가는 삶.
하나님을 창. 조. 주. 로 기억하는 겁니다. 나의 능동성을 없애 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없애요? 자꾸 내 속에서는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대로 투기하려고 합니다. 기획을 던지려고 합니다. 걱정합니다. 이것도 투기 하는 것이에요. 능동적 주체가 된 거예요. 창조주가 된 거예요. 염려합니다. 창조주가 된 거예요. 염려할 능력이 안 되고 자격이 안 돼요. 피조물로서는.
피조물이에요. 피조물. 피조물의 한계에 머물러 있지를 못하게 합니다.
이게 뭐예요? 태초에 에덴에서 마귀가 한 거예요.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이게 마귀의 일성입니다.
인간에게 다가와서 인간을 유혹하려고 했던 첫 마디가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라는 겁니다.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가라. 그러므로 네가 책임지고 네가 계획하고 네가 꿈꾸고 네가 비전을 갖고 가라. 양들은 자기가 비전이 없습니다. 목자가 비전이 있으면 돼요. 이게 양입니다. 이게 바로 창조주를 기억하는 피조물들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런데 안돼요.
우리 속에 뱀의 독이 퍼져서 자꾸 우리로 하여금 창조적이고 우리 스스로 능동적이고 우리가 적극적이 되게 만듭니다. 창조성과 능동성과 적극성은 하나님만 갖고 계시면 돼요.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동작을 받아들이면 돼요. 하나님 자신을 수(受)하면 돼요. 수동(受動).
(수: 받는다. 동: 동작) 하나님의 움직임을 받으면 돼요. 그냥 장갑이 되라는 말이 거기에 뜻이 있는 거지요. 그러므로 하이데거 식으로 얘기하면 인생은 던져져서 시작됩니다. 또 피동적으로 끝이 납니다. 그 사이에서 인간은 인격적 주체이기 때문에 자발성의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면 그 자발성 가지고 뭘 합니까?
하이데거가 말한 대로 창조적인 인생의 가능성을 꿈꾸며 계획하고 사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갑니까? 자발성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나의 자발성을 죽이는 겁니다. 자발적으로 나의 능동적 가능성을 죽이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사건입니다.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붙잡고.
왜? 죄가 자꾸 나를 능동적이 되게 밀어붙이니까. 그 힘을 이기려면 십자가 붙잡고 완전히 죽은 자로 자기 자신을 깨달아야 드디어 하나님이 나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수십억의 은총의 사건들이 내게 고스란히 주어질 수 있고, 나는 러닝머신이 아니라 무빙벨트를 탄 사람으로서 하루 살면 하루만큼 이틀 살면 이틀만큼,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은총의 계획들이 성취되어 간다는 겁니다. 그냥 저절로 가는 거예요. 방향만 바꾸면.
내가 꿈을 가져요? 방향이 바꿔져서 러닝머신을 뛰게 됩니다.
내가 계획해요? 러닝머신을 뛰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비전대신에 십자가를, 그리고 꿈 대신에 나의 죽음이 현실화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죽고 이제 피동적으로 시작된 삶, 어차피 피동적으로 하나님의 능동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창조성과 적극성에 의해서 내 삶이 무빙벨트가 움직이듯이 SMOOTH하게 미끄러져 나간다는 겁니다.
무빙벨트의 삶을 선택하세요.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꼭 기억하시면서 나의 능동성을 죽여 버리는 겁니다.
청년의 때, 책임감과 능동성과 꿈과 비전과 사회적인 독립적 존재감과 독립심과 이런 것이 무성하게 자라날 때 그 때, 바로 청년이 아니라도 그런 마음이 생겨날 바로 그 때,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죽음으로써 피조물의 한계를 철저하게 지켜서, 하나님의 능동성이 내 삶의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무빙벨트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맨 날 제자리, 얼굴에는 땀이 나고 전신에 땀이 흐르고 지칠 대로 지칠 만큼 뛰고 또 뛰어도 마음에 행복도 마음에 보람도 기쁨도 제자리걸음입니다.
러닝머신의 삶을 끝내기 위해 오늘도 순간순간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나의 피조물 됨을 기억함을 통해 하나님을 창조주로 삶에 모셔 들이게 하여 주시옵시고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의 동작과 활동을 받아들이므로 무빙벨트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수고가 많으십니다 8장이 빠졌네요,,,감사합니다
8장은 설교 본문이 없습니다.
아,,감사합니다
안.젼.놀.ㅇㅣ.ㅌㅓ. 추.천.합.니다.
Z. M. M. 6 .9 닸.켬 (추,천,인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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