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먹의 향기를 뜻하는 묵향이라는 말은 단지 비유적인 표현만은 아니죠. 먹에는 분명히 향기가 있습니다. 벼루에 먹을 갈다 보면 그 은은한 향기가 방 안에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은은하다라는 말에 그처럼 어울리는 향기가 있을까 싶네요.
붓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소리와 향기로 가득합니다. 먼저 벼루에 물을 부어가며 먹을 갈 때 나는 소리와 향기가 있고, 그 먹을 붓에 찍어서 종이 위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종이와 스치는 붓의 소리가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가운데 ASMR이라는 것이 있죠. ‘정신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소리’라는 뜻으로, ‘자율감각’, ‘쾌락 반응’이라는 뜻이 있다는데요,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소리를 들으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심리적인 안정이 온다는 분들이 많으시죠. 먹을 가는 소리나 화선지에 붓 스치는 소리도 그런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글씨를 쓰고 사군자를 치는 것이 공부가 된다는 것은 벼루에 먹을 가는 과정에서부터 마음이 차분해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소리와 향기, 그리고 손으로 전해지는 촉감이 그런 효과를 불러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명산에 자리 잡은 오래된 절집으로 들어갈 때 일주문을 지나 숲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미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죠. 먹을 가는 시간은 그 길을 걸어가는 시간 같은 것 아닐까요?
붓글씨를 잘 쓰진 못해도 가끔은 벼루에 먹을 갈면서 그 향기를 느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촉감, 코로 느껴지는 향기, 그리고 벼루와 먹이 내는 소리, 그것이 우리가 오랫동안 잠재웠던 감각을 깨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묵향 / 고성현 5:05
https://youtu.be/L_pb5wwBCL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