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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선사랑 최승준 원문보기 글쓴이: 민주야 사랑해
1) 정선개요
정선은 고구려때 잉매현, 신라때 정선, 고려때 삼봉(三鳳), 도원(桃原), 심봉(沈鳳)등 군명이 자주 바뀌었다. 공민왕 2년(서기 1353년)에 군명이 다시 정선으로 개칭되어 조선 500년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본 군의 군청 소재지로서 정치, 행정, 경제, 교육, 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처음에는 군내면(郡內面)이라 하여 어천(漁川), 병목(甁項), 오반(五半), 송오(松五), 외반점(外半占), 북실(北室), 생탄(生呑), 상동(上洞), 중동(中洞), 하동(下洞) 등 10개 동으로 구획하고 면 행정을 처리하던 것을 1906년에 면장제도로 개편하는 동시에 동하면(東下面)을 합쳐 정선면(旌善面)으로 개칭하였다. 1924년에 서면(西面)을 합하였고,
1973년 7월 1일자로 정선면이 정선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화암8경
제1경 화암약수
화암약수는 1910년경 이 마을 사람 문명무씨가 꿈에 구슬봉 높은 바위아래 청룡, 황룡두마리가 서로 뒤틀며 엉키어 몸부림치더니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는 꿈을 꾼 후 새벽 일찍 남몰래 그곳에 가서 땅을 파헤치니 갑자기 바위틈에서 물이 거품을 품으며 치솟았다고 하며 그 물맛은 마치 계피가루를 탄 것처럼 씁쓸하면서도 시원하였다 하고, 사악한 마음을 갖고 물을 먹으려 하면 약수물에 구렁이가 보인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동면 그림바위 산속에서 바위를 뚫고 샘솟는 화암약수는 위장병, 빈혈, 피부병, 안질 등에 좋은 효험을 갖고 있으며, 철분, 칼슘, 불소 외에 9가지의 필수원소가 함유되어 사이다를 마시는 듯한 신비로운 맛을 낸다.
제2경 거북바위(화암약수 진입로 우측 위)
화암동굴에서 화암약수로 가다 우회전하여 진입하기 직전, 오른쪽 그림바위 앞 기암괴석 절벽에는 둘레 6m의 큰 거북모양의 바위가 남쪽을 향해 기어가는 듯한 모양으로 쭈그리고 앉아있다. 네 다리와 머리, 꼬리부분이 거북과 닮아 거북바위라 불려진다. 거북바위에서 약수터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폐허가 된 구암사 절터가 있으며 이 절터에는 약 9mm가량의 바위틈이 있는데 이 틈을 통해 속세의 못된 바람이 불어 들어 중들이 바람을 피운다 하여 절이 없어졌다고 전한다. 거북바위를 둘러싼 봄 철쭉, 가을 단풍이 절경이다.
제3경 용마소(화암약수 진입 500m전 하천변)
화암약수 500m 앞에 있는 용마소는 광활한 반석이 있고 맑은 물이 감싸고 흐르는 곳으로 한여름에 시원하고 경치 좋은 휴식처로 각광 받고 있다. 주민들이 관리하는 마을 관리 휴양지는 편의시설이 구비되어 야영하기에 편리하다. 계곡의 맑음이 끊일 줄 모르는 용마소는 옛날 그림바위 마을에 살았던 김안댁이라는 여인이 옥동자를 낳은 뒤 며칠 되지 않아 혼자 힘으로 윗목 선반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를 보고 아이가 장사임에 분명하나 잘못되면 3족이 멸하게 될까봐 아이를 죽이게 되었고 다음날 용마가 나타나 주인을 찾았으나 주인이 죽고 없음을 알자 아이가 죽은 이 소에 빠져 함께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제4경 화암동굴
화암동굴은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 33호로 지정(1980년 2월 26일) 되어 있으며 1922년부터1945년까지 금을 캤던 천포광산으로 연간 순금 22,904g 을 생산하는 국내 5위의 금광이었던 곳으로 1934년 금광굴진 중 발견되었다. 화암동굴은 천연 종유동굴과 금광갱도를 이용하여 [금과 대자연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개발된 국내 유일의 테마형 동굴이다. 국내에서 발견된 석회석 동굴 중 최대(2,800㎡)로서 동양최대의 황종유벽 등 다종의 종류석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지금도 종유석이 생성되고 있는 국내 유일의 동굴이다. 금을 테마로 확충 개발된 부분에는 금광갱도의 역사의 장, 동화의 나라, 대자연의 신비 등 3개의 장이 전시 연출되어 색다른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화암동굴에서는 석회동굴의 특성을 보여주는 천연 종유굴과 수많은 광부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삶의 현장인 금광의 흔적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다. 현재 개방된 천연종유굴은 2,800㎡규모의 광장이고 관람 길이는 1,803m로 총 관람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이다.
* 입장시간(동굴) : 09:00 - 17:00
* 관 람 료 - 개인 : 어른 4,000원 / 청소년 3,000원 / 어린이 2,000원
단체 : 어른 3,500원 / 청소년 2,500원 / 어린이 1,500원
*. 모노레일카
화암동굴 매표소에서 입구까지 20분가량 걸어 올라가야했던 가파른 언덕에 국내 유일의 모노레일카가 설치됐다. 최대 4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모노레일카는 걸어야 했던 수고를 덜어 주는 것은 물론, 그림바위의 절경을 관망할 수 있어 색다른 체험을 선사한다.
요금 ; 어른 2000원, 중고생 1500원, 초등학생 1000원
*. 천포금광촌
1. 개방시간 : 09:00~18:00 2. 위치 : 동면 화암리 화암관광지내 3. 입장료 : 무료
4. 규모 : 13,856㎡(금광촌락 16동,황금연못,야외전시장) 5. 전화번호 (033) 560-2057
천포 금광촌은‘휴식의 장’과‘체험의 장’두 개의 테마로 꾸며져 있다. 이곳은 1922년부터 1845년까지 천포광산의 광부들이 살아가던 삶의 현장인 화암리 일대의 금광촌을 재현해 놓은 공간으로 그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4,200여 평의 부지에는 16동의 촌락과 황금연못이 어우러진 무화의 장이 조성되어 있고, 광부들이 살아가던 금광촌답게 금광채굴에 사용된 도구들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직접 사금을 채취해 볼 수 있는 사금 채취장과 광차를 밀어 볼 수 있는 레일도 설치되어 있어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 금광촌입구 : 금광촌 입구에는 갱목을 연상케 하는 게이트가 세워져 있고, 이곳을 지나면 금광촌과 금을 테마로 한 다양한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 금광촌다리 : 통나무로 엮은 아담한 다리를 건너면 아늑한 사택과 휴식을 취하던 합숙소 잡화점 등 금광촌 사람들의 생활상이 펼쳐진다.
- 분 수 대 : 황금 연못의 분수대에서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물줄기가 하늘을 향해 솟구
친다. 나뭇가지 형태로 틀을 짠 분수대가 특이하다.
- 서 낭 당 : 저마다의 간절한 소망이 서려있는 서낭당에는 노다지를 꿈꾸던 광부들의 꿈과 이들의 무사귀환을 빌었던 아낙네들의 간절한 바람이 녹아 있다.
- 광 차 : 금광촌의 한켠에는 광물을 운반하던 광차가 레일에 놓여져 있다. 이곳에서 잠시 금광촌 광부가 되어 직접 광차를 밀어보는 체험도 가능하다.
- 물레 방아 : 물의 힘을 이용한 동격식 물레방아와 수채는 돌을 깨고 금을 채취하는데 이용되었다고 한다.
- 야외전시장 : 야외전시장의 장비는 1970년대 정선군 동면 화암리 산 171번지(화표동)일원에서 금광채굴 시 사용하던 장비를 분해·해체하여 2004.1.30 ~1.31헬기로 운반하여 전시하였다.
- 기 타 : 살림집, 잡화점, 합숙소 등
*. 정선향토박물관
화암동굴을 나와 천포 금광촌을 둘러보고 나면 금빛 유리로 장식된 아름다운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이 바로 정선의 향토적인 매력과 정겨운 모습을 만날 수 있는 향토박물관이다. 정선향토박물관은 우리 선조들의 역사와 문화가 그대로 배어 있는 정선의 문화유산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선사람들의 생업, 농기구, 의생활, 주생활 용구 등을 전시하고 있다. 화암관광지내에 위치한 박물관은 금을 주제로 한 화암동굴과 금을 캐어 생활하던 금광촌락을 재연한 첨포금광촌과 연계하여 황금을 주제로 한 기증유물 전시로 우리나라 금광역사의 상징성을 부여하였다. 전시 제1관인 2층 향토 전시실은 정선의 향토유물인 물레, 풍구 등 민속용구 11품목 400여점이 전시되어 관람할 수 있고, 전지 제2관인 1층 기증유물실에서는 황금불상, 황금 도자기, 황금대접 등 황금유물 200여점을 감상할 수 있다.
관람시간 : - 하절기 : 3월 ~ 10월(09:30 ~ 17:00)
- 동절기 : 11월 ~ 2월(09:30 ~ 16:30)
요 금 : 어른 1000원(단체 700원), 군인청소년 500원(단체 300원)-(033)560-2057
제5경 화표주(화표동 입구 삼거리 우측 30m 앞)
화암리에서 몰운대 쪽으로 가다가 화표동 입구 삼거리에 도달하면, 맞은편에 커다란 바위를
뾰족하게 깎아 세운 듯하고, 기둥 2개를 겹쳐 놓은 것처럼 보이는 절벽이 있는데 이것을 화표주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산신들이 이 돌기둥에 신틀을 걸고 짚신을 삼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6경 소금강(화표주에서 몰운대까지 경관)
소금강은 정선군 동면 화암1리에서 몰운 1리까지 4km구간에 백전리 용소에서 발원한 어천을 중심으로 좌, 우에 100 ~ 150m의 기암절벽이 있는데, 그 기묘하고 장엄한 형상이 금강을 방불케 한다하여 소금강이라 알려진 명승지이다. 특히 겨울의 설경이 아름다워 설암이라고도 부른다. 이 밖에도 소금강의 정문과 같이 어천을 사이에 두고 좌, 우에 서있는 사모 관대바위와 쪽도리바위, 신선 삼형제가 놀았다는 삼형제바위, 독수리집이 있어 항상 독수리가 날고 있다는 평화바위, 조그마한 동굴 속에서 오고가는 관광객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듯한 두꺼비 모양의 돌두꺼비바위 등 정교한 형상은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제7경 몰운대(소금강을 지나 굽을길 우측)
제7경인 몰운대는 수백척의 암석을 깎아세운 듯한 절벽위에 5백년이 넘은 노송이 좌우건너편의 3형제 노송과 함께 천고흥망을 간직하고 있다. 옛 전설에 천상선인들이 선학을 타고 내려와 시흥에 도취되었다고 전하며 구름도 아름다운 경관에 반하여 쉬어 갔다고 하는 몰운대 절벽 아래에는 수백 명이 쉴 수 있는 광활한 반석이 펼쳐져 있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여름철에는 소풍객이 끊이지 않는다. 조그마한 능선을 따라 시작되는 등산로는 화암팔경 중 5경(화암약수, 거북바위, 화표주, 소금강, 몰운대)을 관망할 수 있으며, 비선대, 신선암, 금강대에서 보는 소금강과 설암은 한 폭의 동양화 그것이다. 등산 후 몰운대 밑 소금강 계곡에서 강물에 발을 담그고 몰운대를 감상하면 신선이 된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비선대, 신선암, 금강대 등에는 추락위험이 있으므로 각별 유념하여야 하며 겨울철은 더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제8경 광대곡(몰운대를 지나 좌측 입구)
광대곡은 하늘과 구름과 땅이 맞붙은 신비의 계곡으로 태고 적부터 부정한 사람들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금하는 전설이 있는데, 그 전설이란 부정한 음식물(닭고기나 개고기)을 먹고 입산하면 모든 나뭇가지가 뱀으로 보이기도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부상을 당하는 예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산인 광대곡을 탐승하기 위해서는 앞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여야 한다고 한다. 특히 가을 단풍이 절경을 이루고 12용소를 비롯하여 촛대바위, 영천폭포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3) 화암동굴
화석, 보석과 귀금속 등 자연이 보여주는 조화는 다양하다. 하지만 빠뜨릴 수 없는 것의 하나가 땅속에 세워진 화려한 `지하궁궐'이라 할 수 있는 석회암동굴이다. 우리나라는 지형 상 자연동굴이 매우 발달한 편이어서 석회암동굴, 용암동굴, 해식동굴 등의 자연동굴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특히 석회암동굴이 압도적으로 많아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석회암동굴이 많은 이유는 간단하다. 석회암층이 많기 때문이다. 북한의 경우 황해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지역, 남한의 경우 문경 단양 제천 영월 평창 정선 삼척 명주 강릉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고생대 캄브리아기에서 오르도비스기 사이(5억7천 만 년 전~4억3천8백만 년 전)의 석회암층 이 대규모로 분포하며 석회암동굴도 이 지역에 밀집해 있다. 남한에서 발견된 석회암동굴은 2백여 개로 이중 40%에 해당하는 80여개 가 강원도 지역에 분포하고, 45개가 충북, 25개 정도가 경북에 흩어져 있다. 이들 동굴 중 삼척의 대이리 동굴지대와 초당동굴, 평창의 백룡동굴, 영월의 고씨동굴, 충북 단양의 고수. 온달. 노동굴, 경북 울진의 성류굴, 전북 익산의 천호동굴 등은 천연기념물로, 나머지는 대부분 지방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굴들은 규모나 동굴생성물의 종류와 모습 등이 웅장하고 다양하지만 대이리 동굴지대나 초당. 백룡. 천호동굴은 보호를 위해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고씨동굴 등 나머지 공개동굴들은 공개된 지 오래되고 관람객의 출입이 워낙 많아 애초 흰 우유빛이던 생성물의 색이 검게 변하는 등 원형이 많이 변질되거나 훼손된 상태다. 이런 점에서 지난 93년 3월1일부터 개방된 정선의 화암동굴은 비교적 석회암동굴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정선읍에서 동강을 끼고 이어지는 길을 따라 동쪽으로 20분쯤 들어가면 왼편에 넓은 주차장과 함께 보이는 것이 화암동굴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4년 금광을 파 들어가다 발견된 이 동굴은 입구가 옛날 금광석을 캐내던 갱도이다. 보통 사람의 키 한길 정도의 높이에 폭 2m 안팎, 수평으로 곧게 뻗은 갱도를 따라 2백m쯤 들어가면 갱도가 끝나면서 계단이 나타난다. 2~3m 높이의 계단을 오르면 확 트인 넓은광장이 펼쳐진다. 바닥은 천정에서 떨어진 낙석이 쌓인 경사면을 이루고 있고 최고높이 28m, 긴지름 73m, 짧은지름 42m의 타원형을 하고 있는 이 지하광장이 화암동굴이다. 계단으로 만들어진 5백50m의 탐방로를 오른쪽으로 오르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높이 30m, 둘레 20m의 황종유벽과 부처상이다. 벽 한가운데 부처 모양의 석순이 서 있는 이 벽은 아직도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어 종유석과 석순이 자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석순과 대석주 뒤편의 석회암 고드름(종유석)은 옛날엔 바닥에 닿을 만큼 길게 드리워졌다고 하나 지방기념물로 지정되기 전 사람의 손을 타 지금은 밑둥치만 남아 있다. 동굴 한복판의 동굴소를 보며 계단을 계속 내려오면 바위 위에 흰 눈꽃이 핀 것 같은 석화가 천정과 벽을 메우고 있어 대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천의무봉한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걸까. 지금까지 지질학계의 연구결과 석회암동굴은 물이 빚어내는 자연의 걸작품이다. 물은 꾸준하고 솜씨 좋은 동굴의 조형자로 거대한 지하궁궐을 만들 뿐 아니라 종유석, 석순, 석화, 베이컨 등 이 궁궐을 장식하는 극히 섬세한 일까지도 담당한다. 조개류, 조류(바닷말), 산호 등의 몸을 보호하는 껍데기나 골격 등이 바다 밑에 퇴적돼 만들어진 석회암은 탄산칼슘을 주성분으로 하는 암석이다. 이 석회암은 매우 치밀하고 단단한 돌이지만 조금이라도 이산화탄소를 포함하고 있는 물에는 녹는다. 따라서 지표수가 석회암의 틈을 타고 지하를 향해 침투해가는 동안 석회암을 녹이게 된다. 그 뒤 강이 지표를 침식해 지하수면이 내려가면 석회암이 녹아나간 자리는 지하의 동공으로 남게 되고 지표에서 석회암을 녹여 내려온 물속의 이산화탄소는 대부분 가스가 되어 동굴안 공기 속으로 달아난다. 그 결과 물속의 석회암 성분은 과포화상태가 돼 순수한 화학적 성분인 탄산칼슘은 광물의 결정으로 침전하게 된다. 물이 동굴 천정에서 물방울로 떨어지면 이 침전물은 빨대같은 관이 되어 종유석으로 자라게 되고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에서는 죽순처럼 자라 석순을 만든다. 그리고 탄산칼슘의 결정이 자유롭게 자라게 되면 눈꽃 같은 석화가 되고 얕은 웅덩이 안에서 자라게 되면 동굴진주를 빚어낸다. 석회암을 녹여 동굴을 만드는 것은 흙 속에 들어 있는 식물이 부패한 찌꺼기, 즉 부식토를 거쳐온 빗물이다. 탄산을 함유하게 된 물은 순수한 빗물보다 25배나 많은 양의 석회암을 녹일 수 있어 동굴을 형성한다는 것이 강원대 원종관 교수(지질학)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석회암동굴은 지하수의 부력에 의해 지탱돼온 것인 만큼 물이 빠지면 무너져 내려 바닥에 낙석이 쌓이게 되고 지표의 침식이 진행되면서 천정이 얇아져 끝내는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석회암동굴은 비공개로 보호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자연학습장으로의 공개와 보호가 적절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와 함께 다음 세대들에게 동굴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파괴가 이뤄지기 전에 동굴박물관을 만들어 동굴생성물과 함께 생물, 화석 등을 전시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4) 정선 아우라지
아오라지는 북면 여량리에 위치해 있으며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의 대표적인 발상지 중의 한 곳으로서, 예부터 강과 산이 수려하고 평창군 도암면에서 발원되어 흐르고 있는 구절 쪽의 송천과 삼척군 하장면에서 발원하여 흐르고 있는 임계 쪽의 골지천이 합류되어 "어우러진다" 하여 아우라지라 불리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적인 배경에서 송천을 양수, 골지천을 음수라 칭하여 여름 장마 때 양수가 많으면 대홍수가 예상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옛말이 전해오고 있다. 정선읍으로부터 19.4km 거리에 위치한 아우라지는 산수가 아름다운 여량8경의 한 곳으로 송천과 골지천이 이곳에서 합류되어 한데 어우러진다 하여 '아우라지'라 불리고 있다. 이곳은 주위에 노추산, 상원산, 옥갑산, 고양산, 반론산, 왕재산 등이 둘러싸여 땅이 비옥하고 물이 맑아서 예부터 풍요로움과 풍류를 즐기던 문화의 고장이다. 아우라지는 오래 전부터 남한강 1천 리길 물길 따라 목재를 운반하던 유명한 뗏목 시발지점으로 정착되었으며, 특히 조선시대 경복궁을 지을 때 태백산맥에서 나오는 목재를 남한강 물길 따라 서울로 운반하던 뗏목터였고, 또한 동강(한강상류)까지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기도 하여 각지에서 모여든 뗏꾼들의 아라리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특히, 뗏목과 행상을 위하여 객지로 떠난 님을 애닯게 기다리는 마음과 장마로 인하여 강물을 사이에 두고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애절한 남녀의 한스러운 마음을 적어 읊은 것이 지금의 정선아리랑 가사로 널리 불려지고 있다.
현재 구절천은 돌과 자갈이 많아 물살이 거칠고, 임계에서 흘러나오는 골지천은 잔잔하다. 두 물줄기는 아우라지를 거쳐 조양강과 동강을 거쳐 흐르고 다시 영월군을 지나 남한강으로 빠져간다. 겉보기에 물이 얕지만 나룻배를 타고 물 가운데로 나가면 물 속이 맑고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폭은 그리 넓지 않으나 강변 돌밭이 꽤 넓다. 아우라지가 유명해진 것은 나루터가 있기 때문이지만, 예전에는 나루터에 있는 나룻배가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으나, 현재는 42번 국도며 구절리와 여량리를 잇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나루 기능이 많이 사라졌으나 여전히 나룻배나 나무다리를 이용하는 게 훨씬 가깝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나룻배를 탄다. 강가 논에는 고인돌 5기로 추정되는 것이 있어 흥미를 더해준다. 그리고 「아우라지공원. 나루터공원」이 있다.
강언덕 양지바른 곳에 처녀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 1960년대에 아우라지를 사이에 두고 양쪽마을(싸리골과 가구미)에 살던 신랑, 신부와 하객을 태운 나룻배가 뒤집혀 신랑만 살아남고 모두 익사해 버렸는데 그때 신부는 가마채 쓸려가 버렸다. 그 후 매년 익사 사고가 잇따르자 이 동상을 세워 신부의 원혼을 달랜다고 한다. 가구미(가금)와 여량사이 강에는 강을 가로질러 연결한 줄을 손으로 당겨 이동시키는 '함지박 배' 가 있다. 이 배를 타보는 낭만은 퍽 인상적이다. 아우라지 강을 보고 난 후에는 안쪽 구절리 방면으로 가는 것이 좋다.
아우라지에 물이 줄어드는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나무다리를 놓고 건너 다닌다.
아우라지 나룻터 건너편 야산에는 구전되던 아우라지 강변에 얽힌 처녀총각의 애절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하여 정자(여송정)를 세우고 그 앞에 아우라지비를 건립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임을 알리고 있다. 또한 강물을 바라보며 떠난 님을 애절하게 기다리는 듯한 처녀상은 1987년 10월에 건립하였으나 현재는 '99년에 새로 제작되어 설치된 처녀상이다. 처녀상에 대한 실제 내용과는 달리 구전으로 전해오는 또다른 것은 1930년대. 강가 송천마을의 한 처녀가 강 건너 여량마을 총각과 사랑에 빠졌다. 결혼자금으로 고민하던 총각은 궁리 끝에 뗏목을 타기로 했다. 당시 떼꾼들은 목숨을 거는 일인 만큼 한달 수입이 150원. 군수월급이 15원이었다고 하니,‘떼돈 벌었다’는 말을 이 고장사람들은 ‘뗏목을 타고 번 돈’이라고 풀고 있다. 그러나 여량 총각은 험한 여울을 지나다 변을 당하고 말았다. 처녀는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우다 마침내 아우라지강에 몸을 던졌다. 그 뒤 아우라지에서 익사사고가 잇따랐는데, 처녀상을 세운 뒤에는 사고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태어난 노래에는 뗏목을 타고 떠나간 낭군에 대한 서럽도록 그리운 아낙네의 정한이 서려 있기도 하며, 강을 사이에 둔 처녀총각이 애정을 속삭이던 간절한 사연들이 담겨 있기도 하다.
아우라지에 얽힌 아리랑의 대표적인 가사가 다음과 같다.
-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싸이지. 사시장철 임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고개--로--나를 넘겨--주--게.
(정선은 또한 아리랑의 고장이다. 아리랑은 원래 '아라리'라고 일겉던 것이 세월이 흘러 '아리랑'으로 바뀐 것으로 '누가 나의 처지와 심정을 알리'에서 연유했다 한다)
-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사시장철 물살을 안고 빙글뱅글 도는데 우리집의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 왜 모르나
(스무살이 넘은 과년한 처녀가 여덟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과 결혼하여 2년이 넘도록 부부의 정을 느끼지 못했다. 이 처녀는 차라리 조양강에 몸을 던져 죽기로 작정하나, 무심히 본 물레방아가 물살을 안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어린 남편도 나이가 차면 남자구실을 하겠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한다)
5) 오장폭포(정선군 북면 구절리)
노추산(1,322m)남서쪽 줄기인 오장산에서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타고 송천으로 떨어지는 경사길이 209m, 수직높이 127m의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인공 폭포로서 가파른 암벽을 타고 흐르는 백색의 낙차 큰 물줄기의 시원스러움은 단연 압권이며, 초여름 폭포주위의 구곡천변에는 철쭉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룬다. 겨울철에는 빙벽타기에도 적격이다. 인근에는 아우라지, 자개골, 노추산 등 명소가 많으며, 관광객의 편의를 위하여 진입로 포장과 주차시설이 완료되어 있고, 화장실 1동도 설치되어 있다. 청기와 민박에서 구절리 9.km지점에 위치.
정선읍에서 국도 42호선으로 임계, 강릉방면으로 진행하여 북면으로 통하는 여량1교앞 아우라지주유소에서 구절방향으로 8번군도로 9.6㎞지점에 위치.(구절리역에서 2.5㎞ 지점)
6) 백전리 물레방아(강원도 민속자료 제6호)
물레방아는 물의 떨어지는 힘을 이용하는 동채방아와 흘러가는 힘을 이용하는 밀채방아의 두 종류가 있는데, 백전리 물레방아는 동채방아이다. 물레방아는 산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도정하는 수단이었으며, 화전민들의 애환이 담긴 중요한 생활용구였다. 이 방아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약 100여 년전에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주변지역 총 6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이 방아만 남아 있다. 방아는 백전리와 한소리 주민 20여 명이 방아계를 만들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주로 콩(메주), 고추, 옥수수를 빻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 방아는 약 50여m 떨어진 보에서 물을 끌어들여 사용하고 있으며, 보의 위쪽에는 많은 지하수가 솟아 나오는 용소가 있어 항상 풍부한 수량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방아시설은 크게 물레부분과 방아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방아는 물레 좌우에 십자목(놀림대)을 설치한 양방아로, 방아공이는 방앗간 내에 설치되어 있다. 물레의 회전축인 단면 방형의 궁굴대는 소나무, 십자목과 방아는 참나무, 궁굴대 양끝의 회전하는 부분은 다람나무로 만들었으며, 구유 수는 56개이다. 백전리 물레방아는 동면사무소 기점 동남방 약 12km 지점 우측 하천변에 있으며, 문헌 등의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지역 주민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말(1890년) 농경생활을 영위하던 토착민들이 자연의 힘을 이용, 농산물 가공을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하며 현재까지 정선군 동면 백전리와 삼척시 하장면 한소리 주민이 이용하고 있다. 방앗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로, 1992년에 새로 건립된 것으로 지붕은 대마의 속대공으로 씌운 저릅집이며, 벽체는 나무판자를 이용하였다. 내부에는 돌로 만든 2개의 방아확이 마련되어 있고, 방아의 크기는 물레가 직경 250cm, 폭 67cm, 구유높이 25cm, 궁굴대가 길이 385cm, 두께 25cm, 수로 길이 5m, 폭 60cm, 방아채 길이 440cm, 직경 12cm×16cm, 방아공이 146cm, 방아확 직경 70cm, 깊이 60cm이다. 이 곳 물레방아에는 약 600여 년 전부터 이 고장에 불려지기 시작한 정선아리랑 노랫말 속에 물레방아와 비유한 인간 삶의 애환을 노래한 구절이 많이 불려지고 있다.
7) 옥산장 전옥매 여사 수석이야기
돌과 이야기는 옥산장 주인 전옥매 주인아주머니가 15년에 걸쳐 주변 하천에서 주워 모은 수석을 전시하여 놓은 찻집이다. 사람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인생의 일대기를 연출해두었다.
그 외, 평생 한번 만나기 어렵다는 여러 개의 관통석 등 언뜻 보아도 귀한 수집품이라는 생각이 드는 수석들이 여러 점 있다. 또한 그 옆에는 굴피 천장을 얹은 흙으로 지은 전통가옥이 있어 골동품이 되어버린 옛 생활도구들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건물 뒤편의 야생화 정원 역시 자연의 향취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단체객이 올 때는 수석전시장인 통나무집에서 정선아리랑 공연도 자주 연다. 기암괴석이 갖가지 형태의 삶, 관통석, 숫자, 12지간지동물, 만남 등의 주제로 엮어서 전시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시골 아주머니라 생각되지 않게 아주 전문가적인 식견과 구수한 입담으로 수석이야기를 통해 자연의 섭리와 순리를 정감있게 들려 주며, 정선아리랑의 무형문화재의 한사람으로서 손녀딸들과 작은 공연을 해주기도 한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소개된 이후 유명세를 타고 있다.
8) 정암사(정선군 고한읍)
태백산 정암사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때 고승 자장율사가 당나라 산서성에 있는 청량산 운제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정골사리(頂骨舍利), 치아(齒牙), 불가사(佛迦裟), 패엽경(貝葉經)등을 전수하여 귀국하여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정암사 경내에는 적멸보궁과 보물 제 410호인 수마노탑, 천연기념물 제 73호인 열목어 서식지 등이 있다. 동왕 14년에 금탑, 은탑, 수마노탑을 쌓고 그 중 수마노탑에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유물을 봉안 후 건립하였다고 한다. 사찰 내에서는 도 지정문화재 자료 32호인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범종각, 육화정사, 요사채, 삼성각, 자장각 등이 있으며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410호인 수마노탑, 천연기념물 제 73호 열목어 시식지 등의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으며 한 때는 100여 명의 승려가 기거하였던 참선도량이었으나, 지금은 전국의 불자들이 찾아오는 적멸보궁의 영험깃든 기도처이다.
(적멸보궁)
정암사 적멸보궁은 우리나라의 오대 적멸보궁 중의 한곳으로 유명하다. 자장율사가 언덕 위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수마노탑을 쌓고, 언덕 아래에 건립한 건축물로 빛바랜 단청이 찾아온 이들에게 더욱 경건한 마음이 들도록 한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나 치아사리 등을 모시기 때문에 적멸보궁이 있는 절에서는 대웅전이 없고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자연석 세벌대 쌓기 기단위에 주초석을 두고 정면3칸, 측면2칸의 겹처마 팔각지붕 양식의 건물이고, 주심포 양식으로써 납도리에 장처를 두고 소로받침을 하였다.
※ 5대 적멸보궁 : 오대산 상원사, 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봉정암, 정선
정암사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지성으로 기도하여 문수대성으로부터 불정골 치아사리(佛頂骨齒牙舍利)와 불가사(佛迦娑), 폐엽경(폐葉經) 등을 받고 돌아와 창건하였으며,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불상을 모시지 않은 절로서 유명하다. 경내에 있는 수마노탑은 수마노석을 다듬어 쌒아 올린 탑으로 탑심에는 사리, 불지절(佛指節), 불장주(佛掌珠), 염주, 폐엽경 등이 봉안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대산에 들어가 수도하고 본국으로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자장율사의 불도에 감화되어 용궁으로 초청하여 수마노석을 선물한 것으로 탑을 쌓았다 한다. 모전석탑은 한중일 세나라에서 유독 우리나라에만 있는 형태의 탑이다. 우리나라에도 몇 곳밖에 없다. 경주 분황사, 부여 정림사지, 익산 미륵사지, 영양 봉감 5층, 제천 장락리 7층 등의 모전석탑이 있다.
(수마노탑) - 보물 제 410호
정암사의 가장 높은 곳, 적멸보궁 뒤쪽으로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만든 대지 위에 서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마노석으로 만든 탑이라 하여 마노탑이라고 한다. 전체 높이가 9m에 이르는 7층 모전석탑으로 탑 전체가 길이30~40cm, 두께 5~7cm 크기의 회색 마노석으로 정교하게 쌓아져 언뜻 보면 벽돌을 쌓아 올린 듯하다.
우리나라의 탑은 대부분 돌탑인데, 수마노탑은 전탑처럼 쌓아올렸지만 전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물속의 마노라고 부르는 수마노 돌을 벽돌처럼 잘라서 쌓은 전탑계 모전석탑(7층)으로 탑신부를 구성한 횡전재는 회록색의 석회암으로 크고 작은 모양의 직6면체를 질서 정연하게 쌓아올려 수법이 정교하며 표면은 잘 가공 되어 마치 벽돌을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탑에 가까이 가서 보면 두께 4~7cm, 가로 5~70여cm, 세로5~50여cm 정도로 다양한 크기의 모전을 어떻게 조합하여 쌓았는지 정교함이 기가 막히다. 돌의 색깔도 엷은 회색에서 짙은 회색까지, 아주 옅은 황토색까지 다양한데, 햇살에 따라 탑이 하얗게도 보인다. 땀 흘리며 계단을 올라 탑을 바라보면 햇살 때문에 생기는 음영이 신비롭기까지 하여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한다. 1층 옥신은 밑면이 178cm로 15단을 쌓아 높이 103cm 방형(方形)을 만들었고, 1층 옥신 남쪽면 중앙에는 감형을 설치하였는데 화강석으로 외경 폭 65cm, 높이 70.5cm, 외경 폭 41cm, 높이 59cm의 틀을 짜서 판석으로 문짝을 세워 2짝의 문임을 나타내고 중심에 쇠 문고리를 부착하였다. 옥개는 전탑의 전통적 형식인 추녀의 폭이 좁으며, 전각에서 살짝 들린 듯 하고 각층 전각 끝에는 풍경이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옥개의 체감 현상도 옥신과 마찬가지로 크지 않아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옥개 받침은 1층 7단부터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1단씩 줄여 7층에서는 1단이 되었고 윗면의 층단도 1층의 9단부터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1단씩 줄여 7층에서 3단이 되었다. 추녀에는 풍경이 있고 상륜부에 화강석으로 만든 노반이 있으며, 그 위에 모전재 2기을 얹어 청동제 상륜을 받치고 있다. 이 탑은 신라 사적기(史蹟記)에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 자장율사(慈裝律師)께서 정암사를 창건하고 7년 후에 수마노탑을 건립 하였다고 전하나 고려시대의 건립으로 추정된다. 사적(史蹟)에 의하면 태백산(현 함백산) 삼갈반지(三葛盤地)에 삼봉이 있으니 동은 천의봉, 남은 은탑봉, 북은 금탑봉이며 그 가운데 3탑이 있으니 첫째 금탑, 둘째 은탑, 셋째 마노탑 인데 금·은 두 탑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마노탑만 나타나서 전한다고 한다. 이후 조선 숙종 39년에 취봉당자인과 일종스님이 주동하고 천밀스님이 화주(化主)하여 그해 5월에 수마노탑을 중수하였는데 8월 15일 낙뢰로 인해 탑이 파괴되었으므로 6년 후에 천밀(天密)스님이 다시 발원하고 시주를 걷어 5층 탑으로 축조하였다. 그 후 영조 46년에 취암성우화상(翠岩性愚和尙)이 발원하여 은휴당시연과 단일당홍관이 협력하여 탑을 중수하고 찰우대를 조성하였고, 익년 5월에 낙성하였는데 원탑이 7층 동유장엄(銅鍮莊嚴)이 5층 풍경이 32구였다. 이 풍경은 바람만 슬쩍 불어도 맑은 소리가 공중에 가득 찼다. 그 뒤 백여 년이 지난 광무황제 9년에 얼암서보화상(蘖癌西寶和尙)이 탑이 기우는 것을 보고 발원하고 백일기도를 하였더니 탑 우측 부근에서 한 무더기의 마노 보석을 발견 하였다고 한다. 그때 봉은사에서 화엄경판(華嚴經板)을 조각하고 해인사 대장경을 인출한 남호영기 대사와 협력하여 동년(서기 1872년) 5월에 준공했다. 천밀스님이 이 탑을 중수할 때 금·은 식기(食器)에 사리를 담아 봉안 하였던 것이 탑과 함께 파괴 되었으므로 그 속에서 염주 81교와 금주 5교 등을 걷어 1층 탑신에 안장하고 7층탑으로 축조하였는데, 그 뒤에 49보령(寶鈴)이 하늘에 솟는 듯 했다고 한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나 탑이 도괴 직전에 놓여 1972. 11. 8.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에서 완전 해체 복원하였으나 광산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지역의 특성상 지반이 침하되고 탑의 균열이 심화. '96년 기단석 이상 전면을 해체 보수 및 탑 보호시설·진입로를 정비하였다.
9) 기타 문화재
구미정 : 면 소재지에서 6km 떨어진 봉산리에 위치하고 있는 구미정은 300년 전 숙종시대 사정 공조참의 벼슬을 지낸 이자선생이 당시 노론파로 사색당파 싸움에 회의를 느껴 관직을 사직하고 은거하던 곳으로 정자 주위에 9가지 특색의 비경이 있다 하여 구미정 이라고 이름 지었다. 구미정은 골지천에서 가장 풍광이 뛰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12평의 자그마한 규모지만 자연을 음미하고 풍류를 즐기기에 적당하며, 송림으로 이루어진 수려한 자연환경과 종합캠핑장이 조성되어 단체 및 가족단위의 캠핑장으로 적격지이다.(임계면 봉산3리)
*.九美 : 어량(漁梁),전주(田疇),반서(般嶼),층대(層臺),석지(石池),평암(平岩),등담(燈潭),취벽(翠壁),열수(列岫)
애산산성 : 선군 정선읍 애산1리 소재 성으로 둘레가 약 360m, 높이 2.4m, 폭 3.6m의 타원형이었으나 지금은 길이 3m, 높이 2.3m정도의 두 곳만 남아있고 그 외는 전부 허물어져 있다. 이 산성의 축조 연대는 신라 또는 고구려 때로 추측하나 확실한 연대는 알 길이 없다. 이 성에 올라가면 북으로 덕송리 반점고개와 서쪽으로 정선읍 시내 일대와 동남으로 신월리 일대가 한눈에 지형이 돌입(突立)하여 삼면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험준한 석벽으로 되었고 후면은 사람과 말이 겨우 통할 정도로 협소하여 천연의 요새지로 본 군의 읍내를 수호하는 데 없어서 안 될 산성이다. 이 산성에는 옛날 샘물이 있고 암자가 있었는데 이 암자를 지키고 있던 노파의 꿈에 황새 한 마리가 샘물에서 날아 올라가 맞은편에 위치한 기우산에 앉은 꿈을 꾸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샘물에 가 보니 황새가 앉은 자리에 전에는 없었던 샘물이 솟으므로 물두득(水出嶝)이라 불려온다는 전설도 있다.(정선읍 애산리)
송계산성 고분군(장찬성) : 지방기념물 제70호로 산성은 일직선으로 약 630m가량의 석성이 남아 있으며, 끝부분엔 고분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임계면 송계리)
화암리소나무 : 지방기념물 제66호로 높이 11m, 둘레는 3.92m이며 수령은 약 1,300년 정도로 추정된다. 화표사의 승려가 죽어 그 묘에서 자라난 소나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승려의 혼이 내려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지석묘군 : 송천과 임계에서 내려오는 골지천이 합수되는 퇴적된 평야에 위치하며, 5기의 지석묘가 있는데 이중 2기는 완전히 보이고 3기는 반쯤 땅에 묻혀 있다.(북면 여량리)
장방형의 덮개돌을 사용한 남방식의 지석묘로 성혈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북평면 남평리)
고성산성 : 고방부락 북서쪽 해발 425m 산중턱에 테를 두른 듯 축조된 석성으로 성의 형태는 원형으로 성곽이 전면 연결되지 않고 석축과 토루로 나누어 공간을 두고 있다.(신동읍 고성리)
고석책대(高石責臺) :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道田里)에 고석책대가 소재해 있다. 이 고석책대는 신라 신무왕 원년(서기 561년)에 의상(義湘)대사가 대(臺)를 쌓고 수도한 곳이다. 의상은 신라 문무왕 때의 중으로 화엄종의 시조이며, 644년(선덕여왕 13년)에 황복사에서 중이 되어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전한다. 1968년 이곳에서 이 마을에 거주하는 권오범이란 사람이 청동부처를 습득한 일이 있는데 이는 옛날 이곳이 수도승의 암자등이 있었다는 것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본부락 사람들은 이 고석책대를 가르쳐 일명 도전리 암자골 선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삼경바위 : 정선군 북면 고양리 안골(일명 노고마니) 뒷산 북방쪽 4키로지점(해발 : 450m)에 있는 삼경바위는 높이 3미터 가량의 화석암으로 주변은 기암절벽과 산철쭉, 임계천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옛부터 이 바위는 국가의 큰 재난이나 재해를 예견하여 울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 실례로 1950년 6·25사변과 1968년 1월엔 김신조일당의 청와대 기습과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서거시 징소리 비슷한 음을 내며 바위가 울었다고 전해진다.
3. 정선의 문화체험
1) 정선아리랑
㉠ 유래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정서와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대표적인 민요다. 민족의 동질성이 끈끈하게 배어있는 아리랑은 시대를 반영하고 지역공동체의 정서를 대변하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져왔다. 신나라 김기순 회장은 "아리랑의 참된 의미"라는 글에서 "아리랑 속에는 인간의 모든 아픔과 갈등, 그리고 용서와 화해, 그리고 강력한 저항과 울분이 녹아 있습니다. 아리랑은 그냥 노래가 아닙니다. 아리랑은 삶과 죽음의 소리입니다. 아리랑은 정신을 토해 내는 울부짖음이요, 천하를 가슴에 품고 용서하는 해원의 소리인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 겨레의 4대 아리랑은 누구나 서울의 <본조아리랑>, 강원도의 <정선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전라도의 <진도아리랑>을 꼽는다. 기교가 빼어난 진도아리랑은 낭창낭창 신명이 절로 일고, 남성적인 밀양아리랑에는 투박한 멋이 담겨있으나, 유장한 가락에 정감이 묻어나는 정선아리랑은 가장 토속적인 한국의 소리다. 따라서 강원도의 <정선아리랑>을 아리랑의 원형을 간직한 본류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기록상 4천여 수의 가사가 전해 오고 있고, 노래의 전승체계도 변함없이 이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정선아리랑>을 사람들은 "아리랑 중의 아리랑"이라고 한다. <정선아리랑>을 주제로 한 고숙경의 석사논문 '정선아리랑에 관한 연구'에도 "동부지방의 민요에 속하는 강원도 지방의 정선아리랑을 택한 이유는 정선아리랑은 각 지방의 많은 아리랑 중에서 그 기원이 가장 오래되었고, 가락과 선법에서 한국 민요의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우리 민족의 감정 또한 가장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정선아리랑>은 다른 노래들과는 달리 가사가 고정되지 않고, 삶 속에서 꾸준히 창조되어 온 노래이다. 또, 삶 그 자체임은 물론 사람들의 감정이나 마음에 맺힌 것을 걸러 주고, 풀어 주는 노래라고 말한다.
정선(旌善)아리랑은 ‘아라리’라는 이름으로 정선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 충북지역, 경기도 동부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구비전승 되어왔다. 정선아리랑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조선시대 초기(朝鮮 初期)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고려의 대표적인 충신은 72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김위, 전오륜,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신안, 변귀수 등 일곱 충신은 벼슬을 버리고 개성에서 정선 남면 낙동리로 들어와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죽을 때까지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켰다. 그들이 살던 동네가 지금의 정선군 남면 거칠현동(居七賢洞)이다. 이들은 지난날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忠節)을 맹세하여 일생 동안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입지 시절의 회상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심정(心情)을 한시(漢詩)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곤 했다. 이들이 지어 비통(悲痛)한 심정을 담아 부르던 시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던 소리 가락에 실려 애절함을 더해갔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던 조선 후기부터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자 명맥을 이어온 정선의 소리에 “아리랑 아리랑...”이라는 음율을 붙여 부르면서 ‘후렴구’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선아라리’ 또는 ‘정선아리랑’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사람들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民族)의 서러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담아 불렀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이 분단되자 반공(反共)의 분위기를 드러냈고,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아 부르기도 했다. 정선아리랑에는 시대정신이 그대로 배어있다. 그러면서 남녀간의 사랑과 그리움, 남편에 대한 원망, 시집살이의 서러움, 고부간의 갈등, 산골마을의 지난한 삶, 뗏목 타는 일의 고단함과 유희 등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렇게 구전되어온 정선아리랑은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강원도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유산이 되었고, 체계적인 전승과 보전으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수많은 아리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특색
첫째, 이 민요는 오래 전까지 아라리로 불려왔으며 그 가락은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니고 있다. 둘째, 다른 민요와 같이 한가지의 일이나 하나만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부른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시대(時代)의 흐름에 따라 인간상을 노래한 것이다. 셋째, 그때그때의 지닌 감정을 속임 없이 전래(傳來)의 가락에 맞추어 부름으로써 가사(歌詞)가 많다.
넷째, 합창이 아니고 뜻이 통하는 노래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르고 혹 후렴을 달아서 합창하는 예도 있다. 다섯째, 자연과 인생을 비유하여 노래한 것과 진리(眞理)를 노래한 것이 많다. 여섯째, 율창으로 부르던 한시(漢詩)는 전하지 않고 풀이되어 부르던 노래만 전한다.
일곱째, 낙향(落鄕) 선비들에 의해 불려진 노래는 한시가 인용된 것이다. 여덟째, 장소를 가려서 동년배(同年輩)들 끼리만 부르는 외설적인 노래도 있다. 아홉째, 한문을 숭상(崇尙)하던 지난날이었기에 체계적으로 남겨진 기록(紀錄)이 없다. 열번째, 다른 지방(地方)으로 흘러 나간 정선아리랑의 가락은 많은 변천을 가져오며 그 지방의 아리랑으로 지금도 흘러 퍼지고 있다. 현재 채록된 정선 아리랑은 생활편 317곡(27%), 인간관계편 347곡(29%), 이성편 136곡(12%), 환경편 157곡(14%), 기타 185곡(16%) 등 총 1,200여수가 발굴 전해지고 있다. 창 기능보유자로는 최봉출, 유영란, 김병하 씨가, 전수교육 보조자로는 김남기, 김형조, 김길자 씨가, 전수장학생으로는 홍동주, 신기선, 정도진, 전금택, 배귀연, 김순덕씨가 일반 전수자로는 박봉석, 이승열, 이순옥 등이 아리랑의 폭넓은 전승 보급을 위하여 활동하며 이들이 전수회를 구성 매주 수요일 정선 문화예술회관에서 개강하는 전수교실 참여 및 관내 초·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활발한 전수활동을 하고 있다.
㉢ 수심편(愁心篇)
▶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후 렴>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넘겨 주게.
▶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피며 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울어<후 렴>
이 가사는 정선 아리랑의 시원을 이루는 노래로서 지금부터 600여 년전 려조(麗朝)가 망국함에 벼슬하던 선비들이 이를 비관하고 송도(松都) 두문동(杜門 洞)에 은신하다가 이곳 정선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지금의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居七賢洞)과 백이산(伯夷山)을 왔다 갔다 하며 고려가 그냥 망하고 말것이냐 혹은 다시 재기할 것인지 궁금히 생각하면서 송도에서 험악한 구름이 모여드는 시운(時運)을 한탄하고 쓰라린 회포를 달래며 부른 노래이고 대사 는 이러한 시국이 아니라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쓸쓸한 이 산중에서 울부짖으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닌 것은 이러한 탄식과 설움에 연유한 것이다.
▶ 강초일일(江草日日)에 환추생(喚추生)하니 강물만 프르러도 고향생각 나네.
▶ 무협(巫峽)이 냉냉하여 비세정하니 인생차세(人生此世)에 무엇을 하나 <후 렴>
이 노래는 고려조가 망함에 불사이군의 충의를 지키기 위하여 정선에 낙향한 선비들이 부른 노래로 그들이 겪고 있는 쓰라림이 마치 오랜 옛날 중국 당현종 (唐玄宗)대에 서촉(西蜀)으로 쫓겨나서 갖은 고생을 다한 두보의 처지와 같으므로 두보의 시에다 그들의 심정을 첨가하여 부른 노래이며, 정선에 와서 첫봄 을 맞으니 지난날에 영화롭던 시절의 회상과 이러한 산중에 와서 남아로 국가운명을 바로 잡지 못하고 은신만 하고 있는 자신들의 신세를 부른 노래다.
㉣ 산수편(山水篇)
▶ 정선의 구명은 무릉도원 아니냐. 무릉도원은 어데 가고서 산만 충충하네.<후 렴>
이 노래는 고려 충열왕시 정선을 도원이라 호칭하였을 때 읍터가 남면 증산에 있다가 그 후 공민왕시대 읍터는 정선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 고장을 산자수려(山紫水麗)하고 인심좋아 사람이 살기좋은 선경이라 하여 무릉도원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이 노래는 읍터가 증산에서 정선으로 옮겨진 후 증산 일대의 쓸쓸한 모습을 읊은 것이다.
▶ 아질아질 성마령이 야속하다 관음베루 지옥같은 정선읍내 10년간들 어이 가리
▶ 아질아질 꽃베루 지루하다 성마령 지옥같은 이 정선을 누굴따라 나 여기왔나
이 노래는 조선 중엽 이 고을에서 선정(善政)을 베푼 오홍묵(吳홍默) 군수 부인이 지었다는 노래로서 원님 부임시 가마를 타고 남편을 따라 정선으로 오는 데 높고 험한 성마령을 넘고 지루한 관음베루를 지나는 동안 생전 처음 지나보는 험한 길이여서 한탄하며 울고 들어온 심정을 읊은 노래라 하며, 옛날 이 고 장에 부임한 군수들은 처음 올 때에는 산골에 간다는 서러움과 부임도중 길이 험하여 울면서 들어왔고 여기서 살아보니 산수가 좋고 인심이 좋아 다른 어느 곳보다도 정이 들어 살다가 다시 떠나려 하니 떠나기 싫어서 울고 떠났다 하여 「울고 왔다 울고 간다」는 곳으로 이름 지어졌다.
㉤ 애정편(愛情篇)
▶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싸이지 잠시잠간 임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후 렴>
이 노래는 지금부터 70여 년 전 북면 여량리(餘糧里)의 한 처녀와 유천리(柳川里)의 한 총각이 서로가 사랑을 속삭이던 어느 가을철,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 하여 고요한 산 속에서 사랑도 속삭이고 동백도 따기 위하여 싸리골에 갈 것을 약속하고 밤을 지나고 이른 아침 나루터에 와보니 간밤에 내린 폭우로 강물 이 불어 나룻배를 건널 수 없게 되었음에, 처녀 총각은 부득이 강 양편에서 서로 건너다보며 불타는 연정을 읖은 것이 이 노래라고도 하며 또는 당시 이 강 의 뱃사공이던 지유성(池有成 별명 : 지장구아저씨)이 이러한 사연을 눈치 채고 그 애달픔을 대신 불러 주었다고도 한다.
㉥ 처세편
⊙ 근면(勤勉)
▶ 금전을 주어도 세월은 못사나니 알뜰한 세월을 허송치 맙시다.
▶ 청춘도 늙기 쉽고 늙으면 죽기도 쉬운데 호호백발 되기 전에 부지런히 일하세
80여 년 전 정선읍내에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자라 10여세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늦게 장가를 가니 살아감이란 가난하기 그지없으나 다행히 부부의 뜻이 맞아 서로가 위로하며 격려하여 남과 같이 잘살아 보려고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애써 10년간 꾸준히 일을 하니 집과 텃밭을 마련하게 되고 다시 10년 후 남부럽지 않는 살림살이를 꾸미게 되었다. 이들 부부가 일한 보람을 느낀 10년 후부터는 복(福)은 근면한데 있다는 것을 신조(信條)로 삼아 이 노래를 지어 부르며 일했으며 주위의 게으른 사람들을 계도하였다는 노래라 한다.
⊙ 고부(姑婦)
▶ 시집 온지 사흘만에 바가지 장단을 쳤더니 시아버지가 나오시더니 엉덩이 춤만 추네
▶ 시어머니 죽어지니 안방 넓어 좋더니 보리방아 물 줘보니 시어머니 생각나네
옛날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사이는 어딘가 모르게 서로가 말 못하며 미워하는 사이도 많았던 것 같다. 가풍이 다른 집에서 며느리를 데려와 사람을 만들자니 모진 소리로 일을 시켰으므로 시집살이를 다한 며느리들이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털어놓으니 익살을 부려 부른 노래이다.
⊙ 찬유(讚遊)
이 고장의 아름다운 산천 속에서 풍월(風月)을 벗 삼으며 풍류(風流)를 즐기던 선비들의 한시에 못지않게 평범한 농민들이 계절 따라 일어나는 소박한 흥취(興趣)에 가락을 부쳐 읊은 것이 곳곳에 남아 있는가 하면, 술을 좋아하며 즐기는 주객들이 술집에서 술잔을 함께 주고
받으며 취기를 노래한 것도 있다.
▶ 오동나무 팔모반에 사기잔을 놓고서 가는 손 오는 손님들 만족히나 들고 가시오.
▶ 삭달가지를 똑똑 꺾어서 군불을 때고서 중방 밑이 다타도록 놀다가 가세요
⊙ 후회(後悔)
▶ 신발 벗고 못 갈 곳은 참밤나무 밑이요 돈 없이 못 갈곳은 행화촌(杏花村)이로다.
▶ 술 잘먹고 돈 잘 쓸때는 금수강산일러니 술 못먹고 돈 떨어지니 적막강산(寂寞江山)일세 이 노래는 500여 년 전 정선읍에 살던 부자집 외아들이 귀엽게 자라다가 20이 넘어서는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니 몇 년 안가서 가산(家産)을 탕진하고 패가망신하고 말았다. 술을 잘 마시고 돈을 잘 쓸 때에는 세상이 모두 자기의 것 같고 애인과 친구도 많더니 가산을 탕진하고 돈 없는 거지 신세가 되니 전에 그렇게 다정하게 굴 던 술집 아가씨도 돌아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친구며 이웃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냉대함에 뒤늦게 지난날을 뉘우치고 주위의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길을 다 시 밟지 말 것을 바라며 부른 노래라 전한다.
㉦ 무상편
⊙ 석로(惜老)
▶ 세월아 네월아 나달 봄철아 오고 가지 말아라 알뜰한 이팔 청춘이 다 늙어를 간다.
▶ 월미봉 살구 나무도 고목이 덜컥 된다면 오던새 그 나비도 되돌아 간다.
이 노래는 늙기를 서글퍼서 부른 노래들이다.수려(秀麗)한 강산은 변함이 없으나 그 중에 사람만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이팔청춘도 늙어가고 늙은 사람은 괄세와 서러움을 받다가 사라져 감을 서글퍼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이다.
⊙ 미망(未忘)
▶ 높은산 정상 말랑에 단독이나 선나무 날과야 같이로만 외로이만 섰네
▶ 명사십리(明沙十里) 해당화야 꽃진다고 슬퍼말아라 공동묘지 가신 낭군은 명년(明年)에 도 못온다.<후 렴>
이 노래의 작가는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인생의 고독과 노과부(老寡婦)의 신세타령으로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더욱이 젊어서 사랑하는 남편을 여의고 여생을 홀로 살아가는 여자로서는 죽을 때까지 되씹어야 할 애절한 그리움과 허무함이 말할 수 없음을 슬퍼하여 부른 노래들이다.
⊙ 팔자(八字)
▶ 물 한 동이 여다 놓고서 물그림자 보니는 촌살림 하기는 정말 원통 하구나
▶ 강물은 돌고돌아 바다로 나 가지요 이 내몸은 돌고돌아 어디로 가나 <후 렴>
이 노래는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또는 자신들의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을 근심하고 지금의 의지할 곳 없음을 한탄하며 부른 노래다. 그 후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부르고 있다.
㉧ 엮음편(엮음아리랑)
엮음아리랑은 위의 각 편에 수록되어 있는 가사와 같이 짧은 말로서는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感情)을 다 나타낼 수 없을 때 또는 욕을 하고 익살을 부릴 때에 한 가지 사물에 대하여 여러 가지 표현을 하며 가사(歌詞)를 길게 엮어 부르는 노래로서 노래의 처음은 빠른 음절(音節)로 엮어 내려가다가 뒷 절에 가서 아리랑의 본 곡으로 불리어지는 것으로서 「엮음아리랑」이라 한다. 지금 국내 일부 가수가 방송을 통해 부르고 있는 정선아리랑은 본래의 곡과는 아주 달라 이 고장 사람들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
▶ 우리댁의 서방님은 잘 났던지 못 났던지 얽어매고 찍어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헐게 눈에 노가지 나무 뻐덕지게 부끔떡 세 쪼각을 새뿔에 바싹 매달고 엽전석냥 옷집지고 강릉(江陵) 삼척(三陟)으로 소금사러가셨는 데 백복령 구비구비 부디 잘다녀 오세요.<후렴>
▶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자자 봉봉에 칠성단을 모아놓고 겉돈벌라고 산제 불공을 말고서 힘내힘내 일을 하여 자수성가 합시다.<후렴>
이 외에도 정선아리랑은 5백 여곡이 채집돼 보존되어 오고 있다.
정선아리랑은 구전(口傳)된 소리이기 때문에 문헌상 자세한 기록이 없다. 1971년 정선아리랑이 강원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정선아리랑 소리꾼이라 하면 주로 마을에서 소리를 잘해 입소문이 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정선아리랑의 굵직한 계보는 일제강점기 당시 고명덕, 김천유, 박순태, 정명노와 같은 걸출한 소리꾼으로부터 시작되어 최봉출, 나창주, 박사옥 등과 현재 활동 중인 소리꾼으로 이어지고 있다.
*. 3대 정선아라리 전승
<정선아리랑>에 대해 독자성을 가지고 3대를 이어온 가족이 있다. 1989년 83세로 사망한 1대 정옥선, 61살로 투병 중인 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명예예능보유자 2대 김병하, 그리고 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예능보유자이며, (사)정선아리랑보존회 이사장인 3대 김길자가 그들이다. 1대 정옥선은 많은 일화가 있다. 예를 들면 소를 몰던 사람이 모친의 정옥선의 아라리 소리에 넋을 잃어 그만 소가 귀리 밭에 들어가 밭을 다 절단낸 적이 있다는 얘기나 돌다리를 건너던 이가 모친의 소리에 취해 그만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져 버렸다는 얘기 등이다. 이런 소리의 소유자였으니 두말할 나위 없이 나라가 인정하는 예능보유자가 된 아들과 손녀의 소리내력을 짚어 준다. 또 2대 김병하는 시인 고은이 말했듯 "김병하의 낭낭한 목청은 우리가 넘어온 성마령 쪽에 대고 정선아라리 청승의 극치를 보여준다"라는 평가를 듣는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런 일이 있어도 아라리 한 자락 멋들어지게 하고 나면 가슴이 확 트입니다. 아라리를 부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신명이 나요. 알 수 없는 기운이 쑥쑥 올라 오는듯 하지요"라는 김병하에게서 우리는 신명으로 가득 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리랑에 발자취가 뚜렷했던 김병하는 1995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더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고 대신 3대 김길자에게 아리랑은 넘어갔다.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본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는 그녀를 투병 중인 아버지와 신경통 등의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효성 지극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는 "그녀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그의 소리는 감동을 준다. 가슴을 아프게도 하고 눈물을 짓게도 한다. 그럼에도 청승맞지는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3대 김길자가 와병 중인 아버지의 회갑을 맞아 헌정하는 음반 <아리랑 명가 3대의 정선아라리>(신나라)를 통해 내놓았다. 이 음반의 첫 장에는 할머니 정옥선과 아버지 김병하 그리고 할머니의 이종과 고종 사촌들과 함께 벌인 소리판이다. 특히 장고 반주에 의한 소리와 향피리 연주도 있다. 사설은 약 80여 수인데 이들 자료는 거의 80년대 말에 카세트에 담은 것으로 상태가 고르지는 못하다. 두 번째 장은 김길자씨의 소리로 부친에게 바치는 헌정곡을 먼저 담고, 무반주와 반주에 의한 긴소리, 자즌소리, 엮음소리를 담았다. 특히 잦은 소리는 물박장단(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치는 장단)과 함께했다.
2) 정선아리랑연수관(여량리186-1(560-2897)
아리랑 전수관은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성아리랑을 보존, 육성하고 향토고유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01년 10월 7일 건립되었다. 정선(旌善)아리랑은 "아라리"라는 이름으로 정선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 충북지역, 경기도 동부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구비전승 되어온 민요다. 정선아리랑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조선시대 초기(朝鮮初期)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가 망한 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다짐하던 선비들이 송도(松都)에서 은신하다가 그 중 7명이 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들은 지난날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忠節)을 지키며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입지 시절의 회상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심정(心情)을 한시(漢詩)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곤 했다. 이들이 지어 비통(悲痛)한 심정을 담아 부르던 시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던‘소리’에 실려 애절함을 더해갔다.
정선아리랑이 지금과 같이‘아리랑’또는‘아라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은 조선조 후기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던 조선 후기부터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자 명맥을 이어온 정선의 소리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음율을 붙여 부르면서"후렴구"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아라리"또는"정선아리랑"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그후 일제강점기 당시 사람들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民族)의 서러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담아 불렀다.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반공(反共)의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한민족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아 부르기도 했다. 이와같이 정선아리랑에는 시대정신이 그대로 배어있다. 그러면서 남녀간의 사랑과 그리움, 남편에 대한 원망, 시집살이의 서러움, 고부간의 갈등, 산골마을의 지난한 삶, 떼타는 일의 고단함과 유희 등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렇게 구전되어온 정선아리랑은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강원도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유산이 되었고, 체계적인 연구와 전수는 물론 다양한 활동으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수많은 아리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3) 정선아리랑학교
정선아리랑학교는 정선아리랑의 전승 보존과 교육을 위해 정선아리랑연구소(소장 진용선)에서 운영하는 학교이다. 1993년 여름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어 아리랑을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1997년 7월에는 <정선군 폐교 문화공간화 사업지원 계획>에 따라 현재의 위치인 정선군 신동읍 방제1리의 매화분교를 무상으로 임대받아 사용하고 있다. 정선아리랑학교는 그동안 강원도 폐교활용 평가 우수학교(1999), 폐교 문화공간화 사업의 모델학교(2000), 환경부 체험학습프로그램 지원학교(2000),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외국인을 위한 한국문화캠프지 선정(1998,1999,2001)등의 평가를 받을 만큼 폐교를 활용한 문화공간화 사업의 모델학교로 인정을 받아 교육관계자는 물론 외국 문화관계자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정선아리랑학교에서는 아리랑과 정선아리랑의 이해, 정선아리랑 배우기, 정선아리랑 현장 교육을 기본으로 참가자들이 다양한 체험을 통해 아리랑과 정선아리랑을 즐겁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4) 아라리촌
위 치 : 정선군 정선읍 애산리 560번지 일원 면 적 : 34,722㎡(10,503평)
입장료 : 2004년 10월 ~ 군직영시범운영기간까지 무료입장 전 화 : (033) 560-2059
정선읍 애산리 일원 10,503평 부지에 정선의 옛 주거문화를 재현한 아라리촌이 있다. 전통와가와 굴피집, 너와집, 저릅집, 돌집, 귀틀집의 전통가옥 6동과 주막, 토속매점 등이 조성되어 있으며, 지금은 보기 드문 물레방아와 통방아, 연자방아, 서낭당, 농기구공방, 방앗간 등의 시설도 볼 수 있다. 저릅집, 귀틀집, 굴피집에서는 민박체험이 가능하며, 정선5일 장터에서 섭다리를 건너 아라리촌을 방문하는 것도 이색 체험이 될 것이다.
㉠ 굴피집 : 안방, 사랑방, 도장방과 대청, 정지, 외양간으로 구성된 주거형태이며, 원시형 산간지방 가옥으로 정선, 강릉, 양양, 평창 지방의 마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굴피집은 참나무(상수리나무)껍질인 굴피로 지붕을 덮은 집으로서 보온이 잘되고 습기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매우 춥고 여름에 비가 많이 오는 기후에 안성맞춤이다.
㉡ 너와집 : 2백년 이상 자란 소나무토막을 쪼갠 널판으로 지붕을 이은 정선지방의 전통민가로서 안방, 건넌방, 사랑방과 도장방, 대청, 부엌, 봉당, 외양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에는 정선지방의 특징적 용구인“화티”가 있는데, 이는 부뚜막 귀퉁이에 진흙을 이겨 쌓은 것으로 두 개의 구멍 중 위쪽에는 불을 피워 조명을 대신하거나 음식을 끊이는데 쓰고, 아래쪽은 불씨보관용도로 쓰였다.
㉢ 저릅집 : 정선지방의 전통 민가 중 하나로 안방과 윗방, 도장방, 정지, 외양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릅집은 대마(大魔)의 껍질을 벗기고 난 줄기를 짚 대신 이엉으로 이은집을 일컬으며 겨릅집이라고도 한다. 주로 정선과 삼척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속이 빈 저릅 대궁이 단열재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 돌 집 : 정선지방의 독특한 가옥 형태로 안방, 윗방, 사랑방, 도장방, 그리고 정자와 외양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돌집은 얇은 판석(板石)을 두께2㎝ 정도의 돌기와로 지붕을 덮어 올린 집으로, 주로 정선지방 산기슭에 매장된 청석맥을 파내어 이용하였다.
㉤ 귀틀집 : 목재가 풍부한 산간지대의 주민들이 짓고 살던 원시주거의 한 가지로 안방과 윗방, 정지, 헛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껍질을 벗긴 통나무를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쌓아 올려 벽체를 삼으며, 나무 틈새는 진흙으로 메워 짓는다. 많은 적설량에도 견딜 수 있고 온도유지가 용이할 뿐 아니라 간편하게 지을 수 있어 산간지대의 화전민들이 오래 전부터 이용하여 왔다.
5) 정선의 5일장
매월 2, 7, 12, 17, 22, 27일에 열리는 정선5일장은 도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재미와 정겨움을 맛볼 수 있는 재래 장터이며, 시골에서 나는 농산물과 공예품, 먹거리를 바구니에 담아 팔고 있는 할머니 난점 상인을 볼 수 있는 시골장이다.
㉠ 5일장 난전 쇼핑
봄날 : 달래, 냉이, 씀바귀, 황기, 곰취, 참나물, 드릅 등 무공해 산나물이 좋으며, 각종 산채 음식을 통해 봄을 물씬 느낄 수 있다.
여름 : 다이어트에 그만인 올챙이국수, 찰옥수수, 황기백숙 등을 맛보고 영지버섯, 마늘, 메밀쌀 등이 좋다.
가을 : 산초, 신배(돌배), 고추, 황기, 더덕, 골뱅이, 감자, 머루, 다래 등 싱싱한 여러 가 을걷이들을 접할 수 있다.
겨울 : 따뜻한 감자떡, 옛날찐빵, 민물고기매운탕, 수수노치, 전병, 메밀 부치기와 함께하는 옥수수술은 추운 날씨에 입맛을 돋우기에 제격이다.
㉡ 5일장 음식기행
토속음식 : 곤드레밥, 콧등치기, 황기백숙, 올챙이묵, 산채정식 등
곤드레밥 : 곤드레나물을 넣어 지은 밥으로 간장, 고추장, 된장 등으로 비벼먹는 건강식임.
콧등치기 : 메밀국수로 여름에는 시원하게 먹어 메밀의 특성상 국수가 딱딱하게 되어 콧등을 친다하여 콧등치기라 불리며, 겨울에는 따뜻하게 먹어 느름국이라 불림.
황기백숙 : 정선의 주 특산물인 황기를 넣어 끓인 백숙임.
올챙이묵 : 옥수수로 만들며 모양이 마치 올챙이 같다하여 지여진 이름임.
산채정식 : 정선에서 나는 갖가지 산나물을 맛보실 수 있음.
㉢ 먹을 수 있는 곳 : 장터 내 먹자골목 및 난점 음식점, 정선읍 소재 음식점
6)정선레일바이크
정선군이 관광레저 상품으로 개발한 레일바이크는 석탄산업의 쇠퇴와 함께 정선선의 운행가치가 떨어져 폐쇄된 철로를 활용한 것으로, 페달을 밟아 체인으로 바퀴를 움직이는 자전차를 뜻하는데, 미국 서부 골드러시 시절 기능을 잃은 버려진 철로를 이용하여 바이크를 즐기기 시작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름도 생소한 레일바이크는 페달을 밟아 철로 위를 달리는 네 바퀴 자전거로 유럽의 산악관광지에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철도((Rail)와 자전거의 약칭(bike)을 합친 말이다. 아우라지를 거쳐 구절리까지 달리던 철마는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기적이 끊긴 철길에는 새로운 레포츠로 각광을 받는 레일바이크가 정선아리랑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절경을 지나다닌다. 정선군청과 한국철도공사, KTX 관광레저가 함께 운영하는 레일바이크는 2인용(무게110kg)과 4인용(138kg)이 있으며, 커다란 몸체와는 달리 부드럽게 움직이기에 4인용 레일바이크를 한사람이 페달을 밟아도 잘 달린다. 시속 10~30km까지 낼 수 있고, 바퀴가 4개라서 넘어질 염려도 없으며, 뒷차와 부딪혀도 간이 범퍼가 있어서 안전하다. 노추산의 비경과 오장폭포를 둘러본 다음 구절리역안 여치의 꿈 카페에서 다정한 삶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레일바이크를 타고 아름다운 송천계곡을 지나가면 철길과 강의 양쪽에 늘어선 기암절벽과 정겨운 농촌풍경이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레일바이크의 출발지는 구절리역이며 종착지인 아우라지역까지는 7.2km이다. 레일바이크는 시속 10-30km의 속도로 달릴 수 있으며, 주변경치를 여유있게 즐기려면 시속 15km정도로 가는 것이 좋다. 정선 레일바이크는 전국에서 가장 긴 코스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가까이 앉아서 페달을 밟도록 설계되었으며, 운전 중에 한눈을 팔거나 휴대전화를 걸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르막이 없는 내리막길이라서 4인용 레일바이크를 혼자 페달을 밟아도 힘이 들지 않는다.
===<요금> 2인용 15,000원(단체-13,500원), 4인용 20,000원(단체-18,000원)
===구절리역~아우라지역(7.2km-50분)
===KTX관광레저(주) 033-563-8787,1066/정선군청 문화관광과 033-560-2365
*. 여치의 꿈 카페
구절리역에서 레일바이크를 타기 위해 기다리다 보면 역의 한 구석에 무척 커다랗고, 강철다리를 자랑하는 여치 한 쌍이 있다. 산 깊고 물이 맑은 구절리역 주변 경치와 어울리는 곤충 여치가 한 여름에 멋진 노래를 들려주듯이, 여치의 꿈 카페는 관광객에게 여행의 기쁨을 안겨준다. 무궁화호 객차를 이용해서 만든 여치의 꿈 카페의 암놈(아래층)은 스파게티 전문점이며, 수놈(위층)은 카페이다. 카운터 방향의 테이블에 앉는 것이 송천의 아름다운 경치가 보여서 전망이 좋다.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면 멋진 추억이 될 것이다.
7) 정선아리랑열차
2002년 태풍 루사로 심한 피해를 입었다가 2004년부터 증산-아우라지를 운행하는 열차는 객차 내부를 카페처럼 꾸며 2량짜리 열차로 탈바꿈하였다. 흔히 꼬마열차 또는 정선아리랑 유람열차라고도 한다. 정선, 나전, 아우라지역도 태마별로 멋지게 단장을 하여 철도여행의 흥겨움을 한층 높여 관광객의 호응이 무척 높다. 정선역을 출발한 열차는 유유히 흐르는 조양강변을 따라 나전역까지 조양강이 넉넉하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선사하고, 특히 나전과 아우라지 구간은 꼬마열차 운행구간 중 가장 차창 밖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조양강 상류의 빠르게 흐르는 물줄기와 산들 사이를 잇는 철교와 짧은 터널을 여러 곳 지나가는데, 그때마다 창밖으로 순간순간 비쳐지는 비경은 관광객들의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한다.
※ 증산역에서 아우라지까지 하루에 3회 왕복을 하는데, 아우라지에서 8시에 출발하는 열차 와 증산에서 오후6시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시는 것이 훨씬 정겹다.
문의 : 증산역 033) 591-1069, 요금 전구간(증산↔아우라지) 1200원 동일
8) 축제
㉠ 정선 두위봉철쭉축제
특히 눈이 많은 강원도는 다음해 4,5월까지도 쌓인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한다. 강원 정선 두위봉은 해발 1,466m로 대외적으로 탄광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초여름에서야 피어나는 철쭉꽃으로 다른 지방에 비해 뒤늦게 철쭉제가 개최된다. 두위봉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철쭉지대는 수만평에 달하며 마치 연분홍 양탄자가 깔려있는 듯한 모습으로 장관을 이룬다. 비교적 높은 산이지만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 가벼운 산행차림으로 철지난 철쭉꽃을 보며 산나물도 직접 채취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행사로는 단곡계곡 두위봉산제,사진촬영,등반대회,산나물뜯기대회 등 이벤트도 준비되어 있다
㉡ 정선 민둥산억새풀축제
정선의 민둥산은 여느 강원도의 산들과는 모양이 사뭇 다르다. 높고 뾰족한 산이 대부분인데 반해 이 민둥산은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모양새가 둥그스름하게 생겼다. 가을이 되면 민둥산은 단풍대신 억새풀로 장관을 이룬다. 이렇듯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위해 매년 10월이 되면 민둥산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과 지역 주민이 어울려 한바탕 축제를 벌인다. 이 축제는 등반대회, 산신제, 목소리를 높여라, 보물찾기 등 다양한 행사로 진행된다.
㉢ 정선석탄문화제
1994년부터 개최된 정선 석탄문화재는 사북읍 사북리에서 매년 6월 초순에 치루어지는 행사이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탄광촌의 모습과 탄광지역의 실상을 바로 알리고 지역경기 활성화를 마련하기 위해 기획된 이 행사는 지역 주민들의 뜻을 모아 한마당 축제로 시작되었다. 지주시공대회,조개탄만들기,석탄채탄장비 전시회, 수석, 화석전시회, 등반대회, 각종 놀이마당과 풍물시장이 개설된다.
㉣ 정선아리랑제
1976년부터 개최한 정선아리랑제는 지역주민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노래로 정선아리랑을 즐겨 부르면서 시작된 행사이다. 매년 10월이 되면 열리는 이 행사는 정선아리랑제전, 정선아리랑 경창대회, 정선아오라지(뗏목재연), 민속·체육경기 등이 정선공설운동장 및 보조 장소에서 펼쳐진다. 주말이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덜컹덜컹 정선의 꼬마기차를 타고 정선 장터도 둘러보고 곱게 물든 단풍도 즐길 수 있다.
㉤ 정선아우라지뗏목축제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지 못한 사랑하는 남녀의 애뜻한 사랑이 담긴 정선아리랑의 고장 정선 아우라지에서 매년 7월 하순 쯤에 아우라지뗏목축제가 정선 북면 여량리 아우라지에서 개최된다. 송천과 골지천이 어우러지는 곳이라 하여 아우라지라고 불리웠고 다른 지방으로 원목을 운반하기 위해 뗏목을 사용했던 옛날의 운송수단이었다. 행사 또한 다양하게 뗏목진수식, 아라리시연, 사물놀이, 정선아리랑 경창대회, 행위예술, 가요경연대회, 찰옥수수 많이 먹기 대회 등 다양한 민속축제가 열려 지역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어우러진 토속적인 행사가 진행된다.
㉥ 정선조양강변축제
덜커덩 덜커덩 꼬마기차를 타고 주말여행을 정선으로 떠나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짧은 2 칸짜리 기차를 타는 재미는 너무도 색다른 느낌을 준다. 1996년부터 개최되어온 조양강변축제는 '가장 향토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주제로 수려한 자연경관과 지리적인 특색을 충분히 활용하여 지역주민과 피서 관광객이 더불어 함께하는 관광 이벤트이다. 피서철이 끼어있는 매년 7월이면 축제가 열리는데 화려한 전야행사와 연예인 초청 축하공연,불꽃놀이,수영대회,감자깍기대회,강변노래자랑 등 아기자기한 행사로 관광객을 맞이한다.
㉦ 정선함백산등반대회
강원 남부 최고봉인 함백산과 천삼백년 불교문화가 배어있는 오래된 고찰 정암사를 배경으로 함백산 등반대회가 개최된다. 1996년부터 시작된 이 행사는 함백산 일원에서 펼쳐지며 산신제,등반대회,노래자랑,사진촬영대회,메아리테스트 등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어 가벼운 산행을 즐기는 관광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 정선화암약수제
매년 6월 단오절을 전후해 정선에서는 화암약수제가 동면 화암약수터에서 개최된다. 탄산이 많이 포함되어 위장병에 좋기로 소문난 화암약수의 신비로움과 민속문화를 선보이고 지역의 번영을 위하여 시작된 이 축제는 약수제례, 면민 체육대회, 노래자랑, 약수 많이 마시기 대회, 약수 빨리 마시기 대회, 요리경연대회 등 소박한 행사가 준비되어 있어 주민들의 화합과 관광객에게 색다른 이벤트가 될 것이다.
㉨ 정선황기대축제
정선하면 정선아리랑, 아우라지 장터 등이 딱 떠오르지만 정선의 황기는 이 지역의 특산품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이 행사는 지역 특화 상품을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 지역 주민과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정선읍 애산리 강원 남부 생약 농업협동조합이 주 판매처이며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정선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아름다운 고장이다. 정선황기대축제는 매년 단오절을 전후해서 열리는 행사로 6월에 개최되며 황기요리 경연대회, 황기품평회, 황기 썰기대회, 황기장사 선발대회, 황기요리시식회, 궁도대회, 정선사투리경연대회, 힘겨루기 대회, 황기아가씨 선발대회 등 토속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행사가 진행 된다.
㉩ 조양강 레프팅
정선군 정선읍 조양강과 신동읍에 걸쳐 흐르는 동강을 보트를 타고 즐기는 래프팅은 생태체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천혜의 자연경치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주요 행사로 동강의 잔잔한 여울과 빼어난 절경의 감상하는 한편, 향토음식 시식, 야간낚시, 수석탐사 등 이벤트행사와 6월경에는 두위봉철쭉제 등 각종 이벤트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개장시기는 4월부터 11월까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