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연구개발실
첫 출근하는 아침이 밝아왔다. 강윤재의 발걸음이 올림픽 경기에 임하는 선수처럼 설레었다. 공군본부 앞 정류장에서 통근버스에 몸을 태웠다.
보라매 공원 근처인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발령받은 부서는 기룡자동차 중앙연구소 연구개발실.
시흥공장 내에 있어서 출퇴근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보라매공원에서 10여 명의 근무자들이 함께 이른 버스를 탔다.
‘낯익은 길을 달리는 버스 안. 얼마 만인가. 독산동을 지나 시흥 박미를 거쳐 시흥대교를 건너고. 다시 이 길을 달리는 선수가 되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터라 이번에는 든든한 기분이다. 회사까진 15분여 거리. 딱 좋다.’
소하리 들판에 쫙 들어선 공장 전경. 지난번 시흥 공장 견학 때 왔던 일터가 반겼다. 윤재가 가방을 들고 정문을 지나 중앙 연구소 건물로 들어섰다.
3층에 자리 잡은 사무실로 걸어 올라가다 화장실에 들렀다.
얼굴 한번 매만지고 손을 씻으며 거울을 바라봤다. 47세 부장이 아닌 27세 신입사원이 서 있었다. 윤재는 다시금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윤재. 가르샤의 밀서를 들고 먼 길을 찾아왔다. 다시 제대로 시작이다. 가자!’
사무실로 들어가 만난 여직원에게 인사를 했다. 신입사원이라고 소개를 하자 안내해주었다. 우선 회의실로 가 기다렸다. 두 면의 벽에는 스케치한 개발 자동차들이 보였다.
기룡자동차 개발의 산실 기운이 품어 나왔다. 기계공업의 꽃인 자동차개발을 이곳에서 시작하겠구나. 윤재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윤재씬가? 반가워요. 이리와 앉아요. 나, 개발 총괄팀 한춘범 대리요.”
회의실에 서류철을 들고 들어온 한춘범 대리. 강윤재가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악수를 청하는 손이 둔탁하면서도 따스했다.
“네. 신입사원 강윤재입니다.”
“우선 입사 축하드리고. 편하게 말은 놓을게. 한 시간가량 이곳 업무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만 소개할 텐데. 잘 새겨들어. 지금부턴 강윤재 기사로 부를게.“
날카롭고 기민해 보이는 한춘범 대리의 업무 소개. 강윤재는 진지한 태도로 들으며 메모했다.
“강 기사. 공수 특전사 출신이라고 했지. 난 해군 특수부대 UDT 출신이야. 잘됐네. 서로 힘을 합치면 뭐든 하겠는데. 이곳 일 특성상, 자동차 박사가 돼야 해.
전문 기술력, 종합 판단력, 고도의 협력체제 구축이 필요해. 연구개발 차량의 최초 단계를 컨트롤하니까. 개발 차량은 보통 5년 내지 10년 앞서 콘셉을 잡고 팔로우업하지.
풀 모델 체인지와 마이너 모델 체인지가 있는데, 국가 경기와 회사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어. 개발 취지에 맞는 최초의 모형, 프로토타입 차량을 진흙으로 만들고.
연구소 각 부서가 개괄적인 레이아웃 설계를 하고. 다시 세부설계를 위한 여러 차례 회의와 조정을 거쳐 초벌 설계를 하지. 다음은 판금 수작업으로 모델 차량을 만들거든.”
한춘범 대리의 업무 개요를 강윤재가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개발 차량 업무 공정도를 그려가며 한춘범 대리가 막바지 피치를 올렸다.
‘개발 차량 프로젝트의 최전방에서 업무를 수행한다.’
강윤재가 메모해가며, 책상 아래에서 다른 손을 꽉 움켜잡았다.
“강 기사. 젊어선 한 번 빡시게 전력투구해볼 만 해. 분명 상응하는 결과로 보상을 받거든. 이곳을 거쳐 간 임원들이 많아. 다 연결되니 그 힘도 크지.”
한춘범 대리는 업무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자신감 넘친 목소리로 설파했다.
“대신 어설프게 일했다가는 엄청 깨지기도 해. 체력도 튼튼해야하고 멘탈 관리도 탄탄해야 해. 지난달 이곳을 그만둔 조기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수재인데도 체력과 멘탈이 못 따라갔어. 회사 업무 목표관리도 중요하지만,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버텨낼 수 있어.”
한춘봉 대리의 첫날 OJT식 교육은 스파르타식이었다. 전생에선 한 대리의 조수가 되지 못해 아쉬움이 많았던 강윤재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강한 사수 아래 더 강한 조수가 나오는 법.
‘그래. 힘들어도 고난도의 업무 적응을 빨리하자. 더는 좌고우면할 수가 없다. 변죽 울리지 않고 바로 업무를 배울 수 있으니 다행이지. 고마운 일이고.’
한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한춘범 대리가 서류 파일을 강윤재에게 내밀었다. 족히 30여 페이지가 넘어 보였다. 영어로 쓰인 서류라 의아하게 생각했다.
“강 기사. 인사부 동기한테서 네 신상 정보 다 들었다. 이력이 화려하던데. 연수원 수석 졸업, 영어점수 985점, 일본어 1등급 성적 등.
이곳 업무 수행하는데 적임이라 생각해서 사수로서 기대가 아주 크다. 명심해라. 그 실력에 이곳 실전 훈련 1년이면 다른 부서 신임 대리급과도 맞먹을 거야.
이 서류 번역해봐. 미국 자동차 AMC에서 온 개발 차량 관련 개요거든.”
강윤재가 서류철을 받아 한 장씩 넘기는데, 한춘범 대리를 부르는 부서장 호출이 있었다.
불려간 한춘범 대리가 한참 만에 나오는데,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업무 서류를 든 손이 굳어있었다.
‘무슨 일이지? 나 때문에 저러나.’
강윤재가 엉거주춤 서서 바라보자, 한 대리가 한마디 했다.
“정말 해도 너무 하는구먼. 디자인실장과 한판 붙게 생겼다. 지금 특별 대책 회의 좀 다녀와야겠어.
강 기사 오늘 교육은 여기서 끝낸다. 아까 얘기한 영어 서류 번역하고 있어. 아마 종일 걸릴 걸릴지도 몰라.”
강윤재가 한 대리로부터 받은 영어 서류 파일을 가지고 자리로 와 앉았다. 한 페이지를 죽 훑어보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A4용지에 번역을 적어나갔다.
한 페이지를 번역하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데, 문오경 여사원이 회사 다이어리와 제도 연필 그리고 다른 문구류를 쓰라고 윤재 책상에 주고 갔다.
“저기요. 저 컴퓨터 좀 쓸 수 있을까요? 사무용으로 두 대 보이던데요.”
“컴퓨터 칠 줄 아세요? 타자기 쓰다가 컴퓨터 보급된 지 얼마 안 되어 저희도 익숙하지 않은데요.”
“사무실에 있는 것, 삼보 컴퓨터던데요. 제가 군대에서 좀 다뤄봤거든요. 한 대리님이 업무 지시한 번역을 바로 쳐서 올려야 될 것 같아서요.”
강윤재는 문오경 여사원 옆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정신없이 번역내용을 자판기로 두드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문오경이 놀라서 입을 가렸다.
“세상에나. 영어 서류를 보고 바로 해석하네요. 그걸 컴퓨터에 한글로 치고요. 이게 어떻게 가능하기나 한가요. 그것도 신입사원 강윤재 씨가 첫날부터 우아~!“
창가에 있는 다른 여사원 서옥선이 웬일인가 하고 다가왔다. 서옥선도 소금기둥처럼 그대로 우뚝 선 채 넋을 잃고 바라봤다.
“우리보다도 빠르게 컴퓨터를 잘 다루네요. 이 속도 좀 봐. 영어가 그냥 줄줄이 한글로 막 쏟아져 나와요.
즉문즉설이 아니라 즉해즉타(卽解卽打)네요. 우리 일자리 잃게 생겼어요. 오경이 언니.”
한 장, 두 장, 석 장... 열 장쯤 번역이 됐다. 옆에 보는 사람들 아랑곳없이 자판기 두드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강윤재.
옆에 부서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대리에 팀장까지 와서 쳐다봤다. 고개를 가로젓기도 하고 끄덕이기도 했다.
“드르륵~ 드르륵~!”
강윤재가 번역해 컴퓨터에 친 것이 프린트되어 줄줄이 나왔다.
“야, 신입. 네가 강윤재야? 이리 좀 들어와 봐.”
“네!”
강윤재가 번역한 서류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인사가 늦었구나. 나 정상열 팀장이다. 아침에 본사 회의 갔다가 이제 왔다. 한 대리도 없고. 우리 팀이 좀 바쁘고 정신이 없지. 아까 보니 죽이더라.
신입사원이 아니라 경력 사원 같던데. 즉석 즉해하는 영어 능력하며, 보급된 지 얼마 안 된 컴퓨터를 피아노 치듯 자유자재로 다루고.”
“과찬이십니다. 정상열 팀장님. 잘 모시고 배우겠습니다. 조직에 힘을 실어주는 제 몫을 다하겠습니다.”
정상열 팀장이 윗옷을 벗어 의자에 걸치고 말을 이어갔다.
“아침에 한 대리로부터 이야기 들었겠지만, 이 팀에서 한 사람은 다른 한 팀과 상응하는 업무를 소화해야 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들 독립된 팀이야.
지난달 쓰러져 그만둔 조기사 자리를 빨리 커버해야 살아남을 거야. 상황 판단 능력을 속히 체득해야 해.
개발 총괄 이라는 업무가 총대를 멘 일이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돌파해나가는 특공대처럼 말이야.”
강윤재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업무량도 많지만, 업무강도도 엄청나게 세다는 이야기 투다. 정 팀장 역시 한 대리 못지않게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뭐야. 이게. 공수 특전사 못지않네. 어떻게 적응해 나가야 하나? 알아서 해여한다? 가르샤의 밀서를 받은 로완 중위처럼. 그래. 나도 깡다구가 있지.
해보자. 저런 특출난 포스를 보이는 한 대리님과 정 팀장님 아래서라면 뭐가 두렵겠나.’
그때였다. 누군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신 부장님. 강윤재 신입사원 교육 중입니다.”
“오, 그래. 본사 회의는 잘 매듭지었나?”
“부장님, 처음엔 협조받기가 힘들었지만, 나중엔 다들 동의했습니다. 조금 전 부장님 자리에 가서 보고 드리러 갔었는데요.
자리에 안 계셔서 이렇게 신입과 이야기 나누고 있습니다.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건 좀 나중에 하고. 저 신입사원, 보아하니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던데. 정 팀장도 이젠 좀 이마도 피겠다.
조기사 때문에 마음고생도 했는데. 강하게 훈련해 제대로 일 좀 하자.”
정 팀장이 강윤재가 프린트한 서류를 들어 신 부장에게 보이며 얼굴을 폈다. AMC번역 서류를 신 부장이 두어 장 읽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강 기사. 이 자료 뜻을 이해하고 번역한 거냐? ”
“아직입니다. 특전사 중위로 근무 시, 미군과 국방 관련 업무를 했던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영어는 언제 그렇게 배웠나?
“대학 다닐 때, 미국에서 유학 온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그 친구를 데려다가 2년간 제 방을 함께 썼습니다.
서로 큰 도움이 됐습니다. 덕분에 특전사에서 뽑혀 미국방성에서 주관하는 한 달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좋아. 학교나 군대 그리고 사회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총망라해 이곳에서 제대로 발휘해봐. 강 기사는 어서 번역 마무리하고, 정 팀장은 내 자리로 와봐.”
강윤재가 나머지 자료를 번역하며 컴퓨터 자판기를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이 훅 지나갔다. 윤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3층 코너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뻑뻑한 눈에 물을 끼얹었다. 화장실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괴물 나왔대. 신입사원으로 온 강윤재 말이야. 스펙이 장난이 아니래. 입사 첫날부터 부서원들에게 충격을 주나 봐.
명인대 출신에 특전사 중위 제대, 영어 985점, 일본어 1급까지 획득했대.”
“그러게. 영어 서류를 보며 해석하면서 바로 컴퓨터에 한글로 쳐낸다니. 요즘 여사원 빼고 누가 컴퓨터 칠 줄 알겠어.
조수 없이 힘들게 일한 개발 총괄팀 한 대리가 가장 신나겠어. 슈퍼맨 조수를 받았으니 그동안 업무에 찌든 얼굴 좀 피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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