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 자격연수 대상자로 지명이 된 상태에서 학교를 옮겨야 할 처지가 되었다. 서포 초등학교에서 5년 만기가 된 것이다. 나와 같은 처지에서 다른 학교로 가게 되면 어느 누가 반겨줄 것인가가 걱정이 되었다. 한달 여에 걸친 연수기간 중에 교실을 비우게 되고 업무도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 맡아야 함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해서 선택한 학교가 위에 열거한 어려움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곳이라는 판단으로 우리교육청(사천) 관내에서 가장 큰 학교로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사전에 조사할 것, 밟아야 할 일련의 절차는 그래도 밟았다. 전에 지금보다 젊은 시절에 사천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싶었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감히 접근도 못할 높은 위치의 학교였던 곳이 바로 사천 초등학교였다.
서포에서의 후반 4년 동안 나는 저절로 참으로 많은 이동에 필요한 점수를 확보했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사천행에 성공할 수 있었고, 그만큼 떳떳한 사천에의 입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다시 만난 사람들
사천에 와 보니 전에 만났다가 다시 만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전에 만났던 사람이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직원들을 말한다. 이는 교직생활에서 한 번 같이 근무하게 된다는 사실도 참으로 인연인데 그런 참으로 소중한 인연을 겹으로 맺은 결과가 되기 때문에 결코 예사롭게 여길 일이 아이라고 믿고 있다.
황성규 교장선생님은 전에 함께 근무를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교대 2학년 때 진주 중안 국민학교에 교생 실습을 나갔을 때 1학년을 담임하시면서 훌륭한 수업을 공개해 주신 적이 있고, 내 형과 동학년으로 형의 집을 새로 지어 집들이를 할 때 들리셨으며, 성인만화로 우리나라 제1인자로 꼽히는 『아기공룡 둘리』의 김수정 화백을 길러낸 분이었다.
동성에서 함께 근무했던 김대홍 선생님을 교감선생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동성에서는 연구주임과 연구 보로, 교무주임과 연구주임으로 참으로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았었던 분이다.
다음으로 황인수 선생님 서포에서 벌써 두 번째 만남의 인연을 맺었던 선배님인데 언제나 성실하셨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존경해 마지않았었던 분이다. 또, 황인수 선생님처럼 서포에서 두 번이나 함께 근무를 했었고, 동학년까지 함께 했으며, 교무부장으로 모시기까지 했던 최한업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밖에 서포에서 1년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정임근 선생님, 1년의 환상적인 동학년과, 잠간 동안의 카풀 팀을 포함하여 3년을 함께 근무했던 강혜정 선생님이 참으로 좋은 인연을 이을 수 있어서 이런 일을 내게 있어서의 참으로 기꺼운 행운으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 제자의 딸 이야기
사천 초등학교로 사전 부임을 하는 날 관내에 함께 근무하는 한 초임지 제자를 만났다. 이순엽 선생은 지금은 정동 초등학교에 근무하는데 내 초임지 남해 도마초등학교에서 당시 6학년이었다. 나는 5학년 담임이고, 그의 남동생이 내 반에 있었다.
이순엽이란 6학년 여학생은 내가 맡은 문예부에 속함으로써 1주일에 한 번 내 교실에 와서 공부를 했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관내의 인근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가 되어 있는 자랑스런 제자이다. 이 선생이 결혼을 할 무렵 연락이 되어 나는 그의 결혼식장에도 참석했었다.
그런, 말하자면 간접제자인 그가 내게 한 말이 참으로 고마왔다.
“선생님이 사천으로 오시는 줄 알았다면, 저도 더욱 힘을 써서 이 학교로 올 것을■■.”
그러면서 사천 초등학교에 자녀가 다닌다는 이야기를 했다. 신학기의 바쁜 업무가 대충 마무리된 다음에 나는 그 아이를 찾았다. 6학년 1반의 차화진이란 어린이였다. 막상 불러다 놓고는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를 몰라서 좀 머슥한 기분을 느끼며, 그 옛날 네 엄마가 6학년일 때에 그 학교에서 근무했고, 클럽활동 시간에 내 부서였음을 이야기 하니, 화진이는 무척 밝은 웃음을 웃었다.
그 후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잘 하는 아이였고, 각종 대회에서 다양한 상을 타는 꽤 뛰어난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뿐 만 아니라 학급에서 공부도 상위권에 속한다는 담임 황인수 선배의 말씀을 듣고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2000년 스승의 날, 화진이는 내게 조그마한 선물 상자를 가지고 내 교실을 방문했다.
“엄마가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넥타이였다. 선물이 고가 이어서거나, 어깨 으쓱할 일 이어서가 아니라 30년 가까운 세월이 갑자기 동강났다가 다시 이어진 느낌으로 정녕 흐뭇한 마음일 수 있어서 더욱 진한 감동을 느꼈다. 상당 기간 동안 나는 그런 감동으로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찾은 상태로 살아갈 수 있었다.
화진이가 수학여행을 가는 날 일부러 그들의 출발 시각인 아침 7시 이전에 출근을 하여 조금의, 아주 조금의 용돈을 쥐어 주며 잘 다녀오라는 말을 전했다. 그 때의 내 기분은 조금 지나친 생각일지는 몰라도 할아버지가 손녀의 여행길에 전송을 하는 그런 기분이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 먼 친척 이야기
2000학년도 6학년 2반 담임 권순현 선생님이 있었다. 그도 동년 3월 문선 초등에서 전근되어 왔고, 나도 같은 시기에 서포에서 처음 전입한 처지라 분명 서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권 선생의 아이가 문선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고 있었고, 마침 그 반 담임선생님이 내가 잘 아는 정경화 선배였다. 권 선생이 잘 아는 선생님이면 아이를 잘 지도해 달라는 전화 한 통화만 해 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아니, 내가 먼저 그런 제의를 했던 것 같다. 며칠 후 정 선배에게 전화를 드렸다.
권 선생과 내가 어떤 사이기에 전화를 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갑자기 생각한대로 ‘먼 친적 동생’이라고 대답을 했다. 사전에 아무런 준비 없이 전화했다가 대답을 급조한 셈이다. 참으로 착한(?) 선배를 속인 셈인데, 이는 1년쯤 세월이 흐르고 나면 그 이야기를 바르게 해 드리고, 사죄하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 권 선생의 아이가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를 보고,
“엄마, 사천학교에 우리 친척 누구가 근무하고 있나요?“
하고 매우 진지한 자세로 묻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 후부터 권 선생과 나는 농담 삼아 먼 친척으로 지내게 되었다.
■ 상담실에의 기꺼운 모임
사천초등학교는 규모가 커서 여러 가지로 작은 학교와는 다른 점들이 많았다. 우선 전체 선생님들의 모임이 주2회 밖에 없었다. 학급 수가 많은 관계로 다른 선생님들과 얼굴을 마주할 기회조차 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동 학년이나, 인접 학년끼리의 모임이 저절로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본관 건물 2층 중앙쯤의 지점에 ‘상담실’이란 팻말이 붙은 작은 공간이 하나 있었다. 거기가 바로 3,4학년의 휴식과 회합의 공간이었다.
주로 아침에 모임을 갖고 여러 가지 의논을 하고, 1교시 후의 휴식시간 20분 동안에는 함께 모여 여러 가지 정보도 교환하고 업무의 조정 및 협의도 이루어지는 그런 장소였다. 그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차 한 잔씩을 나누어 마시는 몹시 여유로운 일이었다.
우리가 모이는 상담실 비슷한 장소로 3층에는 ‘쉼터’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 곳은 5학년과 6학년이 모이는 장소였다. 이처럼 인접학년끼리 분산 모임을 갖는 것도 다 학교의 규모가 큰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간혹 이런 모임끼리 배구시합도 즐기고, 회식도 함께 하며 교직수행의 고달픔을 보다 풍요롭게 일구어 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런 즐겁고 기꺼운 모임은 참으로 강한 희생정신으로 조금치의 불평이나 불만의 표시 없이 매일 다과를 마련하고, 설거지를 하는 여 선생님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살짝 밝혀 둔다.-
■ 사량도 옥녀봉 등정 이야기
사천초등학교는 6월 1일이 개교기념일이었다. 2000년의 개교기념일에는 특별히 재미있는 역사를 만들어 볼 요량으로 상담실 팀의 등산을 제의했다. 목적지는 사량도 옥녀봉, 대부분이 찬성을 했고, 그런 관계로 쉽사리 계획이 수립되고, 추진이 되었다. 학습지도 연구대회 본선 행사가 임박하여(6월 9일) 조금은 문제가 생겼으나 애당초의 계획은 추진이 되었다.
처음에는 3,4학년만 가려고 했으나, 1학년에서도 희망을 하고, 거기에 교감, 교무선생님까지 합류하니 그 인원이 갑자기 많을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그러나 각자 개인적, 가정적인 문제들이 생기는 등 불참자가 속출하여 최종 인원은 12명으로 예상이 되었는데 이는 출발을 하여 선창에 도착한 후에야 확정되었다.
김대홍 교감선생님, 최한업, 유순자, 조성자, 본인, 최영순, 김윤희, 문향자, 김정순, 허윤정, 심경희, 백정림 선생님 등 열 두 명이 멤버의 전부였고 하나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다리호에 승선을 했다. 사실은 사량도로 목적지를 정한 것은 순전히 내 뜻에 의한 것이었다. 1989년부터 5년간 2개 학교에 근무하면서 보아 두었던 사량도 옥녀봉의 모습을 실제로 등정함으로써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느낄 수 있도록 하고, 보다 단합된 마음으로 즐거운 근무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내심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약간 안개가 끼기는 했어도, 어렴풋이 보이는 섬의 윤곽은 제법 웅장한 산의 모습을 감탄으로 보게 했고, 선상에서 주고받는 대화도 모두들 정에 겨웠다. 금평리가 가까워 올수록 나는 전에 근무할 당시의 내 삶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설레었다.
배를 내리니 세월이 좀은 흘렀어도 아는 이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고, 그럴수록 내 옛 삶이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등정은 금평에서 옥동 성자암까지 가는 코스를 택했다. 시작부터 몹시 가파른 오르막길이라 좀은 힘이 들었지만 모두들 즐거운 기분으로 등정을 했다. 맨줄, 줄사다리, 철사다리, 가벼운 암벽, 오솔길을 지나는 동안 애기봉과 옥녀봉, 그리고, 가마봉을 차례로 지났다.
산 위의 적당한 그늘을 찾아서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하산은 옥동 뒷산 길을 택했다.
하산하여 금평에 닿아서는 은경이네 집에 가서 은경이 어머니가 베푸는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서 조금의 여독을 풀었다. 배 시간이 잘못 안내되어 우리는 자칫 늦게까지 사량도에서 시간을 보낼 뻔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전에 알고 지냈던 ‘먼산이’라는 분의 친절한 안내로 몹시 덜컹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내지까지 가서 다리호를 타고 입암까지 갈 수 있었다. 버스로 이동을 하는 동안 시골 길이 어찌나 험했던지 대책 없이 흔들리는 차 속에서 흔들림 그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추억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맥전포의 어느 횟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삼천포 어느 노래방에서 뒷 풀이까지 신나게 하고는 늦은 시각에 헤어졌다.
-2000년으로 사량도를 떠난 지 꼭 8년, 나는 그 동안 서포 초등학교 재직 시 두 번에 걸쳐,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의 사량도 옥녀봉 등산을 안내했었다. 그리고, 거의 해마다 혼자서라도 사량도 방문은 했었다. 사실 그랬기에 아직도 사량도에 아는 이들이, 나를 반겨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밝혀둔다.-
■ 추억 어린 송별연 이야기
사천초등 6개월, 이게 내게는 교사생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나름대로 동료들과도, 학생들과도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스스로 미안감을 가득 안고 왔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정녕 최근 승진을 준비하는 막바지 몇 년 정신없이 바쁘게 보낸 세월들 탓으로 내 본연의 의무를 소홀했다는 죄책감을 덜고싶어서 더욱 그랬다.
아이들과는 그럴 수 없이 친할 수 있었다. 학부모들도 그랬었다. 처음 전입한 담임이지만 학부모를 상대로 한 수업 공개 시에는 동학년에서 우리 교실이 항상 붐비는 교실이었다.
다른 선생님들도 그랬다. 주로 3,4학년이 함께 하는 커피타임이나 함께 팀을 이룬 배구경기에서 화합을 마음껏 과시했다. 오죽하면 내가 자격연수를 떠나기도 전에 계까지 조직했을까? 1년에 한, 두 번씩은 꼭 만나자는 의견이 누구의 제안이랄 수도 없게 채택이 되었고, 매우 희망적인 마음들로 기꺼울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양산 천성초등학교로 발령을 받고 나서 송별연이 줄을 이었는데 친화회가 주관하는 송별연에서는 코끝이 시큰함을 느꼈었고, 3,4학년이 함께 한 민속찻집에서의 송별연은 눈물이 났었다. 눈물이 나기 직전 화장실로 피신하여 다른 사람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는 못했을 테지만 나만 아는 이 사건은 우리들(3,4학년)의 모임이 얼마나 기꺼운 모임인지를 단적으로 말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무더운 여름의 교감 자격연수와 교감 발령
애초 교감 자격연수는 2000년 5월 중순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2000년 5월 당시의 우리 경남 초등교육현장은 참으로 애로가 많은 상황이었다. 102명의 연수대상자들의 자리를 임시로나마 메울 소위 기간제 교사로의 활용요원이 전무한 상태였다. 따라서 5월 연수를 강행한다면 그야말로 일선은 난리가 날 것이 뻔했고, 그 난리는 아마 6■25 사변에 버금가는 난리가 될 것이 불을 보듯 환한 일이었다.
그런 사정으로 연수는 연기가 되었고, 그게 내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나처럼 전임지 학교에서 연수대상자로 지명을 받고 학교를 옮긴 사람은 아마 모두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학기 중에 한 달 이상을 교실을 비운다는 것은 교장, 교감, 동학년, 업무 대리자 등 정말로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안겨주는 결과임이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이 덜 미안하게 되었고, 다행스러웠다는 이야기이다.
연수는 2000년 7월 18일부터 8월 22일까지였다. 방학을 거의 송두리째 연수에 투입해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우리들 연수생 모두는 불평 한 마디 안하고 연수에 임했다. 강의실은 모두 에어컨을 작동함으로써 더위는 느끼지 않았지만 냉방에 의한 두통이 약간씩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연수기간 내내 나는 전에 사량도 돈지분교 근무 때 함께 했던 김행식 선생의 집에서 지냈다. 김선생은 아직 미혼이었고, 연수원 부근에서 방 두 개를 전세로 얻어 살고 있었으니 참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이건 내게 참으로 크나큰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연수기간중의 어느 날 도교육청 옥정호 장학관의 강의 시간에 지금 연수를 받고 있는 102명중에 50명 정도가 9월에 발령이 난다고 했다. 그게 처음 듣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지만, 다만 좀 정확한 정보인 것은 틀림이 없었고, 그때까지 흐릿하던 전망이 환해진 것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차출 당시의 서열이 62번이었다. 따라서 현 서열로는 9월 발령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급 정교사자격연수 성적이 88점이었던 나는 적어도 이번 교감자격연수 성적을 90점 이상은 받아야 9월 발령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무딘 머리로도 짐작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함께 연수를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생각으로 열심히들 공부를 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고, 실제로 어중이떠중이의 집단이 아닌 도내의 내노라 하는 이들의 집단이라 더욱 성적을 올릴 자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열심히는 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열심히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겠지만 어쨋든 열심히 했다.
그 결과 연수성적 90.66을 얻을 수 있었고, 초조했던 몇 날이 지나고는 양산으로의 발령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이세 교사시절의 종말을 고하는 내게는 역사적일 수 밖에 없는 사건임을 인식하면서 다음 일들에 대비해야 했다.
발령 받은 학교는 양산시 웅상읍에 소재한 천성초등학교였다. 26학급 규모의 낯선 지역 학교, 두려움도 앞섰고, 내 능력도 의심이 갔지만 모든 것은 직접 대하면서 하나 하나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임하기로 작정을 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