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원철 스님. 사진 <불광출판사>제공
여행의 만족도는 여행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와 여행하느냐가 만족도를 좌우한다. 더구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풍부한 식견을 가진 이와 유적지를 답사 한다면, 먹방에서 끝나지않고, 지식으로 마음까지 충만해질 수 있다.
<낡아가며 새로워지는-것들에 대하여>(불광출판사 펴냄)란 원철스님 산문집과 함께 한 느낌이 그렇다. 원철 스님(61)은 1986년 법전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로 출가했다. 법전 스님(1926~2014)은 성철스님의 맥을 이어 해인사 방장과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선승이다. 평생 산속에서 은거해 오직 노동과 참선으로 일생을 보낸 스승과 원철 스님은 사뭇 다르다. 사람들 속에 있어도 남의 말을 새치기하거나 끼어들기보다는 한발치 물러서서 수줍은 듯 미소짓고, 묻는 말에만 겨우 답해주는 면에선 스승을 닮았지만, 그는 ‘수도승’을 자처하는 도시남이다. 그가 말하는 ‘수도승’이란 ‘수도 서울에 사는 승려’다.
그는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을 거쳐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도, 휴가란 휴가란 ‘여행’에 쓰는 여행광이다. 하지만 그의 여행은 볼거리, 먹을거리만을 즐기는 여행이 아니다. 여행지에 가면 오직 관광할 대상에만 꼿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안에 든게 많으면 안과 밖에 연기적으로 만나는 순간, 이 순간의 대상물이 수천년의 역사의 드라마로 변화한다. 그는 선승에게 출가했지만, 교학에서 더욱 실력파다. 그는 조계종에서 교학으로 우뚝 선 무비스님으로부터 전강(스승의 교학 맥을 이어받음)했고, 중국 역대 선승 81명의 전기인 <선림승보전> 총30권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한 것을 비롯 많은 한문 경전을 번역했다. 또 실상사 화림원에서 화엄경을 강의하고, 다시 해인사로 돌아와 해인지 편집장으로서 이미 문필력을 내보였다. 그러니 수도서울에 사는 수도승이나 여행 좋아하는 스님등의 이미지만으로는 그의 내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의 여행지는 중국과 일본 등 외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찰과 서원만이 아니다. 수도권에서 대중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곳까지도 그가 지나가면 그저 돌조각, 나무기둥이 한편의 고전 혹은 역사 다큐로 살아난다.한번을 보아도 제대로 보아야 하고, 한 사람을 만나도 진실한 만남이어야한다. 원철 스님의 도화담 기행기를 읽다보면 이런 마음이 절실해지지않을 수 없다. 도화담은 중국 안휘성 선성경현에 있는 시골 선비 왕륜의 마을에 있는 연못이다. 시골선비 왕륜과 그의 마을 도화담이 1500년을 지난 지금까지도 발길을 끄는 것은 시선 이태백의 시에 등장한 때문이다. 왕륜은 중국 강남지방을 유람하던 이태백이 인근이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별로 내세울게 없는 평범한 자기 동네로 이태백을 초청하기 위해 길이가 십리가량 되는 도화담을 ‘십리도화(十里桃花·십리에 걸쳐 핀 봉숭아꽃)로 바꾸고, 만씨가 운영하는 초라한 1인주점을 ‘만가주점(萬家酒店)’이라 표현한 문자둔갑술을 사용했다. 그렇게 시선을 유인하는데 성공한 왕륜이 이듬해 세상을 뜨자 이태백은 조문을 위해 다시 그 시골을 찾았다. 움직임 자체가 역사인 시선이 두번씩이나 다녀가며, 담긴 ‘정심담수(情深潭水·정이 도화담의 물보다 깊다)’와 ‘증왕륜(贈汪倫·태백이 왕륜에게 준 시)’는 지금도 읽는 이의 가슴을 울려준다며 원철 스님이 들려주는 시가 다시 시공을 넘어 다가온다.‘도화담 물이 천 척으로 깊어도(桃花潭水深千尺)/왕륜이 나(태백)를 보내는 정에는 못 미치리(不及汪倫送我情)’절 탐방객들이 그냥 스쳐지나가곤하는 해인사의 부도와 비석들이 모여있는 ‘비림’의 많은 비석 가운데 하나는 임진왜란때 나라를 지킨 사명대사비다. 이 비문을 지은 이는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광해군때 역모에 연루돼 참수를 당해 저자의 직위를 기록한 글자 마저 훼손을 당하고, 용케 이름 두자만 남았다. 원철 스님의 이야기 속엔 500년만에 사라진 사명대사와 허균의 인연이 다시 꿈틀거린다.
중국 안휘성 도화담.
허균집안은 아버지 허엽과 큰형 허성, 둘째 형 허봉, 누이 허난설헌까지 문장가 다섯 명을 배출했다. 언젠가 허봉과 사명이 긴글 외우기 시합끝에 대사가 이겼고, 이후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마침내 사명은 허봉에게 당신의 모든 문서를 맡길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됐다. 어느 날 허봉이 동생 허균을 서울 강남 봉은사로 데려와 대사에게 소개했고, 이 때 사명대사를 본 허균은 대사의 첫인상은 기골이 훤칠하고 얼굴은 엄숙했다고 기록했다. 3년후 허봉에 죽자 허균은 형의 역할까지 맡았다. 사명대사의 제자들은 사명의 문집을 만들면서 허균에게 서문을 의뢰했다는 것이다.원철 스님이 충북 보은 법주사 기행을 따라가다보면 조선 세종대왕 당시 빼어난 학자들의 ‘열공’까지 엿볼 수 있게 된다. 법주사엔 세종의 한글 창제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신미대사의 부도가 있다. 그 신미대사의 친동생이 집현전 학사인 김수온이다.김수온은 책을 도포 소맷자락에 넣고 다니면서 외웠고, 외운 뒤에는 미련 없이 버렸다. 한 권을 외우면 한 권이, 열 권을 외우면 열 권이 길바닥으로 사라졌다. 한번은 집현전에 함께 살며 허물없는 사이인 신숙주가 <고문선>을 세종대왕께 하사받은 것을 알게 되었다. 신숙주가 애지중지하는 그책을 빌려 달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결국 손에 넣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록 돌려주지 않자 김수온 집을 찾은 신숙주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책은 뜯긴 채 사랑채 천장과 벽에 한 장 한 장 벽지처럼 발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어떤 자세로 있건 외우기 위해 붙여두었다는 것이었다.
서울 은평구 북한산자락 진관사 수륙재의 모습.
서울 은평구 북한산 자락에 있는 진관사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수록 신기하다. 고려 때 왕실의 골육상쟁으로 피신한 대량군을 진관대사가 숨겨주었다. 대량군은 뒷날 왕위에 올라 현종이 되었고, 이름조차 없던 진관대사의 토굴절은 왕실의 후원으로 제대로 규모를 갖춘 절로 바뀌었고, 절 이름도 진관사가 되었다. 훗날 조선의 건국과 왕권을 다지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왕실 주관의 수륙재도 이 절에서 치렀다. 또 집현전 학사 십여 명이 단체로 휴가를 받아 글을 읽으러 올 만큼 명성을 유지했다. 하지만 진관사는 6·25를 거치며 파괴돼 다시 토굴로 바뀌었는데, 그 폐허에 젊은 비구니 진관스님이 찾아와 50년간 가람을 가꾸어 대찰을 복원해냈다. 옛 진관스님과 현대의 진관스님이 진관사를 무대로 만난듯 희유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낡아가며…>에 담긴 지식들은 무심코 보낸 단어들을 새롭게 깨닫도록 해준다. 우리나라 ‘호남(湖南)’이라는 지명이 전북 익산 황등제 남쪽이라는 의미에서 나왔다거나, ‘호서(湖西)’도 충북 제천 의림지 서쪽이라는 뜻이라는 것도 그렇다.기행기 속에 언듯언듯 숨겨있는 원철 스님 개인과 얽힌 일화들도 남다르다. 전남 화순 모후산 골짜기는 좌우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십리 안엔 민가가 없는 오지 중의 오지다. 해인사 도서관장을 지내던 원철 스님의 선배 법장 스님(1954~2019)은 그런 은둔의 삶을 그리워하다 모후산에 시적암을 짓고, 서재 방문 위에 ‘정와(靜窩·고요한 작은 움집)’라는 글씨를 걸어두었다. 그 법장 스님은 홀로 수행하며 살다가 숨을 거두었고, 핸드폰조차 터지지않는 그곳에서 뒤늦게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도반의 작은 부도를 세우는 날 시적암을 찾은 원철 스님은 남은 이들에게 ‘혹시 유품을 정리하다가 저서가 나오거든 한 권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법장 스님의 유일한 저서인 <사람이 그리운 산골 이야기>가 머지않아 그에게 왔다. 그 저서의 발문을 원철 스님이 썼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전남 화순 모후산 오지 중의 오지 시적암에서 홀로 은거 수행하다 세상을 떠 뒤늦게 주검이 발견됐던, 저자 원철스님의 도반 법장 스님의 생전 모습
원철 스님은 이웃 종교에도 열려있어서 이웃종교인들과 함께 하는 모임에도 함께 한다. 몇년 전엔 성철 스님의 선연구로 박사학위를 한, 프랑스 출신의 서명원 신부 교수의 초청으로 서강대 종교학과 개강 채플 시간에 강론을 했다. 서두에 절집 형제가 이 학교 종교학과 졸업생이란 말로 시작했다.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다만 나로 살뿐> 등의 저서로 유명해진 그의 사제 원제 스님을 말함이었다. 강론을 마친 후 젊은이 몇 명이 면담을 신청했고, 그들과 맛집을 찾고 분위기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문화가 잇는 곳을 찾아다니는 모임이 인근 대학의 학생들까지 더해져 이제 수십 명의 회원까지 생겼다고 한다. 이제 관광지에서 시각과 미각의 만족에 그치지않고 지식을 포함한 오감을 충족할 ‘심미안’을 갖춘 문화인들이 늘아간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