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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남산도서관 내에서 모임을 갖는 ‘물망초’라는 문학회에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을 한 추억이 있다. 문학회 활동을 하였다고 하여 내가 글께나 쓰고 문학을 논하였다고 추측한다면 커다란 오산이다. 문학회에서 나의 주임무는 오락부장, 소위 분위기 메이커였었으니까 말이다. 2년 간의 내 활동이란 그저 모임 후의 오락 시간을 재미있게 주도하거나 ‘문학의 밤’행사에 무거운 비품 나르기 정도였지, 그 흔하디 흔한 시 한 구절 읽는 일도 없었다.
문학회에 가입하게 된 사연은 기실 나의 중학 때부터의 오랜 친구 C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이었다. 문학회에는 꽤 많은 회원들이 모이고는 하였는데 절반이상이 예쁜 여학생들이다. 꽃이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만발했으니 벌이 신명 나는 것은 당연한 일. 매주 집회가 끝나기 무섭게 나는 기옥이며 상금이며 또는 재향이 등 소위 퀸카 여학생들과 빵집을 전전하는 재미에 푹 빠져 돈암동에서는 꽤 먼거리인 남산 중턱까지 열심히 등산(?)을 하고는 하였다.
하루는 C가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부탁을 했다. 자기는 사실 기옥이를 무척 좋아하는데 자신의 그 뜨거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무척이나 고민이란다. 그래서 연애편지라는 것을 썼는데 그것을 사랑하는 기옥씨에게 전해줄 수 없느냐는 부탁이었다. 그 정도 부탁이야 내게는 식은 죽 먹기 아닌가? 나는 주업무 외에 사랑의 메신저라는 알바를 하게 되었다. 편지 전달을 핑계로 나의 빵집 순회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빵값도 C군이 뒷돈을 대주게 되었으니 이처럼 신나는 일이 없었다.
중간 스토리 건너 뛰고 결론을 말하자면 C군이 바로 돈암동 할리스 커피숖의 쥔장 27기
오늘은 한북천마지맥 제4구간을 뛰는 날, 일기예보에 의하면 무척이나 더운 날이라 했다. 단단히 각오를 해야 했다. 마실 물을 평소보다 많이 준비를 하고 모자도 챙이 커다란 모자로 바꿔 썼다. 해외출장 중인 한준이가 결석을 했고 지난 5월 새로 가입한 27기
마치고개 들머리에 도착하여 산행의 첫걸음을 뗀 시각이
가파른 길을 30분 만에 끝내니 통신 중계탑이 설치된 작은 무명봉이 나온다. 서울리조트의 스키 슬로프 정상 뒷봉우리이다. 슬로프 정상 시설물을 만드느라 봉우리의 반쪽을 싹둑 잘라낸 모습이 영 볼썽사납다. 잠시 숨을 고르고 10분 여를 오르니 백봉(柏峰, 587 m) 정상이다. 예부터 잣나무가 많아 잣나무산이라 불렸다는데(柏: 잣나무 백) 아무리 둘러봐도 잣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백봉은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이지만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시계(視界)가 매우 뛰어나다. 멀리 북한산의 능선길이 서울을 병풍처럼 둘러선 모습도 보기 좋고 꼬불꼬불 흐르는 한강과 그 위에 걸쳐진 강동대교가 장난감처럼 보인다.
백봉에서 수레넘이 길로 가는 내리막 길을 한참이나 가다가 드디어 알바를 하게 되고 말았다. ‘알바’라는 말이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을 헤매는 것을 지칭하는 산악인들의 은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번의 제4구간은 무척이나 갈림길이 많다. 고만고만한 능선이 이곳 저곳으로 갈라지는데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구간에서 길이 갈라지노라면 가야 할 등산로의 방향을 지도와 아무리 대조해 보아도 헷갈리기가 십상이다. 가야 할 능선 길은 깊은 계곡 너머의 능선이다. 계곡을 가로질러 쉽게 갈 꾀를 궁리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명길 형님의 경험상 알바 상황에선 지나온 길은 무조건 되짚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최선책이란다.
알바 40분 끝에 제대로 길을 찾아 들었다. 험하게 속살을 보이는 곳이 등산로 중간 중간에 보인다. 또한 등산길이 황량한 송전탑 밑을 자주 지나게 되어 있어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다량의 육수를 생산하게끔 한다. 그래도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가면 제법 시원하니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저 아래 도시는 엄청난 찜통 더위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위를 하며 꼬불꼬불 산길을 걷는다.
적당한 곳을 찾아 점심을 들고 1시간을 더 걸으니 수레넘이고개를 만난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기나긴 고갯길이다. 예전 마석에서 덕소로 나가 뱃길로 한양으로 나가던 장사꾼들의 수레가 넘던 고개라 하여 ‘수레넘이고개’라 불렸고 마석 쪽의 동네를 차산리(車山里)라 불렀다고 한다. 고개마루를 포장공사하면서 더 깊고 넓게 깎아 버린 탓에 지맥과 도로가 만나는 곳에서 급경사를 이루며 툭 떨어진다. 천길 낭떠러지 같은 경사면에 갈지자로 희미하게 이어지는 길을 겨우겨우 찾아 도로에 닿으니 높다란 철조망이 앞을 가로 막는다. 올라 넘기엔 너무 높고도 불가능해 보이고 개구멍을 찾아 아무리 철조망 밑 덤불을 휘저어 보아도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 구멍 하나 없는 매우 견고한 철조망이다. 횡단해야 할 도로를 코 앞에 두고 끝없이 이어진 철조망을 돌아 우회해야 하니 짜증이 살짝 난다. DMZ의 철조망 순찰하듯 스틱으로 철조망을 툭툭 건드리며 한참을 걷다 보니 겨우 철조망이 끝나는 곳이 나와 도로를 건넜다. 뜨거운 태양에 달구어진 아스팔트 길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에 얼굴이 후끈하다. 제길, 다른 고개마루턱엔 휴게소도 많더만 고개마루의 공간도 매우 넓은데 그 흔한 아이스케키 장사 하나 없다.
수레넘이 고개 - 차량이 지나는 곳이 도착점이다.
그 많던 나무는 누가 옮겼을까?
계속되는 길은 사태가 난듯한 개활지 경사면이어서 더욱 많은 육수를 요구하고 있고 이어지는 숲길의 생김새도 데면데면하여 산행의 맛이 반감이 되는 길의 연속이다. 모두 말수가 부쩍 줄어들어 조용히 산행을 하는 것이 모두 나처럼 지쳤나 보다.
골프장이(하산 후에 검색해보니 록인 CC였다) 보이는가 싶더니 길이 갑자기 내리막 급경사를 이룬다. 아이쿠~! 또 지맥을 가로 질러 도로가 났구먼~! 명길형님이 준비해서 나누어 준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복병이다. 이번 지맥을 종주하면서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자연훼손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았다. 깊은 산 곳곳에 들어찬 골프장이며 가로세로 마구 뚫은 도로로 인해 온 산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국민 스포츠도 좋고, 전국 도로 인프라 구축도 좋고, 또 주택공급 차원의 아파트 건설도 이해는 하지만 좀 더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으로 계획하고 설계할 수는 없었을까?
‘어이, 송 부회장~!! 조심해서 내려 와~!!!”
내리막길이 쥐약인 내게 명길형님은 늘 걱정을 해주신다. 항상 고맙게 느껴진다. 조심조심 비탈길을 기다시피 내려오니 야생동물 통행로인 듯 골프장 도로 위로 이어진 브릿지형 도로에 닿는다. 잠시 숨을 고르기로 했다. 따가운 더위에 시원한 맥주 한 컵이 생각 난다. 문득 눈을 들어 보니 클럽하우스가 지척에 있다.
“ 병기야~! 가자~!”
나는 배낭 속에서 이미 비어버린 물통을 꺼내고는 병기에게 클럽하우스에 가자고 했다. 시원한 캔맥주 댓 깡통 사고 빈 물통에 물도 채우고. 밉살스럽던 골프장이 갑자기 반가워 진다. 그러나 그렇게 호사스럽게 올빼미를 교육시키는 유격조교가 있었던가? 명길 형님이 나의 그 멋진 보급추진계획을 저지하신다. 우선 갈 길이 바쁘고 둘째, 물도 여분이 있으며 셋째, 가격이 비쌀 것이란 이유다. 이제는 조교의 지시에 무조건 순종하는 습관이 몸에 밴 송 올빼미, 군말 없이 물통을 잽싸게 배낭 속에 다시 집어 넣었다. 옆에서 동식, 병기의 아쉬운 탄식 소리가 들린다. 나를 불쌍하게 보신 명길 형님,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을 하신다.
“여기서 맥주를 포기하면 오늘 일정은 새재고개가 아니라 먹치고개까지다!!”
다시 길을 재촉한다. 머리 속은 온통 흰거품 찰찰 넘치는 시원한 맥주 한 컵으로 가득하다. 쪽에 봉긋하게 솟은 봉우리가 고래산이다. 고래산만 지나면 내리막길 그리고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먹치고개다. 힘이 다시 솟구친다. 고래산 정상은 지맥길에서 살짝 벗어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갈림길에서 고래산 정상까지는 대략 20분 거리, 왕복 40분 거리다. 명길, 규성형님과 병기만 갔다 오기로 하고 나와 동식은 덕분에 30분이 넘는 휴식을 갈림길에서 취하기로 했다. 웃통도 벗고 신발도 벗고 아예 양말까지 벗어 바위 위에 널어 놓고는 느긋하게 휴식을 즐겼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호젓한 산길에서 벗과 이런저런 한담을 하다 보니 비록 햇볕은 쨍쨍하지만 숲에서 솔솔 불어오는 냉랭한 산바람에 온몸이 시원하다.
나는 아직 젊은 줄 알았는데 - 사진을 현상해 보면 영락없는 촌로의 모습이다.^^
고래산 갈림길에서 하산지점인 먹치고개 (이름이 생소한 이 고개를 우리는 자주 먹튀고개라 발음을 했다.)까지는 한 시간 남짓의 내리막 길. 먹치고개에는 먹거리를 파는 가게가 있다는 명길 형님의 설명에 발걸음이 가볍고 재다. 시원한 맥주 한 컵이 기다리고 있을 터!
하산길 - 좌로부터 C군 27조동식,24이규성, 24우명길, 29정병기
먹치고개에는 제법 커다란 음식점이 여러 곳 있다. 지난 봄인가에 동식이 갑산 등반 길에 들러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는, 아니 식당을 운영하는 세 자매가 모두 미인이라는 “산야”라는 묵밥 전문집에서 뒷풀이를 하기로 했다. 과연 세자매 모두 미인이었다. 묵밥이며 부침의 맛도 일품이다. 땀을 많이 흘린 산행 끝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의 맛이 그만이라 몇 병을 더 마시고 난 뒤에야 겨우 직성이 풀렸다.
뒷풀이는 언제나 즐겁기만 하다. 그 날의 산행을 되돌아 보기도 하고 다음 산행에 대한 정보도 나눈다. 오늘의 산행길을 되돌아 보니 한준의 보충수업이 모두 걱정이다. 알바라도 심하게 하게 되면 어쩌나 모두 걱정이 태산이다. 이제 다음 달이면 한북천마지맥 종주는 끝이 나는데 한 사람이라도 탈락자가 생기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모쪼록 보충수업 해법을 찾아 모두가 완주를 완료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첫댓글 글짜를 크게 해 주세요. 너무 작아서 읽기가 불편합니다.
에구..제 컴터에서는 크게 보이는데 글자가 작게 보이는군요. ..키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