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9. 남전한규
산하대지는 모두 물 속에 나타난 달이다
선교(禪敎) 가운데 어느 하나 소홀히 않으며 한국불교의 본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수행정진했던 남전한규(南泉翰奎, 1868~1936)스님. 쉽고 재밌는 법문으로 대중을 인도하고, 명필가와 대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던 남전스님은 수행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석주정일(昔珠正一)이라는 ‘걸출한 제자’를 길러 한국불교 常岾� 이룬 선지식의 삶을 <남전선사문집(南泉禪師文集)>과
<남전법묵(南泉法墨)> 그리고 석주스님의 생전 회고 등으로 재구성했다.
“산하대지는 모두 물 속에 나타난 달이다”
석두ㆍ성월스님과 선학원 창건 조선불교 수호
만해스님 거처 제공 ‘님의 침묵’ 출간 도와
<사진> 서울 칠보사에 있는 남전스님 진영. 한글과 한문을 섞어 쓴 찬문이 특이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홍(紅)가사를 입었다.
○…일제 강점기 만해스님은 일본 경찰의 삼엄한 시찰대상으로 누구 하나 선뜻 나서 편의를 제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도움을 주었다가는 덩달아 감시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 고초를 겪을 수 있기 때문. 그럼에도 남전스님은 “맹수처럼 일본의 가슴에 불을 지르며 구도자"로서 소외 당하고 있는 만해스님에게 선학원의 방을 흔쾌히 내주었다.
만해스님이 조선독립의 간절한 원력을 담은 불후의 명작 <님의 침묵>을 집필한 것도 선학원에 머물 무렵이다. 이때 만해스님은 47세였고, 당시 18세였던 석주스님은 <님의 침묵> 을 서점에 배달하고 판매 대금을 수금하는 심부름을 했다.
또한 남전스님은 조선불교 왜색화(倭色化)의 주모자였던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을 명고축출(鳴鼓逐出)할 때 그의 무지를 꾸짖는 할(喝)을 했다. 스님은 스스로 ‘백악산인(白岳山人)’이라 했을 만큼 민족정신이 강했다. 백악산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마음 변하지 말고 사람 되는 공부를 해라.” 선학원을 찾아와 출가의 뜻을 밝힌 한 행자에게 던진 남전스님 말씀이다.
“공부 되는 일은 뭐든지 하겠습니다”라고 답한 젊은이는 6년간 행자 생활을 했다. 남전스님은 “마음에 틈이 생기면 번잡한 생각이 끼어들어 때가 묻고 게을러진다”면서 행자를 경책했다.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절일을 모두 감당했던 행자는 훗날 커다란 족적을 남긴 석주스님이다. 석주스님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행자생활이 너무 힘들어 은사스님에게 ‘지금 하는 것은 일이지 공부는 아닙니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은사스님은 ‘일을 시키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 네가 공부하도록 하게 하는 일’이라고 하셨죠. 제가 생각을 굽히지 않고 ‘그래도 일만 시키지 마시고 공부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했지요. 은사스님은 ‘일을 하나 더 주마. 일하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입으로 부처님을 찾아라’며 염불을 권했습니다.”
○…남전스님은 7살부터 12년간 사숙(私塾,글방)에 다니며 <사략> <통감> <고문> <맹자> 등 한학(漢學)을 배웠다. 본래 선비의 길을 걷고자 했지만 조선은 혼란한 정국과 외세 간섭으로 ‘바람 앞에 등불’ 같았다. 벼슬 길의 꿈을 접은 스님은 출가 전부터 익힌 한학과 서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경학을 연찬하고 글씨 쓰는 것도 수행이었다. 합천 해인사 구광루를 비롯해 성주 선석사 등에 친필이 남아있다. 명필(名筆)로 명성을 떨치던 스님의 글씨를 모아 펴낸 책이 <남전법묵>이다. 참선수행했던 남전스님은 “우리의 본마음은 모두 부처님”이라면서 “경전을 이정표 삼아 부처님 경지에 가야 한다”고 경학 연찬도 강조했다.
○…남전스님은 백장청규(百丈淸規)에 근거해 수행자는 선농일치(禪農一致)해야 한다고 했다. 일하면서 수행하는 것이 납자의 본분이라는 것이다. <남전문집>에는 이 같은 마음이 담긴 글이 실려 있다. 선학원에 머물던 어느 날. 서울 외곽에 나왔다가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보고 지은 시이다.
<사진> 지혜로운 사람은 함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인다. 말을 끊고 망상을 끊으면 통하지 못할 곳이 없다. 남전스님 친필.
제목은 ‘城東偶吟(성동우금)’이다.
“久居城裡出城東(구거성리출성동) /
유괴증년불학농(猶愧曾年不學農) /
競面春光何處去(경면춘광하처거) /
只有痴冥一老翁(지유치명일노옹)”
한글 풀이는 다음과 같다.
“성 안에 오래 살다 성동으로 나오나니
일찍이 농사 배우지 못한 것 부끄럽구나
거울 속의 봄빛은 어디 갔는가
다만 어리석은 한 늙은 첨지일네.”
○…상좌 석주스님에게 보낸 편지에는 남전스님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
“네가 이제 사중의 쌀을 먹고, 사중에서 주는 물품으로 생활하게 되었으니 간경(看經)이 어찌 편안하겠느냐?
사은(寺恩)이 실로 큰 것이니라. 그런데도 성공하지 못하면 헛되이 광음(光陰)만 허비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쓸모가 없게 되나니, 어찌 편히 생명을 보존하겠는가? …
공연히 배움의 과정에 전념하지 않으면, 그 과정을 마쳤다 할지라도 남의 부림을 받게 될 뿐이다. 진정 ‘나’에 대해 무식한 사람이 팔을 흔들고 큰소리 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하물며 배움의 과정을 성취치 못한 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승려가 되어 배움의 과정에 들어간 자는 비록 재지(才智)가 있다고 하더라도 금과 옥을 버리고 기와와 마(麻)를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 누구를 막론하고 마음을 밝히는 공부와 정신학에 전문적으로 꿰뚫어 들어가면 세상에서 크게 쓰이는 것이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건가.”
○…스님은 1913년 범어사 임제종 중앙포교소 소임을 맡았다. 쇠락한 불교를 다시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당시 전기로 움직이는 전차(電車)가 다녔지만 이용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걸어 다녔다.
“절집에 들어온 재물은 정재(淨財)이기 때문에 한 푼도 헛되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5전에서 10전 정도하는 전차비와 함께 다른 경비를 아껴 3000원을 모았다. 쌀 한 섬이 50전이었으니, 큰 돈이었다. 절약해 모은 정재를 선학원 창건 당시 모두 내 놓았다. 당신 앞으로 돼 있던 토지 80두락(斗落)도 헌납했다. 두락은 논 661.16㎡(200평) 또는 밭 991.74㎡(300평)에 이른다.
선학원 창건후에는 10여 년간 저축한 돈으로 불양답(佛糧畓,부처님에게 올리는 쌀을 경작하는 논밭) 50두락을 구입해 해인사에 기증했다. 철원군 김화(金化)와 화천 금성(金城)에 100여 두락의 전답은 선학원에 기증했다. 소유한 모든 것을 부처님을 위해 아낌없이 내 놓은 것이다.
○…남전스님이 경봉(鏡峰, 1892~1982)스님에게 보낸 편지 2통이 <삼소굴 소식>에 남아있다. 입적하기 두해 전인 1934년 봄에 작성된 편지는 소박하면서 겸손한 스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한문으로 쓰여진 주요 내용을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몸은 장차 다비할 때가 다 되었는데 무엇을 애석해 하리오마는 다만 한(恨)되는 것은 정신이 병에 시달려 앞길이 캄캄할 뿐이니 평생 지은 것은 종문(宗門)에 누를 끼친 것 뿐이라 죄송할 따름이오.” (1934년 3월) “남전은 불법에서 퇴전(退轉)한지 이미 오래되어 소위 일용사(日用事)는 다만 이 삼독뿐이라 그래서 날이 갈수록 병만 더해갈 뿐이라 지금도 앓고 누웠으니 이밖에 무슨 말을 하리오.” (1934년 4월)
이성수 기자
■ 남전스님의 詩 ■
남전스님 행장을<남전문집>에 게재한 환경(幻鏡)스님은 “경학에 밝은 선지식이면서 법문과 글 잘하는 선승(禪僧)이며 달변가였다”면서 “공덕심(功德心)의 의표(儀表)요 높은 도인이자 희대의 명필.대문장(大文章)”이라고 했다. 상(相)내는 것을 싫어한 스님은 “네 홀로 보고 이것을 없애라”며 세상에 당신 글을 내 놓지 말 것을 제자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석주스님은 “더 이상 비장(秘藏)만 해둘 수는 없다”면서 남전스님 열반 40주기인 1978년 <남전문집>을 펴냈다. 그 가운데 글 두 편을 소개한다.
乙丑初春(을축초춘)
室中多冷小來人(실중다냉소래인)
且喜門庭不落塵(차희문정불락진)
鼓處鍾時門市 浩浩(고처종시요호호)
春風依舊百花新(춘풍의구백화신)
방이 너무 차서 찾는 사람 적지만
뜰에 먼지 떨어지지 않는 것이 또한 기쁘다.
북 소리 종소리가 몹시 시끄러운데
그래도 봄바람에 온갖 꽃이 새롭네.
甲子除夜(갑자제야)
卽去無痕刻刻行(즉거무흔각각행)
壁間惟聞小鍾聲(벽간유문소종성)
元來鼠子知憎物(원래서자지증물)
更待牛兒欲付情(갱대우아욕부정)
가는 세월 흔적 없이 시시각각 흐르는데
벽 위에는 오직 괘종 소리 들린다.
원래로 쥐새끼(갑자년)는 물건을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다시 송아지(을축년)를 기다려 정을 붙이려 하네.
■ 행장 ■
1868년 9월 6일 합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안동 김씨 병용(炳鎔) 공, 모친은 경주 김씨였다. 우두산인(牛頭山人).백악산인은 자호(自號). 사숙에서 서송재(徐松齋) 선생을 모시고 한학을 공부했다. 16세 때 최치원 유적을 보기위해 해인사를 찾았다 신해(信海)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완허장섭(玩虛仗涉)스님에게 인가 받았다.
선교를 겸비한 스님은 수행자의 외길을 걸으며 조선불교 부흥을 위해 헌신했다. 성월(性月).도봉(道峰).석두(石頭).적음(寂音).한암(漢巖)스님과 선학원을 창건했다. 직지사 조실을 지냈으며 통도사 보광전에서 정진했다. 1936년 4월28일 서울 선학원에서 시적(示寂)했다. 세수 69세. 법랍 54세. 보봉준표(寶峰俊杓).석주정일(昔株正一).일부(一夫)스님이 제자이다.
[출처 : 불교신문 2404호/ 2408호/ 2008년 3월12일자]
■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
“부처님 법은 지극하게 평등”
물 얼면 얼음이요 녹으면 물
깨달음의 본래 자리는 같다
남전(南泉)스님은 왜색불교를 막고 전통불교의 계승을 위해 도반들과 함께 선학원(禪學院)을 창립했다. 이때가 1921년으로 석두(石頭)스님과 성월(惺月)스님이 뜻을 같이했다. 조계종 명예원로이며 칠보사 조실인 석주(昔珠)스님의 은사가 바로 남전스님이다. 남전스님은 1868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16세때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한다. 입산 당시의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삼천 대천 세계에 한줄기 빛살이 하늘에 가득찼고
소나무에 걸린 달과 숲속의 바람도 스님과 함께 잠들었네.”
신해(信海)스님을 은사로 1885년 사미계를 받은 남전스님은 완허(玩虛)스님에게 법을 인가 받았다. 장경(藏經)에 능통하고 선필(禪筆)로 후학들을 제도하며 선풍(禪風)을 일으켰던 남천스님이 1908년 해인사에서 한 대중설법이다.
“원각 도량이 어디 있는고?
오늘 여기에서 살고 죽음이 바로 이것이로다.”
남전스님은 한시에도 조예가 깊었다.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나(一歸何處話)’는 제목의 시이다.
“청주의 삼자는 사람마다 입는 것
크거나 작거나 몸에 맞아야 새 것이리
닭과 오리는 추울때라야 나무와 물로 나뉘거니
태산도 도로 하나의 조그마한 티끌이다
구십일의 여름과 석달의 겨울 분별하는 그 속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위(作爲)가 많다
서울생활 10년이 다만 이러했거니
귀밑털이 쓸쓸이 눈 서리에 나부끼네.”
이 글은 〈남전선사문집〉에 있는 것이다.
1924년 〈불교〉창간호에 실린 남전스님의 법어를 옮긴다. 요즘 잘 쓰지 않는 한자가 많아 일부는 우리말로 바꾸었다.
“불법은 원체 지극하게 평등하고 공평한 길로 들어가는 본래 자리이다. 이 본래 자리는 잠시도 이 세계를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현재·미래 삼세(三世)에 출현하는 모든 부처님이 시기와 조건이 함께하여 불러지는 이름이 각별함이언정 그 명호의 당처(當處), 즉 본래 자리는 하나요, 둘이 아님(不二)일뿐 아니라,
또한 중생과도 둘이 아니므로 모든 부처님이 있다 하여도 더 심비광현(深秘光顯)함이 줄어들바가 없으나, 중생과 모든 부처님의 명사와 형식의 구별이 각각 있음은 얼음(氷)과 물(水)이 다른 이름이로되 둘이지 아니함과 같은 것이니, 물이 얼면 즉 얼음이요, 얼음이 녹으면 즉 물이다.
또 태양의 광명(光明)이 나타나는 것과 나타나지 않는 것을 까닭으로하여 낮밤이 구분되나 허공과 세계는 주야를 원인으로하여 호말(毫末)의 변(變)이 무(無)함과 여(如)히 모든 부처님의 깨달은 경계와 중생의 미처(迷處)가 상이(相異)함이언정 그 미묘하고 오묘한 깨달음의 본래자기가 어찌 다르다고 하겠는가….”
스님은 1936년 4월28일 세수 69세, 법랍 54세로 원적에 들었다.
李成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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