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민주노동당 기관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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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8일, 김포공항에서 출국전 일행들과 함께. [사진제공 - 참세상] | | 지난 8월 28일 ‘강서청산수’ 남북합작공장 조업식 참관은 나의 세 번째 평양방문이다. 분단사상 최초의 남북노동자축구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평양을 찾은 이후, 그 이듬해 북측이 초청한 남측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 및 통일인사 43인중 한사람으로 조선노동당 55주년 기념행사를 참관한 것이 그 두 번째. 다시 5년 10개월 만에 이번에는 경제사업과 관련해 분단된 조국의 또 다른 얼굴인 평양 땅을 밟게 되었다.
99년 8월 11~14일 나의 첫 번째 평양 방문은 시기적으로 이른바 ‘고난의 행군’ 강행군의 끝자락이었다. 북측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 시기는 사회주의 후방의 해체, 미국의 집요한 고립.압살 정책, 연이은 자연재해, 김일성 주석의 급서(急逝)라는 네 가지 악재가 한꺼번에 겹쳐 북녘동포들이 시련의 언덕을 넘고 넘어야 했던 94년~98년 즈음을 말한다. 남쪽 언론을 통해 대충은 알았지만, 하루 한두끼 밖에 못 먹거나 굶어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는 말을 직접 듣고는 방북 3박 4일 동안 내내 우울했었다.
그러나 2000년 10월 9~12일 두 번째 평양방문 때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그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기를 놀라운 단결력으로 극복해냈다는 동포들의 자부심이 넘쳐 흘렸고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빠른 속도로 발전했으며,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를 약속하는 북과 미국 간의 워싱턴 공동꼬뮈니케까지 발표되는, 모처럼 찾아온 겹경사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일행을 안내했던 김영성 내각 참사가 한완상 전 부총리, 박용길 장로, 백기완 선생, 김혜경 전 대표 등 방북 대표단이 함께 한 자리에서 이제 갓 태어난 북미공동꼬뮈니케를 상기된 표정으로 낭독하면서 “클린턴이 백기를 들고 평양에 온다”고 외치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북침전쟁연습 중에도 남북경협은 계속되고
그로부터 6년. 사회주의의 보루요 혁명의 수도라고 불리기도 하고 ‘악의 축’ 가운데서도 중심축쯤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 평양을 또 다시 찾았다. 그 사이 한반도 정세는 또 얼마나 복잡했는가. 부시 대통령이 등장해 대북 강경책을 고집하면서 북미관계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북경 6자회담이 열리고 겨우 9.19성명에 합의하고도 미국의 대북 금융.경제제재로 인해 한반도 평화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남북관계까지 방해받고 있어 세 번째 방북 길에 오른 내 마음은 여간 착찹하지 않았다. 8월 22일~9월 1일까지 북침전쟁 연습이라 규탄되고 있는 을지포커스렌즈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진행돼 한반도 긴장이 한층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이런 험악한 환경에서도 남과 북의 민간교류, 경제교류는 계속되고 있어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6.15 이전 같았으면, 북이 준전시상태에 돌입하는 전쟁연습 중의 남북경협은 아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남북교류도 예외 없이 유보, 연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한미합동군사훈련 중의 강서청산수 남북합작 공장 조업식의 상징적 의미를 담아 이글의 제목을 ‘을지훈련과 강서약수’라 붙여보았다.
8월 28일 오전 10시 김포공항 국제선 활주로에 대기하고 있는 평양행 고려민항기 전세기에 오른 우리 일행은 모두 51명이었다. 여기에는 대동무역(주)의 이대식 회장, 이재형 대표이사, 김영미 전무 등 주최 측 관계자들만이 아니라, 함영섭, 김영철 등 남북경협에 관심 있는 다수의 중소기업 사장들, 나의 은사이기도 한 저명한 경제사학자 최단옥 선생, 정광호, 최인백, 양정주 등 한국노총 간부들, 통일운동단체 일꾼들, 그리고 KBS 기자, 민중언론 참세상 편집국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고려민항기 전세기편이 서해 상공을 나는 동안, 나는 옆자리에 앉은 대동무역(주) 김영미 전무에게 우선 강서청산수 남북합작 공장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김영미 전무는 원래 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85년 구로동맹파업의 주역이었고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 건설의 산파 역할을 했던 실력 있는 여성인데, 최근 몇 년간은 대동무역(주)에서 이북 산 주류, 송이버섯 등을 수입, 판매하고 이번에 강서청산수 남북합작을 성공시킨 숨은 일꾼이다. 80년대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지라 나의 질문에도 비교적 자상하게 답해주었다.
김 전무는 이북 천연탄산음료, ‘강서청산수’ 남북합작공장 완공에 대해 “대동무역(주)과 그 계열 판매회사인 대동 두 하나(주)가 300만 달러를, 은하무역총회사가 100만 달러를 투자해 1년이란 짧은 기간에 완공했다”면서 “남측이 주로 설비와 자재를, 북측이 부지와 노동력, 기술을 댔기 때문에 남쪽 기준으로 보면 북측이 남측의 2배 이상 더 많은 투자를 한 셈이며, 월 100만병(500ml 크기)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라고 설명해줬다.
또한 김 전무는 “그동안 북쪽 동포들이 애용해온 ‘강서 약수’는 54명이 일하는 제1공장에서 유리병 형태로 생산해왔다”며, “‘강서청산수’ 남북합작공장은 노동자 25명이 일하는 완전자동화 시스템을 갖춘 제2공장으로서 남쪽과 해외 수출에 대비해 편리한 페트병으로 생산한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김 전무는 “‘강서청산수’는 위장병, 아토피, 당뇨, 고혈압 등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약수이고 오래전부터 이북 요양소에서 활용되고 그 효험이 검증되었기 때문에 잘 알리기만 하면 남쪽에서도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KTX로 1시간이면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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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8일 평양 순안 비행장에서. 왼쪽부터 유영주 참세상 편집국장, 양규헌 전 전노협 위원장, 김영미 대동무역 전무, 필자. [사진제공 - 참세상] | | 상냥하고 날씬한 두 여승무원이 나눠주는 용성 맥주 한 잔과 과자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고려민항기는 이륙한 지 불과 50분 만에 평양 순안비행장에 착륙했다. 오전 11시였다. “서해 공해로 빠져 북상하다가 다시 북측 영해 상공으로 진입하는 ㄷ자 비행경로가 아니라면, 김포공항에서 순안비행장까지 20~30분이면 충분할 것을” 속으로 하루 빨리 통일을 이루거나 군사적 긴장이라도 해소해 하늘 길, 바다길, 땅 길부터 활짝 열리길 빌었다. 창업투자회사를 운영하며 처음 평양을 방문한 함영섭 사장도 “대구 정도 온 것 같다. 통일이 되면,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KTX로 3시간 반에 갈 수 있다”고 얘기했다. 최단옥 선생도 평양 방문 제 일성으로 “상당히 가까워졌다. 통일이 머지않았다. 나의 연구, 분석으로 볼 때, 극동지역이 상승 기세에 있기 때문에 통일된 한반도가 15년 내 미, 일을 추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를 영접한 북측 민족경제연합회(이하 민경련) 관계자들의 안내로 공항 귀빈실에서 인사와 함께 짧은 대담을 나누고 버스를 타고 평양 시내로 향했다. 늦여름의 평양 날씨는 햇살이 따가웠으나 습도가 적어 무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우리 일행은 저마다 차창 밖에 비치는 평양 외곽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봇짐을 메고 걸어가거나 앞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주민들이 보였다. 더워서 그런지 가슴을 풀어헤치고 뛰어가는 청년들, 경운기 수레를 달고 가는 농로의 소달구지, 저 멀리 들녘에는 겨울철 남새(채소) 조달을 위해 지었다는 대규모 유리 온실도 눈에 띄었다. 또 다리 아래 흐르는 황토 빛 시냇물은 얼마 전 북쪽의 큰물 피해 소식이 사실임을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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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대에서. 왼쪽부터 필자, 양규헌 전 전노협 위원장, 북 민경련 참사. [사진제공 - 참세상] | | 우리를 싣고 외곽을 지나 시내로 향한 버스 3대는 거대한 김일성 주석 동상과 구리 조각상들이 기립해 있는 ‘만수대’ 앞에 멈췄다. 이북을 방문하는 해내외 모든 손님들이 예외 없이 입국절차와도 같이 맨 먼저 들리도록 안내받는 이북 특유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만수대 의례와 사진 촬영을 짧게 마친 우리 일행은 ‘원형식당’으로 이동, 점심을 먹었는데, 메뉴는 역시 평양냉면이었다. 안내원은 “‘옥류관’은 지금 수리중이고 10월에 개통하기 때문에 대신 이곳으로 왔는데, ‘옥류관’ 냉면 맛과 똑 같다”면서 유명한 옥류관 점심식사를 고대했던 우리 일행을 위로했다.
원형식당에서 평양냉면을 맛있게 먹은 우리는 평양 보통강 옆에 있는 ‘보통강여관’에 여장을 풀고 다시 ‘만경대 고향집’이라 불리는 김일성 주석 생가를 방문했다. 이곳 역시 평양의 관광 명소의 하나로서 빠짐없이 찾는 곳인데, 일제 때 만주로 건너간 김 주석의 부모와 작은 삼촌, 동생이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고 조부모와 큰 삼촌만이 남아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시골집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용하던 농기구, 베틀, 생활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방안에는 김 주석 일가 사진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우리는 두레박으로 퍼 올린 ‘고향집’의 시원한 우물물을 실컷 마시고는 애초 방북 목적지로 향했다. 평양시 외곽에 위치한 평안남도 강서군 청산리 소재 ‘강서청산수’ 남북합작 공장에는 이미 노동자, 지역주민 100여명이 진입로에서 정문까지 도열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열렬히 환영했는데, 우리도 손을 흔들며 “반갑습니다”를 연발하며 화답했다. 2층 귀빈실에서 “공화국 인민들만 먹으려 했는데, 6.15시대로 인해 남녘 동포들도 ‘강서청산수’를 먹게 됐다”는 농반 진반의 따뜻한 영접을 받은 우리는, 공장 앞마당에 차려진 <강서청산수 공장 조업식> 행사에 참석했다.
“6.15시대로 인해 남녘 동포들도 ‘강서청산수’를 먹게 됐다”
북측 민경련 관계자는 먼저 경과보고를 통해 “‘강서청산수’는 7세기 고구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며 칼슘, 철분, 마그네슘 등 광물질이 적정하게 함유된 천연탄산수로서 국보 제56호로 지정된 민족의 보물”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완전 자동화 시스템을 갖춰 연간 1만2천 톤의 천연탄산음료를 생산하는 이 강서청산수 공장은, 남측이 300만 달러, 북측이 100만 달러를 투자해 1년이란 짧은 기간에 완공한 남북경협의 소중한 결실”이라고 자랑했다.
이어 민경련 김춘근 부회장은 인사말에서 “북과 남이 힘을 합쳐 건설한 ‘강서청산수’ 공장의 조업은 큰 의미가 있으며, 6.15공동선언의 생활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면서 “국보인 강서청산수가 북과 남은 물론, 세계로 뻗어나가도록 하자”고 강조했다. 또 김 부회장은 남북경협을 총괄하는 북측의 책임자답게 “북남합작으로 만든 강서청산수 공장의 조업처럼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민족끼리 서로 돕고 힘을 모으면, 북남경협을 활성화하고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으며, 통일조국, 부강 번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동무역(주)의 이대식 회장도 기념사를 통해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남과 북이 힘을 모아 공장을 완공해 감개가 무량하다”며, “‘강서청산수’는 인체에 가장 적합한 광천수로서 각종 질병의 치료 효과가 높아 민족의 염원인 ‘병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을 일구는데도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 회장은 “‘강서청산수’ 공장이 남과 북의 공동이익, 공동번영을 위한 경제협력사업의 모범이 되길 바란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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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합작 강서청산수 공장 조업식에서. [사진제공 - 참세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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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ML병에 든 강서청산수를 시음했다. [사진제공 - 참세상] | | 남과 북의 대표들이 테이프를 컷팅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이날 행사를 마친 남측 인사들은, 최첨단시설을 갖춘 공장을 참관했으며, 직접 프라스틱병에 담긴 500ML용량의 ‘강서청산수’를 마셔보기도 했다. 그리고 공장으로부터 300M 떨어진 원수지역(原水地域 : 강서청산수가 솟아나오는 곳)을 방문해 ‘강서청산수’의 생성과정을 보고 위생관리와 지질 보호에 만전을 기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강서청산수 공장 옆 청산리농장에서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이 창조돼”
공장 인근에 똑같은 규격과 모양의 파란지붕을 가진 새 주택단지가 보여 나는 잠시 쉬는 틈을 타 안내원에게 물어봤다. “강서청산수 공장 노동자들의 집입니까? 출근하기 편하겠습니다”라고 하자, “꼭 그렇지는 않습네다. 청산리 농장 문화주택입네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청산리 농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집인데, 개중에는 부부 가운데 한사람이 강서청산수 공장에 다니는 집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남편은 공장 노동자, 아내는 농장 근로자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안내원에 따르면, 청산리농장은 북측이 자랑하는 대중지도 사상과 방법인 ‘청산리 정신, 청산리방법’을 창출한 곳이라고 한다. “김일성 주석이 60년 2월초 청산리에 와서 보름동안 농민들과 침식을 같이 하면서 이곳 사업을 지도했는데, 그 모범을 따라 위가 아래를 도와주고, 현지에 내려가 실정을 알아보고 문제해결의 방도를 세우며, 사람과의 사업을 앞세워 대중의 자각과 창발성을 불러일으키는 등의 청산리 정신, 청산리방법을 이북 사회의 운영원리로 일반화시켰다”는 것이다.
숙소인 대동강여관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또 하나의 의문을 해소했다. 다름이 아니라 6년 전 두 번째 방문 때 보다 평양시내에 젊은 사람들이 현저히 많았기 때문이다. 차창 밖에 비치는 ‘보통강 강변’에도, ‘태권도 전당’에도, 오전에 방문했던 ‘만수대’에서도 젊은 사람들이 모여 있거나 놀고 있었으니, “퇴근시간도 아니고 월요일 대낮에 젊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보일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사정이 어렵고 공장 가동율이 떨어져 혹시 청년들이 놀고 있는 게 아닐까” 은근히 걱정이 돼 물어보았더니, 안내원은 “오늘이 청년절이라 일하지 않고 쉬는 경우가 많다”고 간단하게 나의 의문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청년절은 김일성 주석이 1927일 8월 28일 길림에서 보다 많은 청년학생들을 묶어세우기 위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개편해 비합법 대중조직 성격의 반제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선포한 날”이라고 덧붙였다.
“정세가 아무리 어려워도 금강산, 개성공단은 끝까지 같이 하자”
방북 첫날 저녁 우리 일행은 대동강여관 식당에서 가진 민경련 주최의 만찬에 참석했다. 나는 마침 남북경협을 비롯한 북쪽의 대외경제사업에 상당한 경험이 있는 민경련 관계자와 합석해 소중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노태우정권 시절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방북해 40여개 공장을 둘러보고 탄광에도 투자하겠다, 기계공장에도 투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다 말뿐이었다”면서 “일부 남쪽 기업인들의 말로만의 투자가 북쪽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담보를 세우라고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투자자가 어떻게 담보부터 세우겠나”라고 솔직히 털어놨다.
그러면서 “그렇기 때문에 말을 통해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기 보다는 적은 것이라도 뭔가 만들어내는 모범이 중요하다”며 “이것이 커서 뭐가 될지 모르지만 일단 강서청산수 남북합작공장이라는 옥동자를 만들었으니, 대동무역(주)은 큰일 한 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그는 “정세가 아무리 어려워도 남과 북이 금강산, 개성공단은 끝까지 책임지고 같이 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부실기업이 대북 투자에 참여해 잘못되면, 북쪽 노동자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금과 경영이 탄탄한 기업을 선호한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또 한 가지 그는 “북미관계가 호전되면 수출시장은 순식간에 개척할 수 있기 때문에 개성공단의 상품은 우선 남쪽 내수를 겨냥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빼놓지 않았다.
만찬을 끝낸 나는 다시 찾은 평양의 첫 날 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양규헌 전 전노협 위원장이자 초대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 유영주 민중언론 참세상 편집국장과 함께 용성맥주를 몇 병 사들고 그들의 방에 들어갔다. 양 위원장은 내가 80년대 안양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부터 잘 아는 사이인데도 서로 바쁘게 사느라 최근 몇 년간은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양 위원장과 휴전선 이북에서 술을 한 잔 하며 대화를 나누다니, 참으로 나의 일상도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는 양 위원장과 유 국장은 나의 방북 경험을 듣다가 불과 보름 전에 겪은 자신들의 독특한 분단체험을 나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마디로 “하루에 휴전선을 세 번 넘나들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동무역(주)이 북쪽 송이버섯을 수입해 남쪽에 파는데, 북쪽이 채취한 송이버섯을 옮기는 트럭을 절실히 필요로 해 1톤 탑 차 10대를 제공했다”면서 “10대를 4명이 운전해 문산에서 개성까지 육로로 이동했으니, 하루에 세 번이나 휴전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양 위원장은 “남에서 북으로 차를 몰고 비무장지대를 넘었는데 한국군-양키군-인민군 순으로 안내를 받았다”면서 “휴전선 한 가운데 양키가 버티고 있어 저 놈들 때문에 통일이 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에 기분이 아주 나빴다” “하루 세 번 휴전선을 넘으니 분단 60년이 쌓은 마음속의 경계선도 없어지더라” “처음에 깐깐하던 인민군 장교도 두 번째, 세 번째 갈수록 편하게 대해주더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전했다. 두 사람의 특별한 체험 속에서 소중한 교훈을 찾으면,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길이 보일 것 같기도 했다.
“하루에 휴전선을 세 번 넘나들었다” 양규헌의 독특한 분단체험
역사적인 6.15선언에 따라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아직도 비무장지대 관할권을 쥐고 있는 주한미군을 내보내고 7천만 겨레가 남과 북을 자유롭게 오고 가면 그 것이 곧 통일이 아니겠는가. 외세의 간섭과 지배만 아니라면, 민족 내부의 사상과 제도의 차이는 얼마든지 발전적으로 통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전력 사정으로 초저녁부터 깜깜해진 평양의 밤거리를 내려다보면서 어떻게 하면 미국의 대북 금융.경제제재를 중단시키고 94년 제네바 기본합의서, 2000년 공동꼬뮈니케, 2005년 9.19성명에서 거듭 확인한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를 실현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8월 29일은 우리 일행이 묘향산을 관광하는 날이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고속도로를 2시간 남짓 달렸다. 차창밖에는 맑고 깨끗한, 그러나 수심이 깊지 않아 보이는 청천강이 한동안 보였다. 내 옆에 앉은 함영섭 사장은 “저 강이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에 맞서 살수대첩을 전개한 그 유명한 청천강인가” “저렇게 유역이 넓고 평탄한데, 어떻게 강물을 막아 수공을 취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나도 “아마 김부식의 역사 왜곡일 것”이라며 “광활한 영토를 가진 고구려의 살수대첩은 아마 요동의 어느 강이 아니겠느냐”고 거들었다. 나의 첫 번째 방북 때인 99년에는 청천강 곳곳에 물레방아 모형의 소형 수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인근 동네의 전기사정을 조금이라도 해결하기 위해서 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안내원에게 물어보지는 않았고 속으로 전기사정이 조금 나아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4대 명산중의 하나라는 묘향산을 찾은 우리는 먼저 ‘국제친선전람관’으로 안내되었다. ‘국제 친선전람관’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세계 각 국으로부터 받은 진귀한 선물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듣도 보도 못한 온갖 희귀한 물건들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었고 특히 남쪽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 동아일보 사주가 보낸 선물에는 우리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정권안보를 위해 그토록 남북대결을 부추기던 역대 독재자들도 물밑으로는 이렇게 했구나 생각하니 쓴 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도 국가보안법을 어기고 김 주석에게 선물했더라”
99년 남북노동자축구대회를 앞두고 전달한 ‘노동자가 앞장서서 민족통일 앞당기자’라는 구호와 민주노총 간부들의 연서명은 그 당사자중 한명이었던 나와 함께 특별히 소개되어 박수까지 받았다. 바로 옆에 있는 한국노총 간부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민주노총이 노동자 통일운동을 먼저 시작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한국노총이 통일실천단 등 민주노총 못지않게 통일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으며, 북측 수해 돕기는 민주노총 보다 더 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이동해 묘향산 ‘보현사’로 들어섰다. 보현사는 고려시대 사찰로 임시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서산대사 ‘휴정’이 입적한 절로 유명하다. 보현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 우리 일행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바람에 애초 예정된 등산계획은 취소하고 향산 계곡 옆 큰 나무 아래에 자리를 깔고 도시락(북에서는 ‘밥곽’이라 했다)을 먹었다, 이 자리에서 우리 일행은 모두 반주를 곁들였는데, 나도 난생 처음 ‘산삼술’을 몇 잔 마셨다. 맑은 공기에 좋은 술까지 마시고 보니 낮술이 과했던 김서진 6.15민족공동위 서울본부 상임집행위원장, 김영철 사장, 이규 사장 등 4~5명은 거울처럼 투명한 향산 개울물 속으로 옷도 입은 채 풍덩 뛰어드는 게 아닌가.
이날 저녁 만찬은 남측 주최로 평양 ‘민족식당’에서 열렸다. 불고기, 회, 냉면 등이 코스로 나오고 맛있는 음식에 여성 안내원들의 멋진 노래공연까지 구경할 수 있었으니 우리 일행 모두의 기분이 꽤나 고조된 듯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남과 북의 상호 관심사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눴는데, 남쪽 벤처회사 사장과 민경련 어느 참사의 주고받는 말들이 의미 있게 와 닿았다. 남쪽 사장이 “개성공단도 제조업만이 아니라 지식정보산업, 첨단산업을 유치해야 한다” “북쪽에도 만화영화 수준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는 만큼, 남북합작으로 애니매이션산업을 시작해 보는 건 어떠냐” “애니매이션 남쪽 의무 방송이 7,000억 달러 규모다” “북이 인건비가 싸니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자, 민경련 참사는 “그거 관심이 가는 좋은 제안입네다” “연구, 검토해보갔시오”라고 화답했다.
남쪽 벤처회사 사장, “개성공단에 남북합작 애니매이션산업 유치해야”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는 것으로 즐거운 만찬을 끝낸 우리 일행은 숙소로 돌아와 각자 자기 방으로 흩어졌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양정주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과 함께 침대에 누워 TV를 켰는데, 마침 비디오 ‘민족과 운명’ 홍영자편이 방영되고 있었다. 남쪽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을 소재로 한 이북영화였는데, 박정희, 김재규, 김형욱, 최홍희 등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는 실감나는 영화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난 양정주 본부장은 “유신독재를 비판하던 김형욱이가 저렇게 죽었구나”라면서 “대부분 사실에 기초한 것 같은데, 김형욱이 프랑스에서 납치돼 청와대 지하실로 끌려와 박정희가 직접 권총으로 쏴 죽인 장면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고 평가했다.
8월 30일 평양 체류 마지막 날, 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여관 앞을 산책하면서 민경련 관계자, 정광호 한국노총 부위원장 등 몇 사람과 담소를 나누었다. “중국을 어떻게 보느냐”는 나의 질문에 민경련 관계자는 “중국은 거의 자본주의로 넘어갔다”면서 “자본주의시장경제와 일당 정치체제와의 불일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결국 정치도 바뀌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중 간의 우호관계도 예전 같지 않다. 중국지도부가 전통적 혈맹관계에 대한 인식이 불철저한 세대로 바뀌었다”며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중국의 태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듯 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토대로 중국의 정치체제가 다당제로, 중국사회가 다원화로 갈 경우, 안으로는 분열로 밖으로는 팽창으로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나의 의견에, “각 성별로 자치구를 인정하고 미국처럼 연방을 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극단적 분열양상이 연출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브라질을 다녀온 정광호 부위원장이 “남미 일대에도 중국의 중저가 물량 공세가 대단하더라. 머쟎아 중국이 세계를 제패할지 모르겠다”고 하자, 민경련 관계자도 “중동에도 중국 상품이 휩쓸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중국 변방으로 치부하는 동북공정에서 보듯이 중국자본주의의 대외 팽창의 일차 희생자는 우리민족인 만큼, 하루빨리 통일해 어떠한 정세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민경련 관계자도 남측 인사들도 한결같이 동의했다.
이날 오전 우리 일행은 대동강 강변에 있는 높이 170m의 ‘주체사상탑’에 올라 평양 시내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해방직후 김일성 주석이 귀국해 첫 연설을 했다는 평양공설운동장(지금은 김일성경기장) 옆의 ‘개선문’을 구경했으며, 마지막으로 ‘평양금강산 판매소’를 찾아 쇼핑을 했다. 우리 일행들은 이북 상품에 대한 호기심도 있고 조금이라도 더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 이것저것 많이 구매했으나, 나는 수해 돕기 지원에 호주머니를 다 턴 뒤인지라 ‘하나’ 담배 두 보루, 산삼술 한 병, 나무 주걱과 젓가락 두 셋트만 구입했다.
판매소 밖으로 나온 나는 또 다시 민경련 관계자에게 미국의 금융.경제제재와 관련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인민들은 미국의 제재를 못 느끼겠지만, 우리는 시시각각 피부로 느낀다”면서 “미국이 저렇게 나오니 생각이 자꾸 바뀌고 초강경 대응을 고려하게 되는 게 아니겠느냐”고 답변했다. 미국의 대북 정책 변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시가 정권말기에 식물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막판에 정책을 쉽게 바꾸겠는가”라고 비관적으로 내다봤다.
민경련 관계자, “7.1 조치 이후, 약간 좋아졌지만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또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경제사정이 좀 나아졌는가라는 질문에는 “약간 좋아졌지만,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면서 “에너지, 전력, 초기투자 등 기반산업이 취약해 큰 진전이 없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압살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부문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도 갖고 있으며, 여기에 투자를 하다 보니까 인민생활 개선이 더디다. ‘고난의 행군’ 시기 보다는 훨씬 좋아졌지만, 탄광에는 전기가 없어 석탄을 못 캐내고 화력발전소에는 석탄이 없어 전력을 생산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는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또 내가 “시민들이 보트도 타고 소풍도 나오는데 보통강 강물이 깨끗하지 못하더라, 수질 개선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보통강은 상 하류가 가파르지 않아 강물이 고여 썩고 있다”면서 “김일성 주석이 살아계실 때는 상류에 발전기를 설치, 대동강물을 퍼 올려 강물이 흐르도록 조치했는데, 지금은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체계는 갖추고 있으므로 머쟎아 다시 보통강이 깨끗해지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박 3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다시 순안비행장으로 향했다. 공항 대합실의 대형스크린에는 작년 ‘아리랑’ 공연 녹화물이 방영되고 있었다. 북쪽의 큰물 피해로 인해 전격 취소된 대집단체조 및 예술 공연 ‘아리랑’을 보고 가지 못한데 대해 우리 일행은 못내 아쉬워했다. 한번 관람한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공연이기 때문이다.
을지훈련 중의 ‘강서청산수’ 남북합작공장 조업식 참관을 위한 나의 세 번째 방북. 미사일 국면에 이어 미국의 대북 금융.경제제재, 전쟁 위협 등으로 북미갈등은 계속되고 남북관계마저 순탄하지 못한 조건에서도 6.15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한 남북 경제인들의 끈질긴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고 나는 8월 30일 오후 6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KTX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깜깜한 평양의 밤과는 너무나 다른, 남의 말과 글이 어지럽게 새겨진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서울의 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첫댓글 정위원장님, 이 생수공장은 물이 지금도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까?
강서청산수 지금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미리 주문받아 판매하는데 빨리 동이 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