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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으로 아버지 집을 찾으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아버지께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말씀의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
오늘은 비둘기처럼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요나를 통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저는 복음 전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찾다가 요나서를 찾아서 열 번 정도 요나와 관련된 말씀을 준비하여 전해 드렸습니다.
요나서를 읽으실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의 입술을 통해 증거된 말씀들이 생각나고 더 깊은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이루어가시는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소망합니다.
요나는 결국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을 이룹니다.
그럼에도 요나 하면 그렇게 이쁘지 않는 이미지가 떠 오릅니다. 그렇습니까?
우리 성도님들도 요나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도 좀 뺀질거리고 요리조리 잘 빠지는 성도를 보고 요나와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시여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문제가 있지만 오늘 여러분들의 이름이 떠오를 때 여러분들의 이미지가 어떻게 떠 오를까 라는 것을 좀 생각하시면서 살아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목사님이시죠? 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한번은 전라도 어느 부패 집에서 점심을 먹고 계산대로 갔습니다.
계산을 하면서 그곳에 돈을 받으시는 분이 저에게 재림교회 목사님이시죠 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닙니다. 라고 하니까 꼭 재림 교회의 목사님 이미지가 풍긴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느냐고 하니까 손님께서 들어오시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들이 일반 다른 사람들의 모습하고 다르게 보였다고 합니다.
목사님들도 많이 오시는데 재림교회 목사님들은 좀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어느 곳에서나 행동하나 하나 말 한마디들을 더 조심해서 해야 겠다.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저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의 이미지가 풍기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살아 갑니다.
그럼에도 저는 재림교회의 목사가 아니라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저의 모습에서 사탄의 모습이 보인다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그런 말을 들으면 충격입니까?
저의 원래의 모습이 그러니까 충격 받을 것은 없지만 변화되지 못한 저의 모습을 주님께 내려 놓고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처럼 변화된다고 하는데 몸도 마음도 삶의 모습도 예수님 닮은 모습되게 하소서 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이름을 들으면 포근하고 따뜻하고 정겨운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장로님의 이름을 들으면 친정아버지 같은 느낌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번 구겨진 이미지를 펼려면 그 이미지 다름질 하기는 정말 힘이 듭니다.
더 우리의 이미지가 구겨지기 전 지금 이미지 관리를 잘하게 되길 호소합니다.
누구의 이미지도 그렇다는 것입니까? 요나의 이미지도 그러하다.
저도 사실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가 다시 와서 구겨진 이미지를 남기고 장유교회를 떠날까 봐 심히걱정이 됩니다.
저는 첨부터 그런 사람이었는데 지난 십오년을 용케도 좋은 이미지 관리로 그렇게 버텼지만 그러나 요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요나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들어 사용하셨다고 저는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저도 그렇게 끝까지 하나님의 손에 잡힌바 된 사람으로 살아가길 소원합니다.
우리 장유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로 살아가게 되길 축복합니다.
요나의 이름의 의미가 비둘기라고 합니다.
요나를 우리 말로 직역을 하면 비둘기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비둘기가 어디에 제일 먼저 나올까요?
물론 창세기 1장에서 하늘을 나는 새들을 창조하셨을 때 비둘기를 만드시어 그날 비둘기가 출현을 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라는 그 새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은 어디서 일까요?
예 노아 방주와 관련된 내용에서입니다.
성경에 비둘기가 제일 먼저 언급된 장이 창세기 8장입니다.
창세기 6장 7장 8장은 홍수와 관련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40일 동안 노아 홍수라고 알려진 엄청난 비가 하늘에서 내리고 땅 속에 있는 물들이 다 솟아올라 이 땅은 내린 비로 인하여 다 물에 잠겼을 때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방주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로 방주를 만들어 코로 기식하는 짐승들과 새들을 태우고 생명을 이어가도록 하라는 말씀을 따라 홍수를 지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제 홍수가 끝이 나고 방주가 아라랏 산에 닿았습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방주는 150일을 물 위에 떠 있었고,
7월에 아라랏 산에 닿았고 시월 1일에 산봉우리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40일을 지나서 노아는 방주의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보냅니다.
근데 그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냈더니 날아다니다가 방주로 돌아 옵니다.
다시 한 주일을 기다렸다가 비둘기를 내어 보냅니다.
그랬더니 날아다니다가 저녁때에 무엇을 입에 물고 왔다고 합니까?
창 8:11 “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비둘기가 감람 새 잎사귀를 따서 물고 갈 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을까요?
아마도 그 기록에 의하여서 사람들이 비둘기를 편지를 전달하는 매체로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날도 비둘기를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몰라도 예전에는 그렇게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비둘기가 주인이 발목에 매어주는 그 편지를 전하여야 겠다는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날아갈까요?
짐승들은 먹이를 가지고 훈련을 한다고 하죠.
제주도에 수족관이 좋드라는 이야기를 듣고 가 보았습니다.
돌고래들이 얼마나 말을 잘 듣던지.
근데 자세히 보니까 한 동작을 하고 난 다음에는 조련사의 손이 꼭 돌고래 입으로 가드라고요. 무엇하기 위함입니까? 돌고래가 좋아하는 먹이를 주는 광경이죠.
돌고래가 그거 때문에 묘기를 부리고 춤을 추고 합니다.
심부름을 하는 비둘기도 아마도 도착하면 비둘기가 좋아하는 맛있는 먹이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그 먹이 때문에 날아가고요.
요나는 그러한 먹이가 보이지 않아서 순종하지 않으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결국은 말씀에 순종하였고 위대한 선지자들의 대열에 기록되었고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몇 명 안되는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요나를 생각하면 오늘 불순종을 밥 먹듯하는 저와 여러분들도 가능성이 있습니까?
오늘 다시 요나를 통해 그런 가능성을 확인해 보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려 합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말씀에 끝까지 순종한 요나
저는 오늘 원하지 않았지만 끝 까지 순종한 요나에 대하여 좀 생각을 해 보려 합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하였다고요? 순종하였다.
그럴 수 있습니까? 원하지는 않았지만 순종을 하였다, 무슨 순종입니까?
억지로 하는 순종이죠, 요나가 그런 것 같습니까?
요나서 1장에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았습니다.
욘 1:1-2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 말씀을 들은 요나는 어떻게 했다고 합디까? 3절입니다.
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이 어디 나옵니까?
욘 3:4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무슨 말씀입니까?
요나서 1장에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였던 요나가 3장에 보니 어디 있습니까?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라는 성은 어떤 성일까요? 예 니느웨입니다.
중간의 내용은 어떤 내용이 있었든지 생각지 않겠습니다.
성경은 항상 동기와 결론을 중요시하죠? 동기가 좀 그렇드라도 결론이 좋으면 동기도 다 뭍힙니까? 예 뭍힐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안식일 문제로 그렇게 고생한 아이는 나중에 곁길로 나가서 믿음을 버린 사람으로 살아가고요,
학교 다닐 때는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적당하게 신앙을 하였던 학생은 나중에 목사님으로 나오고 이런 경우 들어 보셨습니까?
저의 아들이 군 생활을 할 때 선배가 있었습니다.
믿음 있었던 그 신학 선배가 있었던 곳에서의 군 생활은 신앙하기가 좀 쉽습니다.
왜 그럴까요?
선배가 고생을 하면서 부대의 환경을 재림교회 청년들이 신앙을 잘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후배들이 쉽다는 것입니다.
훈련소 생활을 할 때는 안식일 문제로 부대장이 저에게 전화도 오고 하여서 힘들게 안식일을 지키고 하였는데 자대로 배치되어서는 선배 덕분에 안식일을 부대 밖에 있는 교회로 나와서 잘 지키며 군 생활 하였습니다.
근데 그 선배는 얼마나 고생을 하였을까요?
이야기를 들으니 참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이 보고 싶어서 면회를 갔습니다.
금요일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안식일에 교회로 온 그 신학 선배를 보았습니다.
근데 군 생활을 마치고 저의 아들은 목사가 되고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안식일을 지켰던 그 선배는 이단에 빠져서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 알지 못하지만 그런 일들이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지금 적당하게 신앙을 하드래도 주님 오시는 날 구원받는 성도들로 서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지금 열심히 믿는 믿음의 생활을 하다가 주님 오시는 날 떨어져 나간 사람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무도 제가 말씀드린 뒤에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지를 않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첫 번째 말씀드린 사람들로서도 서지 않길 바랍니다.
지금 적당하게 살다가 주님 오시는 날에는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혹 있을지라도 그거는요 지금 열심히 살다가 주님 오시는 날 잃어버림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이해가 됩니까?
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지금도 뜨거움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을 하시다가 주님 오시는 날 더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하길 소망합니다.
그럼에도 누구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까? 요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말씀에 불순종하였던 요나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은 위대한 선지자의 대열에 설 수가 있었을까요? 그 하나의 비결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원하지 않았던 말씀에도 결국은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귀하신 성도님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얻지만 천국은 그 보혈로 만들어 주신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간다는 것을 아십니까?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임금이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청하고 싶은 사람들을 초청하였지만 오기를 싫어하여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어 오찬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여도 오기를 거절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거리로 나가서 만나는 대로 데리고 오라고 하여 혼인 잔치 자리에 손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22:11-13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혼인 잔치 자리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는 있으나 아무렇게는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되시나요?
제가 조금전에 말씀드린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받지만 하늘나라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짠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간다는 말씀의 이야기가 이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왕이 베푼 혼인 잔치 자리에는 왕이 아무런 댓가 없이 모든 사람들이 입고 들어갈 수 있는 예복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 아마도 종은 그 옷을 나누어 주고 입고 들어가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는 혼인잔치 자리에는 손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왕은 손님을 보기 위해 혼인잔치 자리로 나옵니다.
그때 그곳에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니까?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 그를 보고 왕이 무슨 말씀을 하였습니까?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유구 무언이어늘 무슨 말입니까?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것이죠.
우리 성도님들 우리가 이런 지경에 가도록 살아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을 입으라고요? 주님 준비하신 옷을 입으라.
지금은 하늘 혼인 잔치에서 옷을 살피는 시간입니다.
성도님들 지금 드리는 말씀을 율법주의로만 듣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지금까지 행함보다는 믿음을 더 많이 강조하였고 심판보다는 사랑을 더 많이 강조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고요? 아뇨 지금도 똑 같습니다.
혼인 옷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눈에 보이는 옷일까요?
성경에 보면 분명 눈에 보이는 옷을 입고 혼인집에 있는 백성들을 보게 됩니다.
보셨습니까?
계 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이 어떤 광경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대관식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광경이 어떠하다고 합니까?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무엇을 입고요? 흰옷을 입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광경입니다.
이들 가운데 우리 사랑하는 장유교회 성도님들 한분도 빠짐이 없이 다 참여하게 되길 소원합니다.
그 흰옷이 어떤 옷일까요? 그 옷감 재질이 어떤 것인가 라고 물은 것입니다.
옷감을 다루시는 우리 박집사님은 어떤 옷감 재질이 좋은 것인지 아시죠?
저는 옷감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옷을 사러 가면 그냥 보기 좋고 입어보고 맞으면 삽니다.
그런데 옷감 재질에 대하여 아시는 분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 옷감 재질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하고 찾아 보니 참 많이 있었습니다.
코튼이라고 불려지는 면이 있고요, 울이라고 불려지는 양모가 있다고 합니다.
울도 같은 울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울 몇 프로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폴리에스테르가 있고요, 나일론이 있습니다. 아크릴이 있다네요,
레이온이라는 인조 섬유가 있습니다, 누에고치에서 뽑아내는 실크가 있고요,
비단과 같은 소재인 시폰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그리고 리넨으로 불려지는 마가 있고요. 실캣이라는 천년 견사와 같은 광택이 나는 천이 있답니다.
데님으로 불려지는 목면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레이스, 텐셀, 쭈리면, 옷그포드, 앙고라, 분또, 모카시, 트위드, 코듀로이,
스웨이드, 자카드, 기모,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잘 모릅니다.
하늘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입는 옷감의 재질은 어떤 것일까요?
제가 말씀드린 사람이 만든 23가지의 재질 중 하나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어떤 재질일까요? 성경은 이런 힌트를 줍니다.
계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성도들이 입은 옷의 재질이 무엇이라 합니까? 성도의 성품이라는 말씀이죠?
그럼 성도들의 성품이 무엇이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옷이 되었다.
세상의 옷감의 재질도 23가지가 되는데 하늘 옷감의 재질은 성도의 성품이라고 하니까 성품도 여러 가지입니까?
부조와 선지자에보면 에녹을 언급하면서 이런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부조 88 “이 선지자의 경건한 품성은 그리스도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땅에서 구속함을 얻을”(계 14:3) 자들이 달성해야 할 거룩한 상태를 대표한다“
에녹의 성품이 오늘 우리와의 괸계가 어떠하여야 한다고 합니까?
재림성도들이 달성해야 할 거룩한 상태이다 라고 합니다.
그럼 에녹은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요? 주님 오시는 날 재림을 맞이할 백성들은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을까요?
다시 증언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물69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분의 백성들 속에 완전하게 재현될 때에 그분은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
누구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성격이 있고 성품이 있습니다.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그럼 성격은 무엇이고 성품은 무엇입니까?
성격을 사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이나 품성,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이나 본성,
타인에게 보여지는 어떤 개인의 모습과 특성,
정의하기 참 힘이 듭니다.
그럼 성품은 무엇입니까?
사전에는 성품을 이렇게 정의를 합니다. ”사람의 성질이나 됨됨이“
어떻게 보니까 성격이나 성품이 똑 같은 것처럼 보이죠?
사람의 개성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사람에게는 개성이 있다고 하죠?
개인의 성격이 있다는 것이죠? 그것을 존중하여야 한다고 하는 말을 하죠?
짐승에게도 성격이나 성품이 있습니까?
짐승에게는 성격은 있으나 성품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해가 됩니까? 더 많은 것은 우리 성도님들 살아가시면서 좀 더 성경적인 이해를 가지시길 소망합니다.
저의 이해로는 성격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특징을 의미하고요.
성품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의미한다고 이해를 합니다.
그럼 우리 예수님게서 오실 때 예수님은 자기의 것을 찾으실 때 라고 하셨는데 그 자기의 것은 우리의 성품입니까? 성격입니까?
수십년 전에 들은 어떤 목사님의 설교가운데서 하늘 예루살렘의 문이 열 두개 이며 그곳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과 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개인의 개성을 가리키는 의미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참 좋은 해석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사람 사람 개성이 다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품은 같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누구 닮은 성품요?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성품.
그럼 우리의 개성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우리의 본성은 다 악으로 기울여져 있는 성품과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품은 주님을 바라보면 변화를 받을 수 있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점점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변화될 수가 있는데 우리의 성격은 이대로 하늘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문제의 답을 요나를 통해 얻으려 합니다.
맘에 들지 않드래도 어떻게 하자고요? 순종하자.
우리의 성격을 예수그리스도에게 굴복을 시켜야 우리의 성품이 주님 닮을 수 있는 성품으로 변화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아멘입니까?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의 글 하나 올립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 성도님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격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밖도록 성령님께 내어 드리게 되길 소망합니다.
이 성품가지고도 하늘에 갈 수 없지만 이 성격 가지고도 하늘에 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억지로라도 할 수 없이 순종하였던 요나처럼 매일 매일 나의 거친 성격 예수그리스도의 발앞에 내려 놓고 주여 오늘도 드립니다 저를 십자가에 못밖아 주소서 라는 기도로 매일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오시는 날 우리 모두 손에 손잡고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길 축복합니다.
마 12:39-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