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댔다…12년 하혈 멎게한 그 이유 [백성호의 예수뎐]
예수가 가면 군중도 그를 따라갔다. 마르코(마가) 복음에는 그런 장면이 있다.
예수는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갔다. 그러자 군중이 예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몸이 아픈 이도 있고 마음이 아픈 이도 있었다.
그때 유대교 회당을 책임지고 있는 회당장이 와서 예수 앞에 엎드렸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주십시오.”(5장 23절)
그 말을 듣고 예수는 길을 나섰다. 지금도 호수 북쪽 카파르나움에는 유대교 회당의 유적이 있다.
이 일화의 배경은 카파르나움 일대였을까.
하혈하는 여인의 출혈은 왜 멈추었나
유대인은 하혈하는 여성을 '부정한 여성'으로 간주했다. 구약 시대에는 부족의 마을에서
벗어난 곳에 피가 멈출 때까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다. [중앙포토]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사람들은 절박하게 예수를 찾는다.
‘고통’이나 ‘죽음’과 마주할 때 특히 그렇다.
그건 우리의 삶이 결국 ‘순간’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마주치는 그 모든 기쁨(喜)과 분노(怒), 슬픔(哀)과 즐거움(樂)이 실은 ‘순간’이다.
지독한 고통이나 허무한 죽음과 대면할 때 그런 ‘순간의 헛헛함’은 극도로 증폭된다.
존재의 바닥마저 푹 꺼져버리는 텅 빈 공허. 우리는 그것을 껴안고 갈망한다.
‘순간’을 넘어서는 시간, 시간조차 넘어서는 시간, 그런 영원의 시간을 갈망한다.
‘치유’라는 이름으로,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예수의 뒤를 군중이 따라갔다.
사람들은 서로 밀치며 엉켜 있었다.
그 속에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무려 12년 동안 하혈을 하고 있었다.
나이가 얼마나 됐을까.
마흔 살이라 해도 20대 후반부터 하혈을 한 셈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성경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히려 상태만 더 나빠졌다고 한다.
예수 당시 갈릴리 호수 주변에는 아프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많이 머물렀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 갈릴리 일대는 그들에게 안식처 역할을 했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 주위를 돌면서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중앙포토]
갈릴래아(갈릴리) 호숫가에 서자 찰싹찰싹하고 자잘한 파도가 밀려왔다.
눈을 감았다.
하혈하는 여자.
‘그녀는 몸이 아팠겠지. 아픈 몸을 이끌고 호숫가로 나왔겠지.
예수라는 남자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예수 외에는 달리 기댈 곳이 없지 않았을까.’
12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녀가 30대라면 자기 삶의 3분의 1을, 40대라면 4분의 1을 고통의 나날 속에서 보낸 셈이다.
유대 사회는 철저한 율법 사회였다.
구약의 모세 때부터 그랬다.
여성이 월경을 할 때는 7일 동안 부정하다고 여겼다.
부정한 여자가 만지는 것은 모두 부정해진다고 믿었다.
여자가 깨끗해지려면 월경을 멈춘 후에 다시 7일이 지나야 했다.
그리고 8일째 되는 날에는 제사장에게 비둘기를 가져가 번제와 속죄제의 제물로 바쳐야 했다.
예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12년간 계속 하혈을 한 여자는 유대 사회에서 ‘부정한 여자’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남편과 잠자리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물건에 손을 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철저하게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다.
나는 ‘하혈하는 여자’를 통해 ‘하혈하는 나’를 본다.
저마다 삶의 상처가 있기에 피를 흘린다.
깊은 상처에서는 더 오래 피가 흐른다.
10년, 아니 20년, 아니 30년이 지나도 피가 멈추지 않는다.
그때마다 우리는 의사를 찾아간다.
나름대로 처방을 찾으려 한다.
성경 속의 여자처럼 말이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
깊고 오래된 상처는 좀체 아물지 않는다. 왜 그럴까.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부정한 여자로 여겨지는 하혈하는 여성이 예수의 옷자락을 잡을 때는 굉장한 용기와 절박함이 필요했을 터이다. [중앙포토]
그러니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손만 대도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여자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댔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따라가며 서로 밀쳤다.
몸이 아픈 여자는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예수의 옷자락, 그 끝에 손가락이라도 대보려고 말이다.
결국 그녀는 예수의 옷자락을 잡았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코 복음서 5장 28절)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몸에서 출혈이 멈추었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 일화를 ‘예수의 이적’으로만 본다.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치유의 작동 원리’가 담겨 있다.
여자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댔다.
영어로는 ‘touching’이다.
그것은 단순히 옷자락을 만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어 성서를 보면 더 명확하다.
‘(손을) 대다’는 그리스어로 ‘hapsomai’이다.
거기에는 ‘불을 밝히다(light)’,
‘(관심이나 감정에) 불을 붙이다(kindle)’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여자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은 ‘불을 밝히는’ 일이었다.
여자의 마음에 ‘불을 붙이는’ 일이었다.
그 불로 인해 하혈이 멈추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 광경을 찬찬히 눈앞에 떠올려보았다.
여자가 손을 댄 것은 그저 옷자락이 아니었다.
직물로 짠 천 조각이 아니었다.
옷자락을 만졌다고 해서 마음에 불이 켜지지는 않는다. 설사 그것이 예수의 옷자락이라 해도 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 그려진 예수의 옷자락과 하혈하는 여성 일화. [중앙포토]
우리가 신의 속성에 닿을 때, 우리 안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사라진다. [중앙포토]
그럼 무엇이었을까.
여자가 손을 댄 것은 예수의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그것은 예수의 겉모습이 아니라 예수의 속모습이다.
예수 안에 깃든 ‘신의 속성’이다.
거기에 닿을 때 우리 마음에 불이 켜진다.
하혈이 멈추고 고통이 멈춘다. 왜 그럴까. ‘상처의 뿌리’가 녹아내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