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9일. 내일이면 출항. 아내가 만들어 준 닭볶음탕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온 가족이 마리나 샤워 실에서 샤워했다. 내일 오전 10시 렌트카를 돌려주고 택시로 돌아와 바로 출항이니 여유롭게 샤워할 시간이 안 될 것 같다. 어찌 됐건 육지에서 누리는 호사는 끝까지 잘 누리자. 바다에 나가면 물 한 바가지로 샤워를 해야 한다. 더운 곳에 가면 바닷물로 샤워하고 마지막에 수돗물 한 바가지면 되지만, 지중해를 벗어나기 전 까지는 기온이 10~15도 정도로 상당히 쌀쌀하다. 오후엔 입던 옷을 모조리 벗어 빨래방에 갈 예정이다.
오늘 먼저 세계일주 항해를 한 윤선장님의 충고를 받아 노래방 마이크를 사러 테르몰리로 간다. 하긴, 4개월 여 바다위에 있으려면 뭐든 여흥이 있어야 할 거다. 노래는 가사가 있는 것으로 미리 다운받아 저장중이다. 지중해에서 장윤정이나 정은지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직은 상상하기 어렵다. 며칠이면 곧 맞닥뜨릴 환경이다. 강릉서 책을 한 권도 가져 오지 못한 건 큰 실수다. 인터넷도 전화 통화도 어려운 곳에서 책 없이 버텨야 한다. 항공사의 무게 제한은 여행자에게 때로 엄청난 형벌이다. 아기 기저귀와 항해용품 때문에 나는 딱 한권 넣어두었던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도 빼놓아야만 했다. 두고두고 아쉽다.
테르몰리에 가서 노래방 마이크를 샀다. 비싸다. 이탈리아에서 판매되는 공산품은 품질이 조악하다. 중급품질 이상의 물건을 보기 힘들었다. 대부분 중국산인데, 그냥 기능만 되면 무난하게 사용하는 모양이다. 가격 싸고 그런대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품질은 하향평준화 되어도 괜찮다는 것. 100엔 샵 열풍으로 전 세계적인 추세인 모양이다. 나는 옛날 사람이라 조금 불만이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시류대로 사는 거지.
그리고 이곳에서 한국인들은 절대 사람 없는 무인 판매대 같은 곳에서 물건을 사면 안 되겠다. 데카트론 산살보에서 POS 시스템 오류로, 같은 금액이 두 번 결재된 것도 아직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이탈리아를 떠나게 되는데, 내일 렌터카를 돌려주기 전에 기름을 가득 채우기 위해 주유소에 들렀다. 사람들이 활발하게 주유를 하기에,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보고 그대로 따라 했다. 먼저 카드를 넣으라고 해서 넣었더니 100유로가 표시된다. 한국서 Full로 채우듯 하나보다 하고 Yes를 하고 기름을 넣었더니 오~ 기름이 들어간다. 문제는 그 이후다.
주유를 마치고 보니 48.68유로어치 넣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머지 돈이 돌아오지 않는다. 주유소 사무실에 가보니 사람이 없다. 주변에서 기름을 넣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내일 영수증을 들고 여길 다시 찾아와야 해결 된단다. 뭐 이런 경우가... 그래서 이탈리아어를 잘 못하는 나 같은 한국인들은 절대로 사람 없는 자동기계를 사용하면 안 되겠다. 반드시 사람이 있는 그런 주유소에 가기를 권유한다. 여기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오류가 빈번하다. 내일 오전 10시에 렌터카를 돌려주고 출항해야 하는데 오전 8시에 이 오류를 해결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유소가 귀찮은 일을 만들어 주니 스트레스가 크다.
이 동네를 21일 만에 떠난다. 어쩌다 보니 이탈리아 한 달 살기가 되었다. 여기저기 정들만 하니 이별이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바스토 지방이니, 그동안 다니던 쇼핑몰 피자집에 갔다. 4번째 가는 것인가? 이탈리아는 피자에 진심이다. 어디 가서 먹어도 기본은 하는데 그 기본의 수준이 상당하다. 엊그제 까를로가 산 레스토랑의 피자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아내는 같이 붙어있는 파스타 집에서 한참을 서있더니 아빠와 같이 온 이탈리아 여대생을 사귀었다. 부녀는 잠시 후 우리가 식사하는 곳에 와서 정식으로 다시 인사한다. 로마에 있는 라사피엔차(Sapienza University of Rome) 대학교의 학생이다. 귀에 익은 이름이라 생각해보니 전에 로마에 갔을 때 하루 묵었던 로마스카우트센터 곁에 있던 대학교다. 우리가 ‘야 여기에 대학교가 있네’ 하고 긴 담장을 따라 걸었던 그 대학교. 한국이 이탈리아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그녀는 진심으로 아내와 대화를 원했다. 조만간 한국에 오면 반드시 연락하라고 아내가 내 명함을 준다. 아내는 신기한 여자다. 이탈리아어도 영어도 못하는데, 파스타 집에서 요리를 주문하고, 뜬금없이 이탈리아 여대생과 사귄다. 이게 뭔 일이래? 기막힌 일이다.
이탈리아는 오늘이 무슨 축제인지, 쇼핑몰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쇼핑몰 안의 작은 광장에는 광대와 마술사들이 동원되어 아이들의 넋을 빼고 있다. 아이들과 부모가 모두 마술 공연 관람에 몰두하고 있다. 쇼핑몰 바닥 전체에 색종이 가루가 흩어져 있다. 바닥을 이렇게 마구 어지럽힐 수 있다는 현실에, 약간 틀에서 벗어난 자유를 느낀다. 이런 게 가능하구나. 여기는. 그러나 나는 그 인파를 피해 반대 방향으로 멀리 돌아 Conad - Supermarket 에 들어간다. 아내는 남편이야 대양항해 때문에 걱정하건 말건 수퍼마켓 옆 옷가게에 틀어박혔다. 나를 너무 믿어서 그런가? 긴장감이 전혀 없다. 나도 아내의 옷 쇼핑에 긴장감이 없다. 별로 비싸지 않은 옷을 적당히 살 것이 분명하다. 아내는 명품 같은 것에 관심 없다. 몇 번이고 국제공항을 드나들어도 명품 따위는 흥! 이다. 아내의 관심은 요리와 여행이다. 서로 이렇게 긴장감 없는 것은 우리 부부만의 특별한 신뢰 형태인가? 흠…
저녁에 마리나로 돌아와 산더미로 장봐 온 것을 풀어 놓고 있는데, 까를로가 잠깐 들른단다. 오후 7시에 까를로와 그의 아내가 왔다. 파스타와 과일 조금을 가져왔다. 특별히 수제로 만든 파스타, 뭐 그런 것이 아니라 장에서 파는 일반 파스타다. 한국하고는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부담이 없다. 나는 뭐 준비한 것도 준비할 것도 없는 상황에서,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으면 부담스럽다. 마음 편히 선물을 받고 감사인사를 하는데, 까를로의 음성이 쉬었다. 이유를 물으니, 까를로의 아내가 답한다. 까를로는 오늘 손님들과 점심 식사를 6시 50분까지 했으며 너무 많은 말을 해서 그렇단다. 신기하고 짠하다. 신기한 것은 점심을 오후 6시 50분까지 먹는다는 것이고, 짠한 것은 40대 남자의 힘든 삶이 그대로 내게 전이되어서다.
나 역시 40대엔 그랬다. 목이 쉬고 눈알이 충혈 된 40대를 보냈다. 전 세계 어디서고 40대 남자의 삶은, 불혹이 어쩌고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삶은 계속해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제기하고, 40대 남자는 그 문제를 실수 없이 풀어내야 한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사업의 실패, 좌절과 가난으로 이어진다. 혼자라면 그럭저럭 견뎌내며 재기하면 그만이다. 라고 하겠지만 가족과 아이가 있는 가장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까를로의 쉰 음성에서 그 절박함이 읽혀져 마음이 무겁다. 생명을 걸고 떠나는 나의 항해도 절박하다. 에덴을 떠난 인류의 삶은 어디서나 녹록치 않다.
오후 9시. 아내는 지금 양배추 김치를 담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항해하면서 직접 담근 김치를 먹어 보겠다며 야심차게 도전했는데 이탈리아 양파가 너무 맵다. 그녀는 지금 김치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