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눈 쌓인 향교, 멈추지 않는 배움
- 구순 넘은 목부 선생, 차 타며 "내 직업이유~" 재치 발휘
- 한석봉 글씨부터 옥편 없는 한자까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유학자들
[굿뉴스365=송경화 기자] 섣달 보름 이른 아침, 천안향교 대성전 앞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밤새 내린 눈 탓에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 속 풍경처럼 아련했다.
하지만 눈길이 미끄러운 것도 새벽 추위도 이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2일 오전 8시 30분 전후, 천안향교에서 열린 설 분향에는 중앙지회 회원들이 일찍부터 모였다.
대성전 앞에는 이미 분향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고, 80·90세 어르신들도 하나둘 향교 문을 들어섰다.
"끄떡 엄슈, 나와야제."
눈길에 어떻게 나오셨냐는 걱정 어린 인사에 한 어르신이 답했다.
눈이 쌓이고 추운 날씨에 사람이 부족하면 담당 지회장이 속 탈까 봐, 그래서 나라도 참석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나오셨단다. 배려와 책임감이 몸에 밴 모습이었다.
분향을 마친 뒤 동재(東齋)에 모인 이들 사이로 훈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목부 선생이 아침도 못 먹고 왔을 참석자들을 위해 차를 타겠다며 나선 것이다.
60대 초반의 중앙지회 회원이 "선생님, 제가 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목부 선생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나, 차 잘 타유. 이건 내가 해야 혀. 내 직업이유~"
동재는 순간 웃음바다가 됐다.
어르신의 재치 있는 한마디에 모두가 기꺼이 그 차를 받아 마셨다. 공경과 유머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진짜 감동은 그 다음에 펼쳐졌다.
차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공부 이야기가 시작됐다. 목부·구암·화정·덕촌 선생이 한자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열정과 진지함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 한자는 여러 음과 훈이 있다네", "이 글자는 옥편에도 안 나오는 글자요", "한석봉 글씨를 보면 획을 생략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지", "아, 지금 알았네. 그런 것이 있었구만"
서로가 가르치고 배우는 모습이 펼쳐졌다.
한자 음을 잘못 적용해 뜻이 완전히 달라진 에피소드를 나누고, 종이에 글씨를 써 보이며 획을 짚어가며 설명하는 모습이 마치 한 편의 그림 같았다. 아니, 성스럽기까지 했다.
특히 목부 선생의 배움을 향한 진심은 비할 데가 없었다.
"공부는 끝이 없다"며 "아직도 멀었슈"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시는 어르신의 모습에서 진정한 학자의 자세가 무엇인지 절로 깨닫게 됐다.
이러한 목부 선생의 열정을 아는 화정 선생은 벌써부터 한지를 따로 말고 있다. 목부 선생께 드릴 것이라고 한다.
한편 화정 선생이 연습 삼아 쓰셨다는 글씨를 보고는 모두가 놀랐다. 컴퓨터로 프린트한 것처럼 정갈한 글씨가 손으로 쓴 것이라니. 옥편에서나 볼 수 있는 글씨체였다.
천안향교에서는 인사법도 달랐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건강은 어떠십니까",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일 잘 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시고 복 많이 지으세요."
서로를 걱정하고 복을 빌어주며 두 손을 가지런히 앞에 모으고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인사하는 모습.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르신들이 이렇게 인사를 하니 저절로 폴더 인사가 나왔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요즘 보기 어려운 풍경들이 이곳 천안향교에서는 보편적 일상이다.
눈이 쌓인 추운 새벽, 미끄러운 눈길을 마다 않고 향교에 나온 어르신들.
끝없이 공부하고 서로를 가르치고 배우며 존중하는 태도. 차 한 잔에도 유머와 배려가 담기는 순간들.
중앙지회 일원으로 참석한 나는 그날 선비정신이 무엇인지 배웠다.
그것은 책 속의 관념이 아니라 눈 쌓인 향교에서 차를 나누고 한자를 가르치며 서로를 존중하는 일상 속에 살아있었다.
"내 직업이유~"라며 차를 타시던 목부 선생의 환한 웃음이 오늘도 내 마음속에 따뜻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