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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은 것을 기억하라(2240.2024.3.10. 사순절 4주)
눅23:34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중에 사순절 기간동안에도 2024년 심방을 은혜중에 할 수 있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목사님이 여러분 가정에 필요한 말씀을 준비해서 드렸는데 각 가정에 주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지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사순절 4주째를 맞이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용서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십자가 형을 언도 받은 예수님은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갈 때 기진해 걸음을 옮길 힘조차 없었습니다. 군인들은 구레네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26).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던 시몬베드로는 어디 가고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이 여러번 들어서 알다시피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이방인 지역인 구레네, 지금은 아프리카 땅인 리비아지역입니다. 멀리 타국에서 살다가 평생소원인 성지순례를 왔다가 뜬금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져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채찍에 맞아 피를 많이 흘리셔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질 수도 없고, 이것이 계속 된다면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죽으실 것 같으니까 로마 군인이 구경꾼 중 한 사람인 구레네 시몬에다가 십자가 형틀을 맡긴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구레네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나옵니다. 막15:21절‘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이것은 알렉산더와 루포가 당시 유명한 인물이었기에 구레네 시몬을 소개할 때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로마서에 보면 편지 끝부분에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 루포가 등장합니다. 롬16:13절‘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구레네 시몬의 아내가 사도 바울의 친어머니와 같이 인정받을 정도로 사역을 위해 헌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루포, 그들의 어머니. 모두다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진 구레네 시몬의 가족들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졌는데 초대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보면 구레네 시몬의 12대 후손이 바로 로마의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12대 후손이 로마의 황제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사람이 맘에 들면 무엇이라도 못하겠습니까? 마음에 안 드니까 교회도 안 오고, 충성도 안하고 떠날 생각에 사로잡혀서 끙끙거리고 합니다. 성경은 억지로라도 좋사오니 맡겨주시면 충성하겠다는 믿음을 좋아합니다. 욕을 먹어도, 서운하더라도, 억울해도 나는 이 길을 가리라고 가는 것이 좁은길, 좁은문, 믿음의 반응이고, 반드시 승리하리라 믿음의 길입니다. 거기다가 용서까지 한다면 엄청난 축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서로 용서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주님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7번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7번은 대단히 중요한 숫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일곱 번의 일흔 번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일흔 번의 일곱 번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 세 번이라고 할 것입니다. 대체로 무엇을 할 때 3번 정도는 합니다. 그 이후에는 대개 안 봐줍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절은 완전 수 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7번 용서하면 될까요? 라고 물었을 때 엄청나게 용서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으로 용서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타인을 향하여 용서하라는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고 용서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용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당하신 조롱과 모욕은 전부 37절‘네가 그리스도라면 너부터 구원해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자기증명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자기증명은 사단의 간악한 시험입니다. 지금도 사단은 자기증명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라고 우리를 부추겨 인생 전부를 거기에 매진하도록 속입니다. 거기에 속아 준동하고 있는 인생들을 향하여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동정의 눈으로 바라볼 사건이 아니라 내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하면서 냉철하게 믿음으로 참여해야 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천년 전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 가운데서 한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34절‘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이 그토록 극악한 강도 곁에서 죄인들과 함께 죽으셨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죄 없는 분이, 한번도 악을 행한 일이 없고, 불의를 범한 일이 없으며, 남을 해롭게 한 일이 없는 주님께서 왜 그토록 무서운 죄의 형벌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이것은 이천년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인류의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는 왜 고난을 받으셨을까 왜 그토록 선하신 하나님의 아들, 거룩하신 분이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고난을 겪어야만 했을까 이것은 끊임없는 우리의 질문입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누구입니까? 빌라도, 유대인들, 당시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못을 박았으나 결국 못 박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요, 사람들이 그를 고통 가운데 처절하게 만들었으나 그를 그렇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의 질문은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가’하는 것입니다. 사53:10절‘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당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롬8:23절‘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자기 아들을 이미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자리가 바로 골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로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해골이라는 죽음의 현장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눅23:33절‘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라고 했고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골고다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자기 죄 값으로 죽어가는 해골들, 또 미래에 죽어야 할 죽음의 해골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해 주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관에서 흘린 피, 손에서 흘린 피, 발에서 흘린 피, 옆구리에서 흘린 피를 해골이라는 인간의 죽음의 무덤에 흘려 내립니다. 골고다의 땅을 적십니다. 그 죽음이 죄값이요, 심판과, 저주와, 죽음에 처한 인류를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의 피로 적셔 놓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는 친히 이 사실을 예언했습니다. ‘저가 찔림을 받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저가 상함을 입은 것은 우리의 죄악때문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십자가에 상함을 받게 하사’ 하나님께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고, 채찍에 맞게 하시고, 피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요6:38-39절‘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는 목적도 분명하고 그 기도의 목적도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인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평상시에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해 달라는 기도는 십자가 상에서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피흘리심으로만 그 죄를 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 상에서 그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2.용서는 죄인을 사랑하는 확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하신 기도를 통하여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확증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양쪽에 있는 강도와 함께 죄인들의 무리 속에서 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원수의 죄를 자기 몸으로 지고 대신하여 용서를 받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가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죄사함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사함을 베푸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다 포기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죄인의 몸으로 죄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용서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해 주소서’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무런 괴사도 없고,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시며, 남들로부터 고난을 받으시되 참고 인내하시면서 그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무리들은 공모하여 거짓되고 날조된 죄를 뒤집어 씌워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고통을 주어 죽도록 했습니다. 양쪽의 강도들은 악담을 하고 분을 터뜨리고 있는데 주님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죄의 용서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죄가 있어서 용서를 비는 것도 아니요, 불의해서 용서를 비는 것도 아니요, 잘못해서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악을 홀로 담당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택한 자원적고난이요, 예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예수님은 죄인의 입장에 서서 이 기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사53:12절‘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할 때 저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대인들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제비뽑은 로마의 군병들입니까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언도한 로마의 총독 빌라도입니까 그리고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함성을 질렀던 군중들입니까 물론 이 사람들이 다 저들 속에 다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우리들입니다. 예수의 용서를받고 구원받을 우리들입니다.
마1:21절‘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할 때 저들은 바로 예수 믿고 구원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인 자가 누구냐? 묻는다면 우리들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왜 죽으셨는가’라고 물으면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천년 전 저 예루살렘 거리에서 예수를 욕하고, 비난하고, 침뱉고,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 속에 나도 끼어 있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무한하나 그 효험은 믿는 자에 한한다’이것은 존 칼빈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무한하지만 믿는 자에게만 그 효험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약의 능력은 무한하지만 약을 마시는 자만 효력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기도는 무한한 능력이 있지만 용서받은 자만 저들 속에 들어 용서의 은총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간구는 높고 깊은 하나님의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산상수훈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하셨던 그 예수님의 사랑을 십자가 상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3.용서는 죄인을 살려서 낙원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들은 사람은 이천년 전 바로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 두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강도는 살인 강도요, 로마에 폭동을 일으킨 바라바와 같은 정치범으로 법을 어긴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범한 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고 악질적인 사람으로 죄형을 받았던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아시지요. 저들은 죽는 순간에도 예수님을 향해서 욕하고 비난했습니다. 마27;42절‘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27:44절‘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두 강도가 다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에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이때 한 강도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자신이 용서받을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할 때 저들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40-42절‘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예수여’부르짖는 그 고백 속에는 자기 자신이 용서받을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생각하소서’ 예수님은 즉시 43절‘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즉시 골고다 언덕에서 효험을 나타냈습니다. 용서를 비는 그 기도가 그 강도에게 임해서 강도는 용서를 받고 낙원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용서받은 자에게는 낙원이 약속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강도는 자기의 죄는 알지 못했으나 주님은 알았습니다. 자기 악한 것은 그동안 알지 못했으나 주님께서 용서해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용서를 받는 순간에 그에게 약속된 것은 낙원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한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자는 그 낙원이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다는 것입니다. 43절‘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강도는 바로 그 시간에 죽습니다. 그런데 그는 낙원으로 갔습니다. 용서받은 자로 갔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도 이 사실을 알고 십자가에서 피흘려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용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세 가지를 용서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용서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불평하거나, 불만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다른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고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은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를 용서해야 합니다. 자기 현실을 용납하지 않고 열등의식을 갖고 운명을 한탄하는 것은 자기를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는 그 심령이 낙원이 됩니다. 용서받은 자는 사는 가정이 낙원이 됩니다. 용서받은 자는 삶의 현장이 낙원이 됩니다. 어떻게 용서를 받습니까? ‘예수님이 나 때문에 죽으셨구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라는 확신을 가지면 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용서하면 예수님을 닮습니다. 용서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해치는 자를 용서하고, 미워하는 자를 용서하면 주님의 형상을 닮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은 평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얼굴에 웃음이 없는 사람,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용서받은 증거가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자기 속에 용서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얼굴에 상처가 깃들어 있는 사람은 어린시절부터 용서하지 않은 상처가 축적된 것입니다.
용서하면 건강해집니다. 모든 건강은 상처의 치유로 이루어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병이 깊어집니다. 용서하면 다른 사람과 화목합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고독합니다. 아무도 그를 따라주지 않으니까요. 용서하면 내 마음에 자유가 옵니다. 용서하면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용서는 가정생활을 행복하게 합니다. 가정생활을 원만하게 못하는 사람은 속에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4.상주감리교회 성도인 나는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증명하려 하는 해골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 해골 위에 그리스도가 피를 흘려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한편 강도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갑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예수님이 화답하십니다. 40-43절‘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십자가에 대한 태도가 믿음의 여부를 좌우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인 나는 어떠합니까?
악한 자들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하시는 주님을 비웃고 희롱하였습니다.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하여 주님은 이와 같은 멸시와 천대, 고난과 모욕, 수치와 고통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내 죄가 너무나 크고 엄청난 것이었기에 주님이 나 대신 죄 값을 치르셔야 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2000년 전 예수께서 왜 갈보리 산위, 십자가에 매달리셔야 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여러분은 말씀과 사랑으로 깨닫도록 하며 오늘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제일 힘든게 있다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관계를 맺는 것일 겁니다. 이 용서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마음먹고 ‘이제는 용서할 수 있겠어’ 하고 나서지만 정작 상대를 만나면 그 응어리진 마음을 풀지 못하고 돌아서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서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다 잊을 수 있어’ ,‘시간이 약이다’라는 겁니다. 물론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정말 ‘용서’는 참 힘든 것만은 사실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 사람을 형식적으로 말고 진정한 ‘용서’를 하셨습니까? 하셨다면 그게 ‘쉬웠습니까?’
인간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내시는 있는 분은 물론 하나님뿐입니다. 겔15:5절‘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 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렘17:10절‘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인간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정확히 그들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습니다. 근사치는 하지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온갖 방법으로 숨기려고 하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정확히 알고 읽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작은 죄라고 다 아시는 주님은 우리가 그의 앞에 나올 때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정도쯤이야’라는 것까지도 주님은 다 용서하십니다. ‘이것도’라고 하는 의문의 것까지도 다 용서하십니다. 머리터럭 하나까지 세신 바 되시는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 용서하시는 모습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는 길에서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까지도 이루시는 것을 봅니다. 32절‘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두 행악자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들이 누구인지는 우리는 다 압니다. 본문은 ‘행악자’라고 누가는 표현했습니다.
십자가는 팍스 로마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정치범을 주로 죽이는 그리고 극악무도한 자들을 죽이는 사형도구였습니다. 그런데 ‘행악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동족인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뿐만 아니라, 로마의 황제에 대항하는 ‘왕’이라는 표현을 달아 정치범으로 고발한 것입니다. 하지만 ‘행악자’라는 표현을 씀으로서 예수님은 결코 정치적인 목적이 없는 분으로 십자가에 죽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누가의 솔직한 고백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행악자 중 하나는 주님을 비방하였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은 마땅히 죽을 죄를 지었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며 비방하던 자를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큰 죄를 지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는다고 생각하며 비웃고 조롱했지만 이 행악 자는 주께서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주께 자신을 맡겼습니다.
예수께서는 비록 행악 자였지만 회개하고 주께 자신을 맡긴 자를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모진 고통과 죽음 직전에서도 회개하는 자를 외면치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주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만이 죄인의 살길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길 평생 죄만 짓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평생 죄만 짓고 살던 자가 죽기 직전에 갑자기 회개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해야 합니다.
행악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공생애 목적 그 아름다움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셨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내가 여유 있고, 잘 나가고, 평안할 때 나를 아프게 한 사람들은 ‘그 정도쯤은 내가 이해할 수 있어’ 하면서 어느 정도 잊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흔히 가진 자의 여유라는 가정 하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박하고,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 때는 ‘그 정도쯤은’은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이를 갈며 ‘반드시 내가 되갚으리라’고 하며 용서의 단어는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생활입니다. ‘용서’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용서는 ‘내’ 상황이 지금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건 성서에서 말하는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목회를 하며 말씀을 전하는 저도 이 ‘용서’는 정말 힘듭니다.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그럼에도 힘든게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여정 길인 십자가의 길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길에서도 자신의 죄를 깨달은 한편 행악자에게 ‘용서’를 행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용서’의 힘이 그 행악자를 마지막 순간에 ‘낙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 아픈 상처를 가진 분들이 있다면 모두 ‘용서’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도 이 사람만은 안 돼! 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럼 내가 용서 받은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도 안 될 존재’였습니다. 이런 존재였던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겁니다.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 주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합니다. 주기도문의 이 말씀을 잘 보면 용서는 우리를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함을 봅니다. 나를 얽매이고 있던 것들을 용서하는 겁니다. 나 자신에 대한 것, 타인이 나에게 입힌 것들의 올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의 죄를 사할 때,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겁니다.
시130:4절‘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이 말씀에서 ‘용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살라크’는 하나님의 용서를 가리킬 때 특별히 쓰이는 말이라고 합니다.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못 박는 단어인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용서의 주관자가 누구이신지 아시겠습니까? 이제 저와 여러분 모두 쌓아두고 있는 모든 것,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시고 고집부리지 마시고 그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가지고 나와 기도합시다.‘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주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우리는 이해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서로 용서하라. 용서는 명령이기 이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한없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정죄하고 미워할 만한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실제가 바로 용서입니다. 너만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서로 용서해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친 이웃들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회복의 자리에 서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잘 들으십시오. ‘서로 용서하라’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안에 미움이 있으면 내가 고통스럽고 내가 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를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은늘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인애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서 인애와 사랑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내가 용서받은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 한계가 있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용서의 은혜와 사랑이 사회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각 처에서 부딪치며 살아가는 성도 모두에게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예수님의 사랑을 퍼뜨리시고 전하시는 귀한 성도가 되시고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아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아 낙원에 이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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