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인(被㢚人),그들의 상처 속에 우리의 부끄러운 기화상을 들여다보라
아들아, 노래 한곡으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 볼까.
간양록(看羊錄)
(노래 : 조용필 )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의 잡초는 누가 뜯으리 .
어야어야어야 어야 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님그린 뜻 바다되어 하늘에 닿을 세라
어야어야어야 어야 어~~야
어떠냐? 그 느낌이 구슬프고..그 슬픔, 한(恨)이 느껴지느냐.
7년 조일전쟁 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신봉승 작가가 쓴 시에 곡을 붙여 가왕 조용필이 부른 간양록이란 노래이다.
그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수은 강항 선생이 남긴 책 '간양록'이 또한
이 노래의 원조라고 볼 수 있지.
아들아, 쉽지는 않겠지만..부모로서 네게 바라는 것 중의 하나가 항상 바르게 처신하고
바르고 고운 말만 썼으면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분노하거나 누군가를 미워할 일이 분명 있고, 그럴때면 누군가를
욕하고 하는 것은 흉보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더라도 최대한
그런 것은 자제하고 인내하는 것이 중요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과 말이 있는 법이다.
환향녀(還鄕女), 호로자(胡虜子)란 말을 들어보았느냐?
난 네가 이런 말은 듣지 않고, 알지 못하며..또 안다하더라도 절대 입에 담는 일이 없길
바란다. 아빠가 앞에서 말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절대 해서는 안될 말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환향녀와 호로자의 경우..오랫동안 누군가를 욕하고 비하하는 강한 의미의 욕설로
쓰이고 있다만, 그 사연을 알고나면, 이런 말은 절대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의 역사이기도 하며, 그분들의
가슴에 박힌 대못이기도 하며..
그런 말을 만들어낸 우리 선조의 가장 못나고 본받지 말아야할 부끄러운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아빠는 그래서 이런 말을 절대 입에 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아들아, 너는 피로인(被虜人)이란 말을 아느냐?
피로인이란..전란 와중에 적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적국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던 그분들을 이르는 말이란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하고, 대규모의 피로인이 발생했던 그 전란은 7년 조일전쟁,
특히 그 후반부..우리가 정유재란이라 부르는 역사적 사건이다.
또 하나는 조청전쟁, 특히 병자호란이라 부르는 그때였다.
이 두 전란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시련 중의 하나이면서, 가장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지. 7년 조일전쟁 때는 10만여명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조청전쟁 때는 또
무려 50만이나 되는 우리 백성이 만주로 끌려 갔었다고 하는구나.
일전에..KBS 역사다큐 '그 날'에서 이 피로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었단다.
그때 그 패널 중 한분..류근 시인이 이들의 사연을 접하면서 그 고초를 떠올리고
안타까운 마음에 눈시울을 붉히다 결국은 눈물을 흘리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류근 시인이 지도자가 무능하고 나라가 힘이 약해서 전란(戰亂)을 만나면
결국 약한 백성들만 고초를 겪고 피눈물 흘린다고 덧붙인 한마디가 정말 크게 공감되고
가슴 속에 그대로 콱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
아들아..아빠가 네게 전하는 이번 역사이야기는 바로 그 '피로인'들의 이야기란다.
7년 조일전쟁의 또다른 이름중에 '도자기 전쟁'이란 말이 있단다.
7년 조일전쟁은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그리고 특히 정유재란(1597~1598) 기간때
그 피해가 극심했단다.
임진왜란 초기엔 단순히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군사적인 목적에서 왜군이 살육했다면
정유재란 때는 조선의 점령지에 대한 초토화와 잔인한 살육, 납치와 약탈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지.
이 시기에 왜군은 우리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왜로 끌고 가는 한편..그들에게는 없는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학자 등 지식인과 기술자들, 도서와 도자기, 각종 귀중한
보물을 약탈하는데 열을 올렸단다.
7년 조일전쟁때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단다.
군의로 참전한 일본인 승려가 남긴 기록(게이넨의 조선일일기)을 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을 묶어 끌고 가는데,
마치 원숭이 떼를 엮어서 끌고 다니는 것 같았고
소나 말을 다루는 듯한 그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이 얼마나 참담한 기록이냐..
그리고 그 피로인 중 어떤 사람은 전란에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노예로 포르투갈 상인에게 팔려가 그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분들의 고초와 그 비참함은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느냐.
또 노예로 끌려가지 않은 이는 일본에서 또 누군가의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살았고
온갖 부역에 동원되었지.
심지어 전후에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성을 축성할때도 조선인 피로인들이 동원되어
피눈물을 흘렸다고도 해.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2016년 지진으로 그 구마모토성이 많이 붕괴되었다고 하니까..
솔직히 아주 속이 시원하더라.
일본의 한국계 도예가 심수관
또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나았는지 모르겠다. 기술자와 지식인은 그래도 조금 처우가
나았다만, 그들은 일본에 억류되어 그들의 기술과 지식을 전수하는 역할을 하게 돼.
일본에 끌려간 수많은 도공들..그리고 그 후예로 심수관(沈壽官) 가문이 있다.
그들은 전북 남원에서 왔다고 해.
홍호연의 글씨, 忍
그리고 홍호연(洪浩然)은 어린 나이에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산청에서 왜군에게 잡혀
끌려가 일본인 영주 나베시마 가(家)의 가신으로 있으면서 유학을 전하고, 혹부리라는
독특한 글씨체로 유명한 서예가로 활약했지. 그도 여러번 조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일본인 영주의 만류 때문에 발목 잡히고 결국은 일본에서 결혼하고 낳은 후손을 위해
귀국을 포기했단다.
그는 일본인 영주 나베시마 가쓰시게가 죽자..그를 따라 죽어야 했지. 일본인 영주를
위한 충성이 아니라, 일본땅에서 살아가야 할 그의 가족을 위해서였지.
수은 강항 선생(1567~1618)
또 유명한..피로인이 있단다. 그는 수은 강항(睡隱 姜沆,1567~1618)선생이시지.
조선의 선비이자 의병장이었던 분으로 전라도 영광에서 왜장 도도 다카도라에 의해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었단다.
이분은 유학자로서 일본 성리학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단다. 그는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여러번 탈주했다가 실패하고 끌려오기도 했고, 또 그 높은 학문에
감복한 일본인에 의해 귀화를 권유받았지만 거절하기도 여러 차례였단다.
수은 강항 선생은 1600년에 결국 일본에서 길러낸 제자들과, 친분을 맺은 일본인
다지마 영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의 후원으로 귀국할 수 있었지.
수은 강항 선생은 일본에 억류되어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그 모든 기록과
더불어 일본의 정세를 전하고 그에 대해 조선의 대응책 등을 저술한 '간양록'을
남겼다.
우리 사학계에서 7년 조일전쟁 기간 동안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의 수는 무려 10만에
달한다고 보고 있지. 하지만 전후에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며 사신으로 간 사명당이
다시 데려온 피로인은 겨우 1천여명, 몇차례 더 피로인을 데려오기 위해 사신들이
일본에 건너갔지만..그들이 데려온 조선인들은 턱없이 적은 수에 지나지 않았단다.
왜 그러했던가. 따져보니 그렇더구나.
먼저 일본은 그들의 노예로 삼아 그들의 사유재산이 되었으니 내놓으려 하지 않아
우리에게 숨겼고,
조선은 조선대로 그렇게 적국에서 고생하다가 돌아온 우리 백성들에 대한 지원책이
너무나 미비했기에..그들이 돌아와도 이땅에서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것이지.
그리고 그때 조선의 양반들은 가족과 고향에 대한 기억이 없는 어린 피로인들을
또 노비로 삼기도 했고, 당시 조선 사회가 피로인에 대해 배려가 아니라 온갖
차별대우로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심지어 일본의 첩자로 몰아 죽이기도 했으니
일본땅의 피로인들이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눌러 앉기로 한 사람도 그렇게 많았던
것이다.
아들아,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7년 조일전쟁이란 참화를 겪고서도 그렇게 정신을
못차린 그때 우리 조상들의 속좁음과 못난 모습에..
너무나 한심해서 할말을 잃을 지경이다.
7년 조일전쟁이 끝나고 겨우 30년 조금 지나서..조선은 또다시 엄청난 전란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그것이 조청전쟁(朝淸戰爭), 역사에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 한다.
뜬구름잡는 명분에만 사로잡혀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몰랐고, 힘도 없고 준비도 안된
상황에서 대체 뭘 믿고 그런 전쟁을 벌일 생각을 했는지..
결과는 다 아는바와 같다. 아주 비참했지.
인조는 파죽지세로 쳐내려오는 청의 대군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갔지만 포위되어
45일간 버틴 끝에 결국은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루었지.
우리나라는 명분도 실리도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꼴을 당했었다.
청으로 끌려가는 조선 백성들(영화 최종병기 활 中에서)
청나라 군대는 우리 조선 백성을 포로로 잡아 무려 50만이나 끌고갔단다.
그때 조선의 인구가 800만이 조금 넘었다 하는데 우선 그 엄청난 수에 놀라게 된다.
아들아 조선의 백성들이 또 수천리 멀고 먼 거친 길을..칼바람 맞으며 청군에게 험한
꼴을 당해가며 그 얼마나 고되었겠느냐.
살아서 다시는 가족을 보지 못할 수도 있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그 길이, 그 발걸음이 또 얼마나 힘겨웠을 것이며..그 마음은 또 얼마나 무거웠겠느냐.
청나라 군대가 수많은 조선인들을 포로로 끌고 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몸값 때문이었단다.
조선인들은 노예가 되어 노예시장을 통해 팔려갔고..그들을 데려올 방법은
몸값을 내고 돌려받는 것인데, 그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그 몸값으로
집안이 기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간 조선인들, 여인들은 누군가의 노예로, 첩으로..
또 궁중의 시비 등으로 팔려가 엄청난 고초와 수모를 겪었단다.
그 고초와 수모를 못이겨 도망쳐 조선으로 돌아간 이들을 주회인(走回人)이라 했는데
이들은 조선으로 돌아와도 청의 요구로 송환되어야 했고, 그후엔 도망친 것에 대한
대가를 또 치뤄야 했지.
그러니까..결국은 피로인들이 조선으로 돌아올 방법은 오직 몸값을 치르고
데려오는 것, 속환(贖還)이었지.
돈많은 양반들은 가족들을 데려오려고 엄청난 고액의 몸값을 주었단다.
그나마 어느 정도의 피로인들이 속환되어 돌아온 것은 청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와
강빈이 볼모생활 하면서 청에서 불하받은 땅에 조선인 피로인들을 데려와 농사짓고
상업에 종사하여 번 돈으로 몸값을 치루고 송환한 덕분이었지.
청나라에서 돌아온 피로인들도 역시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단다.
이번에도 역시 조선은 그 피로인들에 대한 그 어떤 지원도 없었고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주지 않았으며, 역시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차가운 시선과 냉대 뿐이었지.
특히 여인들도 마찬가지..아니 더 가혹했단다.
정절을 잃은 여인과 살 수 없다고, 정절을 잃고 속환되어 온 아내나 며느리에게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 없다며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오랑캐에게 정절을 잃은 여자라고 하여 환향녀..이런 모욕을 받고 매도되었지.
그리고 그녀들이 낳은 아들은 오랑캐의 핏줄이라고 호로자식이라 했어.
그들이 받았을 그 고통의 무게가 짐작이 가느냐?
그렇게 온갖 모욕과 냉대를 다받고..이들은 사회에서 버림받고 숨어살거나
아니면 자의로 아니면 다른 가족의 강요 때문에 죽음을 택하거나..그랬단다.
왜 세상은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없었을까?
왜 그들의 무능과 무력 때문에 억울한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이토록 가혹하게 했을까.
아들아, 이 피로인들..그리고 피로인이었던 여인들은 피해자였다.
국왕과 조정신료, 그리고 무능하고 무지한 양반 지배층 때문에 나라는 약했고,
전쟁을 자초해서 그들이 그렇게 끌려가고 그 고초를 다 겪지 않았더냐.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아들아, 그래서 아빠가 환황녀에서 나온 욕설, 호로자에서 나온 그 욕설을 함부로,
아니 절대 쓰지 말라고 한 것이다.
비극적인 역사와 그 때문에 고초를 겪은 우리 조상들, 역사의 피해자들을 생각한다면..
이런 말은 절대 쓸 수 없는 것이다.
아들아, 아빠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며..우리 조상들이 그때 무슨 잘못을 했으며..
특히 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배층들의 무지와 무능함, 그리고 같이 고초를 겪고
피해를 입었음에도 약자들을 품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상처만 주었던
우리 조상들의 못나고 부끄러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다 풀어주는지 아느냐..
너는 이 조상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저런 못난 조상들의 모습을
본받지 말고, 또다시 저런 부끄러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모르면 ..또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저런 잘못을 그대로 반복할테니까 말이다.
아빠가 늘 말하지 않더냐. 이것이 바로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라고.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