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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운동의 위기 극복을 위한 몇 가지 제언
- 시민사회운동의 재활성화를 위한 여러 가지 고민
- 시민운동의 3대 위기(관계·교육·언론 문제)를 중심에 두고.
- 안진걸 (현 2007대선시민연대 조직팀장, 성공회대 ‘엔지오와 사회운동’ 강사, 전 참여연대 시민참여팀장)1)
1. 들어가며 : 시민사회운동의 정체 국면
최근 시민사회운동(이하 : 시민운동)2)은 확실히 정체 국면이다. 나아가 시민사회 안팎에서 ‘시민운동이 위기에 처해있다’라는 진단이 무성하다. 민주주의의 심화, 인권 신장, 복지·생태사회 지향, 투명성·책임성 제고 등 다방면에서 치열하게 활동해왔던 시민운동의 역사를 보면 최근 시민운동의 ‘정체와 위기’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물론, 이 위기의 와중에도 치열하게 활동하는 몇몇 단체들이 있고 새로운 의제와 영역을 발굴하고 개척하는 모범 사례들도 있다. 또 ‘언제는 사회운동이 위기가 아닌 적 없었냐’며 ‘사회운동 위기 담론의 과잉’을 지적하는 분들도 있다. 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치열하게 모범을 만드는 단체들과, 필요 이상의 위기 담론이 오히려 ‘사회운동을 곤란하게 한다.’는 지적의 요체를 십분 고려한다 해도 ‘정체와 위기’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그것은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예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점, 시민운동에 대한 신뢰도가 현저히 저하되고 있다는 점, 시민운동의 새로운 의제 설정이 부진하다는 점, 시민사회단체(이하 시민단체)3)마다 회비와 회원의 감소나 정체가 눈에 띈다는 점, 시민단체의 상당수 활동가들이 스스로 정체와 위기를 시인하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러한 근거를 뒷받침하는 많은 여론 조사들이 있다. 여론 조사를 맹신해서는 안 되겠지만, 최근 시민사회 관련된 여론조사들의 결과가 대부분 비슷하기에 조사의 신뢰도를 수용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비교적 최근의 세 조사 결과는 아래와 같다.
“16개 주요 사회기관에 대한 신뢰도(100점 만점 기준) 조사에선, 국회(16위)와 정부(중앙정부 15위·지방정부 14위) 청와대(13위)가 나란히 최하위로 나타났다. 3년 전과 순위도 똑같았다. 금융기관, 의료계, 학계가 84점으로 공동 1위에 올랐다. 또 대기업(11위→7위)과 금융기관(6위→1위), 군대(8위→4위) 등은 신뢰도가 높아진 반면에 3년 전 1위였던 시민단체는 6위로 떨어졌다.”(한겨레신문 2007년 5월 24일, ‘성균관대 리서치센터 조사 결과 소개’ 기사 중)
“온라인 취업사이트 사람인(www.saramin.co.kr 대표 이정근)이 2~30대 성인남녀 1209명을 대상으로 사회 각계의 신뢰점수를 묻는 설문을 진행한 결과, 평균 44점인 것으로 조사됐다. 집단별 신뢰점수는 예술가가 56.2점으로 가장 높았고 금융계 51.8점, 의료계 51.3점, 시민단체 50.6점, 경제계 46.3점, 교육계 44.9점, 법조계 44점의 순이었다. 가장 신뢰점수가 낮은 집단은 정치계로 17.4점을 기록했으며 종교단체(36.9점), 공무원 집단(39.5점)도 평균을 밑돌았다.”(경향신문 2007년 4월 9일, ‘20~30대 한국사회 신뢰도 43.9점’ 기사 중)
“지난해 말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는 전국 성인 남·여 7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벌였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을 두 개씩 선택하게 한 결과, 언론을 선택한 이는 전체의 39.2%로 ‘대통령과 청와대’(25.3%)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한나라당’과 ‘법조계’는 각각 23.2%, ‘시민단체’는 19.7%에 그쳤다.”(국정브리핑 2007년 6월 8일,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 조사 결과’ 기사 중)
이외에도 여러 조사에서 시민단체에 대한 신뢰도·영향력이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덕성과 순수성, 적절한 문제제기로 국민 대다수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성장해왔던 시민운동의 역사를 본다면 최근 시민단체의 신뢰 저하는 걱정할만한 수준이다. 물론, 수구냉전기득권 언론 등의 의도적 공격과 왜곡, 국민의 의견이 분분한 분야에서도 탈냉전·생태주의·소수자 인권 지향의 사회를 위해 여론의 역풍을 무릎 쓰고 확실히 자기 목소리를 낸 점, 시민단체 외에도 다양한 참여통로가 활성화된 점 등이 영향을 끼친 면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운동은 이러한 정체와 위기 국면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정체와 위기에 대한 진단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를 극복할 방안은 제대로 모색되고 있는가. 여기서 특히 시민운동의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갈파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할 것이다. 위기의 본질에 대한 진단이 제대로 되어야만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오기 때문이다.
2. 시민운동의 위기 진단 ① : ‘시민운동’과 ‘시민’의 거리가 너무 멀다(관계의 문제)
누가 뭐라 해도, 그동안 시민운동의 역사는 ‘고행’의 역사였다. 지금만큼의 민주주의와 자유가 지난날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70-80년대의 민주·민중운동의 힘으로 가능했던 것처럼, 이 문제 많은 한국사회에서 지금만큼의 인권·복지·투명성을 실현하는데 90-2000년대의 시민운동의 기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낮은 급여와 복잡한 고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온 시민사회 활동가들을 감안하면 아무리 정당한 비판일지라도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시민운동의 정진과 활성화를 위해 글을 쓰는 마음 아프기까지 하다.
최근 많이들 ‘시민운동이 큰 위기’라고 이야기한다.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진단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참여통로의 다양화 △1인 NGO(UCC)의 출현 △참신성의 약화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과 정당정치의 변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의한 개혁의제의 흡수 △새로운 의제 발굴 저조 △시민운동 반대 세력의 점증 △수구냉전 언론과 기득권세력의 집요한 흠집내기 △지속적인 경기침체로 인한 시민들의 관심 저하 △시민운동의 관성적 활동 △과도한 영향력의 거품이 빠지고 있는 점 △넓은 의미의 진보·개혁세력의 전반적인 부진 등등 다양한 진단이 나오고 나름대로 다 근거가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에 우선하는, 시민운동의 위기를 관통하는 핵심은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시민운동’과 ‘시민’의 거리가 여전히 너무 멀다”는 근본적 문제이다. ‘시민’운동인데도 ‘시민’과 거리가 멀다니 이것보다 더 큰 위기의 원인이 어디 있으랴.
1) 시민운동의 ‘의제’와 시민과의 거리
‘시민운동이 시민과 너무 멀리 있다’라는 엄연한 현상을 주체적으로 비판해보면, 시민단체와 그 활동가들이 시민들과 함께 하려는 치열함과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모두들 좋은 뜻을 가지고 모였지만, 최근 시민운동이 민중·서민으로서 고통 받는 시민들과 얼마나 함께 했는지, 제대로 치열하게 노력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회의 많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많은 시민들이 제기하는 수백·수천가지의 문제가 있다. 대표적으로 부동산·집 문제로 고통 받는 서민들의 고통을 과정에서도, 결과적으로도 시민운동은 풀지 못했고, 시민사회가 전면적으로 대응한 적도 없다. 수백만 명의 자영업자들이 호소하는 과도한 신용카드사의 수수료 문제에 적극적인 시민단체를 보지 못했다. 시민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대중교통 이용의 문제, 아파트 공간에서의 삶의 문제, 각종 공공서비스(요금)의 문제, 핸드폰 등 정보·통신 분야의 문제에 누가 천착하고 있는가? 몇몇 단체가 애를 쓴 것까지 무시하는 게 아니다. 시민사회 전반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매우 초라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운동의 여러 의제들에 대해 시민들은 당연히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민들은 시민단체들이 하는 여러 가지 일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통의 시민들이 살아가면서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에 대해 시민운동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2) 시민운동의 ‘태도’와 시민과의 거리
시민운동과 시민의 거리 발생은 의제 설정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시민운동의 ‘태도’에서도 많은 거리가 발생한다. 시민단체들이 그 많은 시민들의 억울한 이야기, 하소연, 고충 호소에 귀 기울이고 낮은 자세로(이건 ‘내 문제다, 우리 문제다’라며) 치열하게 함께 한 적이 있는가. 정부나, 지자체의 각종 고충민원 또는 국민제안 사이트에는 1년에도 수만 건의 글이 올라가고 있는데, 시민단체들은 시민상담을 활성화하거나, 제안이나 고충민원을 제기할 수 있는 코너나 그 해결 프로세스를 운영하고 있는가. 현재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만 1년에 2만여 개의 시민제안이 접수되고 있고 서울시 ‘천만상상 오아시스’도 개통한지 1년도 되지 않아 8천여 개의 아이디어가 접수됐다. 당연히 중앙정부·지방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시민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체계와 태도만큼은 중앙·지방 정부가 시미단체보다 더 선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심지어 찾아오는 시민들,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민들을 귀찮아하고 꺼려하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물론 바쁘기도 하고 그 분들 말씀을 들어도 마땅히 도울 방법이 없는 경우도 많겠지만, 그래도 시민들의 제안과 목소리를 귀찮아한다면 그것은 이미 ‘시민운동이 아니다’라고 감히 비판받을 것이다.
3) 시민운동의 ‘정서’와 시민과의 거리
또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어떠한가.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성찰해봐야 한다. 평범한 이웃들인가. 그게 운동을 위해서겠지만, 주로 기자·언론인, 정·관계 인사들, 교수·변호사 등 전문가들, (특히 고액의)후원자들, 동료 활동가들(아마 동료 활동가들을 제일 자주 만날 것이다)일 것이다. 만남이라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만남 속에서 정서적 공감대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만큼 서민들을, 보통의 시민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보통의 서민이나 시민과의 ‘정서적 공감대’도 쉽게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평범한 이웃들과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함께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들이 주로 누구냐에 따라서 문제의식도 달라질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또 많이 만나야 보통의 시민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에 대해서, 시민운동에 대해서 요청하는 바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4) 시민단체 ‘운영’과 시민과의 거리
시민운동과 시민과의 거리에서 또 하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시민단체 운영과 시민과의 거리이다. 시민운동에 시민들이 없다는 수구냉전기득권 신문들의 비열한 공격에 분노하면서도, 정반대로 시민운동에 시민들이 얼마나 있는지 ‘우리들이' 깊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관에 회원참여 규정이 있고, 운영비의 상당수를 시민들이 후원하고 있고, 자원활동가들이 수십·수백여 명이며...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진짜 평범한 시민들이 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물어야 한다. 주요 시민단체의 의사결정과정, 문화, 소통 방식은 어떠한가. 시민들은 후원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를 바라고, 거의 100% 중요한 결정은 이른바 교수·변호사·활동가·고액 후원자 등 ‘전문가 집단’의 고유영역이 되어버리지 않았는지 점검·성찰해볼 일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중첩되면서 그 많은 훌륭함과 선의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과 시민이 가까이 있지 않다’는 단 하나의 명백한 진실이 가슴 아프게 자리 잡아 버린 것이다.
5) 평범한 이웃들에게 확인해보자.
시민운동의 위기는 이처럼, ‘시민들과 너무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 같은 ‘시민들과의 거리’가, 흔히들 시민운동의 위기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 ‘시민단체의 영향력 축소’ ‘현안에 대한 시민단체의 대응력 부족’ ‘새로운 이슈 발굴 미흡’ ‘비판·반대세력의 증가’ ‘시민단체 운영의 어려움’ 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건 보통의 시민들께 ‘시민단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예전에도 그러했는데, 그것이 위기의 원인이 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잘 봐야 한다. 이른바 ‘잘 나갈 때’는 객관적 상황의 호조 속에서 이 중대한 ‘주체’의 문제가 가려져 있었으나, 객관의 변화 속에서 문제와 위기의 본질이 제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파악해야 한다.
길거리 나가서, 아니 친구들이나 주변 이웃들 만나서 물어보라. 제일 짜증나는 것, 힘든 것,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고통스러운 것 등등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것이다. 시민운동의 위기극복, 거기서부터 함께 해야 한다. 시민들이 느끼는 고통과 짜증, 분노(물론, 시민들마다 다 다른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 안에 여러 공통분모가 있고 정당한 분노가 있다)와 전면적으로 함께해야 한다. 아니 ‘함께 한다는 것’도 ‘건방진’ 표현이다. 그냥 시민으로 살면서, 자연스럽게 먼저 또 같이 문제제기하고 호소하고 제안하고 발로 뛰는 시민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6) 활동가들의 패기와 능동성의 후퇴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패기와 능동성의 후퇴도 짚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시민운동의 부진이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패기와 능동성의 후퇴를 불렀고, 또 역으로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패기와 능동성의 후퇴가 시민운동의 부진을 불렀다. 이는 역시 시민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시민들로부터 기쁘게 지지받지 못하는 상황이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시민들을 만나는 데 주저하게 만들고, 그러한 주저함이 또 역으로 시민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거리감을 증폭시킨다. 민주화운동 시기, 그리고 새롭게 시민운동이 출범하던 때, 나아가 총선연대 낙선운동에서 미선·효순 촛불 시위까지 시민운동의 전성기 때 보여주었던 그 활동가들의 패기와 능동성이 지금 절실한 때이다. 그때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던 시민운동과 시민과의 거리를 좁혀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활동가들의 패기와 능동성도 눈에 띄게 감소된 지금 시민운동과 시민사이의 객관의 거리에 주관의 거리까지 합쳐져서 더 큰 거리가 되고 있어 서글프다. 당연히 패기와 능동성의 후퇴는 활동가 자신이 속한 단체와 시민사회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길을 열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3. 시민운동의 위기 진단 ② : 시민운동이 시민들 속에서 학습되지 않고 있다(교육의 문제)
1) 핏빛 5월도 저 찬란한 6월도 이젠 먼 얘기? ·
시민운동이나 시민단체, NGO·NPO, 그리고 시민사회에서 주창하는 여러 가치들이 국민들 속에서 제대로 교육되고, 또 인식·회자되고 있는가. 그 문제제기를 ‘6월 민주항쟁은 잘 계승되고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던져본다.4) 항쟁의 계승 여부와 시민운동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섣부를지라도 이렇게 결론 내 본다. “항쟁은 제대로 계승되지 않고 있다!”
필자의 ‘섣부른’ 결론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해주는 2개의 설문결과를 보겠다. “5.18을 어떤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하냐는 질문에 응답자 10.2%는 '폭동', 6.7%는 '사태'라고 답하는 등 전체 16.9%가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2007년 5월 5.18재단 국민 1,500명 조사 결과)
“광주·전남지역 초등학생 가운데 5.18의 성격을 제대로 아는 응답자는 1.2%에 그쳤고 중학생은 4.0%, 고등학생 12.0%만이 5.18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또 5.18이 발생한 해를 묻는 질문에 대해 광주·전남지역 응답자의 9%(전국 2.1%)인 155명만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밖에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건들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묻는 질문에 광주·전남지역 학생들은 3.1운동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높은 17.2%가 정확한 응답을 했을 뿐 4.19혁명 2.8%, 5.16쿠데타 0.8%, 6월항쟁 3.8% 등으로 인지도가 낮았다.”(2004년 5월 한국사회조사연구소의 초·중·고생 1만3천867명 조사 결과)
자 어떤가. 사실 설문조사 결과를 보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4.19혁명은 아주 먼 옛날 얘기가 되 버렸고, 그나마 근래인 5.18 광주민중항쟁, 6.10 민주항쟁도 이제는 먼 얘기가 되고 있음을 ‘대략’ 느낄 수 있다. 특히 미래 사회의 주역인 20·10대들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항쟁에 참여하고 지지한 세대들이 맨 날 항쟁을 기념하고 계승을 결의한다고 해서 항쟁이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다 아는 얘기겠지만, 실질적이며 참다운 계승은 미래 세대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발전도 미래세대에 달려 있는 것처럼.
2) 시민운동의 위기는 중첩돼 있다.
시민운동과 시민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위기의 원인에 이어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와 그를 계승한 시민운동이 시민들 속에서 제대로 인식되고 교육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짚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시민운동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모태가 된 5월 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의 정신이 미래세대에게 제대로 계승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한다. 동시대의 시민들의 혼란도 여전하다. 5월 민중항쟁을 부정하는 여론이 아직도 상당히 존재하고 있고, 참배를 거부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있는 것처럼 심지어 4.19혁명을 부정하고 5.16 군사쿠데타를 찬양하는 그룹까지 나타났다. 바로 뉴라이트가 그들이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4.19, 5.18, 6.10으로 이어지는 민주항쟁의 역사를 폄훼하고 친일·친미·군사독재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 혼란 속에서 6월 항쟁 20주년이라고 이런 저런 행사나 기획이 여기저기서 참 많았다. 토론도 하고 의의도 밝히고, 계승하자는 다짐도 하고 계승의 과제도 밝혔다. 그런데, 그런 기획들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행사들의 좋은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사들이 6월 항쟁의 계승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이들, 기억하는 이들이 그날을 떠올리고 계승을 다짐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6월 항쟁의 참다운 계승은, 적어도 그날을 잘 모르는 세대들에게 정확하게 인식되고, 깨달음이 되고, 공명이 되는 그런 계승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미래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미래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발전의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기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의 20대, 10대가 앞으로의 20대, 10대가 잘 모르고, 공감하고 공명하지 못하는 6월 항쟁이라는 것은, 그 계승이라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것이다. 시민운동과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더 많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더 많은 평화와 복지를, 더 빠른 통일과 해방을 가져와야 할 몫은 지금의 청년·소년·아동 세대에게 있기 때문이다.
3) 항쟁의 계승과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위해 미래세대와 만나야 한다.
이 같은 중첩된 시민운동의 위기 국면에 시민사회는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더 이상 대학, 야학, 교회, 사찰에서 각성된 시민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음도 각인해야 한다. 직접 시민들을 만나야 하고, 직접 대학사회와 소통해야 한다. 그래야 항쟁도 계승되고 시민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고 활성화도 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개설된 <참여연대>의 ‘시민운동 청년연수 프로그램’은 정말 멋진 기획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좋은 강좌 프로그램과 풍부한 내용이 담긴 이메일 뉴스레터로 꾸준히 시민들을 만나고, 시민교육에 성심을 다하는 <인권연대>의 경우도 배워야 한다. 대부분의 단체들이 회원·회비가 줄어든다고 하는 근래에 인권연대의 회원과 회비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특히, 지성의 요람이라고 하는 대학사회와 교류·협력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각 대학마다 교양과목으로 ‘시민사회와 NGO’ 등의 과목을 개설할 수 있도록 전국의 모든 대학에 제안하고 대화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서 제안배경을 잘 담은 공문을 각 대학에 발송하고 각 대학 교양과목 담당자를 면담하는 것도 방법이다. 대학 측의 노력도 분명 필요하지만, 시민사회에서 먼저 노력해 ‘1시민단체 1대학 자매결연 또는 협약체결’같은 형태로 인연을 만들 필요도 있겠다. 그 교양과목이 개설된 대학의 학생들은 그나마 그 수업을 통해서 시민사회와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이해와 참여의 계기를 가지게 된다. 시민사회를, NGO를 공부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복지의 가치를 배운다는 것으로 그것이 바로 항쟁의 계승이고 연속이다. 필자가 수업을 했던 국민대, 성공회대 학생들은 그 교양과목에 대한 높은 관심과 참여의 열기를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교양과목도 없는 대학이 수두룩하다.
또 틈만 나면 대학사회에서 학교 또는 학생회, 동아리 등과 연계해서 특강 등도 개설해야 한다. 그리고 대학마다 엔지오 동아리도 적극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대학생 인턴 프로그램, 자원활동 프로그램 강화는 기본이다. 이런 일들을 대학생에게 맡겨야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예전엔 대학생들이 ‘좋은 교양과목’ 개설투쟁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거의 없다. 시민사회가 대학사회와 직접 소통하고, 시민사회단체들이 대학생을 찾아가면서 만나야 할 때라는 의미이다.
4) 시민운동의 위기 극복, 시민교육·시민소통 활성화에서 시작하자.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선배투사들과 민중들의 숭고하고도 엄청난 투쟁이 있었던 것처럼 이를 더 좋은 민주주의로 가꾸는 것에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제도가 너무 일상적인 것이어서 마치 물이나 공기처럼 필수불가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마움을 모르기에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공부하고, 깨우치는 계기가 없다면 후배세대들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토대위에서 민주주의의 심화와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상의 참여와 감시 없이는 일상의 민주주의도 없다고 했는데, 누가 참여하고 감시해야하는가. 6월 항쟁 세대가 천년만년 살아서 감시하고 참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좋은 느낌을 드높이기 위한 여러 기획에도 돌입해야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시민들이 다 같이 기쁘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제들을 많이 개발해야 한다. 아직도 시민들이 불편해하고, 분노하는 의제는 널리고 널려있다. 시민단체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발휘해 권력 감시와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것과 병행해서 반드시 진행해야할 일이다. 그것이 관심과 소통의 첫 출발이 될 것이다. 미래세대는커녕 민주주의 항쟁을 경험한 세대들까지 민주주의나 시민사회에 대해서 거리감이나 냉소를 느끼고 있다면 이는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시민들을 만나고 또 만나야 할 일이다. 교육이 활성화되려면, 먼저 만남과 소통부터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런 노력을 바탕으로 시민과 학생들이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소중함과 의의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일상화해야 한다. 또한 학생들의 교육과정(시민들의 재교육·평생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인권과 복지, 정의와 평화에 관한 교육이 강화되는 프로젝트에 착수해야 한다. 지금의 교육과정에서 배우는 5.18은, 6.10항쟁은 또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은 너무나 형식적이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으로 교육이 끝나서는 안 된다. 교육과정 개편과 함께 일선 학교와 연대해고 소통하는 일도 병행해야 한다. 주변에 있는 고등학교에서는 특강을 직접 조직화해야 한다. 모든 시민단체들이 <전교조>, <참교육학부모회>,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등 교육단체들과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일이다. 시민교육의 일상화·활성화가 항쟁의 계승과 시민운동의 위기 극복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현재 시민사회와 시민단체에서 시민과의 만남, 소통,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다시 묻는 것이다. 무어라 답변하는가. 이것이 위기의 또 다른 원인이다.
4. 시민운동의 위기 진단 ③ - 시민운동을 제대로 대변하는 언론이 없다.(언론의 문제)
1) 관계·소통·교육 문제의 중심에 선 ‘언론’
지금까지 시민운동의 위기와 관련해 관계·소통·교육의 문제를 언급했다. 그런데 관계·소통·교육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가 바로 ‘언론’일 것이다. 위에서는 주로 시민운동의 위기의 원인을 내부적인 차원에서 검토했지만 시민운동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공격하는 언론환경이 시민운동의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시민운동이 시민들을 일일이 다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언론이라는 ‘매개체’는 너무나 중요한데, 그 매개체가 건강해야만 시민운동과 시민사이의 관계·소통·교육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시민운동과 시민사회를 제대로 대변하는 언론이 없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언론개혁도 지지부진하고, 그나마 있었던 ‘시민의신문’까지 무너진 지금, 우리는 시민운동을 제대로 대변하는 언론이 없다는 사실에 큰 위기감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이 위기의 극복책은 세 가지 방향에서 검토할 수 있다. 하나는 언론개혁 의제의 중요성을 다시 환기시키며 언론개혁을 끊임없이 추진하는 것이고, 둘은 대안언론을 만들어나가고 키우고 아낌없이 지원해나가야 한다는 것이고, 셋은 시민단체들이 모두 자체 사이트나 기관지 등을 키워서 작지만 강한 대안언론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초라한 시민운동 언론의 현실
80년 5월을, 87년 6월을 제대로 계승하기 위해서, 그리고 시민사회의 위기국면을 타파하기 위해선 결국 시민사회가 가꾸고 있는 소중한 가치들이 절대 다수의 시민들과 만나고 소통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5)과 ‘언론’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문제는 위에서 자세히 언급했으니까 넘어가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을 대변하는 제대로 된 언론 하나 없는 초라한 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시민의신문>이 고군분투했으나 문을 닫았고, 어찌됐든 문을 연 <시민사회신문>이 선전하기를 기대해봅니다만,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 냉정하게 시민사회의 참된 가치를 대변하며 다수 시민과 소통하고 있는 매체는 지금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6)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데일리서프> <민중의소리> <레디앙> <참세상> <대자보> <참말로> <매일노동뉴스> <르몽드 디플로마띠크 한국판> 등이 각각 다른 색깔로 나름대로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각각 여러 다른 이유로 시민사회와 시민과의 소통을 전면적으로 매개하는 말 그대로의 시민사회 ‘매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 시민운동의 정말로 안타깝게도 자신의 대변지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3) ‘시민의신문’에 대한 추억 하나
<시민의신문>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시민사회의 적극적 대응이 부족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필자가 속한 ‘시민사회청년활동가모임’이 참여하긴 했지만 필자 역시 적극적으로 ‘시민의신문 사태 대책위’에 참여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 심지어는 <시사저널> 사태에 보인 관심보다도 못하다는 지적도 터져 나왔다. 맞는 말이다. <시사저널>도 <시민의신문>도 둘 다 살렸어야 합니다.(안타깝게 지금 시사저널도 굉장히 어려운 형국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시민사회,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주요 시민사회단체들은 <시민의신문> 사태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적절하고도 정확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시사저널 대책위’에는 들어가면서 ‘시민의신문 대책위’에는 참여하지 않은 단체들도 있다. 이쯤에서 시민사회의 이중적 언론관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사실은 자신을 부족한대로 전면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시민의신문>이 사회적 영향력이 낮다는 이유만으로(말로는 기성 언론의 문제를 열심히 지적하면서도) 거대 언론 또는 기성 언론과의 관계에 더 신경을 쓴 측면이 있다.7) 심지어는 조선일보에 대해서도 불철저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필자는 안티조선운동은 여전히 유효하고 더 치열하게 전개되어야 할 운동이라고 판단한다. 언론 개혁에 소극적임과 동시에 자신을 대변해주는 매체에 대한 부족한 관심... 이게 시민사회 작금의 위기 중의 하나이다. 자신들이 말하고, 생각했던 것처럼 ‘나쁜 언론’의 문제를 고치기 위해서 언론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섬과 동시에 자신을 대변해주는 신문에 아낌없는 지원과 사랑을 주었다면 아마도 <시민의신문> 사태의 결론은 아주 다르게 나타났을 것이다.
4. ‘시민의신문’에 대한 추억 둘
마지막까지 고생한 <시민의신문> 기자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럼에도 <시민의신문>과 관련해 왜 시민사회의 관심이 낮았을까를 지적하고자 한다. 조심스럽지만, 시민사회 주요 구성원들은 <시민의신문>이 제대로 시민사회를 대변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설령 지면을 통해 대변이 이루어지고 있더라도, 국민 여론이라는 ‘공론장’에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거기에서 시민단체들과 <시민의신문> 사이에 일종의 거리와 실망이 발생했다. 시민단체 나름대로는 지원과 애정을 아끼지 않았는데, <시민의신문>이 늘 ‘부족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또 시민사회와 <시민의신문> 간의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신문사 자체가, 신문사의 역사가, 신문사주가, 신문의 내용이, 신문의 영향력이, 또는 신문사의 구성원들이... 각각 또는 모두 시민사회의 여러 ‘기대’와 소통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그렇게 둘 다의 일정한 책임으로 시민사회와 <시민의신문> 사이는 굳건하지 못했다. 그런 점들이 안타깝게도 <시민의신문> 사태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 부족과 적극적이지 못한 대응을 부른 것 아닌가 감히 추정해본다.
5. 세 가지 대응으로 ‘언론’ 문제를 해결하자.
1) 하나는 언론개혁 의제의 중요성을 다시 환기시키며 언론개혁을 끊임없이 추진하는 것이다. 언론개혁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도 신문시장은 수구냉전기득권·개발파괴 세력이 장악하고 있다. 신문시장의 90%가 그런 신문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답답하고 끔찍한 일인가. 언론 영역에서 신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긴 하지만, 지금도 왜곡된 여론과 공격으로 시민사회의 가치를, 시민단체를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시민사회가 다시 한 번 ‘언론개혁’이라는 대의와 명분을 곧게 세워야 한다.
2) 둘은 대안언론을 만들어나가고 키우고 아낌없이 지원해나가야 한다. 어떤 매체라도 좋다. 새로 출범한 <시민사회신문>에도 더 큰 관심으로 함께 해야 한다. 국회전문지 <여의도통신>도 주목하자. 인터넷 대안언론들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바꾸자. 대안 매체, 시민사회와 소통하려고 하는 매체의 기자들부터 귀하게 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면 걱정했던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것도 서서히 커지기 마련이다. 우리부터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어떻게 사회적 영향력이 생기겠는가. 지금은 예전 같지 않지만 <한겨레>도 그렇게 키워내지 않았던가. 시민사회와 시민단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한다면 제 2의 제3의 <한겨레>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또 대안매체를 키워나가는 과정과 함께 <한겨레> <오마이뉴스>처럼 민주주의·시민사회와 소통하려했던 창립정신을 가지고 있는 매체들과의 소통과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그런 매체들이 지금보다 더 시민사회와 시민단체들을 대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한다.
3) 셋은 시민단체들이 모두 자체 사이트나 기관지 등을 키워서 작지만 강한 대안언론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단체들마다 사이트에 많이 투자하고 있지만, 더 투자해야 한다. 더 많은 네티즌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사이트 정책을 끊임없이 개선하고 발굴해나가야 한다. 뉴스레터도 더 정성껏 만들자. 뉴스레터 신청도 더 늘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관지도 마찬가지다. <녹색평론> <인물과사상>처럼 권위있는 기관지를 시민단체들도 만들 수 있다. <작은것이아름답다> <함께사는길>처럼. 또 최근 시민단체, 지역단체들이 라디오 방송을 늘려나가고 있다. 너무 좋은 일이다. 작지만 소중한 대안 언론들이 하나씩 하나씩 늘어난다면, 그러한 개미들의 연합체가 언젠가 ‘조선일보’같은 신문시장의 괴물을 무너뜨릴 날도 올 것이다. 결코 상상이 아니다.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문제는 여럿이 함께 그 꿈을 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5. 글을 마치며 : 그래도 시민사회·시민단체가 희망이다!
1) 현재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복지 등 시민사회의 ‘절대가치’가 심화, 확산되어야 함에도 오히려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최근 20주년을 맞이한 항쟁의 계승이 아니라 항쟁의 단절을 걱정해야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수구냉전기득권세력들과 환경파괴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는 개발독재세력들, 인간보다는 오로지 이윤을 우선으로 하는 신자유의세력들이 판치고 있는 모순이 격화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항쟁정신을 부정하고, 인간성을 파괴하고, 민중을 억압하며, 민족을 배반하는 이들에게 우리나라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시민사회가 시민들을, 미래세대를 만나야 한다. 여기에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사활이 걸려 있다. 위기는 위기로 절대로 그치지 않고 시민사회와 시민단체를 향한 험난한 공격으로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2) 이와 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한국의 시민운동의 위기에 대해서 대표적인 것들만 살펴봤다.8) 그러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희망은 여전히 시민사회운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를 위한다면 여기서 시민운동이 위기에 침몰해서는 안 된다. 모두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열정으로, 헤매더라도 ‘시민의 바다’에서 헤맨다면 그 속에서 분명 보람과 긍지 넘치는 참다운 운동의 ‘넓은 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시민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시민교육에 매진하자. 특히 미래세대와의 소통에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관계·소통·교육·언론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해보자. 그러면 분명 빛나는 길이 보일 것이다. 참다운 세상을 향한 시민운동의 길은 앞으로도 쭉 계속 돼야 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해당하지 않은 여러 단체들과 정말 열악한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활동가들에게 미안한 마음 감출 수 없다. 또 제 자신도 이 이야기(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하게 시민사회 내에 존재하는 일정한 경향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자신,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위해 더욱 치열하게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 글을 마친다.
1) 필자는 엔지오·엔피오·시민운동·사회운동에 대한 관심 충만하여 시민단체들과 그 운동을 지켜보며 연구하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 물론, 직접 참여하는 것이 연구보다 더 행복하다. 무엇보도다 보람찬 참여 속에서 시민단체들과 그 활동이 보다 활성화되는 길을 끊임없이 찾고 공유하고 싶어한다.
2) 보통 시민사회운동이라 하면 시민사회에서 전개되는 모든 공익적·계급적 운동을 총괄하는 표현이다. 여기서는 줄여서 시민운동이라 표현하겠다. 또 시민·사회운동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시민운동과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전투적인 사회운동을 대등한 관점에서 나란히 나타내는 표현이다. 시민사회운동과는 달리 시민사회라는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정통 진보좌파운동도 포괄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은 시민운동이라는 표현보다는 사회운동이라는 표현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3) 각주2)과 동일한 이치로 시민사회단체를 줄여서 시민단체로 표현한다. 역시 시민·사회단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정통 진보단체들의 경우 시민단체보다는 사회단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하지만 시민운동 보다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이 포괄적이므로 운동의 역사성이나 전체 운동을 언급할 때는 ‘사회운동’이라고 표현하겠다.
4) 이 문제의식과 시민운동의 위기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광주민중항쟁과 6월 민주항쟁이 바로 시민운동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즉 민중·민주항쟁이 국민들 사이에서 제대로 계승되고 있다는 것은, 그 항쟁을 계승하고 있는 시민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와 관심의 질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시민운동의 몇몇 위기 징후를 국민들과 함께 잘 극복할 가능성이 높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 항쟁이 제대로 계승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항쟁의 계승자인 시민운동의 가치들도 위기에 처하게 되고 시민운동의 위기는 증폭되게 된다.
5) 교육의 문제는 제도권 교육, 비제도권 교육 문제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학교 외에도 가정, 교회, 사찰, 또래 문화, 언론, 사교육 시장을 통해서 무수히 많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시민교육을 활성화하자는 문제의식도 제도권 교육에서 시민사회에 대한 교육 강화뿐만 아니라 방금 언급한 학교 외 교육 공간에서의 시민사회의 개입까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생활세계 전반에서 시민운동과 시민단체들이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6) 참고로 ‘한국엔지오신문’이 발행되고 시민단체에도 일부 배달되고 있는데 내용은 꽤 괜찮은 것 같지만 필자가 그 신문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서 이 글에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못하겠다.
7) 심지어는 시민단체 상근자들이 기자를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수 시민단체 상근자들이 자신들을 대변하는 매체의 기자들이 사회적 영향력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건성으로 대하고, 제도권 언론의 기자들에게는 정성껏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문제는 대안매체 기자들이 오랫동안 호소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나아가 인격적 모멸감까지 느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8)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의 위기를 야기하는, 어려움을 야기하는 원인들은 더 있을 것이다. 시민단체 활동가의 충원과 재충전의 어려움도 큰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고, 시민단체들의 연대성 약화도 짚을 수 있을 것이고,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엄밀한 대안과 정책을 제시하는 것의 어려움도 있고 그것 자체가 국민들 사이에서 시민사회의 신뢰도 저하로 연결되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도저히 저항하기 쉽지 않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센 파고와 미국의 강력한 패권도 우리 운동의 대응을 어렵게 만들어 위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다행스럽게 최근 엄밀한 대안과 정책 제시를 목표로 한 많은 싱크탱크들이 생겨나고 있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생태지평, 사회갈등연구소, 세계연구소, 사회디자인연구소, 희망제작소, 각 대학의 진보연구소 등이 그들이다. 역시 시민사회가 희망인 것이다. 또한 거세고 심각한 도전 속에서 시민운동과 시민단체의 의의가 더욱 빛나게 되어 있는 만큼 지금의 위기가 전환의 기회가 될 것임도 분명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