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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용시즌 |
1992년 |
- 개최국 |
스웨덴 |
- 결승전 매치 |
덴마크 2 VS 0 독일 경기장 : 올레비, 예테보리, 1992년 6월 26일 |
- 대회 주요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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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슈마이켈, 위르겐 콜러, 안드레아스 브레메, 루트 굴리트, 데니스 베르캄프 |
- 공인구 |
Etrusco Unico |
- 대회 이야기 |
1992년 UEFA 유럽피언 챔피언쉽에서 선수들은 메이저 대회 본선에서 처음으로 등 번호와 함께 이름을 유니폼에 새겨 넣었다.
슈마이켈, 유로 1992를 돌아본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입단 일 년 차였던 피터 슈마이켈은 유로 '92에서 덴마크의 귀중한 골을 기록했다. 그가 여기서 그 여름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덴마크는 유로 '92 예선전에서 탈락했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제명으로 본선에 오를 기회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해서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다. 스웨덴에 입성한 이후, 덴마크는 조별예선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제치고 진출했고 4강에서는 네덜란드를 승부차기로 꺾고 결승에서 독일을 2-0으로 누르면서 트로피를 차지했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입단 일년 차였던 피터 슈마이켈은 이 대회에서 덴마크의 귀중한 골들을 기록했다. 그가 여기서 그 여름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늦게 찾아든 본선합류통보... 저는 당시에 브뢴드비에 있었습니다. 그 날, 저는 사실 훈련 중이었지요. 잉글랜드에서의 시즌이 유럽의 다른 대회들 보다 조금 일찍 끝났고 저희는 유로에서 탈락했지만 스웨덴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우리는 본선에서 겨뤄보고 싶은 팀 중 한 팀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브뢴드비에서 독립국가연합과의 친선경기를 앞두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의 훈련 시간 사이에 점심을 먹고 있는데 어쩌면 유고슬라비아가 제명되어 우리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그리곤 두 번째 훈련 시간이 끝나고 돌아오자 덴마크의 합류가 확정됐고 그땐 공식적으로 대회 참가국이 되었습니다.
덴마크의 불굴의 정신력... 당시 팀의 정신은 브뢴드비 IF와 21세 이하 선수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브뢴드비에서 한 번도 뛰진 않았지만 프레밍 폴센과 같은 선수들처럼 덴마크의 프로축구 선구자로 발전한 선수들이 팀에 있었지요. 그리고 브뢴드비는 1986년에 처음으로 풀 타임 출전한 팀이어서 남들이 덴마크에서 보았던 많은 것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습니다. 아마 1992년 이전에는 굵직한 사건들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특별한 일을 이뤄냈지만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우리가 이번 시합을 이기고 싶다. 이 시합이 우리의 목표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는 스포츠 정신은 없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우승... 무엇보다도 저희가 코펜하겐의 시청에서 덴마크 국민들과 우승의 기쁨을 나눌 때서야 비로소 피부로 느낄 수 있었어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어요. 당시에 "맙소사, 꿈이 아니구나, 우리가 정말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2 유럽피언 챔피언십 베스트 11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 (덴마크)선수 경력 내내 세계 제일의 골키퍼로 꼽혔다. 무엇보다 슈마이켈은 유로 '92 결승전에서 보여준 특출난 활약을 펼치며 축구팬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그는 1999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포함해 수많은 빅매치에 출전했다. 그러나 슈마이켈의 축구인생에서 최대 결전을 꼽으라면 1992년에 치러진 독일과의 결승전이 될 것이다. 앞서 그는 네덜란드와의 준결승전에서 상대팀 '에이스' 마르코 판 바스텐의 페널티킥을 선방하며 조국의 승부차기 승리를 이끌었다. 이뿐만 아니라 슈마이켈은 덴마크가 유로 '92 결승전에 진출하기까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결승전에서 총 세 번의(위르겐 클린스만으로부터 두 번) '월드클래스 선방'을 펼친 끝에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슈마이켈은 현역 시절 동안에 총 네 번의 유럽피언 챔피언십 그리고 프랑스에서 열린 1998 FIFA 월드컵에 참가했다. 그는 A매치 129경기 출전이라는 덴마크 기록을 남긴 채 덴마크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수비수: 조세린 앵글로마 (프랑스) 미셸 플라티니 UEFA 회장은 프랑스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이던 1990년 10월에 열린 유로 '92 예선전에서 과들루프섬 태생의 앵글로마에게 A매치 데뷔의 기회를 부여했다. 전(前) 파리 생제르맹 FC 소속의 풀백 앵글로마는 '르 블뤼[프랑스 국가대표팀의 별칭]'가 유로 예선 여덟 경기에서 승점 24점을 획득하며 본선행을 확정하는 데에 기여했다. 조국 프랑스가 비록 조별리그에서 충격적으로 탈락했지만, 앵글로마는 유로 92 베스트 11(프랑스 총 두 명 배출)의 일원으로 선정됐다. 그는 이듬해에 올랭피크 마르세유 소속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후 1994년에 이탈리아 무대로 이적했다. 앵글로마는 토리노 FC에서 환상적인 데뷔 시즌을 보낸 뒤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 프리메라리가의 발렌시아 FC에서 활약했다. 그는 A매치 37경기에 출전했으며 유로 '96을 마지막으로 프랑스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이후 그는 잠시동안 과들루프를 대표하여 뛰기도 했다.
수비수: 로랑 블랑 (프랑스)블랑은 1992년과 1996년, 2000년 등 3회 연속 UEFA 올스타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특히 그는 유로 2000에서 결승전에 출전하여 조국의 우승에 기여하면서, 1998 FIFA 월드컵 당시 경고누적으로 브라질과의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했던 상처를 달랬다. 특유의 권위와 고상함, 리더쉽으로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블랑은 A매치 97경기 출전이라는 기록을 남긴 채 국가대표 무대에서 물러났다. 그는 미드필더로 몽펠리에 에로 SC에서 프로무대에 입문한 뒤 센터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해 총 아홉 개 클럽(FC 바르셀로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등)에서 활약했다. 블랑은 선수 시절 동안에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는 현역 은퇴 이후 감독으로 보직을 변경하여 지롱댕 보르도 FC를 리그 1 정상으로 견인했다. 현재 '르 블뤼'의 수장이다.
수비수: 위르겐 콜러 (독일)축구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맨투맨 수비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콜러는 조국 서독 대표팀 소속으로 1990 FIFA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소속이었던 그는 1997년에 소속팀의 UEFA 챔피언스리그 및 분데스리가 '더블'을 도왔다. 총 세 번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한 콜러는 새 소속팀인 유벤투스와 세리에 A 및 이탈리아컵 챔피언에도 올랐다. 콜러는 과거에 한때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뛰었고, A매치 105경기에 출전한 뒤 1998 FIFA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애초에 그는 유로 '96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물러나고자 했지만, 체코와의 개막전에서 전반전 14분 만에 부상을 당하며 조국 독일의 챔피언 등극에 함께하지 못했다. 그는 앞서 열린 두 번의 UEFA 유럽피언 챔피언십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수비수: 안드레아스 브레메 (독일) 브레메는 1990 FIFA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조국의 우승을 결정짓는 골을 넣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브레메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윙백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결승전에서 오른발로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브레메는 잉글랜드와의 준결승전에서는 왼발로 프리킥골을 터뜨렸다.) 그는 A매치 86경기에 출전하여 8골을 넣었고 친정팀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프로 데뷔와 은퇴를 했다. 그 사이에 브레메는 FC 바이에른 뮌헨과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 몸담으면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는 세 번의 UEFA 유럽피언 챔피언십에 참가하여 총 12경기에 출전했다. 유로 '84 및 유로 '92 베스트 11인 브레메는 1994년에 국가대표팀에 복귀해 마지막으로 월드컵 무대를 한 번 더 밟았다.
미드필더: 뤼트 굴리트 (네덜란드)굴리트는 유럽에서 가장 걸출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1987 유럽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던 그는 큰 키와 긴 레게머리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굴리트의 소속팀 AC 밀란은 그의 '토털축구'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9년 만에 리그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또한, 굴리트는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조국을 1988 UEFA 유럽피언 챔피언십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우승이 지금껏 '오렌지군단'의 유일한 메이저대회 우승이다. 특히 굴리트는 구소련과의 결승전에서 강력한 헤딩슛으로 선제골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1990년월드컵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AC 밀란과 스쿠데토를 차지한 직후에 참가한 유로 '92에서는 다시 한 번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개인통산 A매치 66경기에 출전하여 17골을 넣은 그는 1994년에 국가대표 무대에서 은퇴했다. 그는 현역은퇴 이후 감독으로 변신하여 첼시 FC와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페예노르트, LA 갤럭시, FC 테레크 그로즈니를 각각 지도했다.
미드필더: 슈테판 에펜베르크 (독일) 바이에른 뮌헨의 '캡틴'으로 친정팀의 2000/01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에펜베르크는 1994 FIFA 미국월드컵에서 귀가조치를 받은 이래 오랫동안 국가대표팀에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는 4년이 지나 일시적으로 '전차군단'에 복귀했지만, A매치 단 35경기 출전 (5골)이라는 기록을 남긴 채 은퇴를 선언했다. 에펜베르크는 유로 '92에서 총 다섯 경기에 뛰었고, 그 중 스코틀랜드전(독일 2-0승)에서 본인의 A매치 데뷔골을 신고했다. 그는 덴마크와의 결승전에서 패한 이후 피오렌티나와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거쳐서 친정인 바이에른 뮌헨으로 복귀해 분데스리가를 3연패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미드필더: 토마스 헤슬러 (독일)'서독 올해의 선수상' 두 차례 수상. 헤슬러는 유로 '92에서 대회 최우수선수에 선정되는 최고의 활약으로 본인의 두 번째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그는 2년 전 서독이 우승을 차지한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이 단신의 플레이메이커는 스웨덴에서 최상의 모습을 선보이며 '전차군단'의 결승행을 주도했다. 특히 헤슬러는 독립국가연합(CIS)과 홈팀 스웨덴을 상대로 각각 환상적인 프리킥골을 터뜨렸다. 그는 프로무대에서 유벤투스와 AS 로마, 분데스리가 네 개 클럽을 거치는 동안에 단 한 번의 우승컵도 들어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유로 '96에 출전하여 우승컵을 들어올리면서 '국가대표팀 체질'임을 입증했다. 헤슬러는 유로 2000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그는 독일 출신으로 '센츄리클럽'에 가입한 다섯 번째 인물이다.
미드필더: 브라이언 라우드룹 (덴마크)라우드룹 형제는 리차드 뮐러-닐슨 감독과의 불화 이후 대표팀 호출에 불응했다. 그러나 동생인 브라이언은 형 미카엘과 달리 1992년 봄에 복귀하여 예외로 출전권을 획득한 덴마크의 유로 '92 여정에 함께했다. 브라이언은 스웨덴에서 득점에는 실패했지만 덴마크 선수들 중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쳐보였다. 그로부터 4년 뒤 그는 이번에는 친형과 함께 출전한 UEFA 유럽피언 챔피언십에서 3골을 넣으며 다시 한 번 맹활약했다. 하지만 덴마크는 조별리그 탈락의 쓴맛을 봤다. 브라이언은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조국의 준준결승행을 이끌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는 A매치 82경기 출전, 21득점의 기록을 남기고 만 29세의 나이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브라이언은 수많은 클럽을 거쳐가면서 레인저스 FC에서 가장 성공적인 시간을 보냈다. 그의 AFC 아약스에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공격수: 데니스 베르캄프 (네덜란드)베르캄프는 유로 '92를 계기로 자신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알렸다. 앞서 소속팀 AFC 아약스를 이끌고 두 차례 유럽 챔피언에 올랐던 그는 유로 '92 예선(4골)과 본선(덴마크와의 준결승전 포함 3골)에서 득점포를 가동하며 대회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 이 걸출한 스트라이커는 이후 유럽피언 챔피언십과 월드컵 무대를 추가로 각각 두 차례씩 밟으면서 A매치 79경기에 출전하여 37골을 넣었다. 그는 비행공포증만 아니었다면 2002 FIFA 한·일 월드컵에도 출전했을 것이다. 베르캄프는 1995년에 이탈리아의 명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를 떠나 아스날 FC에 입단했다. 그는 런던에서 프리미어리그 및 FA컵 '더블'을 두 차례 달성하며 '하이버리의 전설'로 입지를 굳힌 뒤 2006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공격수: 마르코 판 바스텐 (네덜란드)판 바스텐은 유로 '88 구(舊)소련과의 결승전 경기에서 터뜨린 발리슛 득점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 골은 잉글랜드전 해트트릭과 서독과의 준결승전 경기 막판에 나온 극적인 결승골을 잇는 그의 대회 5호골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골잡이 판 바르텐은 유로 득점왕을 차지한 뒤 같은 해에 본인의 첫 발롱도르(현역 시절에 총 3회 수상)를 수상했다. 그는 비록 유로 '92에서 무득점에 그치고 준결승전에서 덴마크의 피터 슈마이켈 골키퍼에게 페널티킥이 막혔지만 여전히 출중한 공격수의 모습을 보였다. 판 바스텐은 소속팀 AC 밀란과 유럽피언 챔피언 클럽스 컵을 두 차례 제패했다. 그러나 그는 발목 부상으로 조기에 현역에서 은퇴(A매치 58경기 출전, 24골)했다. 판 바스텐은 감독으로 변신해 네덜란드 대표팀을 4년간 지도한 이후 친정팀 AFC 아약스의 지휘봉을 잡기도 했다. <자료 출처 : http://kr.uefa.com/uefaeu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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