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계리 (玉溪里)
병곡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8 8 고속도로와 지방도로가 지나가고 있어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병곡 7개
동리 가운데 자연부락을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싸리골(杻洞),새터(新基),옥계(玉溪),작은재(小峴),도란(吐內)등 다섯개의 마을을 합해서 옥계리 라고 하였다.
▶싸리골(杻洞)마을은 맨처음 들어온 성씨는 경주 김씨라고들 하며
땅을 개척하고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 전한다. 다음으로 들어온 사람이 김해김씨라고 한다. 마을 서편 뒷골에 경주김씨의 선산이 있으며 먹골(墨谷)에는
김해김씨 선산이 있으나 지금은 그후손들이 이 마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그 뒤 마을이 황폐
해졌는데 조선 성종시대에 삼척박씨가 안음(安陰)에서 이주하여 와서 박달나무와 싸리나무 등 잡목이 많았는데 나무를
쳐내고 개간하여 살면서 싸리골 마을로 불러왔다.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축동마을이라 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마을의 형국이 버드나무가지에 앵무새가
알을 품은형(柳枝鶯巢抱卵形)으로 좋은 길지(吉地)라 전한다.마을 뒷편에는
심방(沈芳)터 또는 심만(沈萬)터라고 전하는 곳이 있는데 옛날 심방이라는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여 재산을 모아서 만석지기 거부가 되었는데 7년간의
심한 가뭄(旱拔)으로 인하여 큰 흥년이 들게
되었다. 그는 곡간에 쌓아두었던 식량을 굶주려 곧 죽게 된 이웃들에게 몇 년동안 모두 나누어 주니 점점재산이 탕진되었고
결국은 자신이 망해서 패가하게 되었다고 한다.지금도 이 심방터에는 기와 조각이나
도기의 파편,기초석, 맷돌등 유물이 발견되어 그 때의 큰 부자가 살았음을 짐작케 해준다.또한 마을 맞은편 산에 문필봉이라는 봉우리와
노적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어 문필과 부가
이어져 많은 인물들과 부자가 배출 되었다 한다. 삼척박씨 이후에 하동정씨가
들어오고 밀양박씨 등이 들어와 살고 있으나 그래도 삼척박씨의 집성촌이다.
마을 뒷편에 는 박씨의 묘제각인 영모재가 있는데 헌종시대에 창건하여 오늘 에 이르고 있다. ★.싸리골(杻洞)마을 전경
▶새터 (新基)마을은 글자 그대로 새로운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새터라고 한다. 이 마을은 옛날 병곡과 백전을 서면(西面)이라고
하였는데 서면골에서 거둔 세곡(稅穀)이나 군량미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창터라고도 한다. 마을 앞에 창터라고 하던 곳은 1960년대 까지만 해도 5백여평의 대지 주위를
둘러쌓던
높고 넓은 담장으로 축조되어 있었다.그것을 마을 사람들이 밭을 개간하고 새마을 사업과 농로 개설 등 근대화 작업으로 인해 담장은 헐리고 지형은
변형이 되어 지금은 창터라는 이름만 전할 뿐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이 새터마을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로써 이창터에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그리고 창터앞에 흥성대(興城臺)라고 부르는 터가 있는데 그러고 보면
창터와도 무관 하지
않다고 생각 되어진다.또 이 마을은 풍수지리설로 농악의 악기인 징의 형국이라
하여 징이나 괭과리를 울리지 않으며 징을 울리면 마을에 화를 당한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영조시대에 삼척박씨가 처음 들어와 터를 잡았다고 전하며 그 다음은 합천이씨,하동정씨, 단양우씨 등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삼척박씨의 집성촌으로 이어지고 있다.
★.새터 (新基)마을전경
▶옥계 (玉溪)마을은 조선 연산군 집정시 무오사화로 피난차 김해김씨가
이곳에 들어와 가시덩굴과 잡목을 베어내고 터를 닦아 집을 짓고 논밭을 일구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은
좌우로 산이 잘 감싸서 볕이 많이
들고 따뜻하며 땅이 기름지고 곡식이 잘 자란다. 마을 가운데 샘물이 양이 많아 마을
사람들이 마시고도 남아 언제나 넘쳐 흐르고 있어 이 샘물을 옥수
라고도 한다.
넘쳐 흐르는 샘물은 계곡을 이루고 햇볕을 받아 반짝이니 마을 이름을 옥계라고 하였다 한다. 마을 뒤에 김해김씨 묘각인 성육재가 순종조에 창건되었다. 김해김씨 집성촌이지만 뒤이어
나주정씨 밀양박씨 전성전씨 진주강씨 해주오씨 등이 살고 있다.
★.옥계 (玉溪)마을 전경
▶적은재(小峴) 마을은 처음 창녕조씨가 들어와서 마을을
개척하고 살았다고 전하나
지금은 그 후손들이 없고 마을 근처에 조씨들의 옛 무덤만 남아있을 뿐 알 길이 없다. 또 마을 뒷쪽에 향교가 있었다
하여 향교터 라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기와 쪽 이나 흔적이 나오고 있으나 창건 년대나 기타 자세한 내역은 알 수가
없다. 향교가 난세에 일시적 피난처로 와 있던 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후 광해군 때에 삼척박씨가 들어와서
살면서 마을을 이루게되었다. 이웃 송평마을이나 옥계 마을에서 이 마을에 들어을 적에는 작은 고개을 넘어 들어
온다 하여 작은 재마을 즉 소현 마을로 부르고
있다. 조선 철종시대에 창원황씨가 진주에서 들어와 살았다고 하나 그 후손은
확인할 길이 없다. 마을 서북쪽에 길밋소와 갈미바우가
있고 엑끼나더리 길이
있다. 마을 어귀에 수령 3백여 년된 왕버들 나무가 풍치목으로 오랜 세월을 말해
주듯 우뚝 서 있고 그 옆에 삼척박씨 묘각인 운강재가 있다. 또한 삼척박씨
집성촌으로 대대로 살고 있다.
★.적은재(小峴) 마을
전경
▶도란(吐內)마을은 그 이전에는 도안(島雁)이라 불렀으며 양쪽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섬이였고 기러기나 물오리 등 많은 조류가 먹이를 찾아서 날아들고 있었다.그로 인해 도안(島雁)이라 불러온 것이 우리말로 변형되어
지금껏 도란 마을로 부르고 있다. 도란에 모여든 모든 새들이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줄 때 먹은 먹이를 토해내서 새끼에게 먹인다고 하여 토내(吐內)마을로
이름 지어
졌다고도
한다. 세월은 흘러 지형도 변하고 이곳 들판에
농사를 짓기 위해 하나 둘씩 농막을 지은 것이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풍수지리에서 마을의 지형이 행주형(行舟形) 즉 배의 형국
이라 하여 마을 안에는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을 뚫는 것이기 때문에 배가 갈수 없고 가라
않는 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지내온 것이다. 마을 서쪽에는 고무래(당그레)처럼 생겼다 하여 당그레봉이라 하는 산이 있고 마을 앞에 해미골이라는 들이 있다 이 마을에 진양하씨 성주이씨 남원양씨
삼척박씨 나주임씨 등이 살고 있며 2백여 년을 지내온 것으로 추측된다.
★.도란(吐內)마을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