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 뭐길래
안녕하십니까? 그동안에 제가 없는 사이에 컴퓨터가 잘못되어 포맷하고 새로 설치하는 바람에 오랜만에 들러봅니다. 불교는 맑음과 평온함 같은 것을 주는 것을 느끼며 항상 친절한 답변에 그저 불교에 더 호기심이 가고 좋아하게 됩니다. 스님들은 제일 어려운 수행이 자식과의 연을 끊는 것이라고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불교영화에서 자식을 찾아간 어머니를 돌려보내는 슬픈 장면을 보고 부모와 자식의 연을 끊는 것이 괴로움을 덜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자유인이 되는 하나의 해탈인지? 수행에 장애가 되는지? 좀 묘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때는 교사로서 교사와 학생과의 연은 어떤 것일까? 교사와 학생도 맺어진 연에 어떤 굴레 속에서 허덕이는 것은 아닐까? 선생님 생각은 어떤지 듣고 싶습니다.
홍 00 드림
인연의 쓰고도 아리는 사슬
윤회의 고달픈 머나먼 길을
풀려서 진여의 꽃동산이라
향기여 천지에 넘쳐 나가라
우리는 감로로 공양하나니
우리에게 죽음도 이미 없도다
미당 서정주 님의 <불교도의 노래> 2절의 가사이지요. 우리의 삶을 인연의 쓴 사슬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고팔고의 애별리고(愛別離苦)를 말하지요. 사랑하는 사람이나 대상과의 떠남은 어떤 고통보다 크다는 것은 더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별의 극점에 있는 사별, 가까이 있으면서도 만날 수 없는 남북의 이산가족, 부모형제의 생이별, 더 큰 진리를 찾고자 떠나는 출가하는 이들과의 이별 등 슬픔의 눈물을 닦으며 돌아서야 하는 수많은 헤어짐은 우리들의 가슴을 더없이 아프게 합니다.
그 가운데 출가로 인한 이별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멀 수밖에 없는 이별의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지금은 형태가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만 가족을 떠나 수행자의 길로 들어서는 출가는 세속적 인간적 입장에서 보면 무엇보다 큰 이별의 아픔을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정 스님의 출가 이야기는 출가의 공덕을 떠나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고 들은 지식으로만 판단을 하는 작은 나에 머물게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인정에만 머물었다면 진정스님의 출가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어머니의 왕생극락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생에서의 육신의 만남과 이별은 회자정리의 이치를 조금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아이들이 귀엽고 예쁘다고 부모님 슬하를 떠나지 않고 있다면. 다들 잘 아는 것이지만 떠남이 없는 성숙은 절대 없다고 생각합니다. 출가는 더 큰 만남을 위한 떠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식이 학업이든, 분가든 부모를 떠나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것과 같이 출가는 참된 삶을 살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출가가 전부라고는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출가를 위해 출가를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한국적 출가수도의 전통은,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고 듣고 있지만 과연 바람직한지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대 인도의 출가수행자들은 브라만의 4주기(청년 시절의 학습기, 가정을 꾸리는 가주기, 산림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임서기, 자신이 가진 물질은 모두 사회에 돌려주고 걸식을 하면서 오로지 자신이 닦은 수행력으로 세상에 감화를 주는 유행기)라는 인생의 방식을 따라 산림에 은거하면서 수행을 하였습니다. 불교가 나오면서 이것이 변하여 오로지 수행만 강조되면서 출가수행이 정착되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기원전후에 출가중심의 불교에서 세속에 머물면서 수행을 하는 대승불교가 등장하게 됩니다. 대중불교는 출가와 재가수행자를 구별하지 않고 가정이든 산이든 그것에 의해 수행의 높고 낮음이 구별될 수 없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하지 않고 집을 나와 산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현대에 오히려 적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진각종을 비롯한 많은 종단들은, 가족을 떠나 삭발 염의하는 출가중심의 불교보다 재가생활불교 수행을 종단의 수행방법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말씀에 좀 어긋났지만 출가만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불교는 대승불교권인 우리나라에 좀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출가수행을 절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출가로 인한 별리든 어떤 형태의 별리는 우리들의 가슴을 도려내듯 시리게 하는 것은 어떤 표현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매일 일어나는 일이지만 어린 아이가 손을 흔들고 학교로 떠나는 모습에서도 별리를 보고 학생시절 함께 공부하고 탁마했던 벗들을 생각만 해도, 흔한 유행가의 노랫가락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돌지요. 아만 이것은 인간의 본성일 것입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게 어쩌면 우리네 삶의 본질일 터인데. 생하고 멸하는 이치를 바로 알면 곧 니르바나라고 하였습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님의 침묵>에서 이별의 노래를 만남의 노래로 승화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만날 때는 헤어짐을 생각하고 헤어질 때는 만남을 알기에 아픈 마음을 달래며 그가 잘 자신의 뜻을 이루기를 기원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우리네 삶속에서 그것을 잘 보는 것은, 나고 죽는 이치를 관하는 수행으로 이어가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두서없는 글을 마칠까 합니다. 나날이 좋은 날 되시고 건강하시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불전에 기원합니다.
2007. 5. 12. 우천 이성운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