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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화현 손현희
딸 셋, 낳고 아들 둘 낳은 우리 어머니, 엄한 시어머니는 무당 이였고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할머니는 어머니 첫 딸을 낳고부터 구박을 받으셨는데, 두 번째 태어난 현희로 인해 더 늘어 난 것은 모진 시집살이였다.
아버지는 가끔 말씀 하신다. “할머니가 그래도 현희 너를 업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좋아 하셨다고 하신다.
손녀지만 할머니를 닮은 사람은 아버지, 아버지를 닮은 사람은 현희 그러니 할머니가 너를
딸이지만 귀여워했단다.
할머니는 40에 나를 낳았고, 어찌나 형님들만 좋아하시는지, 서운 할 때가 많았단다.
아버지는 내 나이 다섯 살에 오동 골짜기 못에 빠져 돌아 가셨고, 어린 탓에 기억을 많이
하지는 못했단다.
아버지는 장날이면 지게에 짐을 날라다 주고 돈을 벌기도 했고, 남의 집 일을 하며, 농사를
지었지! 부모님이 물러준 작은 논 하나 자갈밭 하나가 전부였는데 살기가 많이 힘들어져
집을 짓는 목수 일을 하기 시작 했단다.
한 번은 지붕에서 바지 끝에 못 하나가 걸려서 떨어졌는데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았지!
목수일이 없을 때는 쟁기와 지게 같은 농기구를 만들어 팔았다.
너희 언니는 부산에서 신발 공장에 다닐 때 부산에서 낳았고, 거기서 생활이 너무 어려워
다시 시골로 내려와 널 낳았다.
할머니는 딸 셋 낳고 손자 낳는 것은 못 보고 돌아 가셨지!
돌아가실 때가 되니 음식을 안 드시기에 “엄마! 뭐 드시고 싶은 것 없으세요? 물으니 홍합을 넣은 부침개가 드시고 싶다기에 장날에 나가서 일한 돈으로 사서 왔는데 아무리 드시라고 해도 못 드시고 결국 돌아 가셨다.
어머니가 나를 공부만 좀 더 시켜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6.25 사변 이후 학교를 다시 짓는다고 학생 한 명당 그 당시 돈으로 1000원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그 돈을 못 내어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만 다니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사는 동안에 할머니를 원망하게 되더라.
형들한테는 그렇게 잘 하시더니 유독 나를 어찌 그리 마음 아프게 키우셨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둘째 형이 부대에서 탈영을 하고 집에 숨어 있을 때 할머니가 나에게 너무 심하게 야단치고 때려서 아버지는 동네 사람 들으라고 “성조 여기 숨어 있다.
크게 고함 쳤더니 할머니는 부엌에서 칼을 가지고 나와서 나의 입을 찢었다.
현희는 늘 아버지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다
어머니는 딸 낳은 설움으로 언제나 나를 싫어 하셨다.
그럴 때면 든든한 아버지께서 바람막이가 되어 주셨고 현희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며 어디든 따라 다녔다.
아버지 경운기 몰고 논으로 가시면 따라가서 논두렁 베면 풀을 모아 경운기에 싣고, 밭으로 가시면 또 따라 다니며 일을 거들었다.
현희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하교 후 집에 도착 했을 때 아버지께서 마당에 들어서는 날 부르시며 오라고 하시어 아버지 앞으로 다가 섰는데 “현희야! 그동안 어른 지게 지고 다닌다고 고생했지!
오늘부터는 이건 너의 것이니 작은 지게를 쓰도록 해라. 하시며 지게를 안겨 주셨다.
또래 친구들은 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 머리에 이고 내려 왔지만 현희는 지게를 지고
내려왔다.
친구들은 리어카에 풀을 가득 담아 끌 때, 현희는 경운기를 몰았다.
또래 친구들보다 힘이 몇 배나 세다고 해야 할까?
동생을 괴롭히는 동네 아이들은 가서 다 패주고, 작은 어머니와 팔씨름도 이겼으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게와 경운기를 몰았고 나락 가마니도 덥석 들어 어깨에 멜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나 할까?
달리기를 잘해서 아버지 들일 가셨을 때 집에 가서 뭘 가지고 오라 하시면 금방 바람처럼
다녀오곤 했다.
그런 나를 참 많이도 칭찬 하셨는데, 칭찬 듣는 보람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는 압제에 있는 친구 집을 짓고 계셨는데 집 기둥이 될 원목을 구하기 위해 학교를 마친 나와 나란히 지게를 지고 겨울 산을 오른 적 있었다.
아버지는 산 중간 지점 내리막길 쪽에서 소나무 한 그루를 베어, 밑 둥 무거운 것은 아버지
큰 지게에 올리고 윗 둥은 작은 지게에 올려 주시고 산길까지 나를 데려다 놓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섰는데 갑자기 비명 소리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들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나무 벤 자리로 가니, 겨울이고 보니 얼었던 땅이 녹아 지게 지고 올라오시다가 미끄러져
소나무에 깔린 상태였다.
아버지! 하며 있는 힘을 다해 소나무를 들어 올려 내리니 아버지께서는 살며시 일어나시어
허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현희는 울면서 소나무 버리고 저거만 가지고 그냥 가자고 했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꼭
다시 지고 올라 오셨다.
그렇게 어렵게 베어 낸 소나무를 어찌 버리니? 가져가서 세워야 하는데 어찌 버리겠니?
라고 말씀 하셨다.
어둠 내린 마당을 들어서니 어머니는 “왜 이리 늦게 오노. 묻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께서는 오늘 일을 이야기 하시며, “현희 안 데리고 갔으면 난
아직도 산에서 못 내려왔다. 라고 말씀 하셨다.
어느 날 하루는 가마솥에 쇠죽을 끓이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께서 불러서 뛰어가니
아버지께서는 “제사 때 사용 하려고 놓아둔 문어 다리가 없어졌다. 누가 먹었니?
하시며 고함을 지르셨다.
현희는 너무나 놀라서 “금방 전에 개가 방에 들어가 물고 산으로 가는 것을 봤습니다. 라고 했더니 ”개가 방엘 어찌 들어가! 네가 그리 말 하니 네가 범인이네. 하시며 현희의 두 손을
꼭 잡으시고 빗자루로 엉덩이를 많이 때리셨다.
너무나 억울하여 현희는 새벽까지 울다가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두 남동생이 야단치면 경련을 잘 일으켜 벌을 주셨는데, 옷을 입히지 않은 상태로
만당까지 걸어서 갔다가 고속도로 차가 100대 지나 가거든 내려오라고 하신 적이 많다.
한 번은 저녁을 먹는데 아버지 국그릇에는 명태 살 토막이 들어 있었고, 유독 나의 그릇에는 명태 머리만 있으니, “네가 이걸 어찌 발라 먹겠니? 하시며 명태 살을 현희의 국그릇에
옮겨 놓고 명태 머리를 들어 가셨다.
이렇듯 아버지는 자식을 많이 챙겨 주셨던 인자한 분이셨다.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렸다.
현희 나이 43세 때 남동생 정제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께서 경운기 타이어 갈다가 갑자기 경운기가 넘어져 머리를 다치셨다고 했다.
다행히 언니가 가까이 살아서 병원에 모시고 가서 열 몇 바늘 꽤메었다고 한다.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전화를 하니, “괜찮다. 안와도 된다. 라고 하셨다.
2015년 6월 초
아버지께서 많이 아프다고 남동생이 일을 마친 나에게 전화를 주었다.
아침에 아버지께서 떡을 드셨는데 아파서 병원 다녀오셨는데 지금도 많이 편찮으시다고 했다. 사혈과 부항을 챙겨 정제 차를 타고 고향집에 도착하니 아버지께서는 누워서 앓고 계셨다. “아버지! 아파도 참으십시오. 라며 손가락 따고, 등에 혈 눌러 풀어주고 부항으로 굳은 피도 뽑아내고 전신을 안마 해 드리고 아버지 드신 것이 없어서 기운 없다며, 현희는 장에 좋은 요구르트를 2개 드시게 하고 다시 정제랑 마산으로 오는 길에 못 옆 길 앞에 불빛에 의해 안개 깔려 하늘거리는 것이 보이니 동생은 ”누나 꼭 귀신 나올 것 같다. 저 위에 공동묘지도 있으니 더 그렇다. 라고 했다.
“정제야! 누나가 이야기 하나 해줄까? ”뭔데? “그러니까 그때가 누나가 중학교 1학년 때 쯤
여름, 밤이 늦은 시간인데 아버지 방에서 앓는 소리가 들러 들어가니 아버지께서 고열이 나고 몸을 떨고 계셨다. 해서 약 살 돈을 받아서 병환이 자전거 타고 지수까지 약을 사러 가는 길에 누나가 이곳을 지나며 얼마나 많이 떨었는지 네가 모를 거야! 같이 갈 동생을 깨워 봤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아 결국 혼자 자전거를 몰고 가는데 못 위에 공동묘지 지날 때
구렁이 우는 소리와 개구리 우는 소리가 얼마나 소름 돋았는지 넌 모른다.
내리막길에서 속도가 높으면 자전거 불이 나가는 걸 모르고 달렸다가 불까지 꺼져 참 많이
떨며, 약국에 도착하니 불은 꺼져 있어 문을 막 두드리니 열어 주어 약을 사고 다시 집으로
오는데 공동묘지 있는 못 쪽으로 내려올 때 땀이 범벅 되더라.
이야기를 들은 정제는 “누나 그때 날 깨우지? 라며 손을 잡아 주었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나고 정제로부터 또 전화가 왔다
아버지 모 심다가 아파서 경상대학 병원에 중환자실에 계신다며, 심근경색이라고 했다.
그날 밤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언니야! 아버지 심장 멈추면 돌아가시는 건데 하면서 울며 이야기 하는데 난 괜찮을 것이다. 너무 염려마라. 아버지 강한 분이다. 안돌아 가시니 너무 걱정 말고 자라고 달래었다.
토요일에 여동생 차를 타고 진주로 가서 수술 동의서 작성하고, 위험 상황이나 합병증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면회 시간에 아버지를 보는 순간 눈물이 흘렸다. 그 전날도 울다가 잠이 들었었다.
“아버지! 오후 2시 이후에 차례대로 시술 한다고 하니 마음 강하게 하시고 떨지 마십시오.
중환자실이라 제가 옆에 있어 드릴 수 없어도 현희가 곁에 있다고 생각 하시고 힘내세요.
라고 말한 뒤 나와서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은 가고 혼자서 점심을 사 먹고 시술 대기석에서
아버지 차례가 되길 기다리며 걸었다. 앉았다. 반복 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언니가 와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언니는 식당을 운영하니 다시 진성으로 갔다.
아버지 시술 끝나갈 쯤 남동생 정제가 왔다.
“손 덕조님! 보호자 분! 들어오세요. 라고 해서 들어가서 시술 상향을 듣는데 아주 많이 힘들었다. 라며 의사는 십 년 넘도록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석회석이 막고 있어서 공기 풍선도 한두 개면 되는데 10개를 사용 했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어 철사 같은 걸로 위험을 감수하고 뚫었는데 혈관이 약간 꺾어져 있어
완전 끝까지 뚫지는 못 해서 재발 확률이 높습니다. 라고 했다
의사들이 진땀을 뺐다. 라며 모험을 한 것이라고 했다.
잠시 설명을 듣고 중환자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면회를 시켜 줘서 들어갔더니, 아버지
하시는 말씀은, “내가 팔을 계속 세 시간을 들고 있어도 의사들이 뭐가 잘 안된다며 자꾸
뭘 사용 하면서 힘들어 해서 내가 말했다. “그만 하라고 너무 아파서 못 견디겠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하니, 의사 말이 지금까지 잘 견디고 하셨는데 조금만 더 참으세요.
라며 그렇게 해 줘서 수고 했다고 고맙다고 하셨다면서 우시는 것 이었다.
현희는 아버지! 여기 있어도 아버지 곁에 있을 수 없으니 내일 오겠습니다. 라고 하고
한 숨 주무시라고 하고 나와서, 정제에게 말했다.
“정제야!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만 해라고 하셨을까? 하며 마음 아파했다.
시간이 밤 10시라 진성에 있는 언니 식당 (고부네 닭갈비)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지수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이불과 빨래를 헹구고 계셨다.
정제와 난 집안 청소를 하고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들어, 난 새벽 5시20분에 일어나 정제랑
버릴 것들을 포대에 담아 동네 밖에 버리고 정제도 계속 세탁기 돌리고, 이불과 빨래는
빨랫줄에 가득 늘어놓고, 진주로 다시 가서 아버지 뵙고, 병실로 옮긴다기에 기분이 좋았다.
중환자실에서 휠체어 타고 나오시는 아버지 모습에서 힘이 많이 없는 것을 보았다.
병실로 옮기고 (호흡기 장비가 있는 약간 중환자실 병실)아버지 손과 얼굴 닦아드리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후2시에 인사를 하고 그곳에서 나왔다.
메르스로 인해 병원도 난리였다.
월요일 출근하여 자재가 한 대 뿐인데 일찍 다 들어와서 어제부터 혼자 계셨을 아버지 생각에 조퇴를 오전11시에 하고 진주행 버스를 탔다.
진성쯤 갔을 때 정제한테 문자를 넣었더니 전화가 왔다.
누나! 잘 다녀와 안 그래도 아버지 혼자 계시니 마음 쓰였는데 고맙다. 라고 했다.
병원에 도착하여 병실로 들어서서 아버지! 하며 다리를 만지니 일은 안하고 어쩐 일이냐고
말씀 하셨다.
“아버지 혼자 계시니 마음이 안 편해서 뵈러 왔습니다. 식사는 하셨는지요?
물으니 드셨다고 하셨다.
아버지 드실 우유와 떠먹는 요구르트와 김밥을 사갔는데 좀 이따가 드실 거라고 하셨다.
오후2시 넘어서 아버지랑 김밥을 먹고 병실 사람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오후 4시 45분에 병실을 나서려고 하는데 아버지 화장실 가신다고 해서 같이 일어나 인사를 드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데 아버지께서 거기까지 걸어서 딸 가는 것 보신다고 바라보고 손 흔들어 주셨다.
마산 도착해서 잘 도착 했다고 전화 드렸더니 “그래 쉬어라. 하시며 종료 버튼으로 통화가 끝났다.
아버지는 작은 어머니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되었고, 친한 친구가 저 세상 간지 며칠이니 심신이 약해 계셨던 모양 이였다.
앞으로 관리를 잘 해야 하는데 퇴원 하시어 집에 오시면 덮으라고 이불과 베개커버를 택배로 보내 드렸어도 여전히 자꾸만 걱정이 된다.
혈관이 완전히 뚫어진 게 아니니 더 그렇다.
아버지 연세 칠십 하고도 넷, 좀 더 우리 오남매 곁에서 함께 오래도록 행복하고 건강 하시기를 빌어보며 이글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