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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사태
경찰서 대기실에서 밤을 새운 대원들은 아침을 먹자마자 진압 복장을 갖추고 2호 버스에 오른다. 1호차 앞에는 순찰차가 사이렌을 불며 에스코트한다. 다섯 대의 버스는 노량진을 지나 한강다리를 건너 시내 쪽으로 달린다. 비상계엄 선포를 예고하기나 한 듯 날씨가 음산하다. 하지만 나는 출동시간이 즐겁기만 하다. 이 시간만은 미나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어 좋다. 제발 만날 데모가 터져 진압 업무에만 매달리며 봉급을 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금년(1964년) 학생시위만 해도 3월 30일 11개 대학 학생대표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함으로써 일단 진정되었다가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4월 19일 경부터 시위가 재발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영등포서 출동부대의 대기 장소는 세종로 네거리다. 가랑비가 내리는 탓인지 거리는 조용한 편이다. 매일 격렬한 상황이 벌어지는 바람에 마치 잔치를 치르고 난 마당처럼 을씨년스럽기마저 하다.
어제 연세대학교 데모대에 시달린 탓인지 몸이 나른하다. 연세대 데모대는 고려대 못지않게 끈질긴 게 특징이다. 그들은 큰 덩어리가 깨지고 몇 사람만 남아도 협공으로 대든다. 신촌고개는 진압부대에 있어 사자굴이나 다름없다. 고개 언덕에서 돌을 던지면 속수무책이다. 어제도 그곳에서 온 종일 공격과 후퇴가 반복되었다. 어느 때는 경찰이 신촌 로터리까지 밀고 넘어가기도 하고 어느 때는 학생들의 치열한 공격에 아현동 고개까지 밀리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로 네거리 도로는 아침부터 차량이 통제된 상태다. 중앙청 정문(현재 광화문) 쪽 도로는 가시철망으로 된 바리케이드가 처져있고 그 안쪽으로는 군용 트럭으로 차량 바리케이드가 처져있다. 도로를 일렬로 막은 트럭 적재함 뒷면에는 두꺼운 판자로 벽을 만들었기 때문에 마치 판자울타리와 가시철망이 이중으로 쳐진 셈이다. 그리고 철망 바리케이드와 차량 울타리 사이에는 대형 풍차와 최루탄을 발사할 기동대 정례부대가 도열해 있는데 내가 소속된 영등포서를 비롯한 각서 혼합부대는 그 후방에 배치되어 있다. 잔뜩 찌푸린 하늘과 추적거리는 가랑비와 육중한 전투태세, 세종로 거리에는 폭풍전야와도 같은 긴장감이 감돈다.
잠잠하던 세종로 네거리가 갑자기 부산해지기 시작한다. 풍차가 작동한 것이다. 군용 트럭에 장치된 풍차는 대형 선풍기인 셈인데 풍차가 돌아가면 그 앞에 최루가스를 피워 데모대 앞으로 날려보낼 참이다. 누구의 머리인지 그럴싸한 묘안이다. 모기떼처럼 웽웽대는 데모대를 향해 북악산만한 선풍기에 모기향을 피워 싹 쓸어버린다? 혁명적인 발상이다. 모든 진압부대원들은 눈을 크게 뜨고 구세주 같은 그 괴물을 바라본다.
풍차에 대한 진압부대원들의 기대는 크다. 주먹만한 사과탄 두어 개씩을 방어무기로 꿰차고 다니던 대원들에게 그 풍차는 원자폭탄이나 진배없다. 지휘관들도 뒷짐을 진 채 국가사회의 안녕과 질서에 이바지할 괴물을 우러러본다. 시민들 역시 데모판에 처음 등장한 그 괴물을 보기 위해 세종로 네거리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드디어 풍차 앞에 최루탄을 터뜨려놓는다. 그런데 최루가스가 시청 방면이 아닌 중앙청 방향으로 거꾸로 날아든다. 데모대를 쫓아야 될 가스가 진압부대를 덮친 셈이다. 바람 탓이다. 바람이 역으로 분 것이다. 내가 속한 진압부대원들도 쿡쿡 재채기를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시민들이 웃는다. 이제 풍차는 방해물이 되고 있다.
어느새 학생들이 도로를 메워가고 있다. 남녀가 혼합된 서울대 음대생들이 제일 먼저 나타나고 흰 가운을 입은 수의대생들이 그 뒤를 잇는다. 하지만 그 정도야 신경 쓸 데모대가 아니다. 의대생, 약대생, 수의대생, 음대생, 미대생 같은 비전투요원은 한갓 구색에 불과하다. 숙성된 데모형태를 생일케이크에 비유한다면 그들은 작은 촛불에 불과하다. 촛불이 없다고 케이크의 맛이 감소되는 건 아니다.
그 비전투요원들은 싸울 마음조차 없다는 듯 바리케이드 앞에서 조용히 애국가를 부르고 관철사항만 낭독한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자기네들의 임무인 양 계속 합창으로 시간을 끈다. 진압부대원들 역시 한가롭게 담배를 피우며 그들의 노래부르는 모습을 구경만 하고 있다.
“위문단 같은데.”
어느 짓궂은 대원이 우스갯소리를 한다. 사실이다. 데모하러 온 학생들이 아니라 포탄이 퍼붓는 격전지에 아군을 위로해 주러 온 고마운 위문공연단 같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자 헛웃음이 나온다.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다. 적과 싸우는 당당한 전사의 모습이 아니라 위문해 주러 온 공연단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반역자의 모습이다. 우선 복장부터가 그러하다. 가스마스크를 쓰고 최루탄을 쥐고 방석모를 쓴 내 모습이 어설프다. 어째서 저들과 함께 있지 못하고 이쪽 편에 서 있는 걸까. 사과탄이 쥐어진 내 손이 가여워진다.
공공질서, 치안역군....
나는 그런 합리적인 생각으로 겨우 우울한 기분을 달래곤 한다. 사회질서와 안녕을 지킨다는 한 가닥 자부심이 몸을 겨우 지탱해준다. 나는 몸에 힘을 주어본다. 그때 시청 쪽에서 데모대가 밀려온다. 구름처럼 밀려오는 데모대들의 모습이 눈에 띄는 순간 내 몸은 긴장감으로 굳어버린다. 여기저기서 대일굴욕외교 반대 구호가 진동한다. 오후가 되면서부터는 데모대의 숫자가 늘어나 세종로에서 시청 앞까지 꽉 찬다.
데모대가 늘어감에 따라 분위기도 점점 거칠어진다. 사이드카 무전 연락으로 들려오는 정보에 의하면 고려대 앞은 이미 저지선이 뚫리고 신설동 로터리를 지나 종로통으로 밀려오는 중이라고 한다. 우리 부대에도 전투태세가 취해진다. 방석모 방석복 가스마스크에 사과탄과 경찰봉으로 무장한 대원들은 네거리 쪽을 향한 채 겹겹으로 방어벽을 친다. 드디어 페퍼포그에서 가스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쾅쾅쾅 여기저기서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하지만 역풍 때문에 가스는 효과를 내지 못한다. 한차례 밀려나던 데모대는 종로 쪽과 서대문 쪽에서 몰려온 큰 물결과 어울려 다시 소나기를 담은 먹장구름처럼 까맣게 밀려온다. 그들의 함성이 거세짐에 따라 방어선은 자꾸만 뒤로 밀린다. 학생만 해도 1만 명이 넘어 보이고 민간인도 파악하기 힘들 만큼 숫자가 많다. 역부족이다. 이미 폭도로 변한 일부 데모대들은 경찰차량을 빼앗아 불을 지르고 시가를 누빈다. 진압부대는 중앙청 담 안으로까지 밀려난다. 차량 바리케이드를 뜯어 판자에 불을 댕긴 데모대들은 중앙청 철대문 안으로 던지기 시작한다. 철문이 여닫히기가 반복되는 동안 사복부대는 몰래 데모대 속에 침투하여 주모자들을 점찍어둔다. 나중에 검거하기 위해서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승기를 잡은 데모대들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진압대원들은 교대로 방어에 나선다. 임무를 교대한 대원들은 중앙청 지하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지친 대원들은 벽에 몸을 기대앉아 졸기도 하고 뒤숭숭한 시국을 걱정하기도 한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헉헉대는 대원들이 늘어난다.
“
도대체 밥이 언제 배달되는 거야!”
소리를 지르는 대원도 있다. 별별 소문이 들리지만 졸개들은 당장 배고픈 게 문제다. 함성이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불안감에 몸이 옥죄인다. 데모대들이 지하실 입구에 불을 놓아 태워죽이면 어쩌지......
처음으로 공포감이 느껴진다. 미쳐 느껴보지 못한 공포다. 새삼 내 위치가 깨달아지는 순간이다. 데모를 막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늘 데모대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함성을 지르는 착각 속에 빠져왔는데, 이제는 그들이 무서워진다. 나는 데모대를 무서워할 만큼 변해버린 내 정서가 또한 두렵다.
파출소가 불에 타고 부상자가 속출한다는 소문도 들린다. 중앙청 지하실에 저녁밥이 배달된 것은 그 무렵이다. 상황이 위급하다.
드디어 밤 8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군대가 출동한다. 계엄사령관으로 민기식 육군대장이 임명되었다. 포고령이 선포되자 통금시간이 아홉 시로 단축되고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손목시계를 보니 6월 3일 21시 30분이다.
경찰과 진압업무를 교대한 군인들은 진압대형을 이루어 저벅저벅 행진해 나간다. 하지만 데모대들의 돌이 빗발치는 바람에 주춤거리다가 도로 중앙청 문 쪽으로 후퇴한다. 두어 번 진퇴를 거듭하던 군대가 무장을 갖추고 돌격자세로 나오자 그제야 데모대들이 흩어진다. 경찰진압대원들은 골목과 건물과 극장 등을 뒤져 불량배를 색출한다.
영등포부대는 자정을 넘어 두시 경에야 본서로 돌아왔다. 해산하고 집에 돌아오니 새벽 세 시다. 지친 몸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나는 술에 취해 잠들어 있고 젖먹이 성원은 깨어나 칭얼대고 있다. 건넌방에서는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나는 작업복도 벗지 않고 각반도 풀지 않은 채 그냥 방구석에 쓰러졌다.
“밥은 워쨌어?”
눈 어둔 어머니가 문턱을 더듬거리며 늦게 돌아온 아들의 끼니를 걱정해 준다.
“먹었어요.”
“지금이 몇 시랴? 날이 샌 것 아녀?”
“한밤중에요. 날 새려면 멀었으니 어서 주무세요.”
“시국이 시끄럽다는디 지발 몸조심혀.”
어머니는 주눅든 목소리로 아들의 신변을 걱정해 준다. 그때 미나의 신경질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짓누른다. 어느새 깨어났는지 미나는 눈을 뜬 채 누워 “시국이고 뭐고 잠이나 자요.”라고 시어머니에게 소리친다. 그녀는 이번에는 나를 닦아세운다.
“사흘 동안 어느 계집과 놀아났지?”
나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 동안 경찰서에서 직원들과 함께 먹고 자며 비상대기했지만 변명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오해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내게서 정이 멀어질 것 아닌가.
“왜 대답 않는 거지? 내 말이 말 같잖아서?”
“고생허구 온 사람 너무 달달 볶지 말어. 고단헐 틴디 얼른 자도록 혀줘.”
“입다물어요! 누가 노인네보고 참견하랬어요?”
미나의 고함소리에 어머니는 몸을 뭉그적거리며 문턱 너머로 숨는다. 나는 치미는 화를 눌러참으며 부드럽게 말을 돌린다.
“라디오 뉴스는 들었겠지. 사백삼십칠 명이 다쳤어 그중에는 중상자도 많고.”
“그래서 어쩌란 말야? 죽지 않고 돌아온 것만도 다행인데 웬 잔말이냐 그거야?”
“오늘 상황을 설명해 준 것뿐야. 이 집에 들어온 의무감 땜에.”
“그 의무감 참 고맙네.”
“또 보고할 게 있어. 그 동안 노름해서 이천오백 원 잃었어.”
“기특하군. 쉬는 시간에 책 안 보고 노름했다니. 이제 내 체질을 닮나보지? 암 그래야지. 어서 내 체질을 닮아야 쌈 않고 행복하게 살지.”
“요새 춤솜씨 좀 늘었나?”
나는 그런 말을 던짐으로써 잠잘 틈을 내고 싶었다. 미나는 지금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중 아닌가. 또 밤을 새워 악다구니를 퍼댈 판이니 어서 그녀의 입을 닫아주어야 한다.
“모두 내 춤솜씨를 칭찬하던데.”
“자랑스럽군.”
“차 부장은 내 춤에 반했대.”
“차 부장이라니?”
“오빠네 회사에서 일하는 분. 군대시절에는 오빠의 부하 장교였어. 홀아빈데 참 멋있게 생겼지. 그 동안 여러 번 함께 췄는데.”
“고마운 분이군.”
“질투하세요?”
“고마운 분을 왜 질투해.”
“암튼 당신도 춤을 배워봐요. 사는 맛이 달라지니까.”
“데모 막기 바쁜데 춤 배울 새가 어딨어.”
나는 얼른 부엌으로 나간다. 미나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몸을 피한 것이다. 부엌에서 담배 한 대 피우는 동안 연탄불에 올려놓은 물이 미지근해질 거고, 그 물로 대충 몸을 씻고 나면 한 시간쯤 시간이 흐를 테니 그때 방으로 들어가면 미나가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계엄이 선포되자 계속되던 시위가 진정되었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시위의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해오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金鍾泌)이 사임하였다. 시국은 여름 내내 잠잠했다. 6·3사태 주동학생 삼백오십여 명이 정학이나 퇴학처분을 받은 데다 인혁당사건으로 뒤숭숭해진 바람에 데모는 맥을 출 수가 없다. 가을로 접어들어서도 함석헌 씨 등이 주동이 되어 자유언론수호연맹을 발족시켰지만 외부로 투쟁을 전개하기가 불가능하다.
내가 기동대로 발령 난 것은 겨울이다. 박 대통령이 서독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다. 날씨가 풀리면 시국이 더욱 시끄러워질 기미가 보이는 터라 기동대의 역할은 크다. 내자동 기동대 운동장에서는 매일 진압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기동대는 경찰의 정례부대였다. 서울경찰청(서울경찰국) 관내 어느 곳이든 상황이 벌어지면 우선 출동하는 부대였다. 다중범죄진압이 주업무인 기동대야말로 젊고 튼튼한 직원으로 선발된 가장 믿음직스러운 조직체였다. 그런 정례부대도 상황이 없는 겨울철에는 우리에 갇힌 짐승 꼴이었다. 겨울철에는 정치적인 사건이 벌어져도 직접 가두에서 돌과 최루탄으로 맞서는 상황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집단행동이라야 무허가촌 철거반대투쟁이 고작이었다. 새로 건설 중인 장충동 영빈관 주위 산동네 철거가 그 예였다.
기동대원들의 겨울철 업무 중에는 밤에 일선 경찰서로 지원근무를 나가는 일도 있었다. 대원들은 내무반 단위로 각 경찰서에 나뉘어 배속되었다. 주로 폭력배나 도범 단속 같은 방범근무나 윤락해위 같은 풍기사범을 단속하는 게 그들의 업무였다.
나도 자주 창녀단속을 나가야 했다. 종로 3가나 청량리 영등포 역전 같은 공창지대는 윤락이 허용되어 있지만 손님을 유혹하거나 강제로 끌어들이는 유객행위는 단속 대상이었다. 단속된 아가씨들은 즉결 재판에 넘겨져 구류를 살거나 벌금을 물게 되고 보호소에 수용되기도했다. 그녀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부모에게 인계되는 일이었다.
인솔자는 지원근무를 떠나기에 앞서 대원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여러분은 놀러가는 게 아닙니다. 사회기강을 세우는 중차대한 업무를 수행하러 가는 길입니다. 단속을 소홀히할 경우 종로 일대가 썩고 서울이 썩고 나중에는 대한민국 전체가 썩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창녀단속을 해야 하는 당위성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종로 3가 같은 공창은 왜 만들었습니까?”
멍청한 대원 하나가 아는 척을 했다. 단속하려면 애초부터 왜 묵인했냐는 편리한 질문이었다. 인솔자는 입맛을 다셨다. 자기의 유식함을 펴보일 좋은 기회였다. 그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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