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노성-은진-여산 구간: 목숨 건 순례길

[금오랑]

11.0 프롤로그
  권 대사의 고향은 충무공의 본가가 있는 온양이다. 그는 충무공이 백의종군한 길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검암에게 듣고 꼭 참가하고 싶었다. 순례자들이 고향을 지나간다는데 그들을 환영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온양 구간은 이미 지나갔단다. 권 대사는 순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다른 구간이라도 참가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나는 2011년에 노성-은진-여산 구간을 걸었었다. 당시는 지리 공부가 부족해서 걷기 좋은 길을 찾지 못하고 그냥 큰 길을 따라 걸었다. 위험하고 시끄러운 차도였지만 혼자이므로 참고 걸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여러 사람을 안내해야 할 입장이므로 안전하고 아름다운 길을 찾아야 한다. 스카이뷰 지도를 보고 대체로를 찾아 인터넷(문리대64학번 카페, 백의종군로순례 카페, 제물포고교동창회)에 공지했다. 그 길을 처음으로 걸을 순례자들은 대체로를 찾는 선구자가 될 것이다:
  지난 6월24일, 순례자는 광정에서 출발해 공주까지, 다음날은 신명리, 복룡삼거리 지나 장선리까지 갔습니다. 이번에는 노성, 논산, 은진, 여산을 순례할 예정입니다.
1. 일시: 2013년8월4일(일)-5일(월)
2. 집합 일시와 장소: 8월4일 10시20분, 논산역 집합
3. 교통 수단: 무궁화호 1423열차 출발(용산 07:45, 영등포 07:52, 수원 08:13, 천안 08:48) ---- 도착(논산 10:17)
*하행선 편도 승차권 예매: 각자 예매해도 되고, 금오랑에게 의뢰해도 됨.
--예약 대행: 금오랑에게 문자로 승차역을 알려 주세요. 계좌이체로 접수하면 예약 대행함.
--운임: 일반 및 경로: 용산(13,500, 9,400), 영등포(13,200, 9,200), 수원(11,100, 7,800), 천안(7,500, 5,200)
*상행선은 여산에서 시외버스 이용 예정
4. 준비물: 식수, 중식, 행동 간식, 여벌 옷, 우산(양산 겸용), 구급약
5. 소요 경비 예상(각자 부담):
- 왕복교통비(20,000원 내외)  - 식비(30,000원 내외); 4일 석식, 5일 조식, 중식, 석식  - 숙박비(*****); 주최자가 일부 지원
6. 도보 일정: 34km, 11.5시간(4일: 18km, 6시간. 5일: 16km, 5.5시간)
-4일(일): 논산역(10:30) >(버스로 이동) >노성면소(0km, 10:40) 명재고택(10:50-11:30), 노성치안센터, 119, (논산평야로), 현대노성주유소, 두사리, 왕전리, 천동리 농협, 광석교차로 643, >전동리(6km, 13:00), 중식 및 휴식(13:00-14:50), >산동리 삼거리(8km, 15:30), 산동들, 논산교차로, 논산대교(10km, 16:10), 시외터미널, 북동방향(논산역방향) 643, 동성초교, >관촉사 은진미륵(15km, 17:30-18:30), 은진만남의 광장, 은진면소(18km, 19:30) > 논산 시내에서 석식(19:30-21:00) >소등(22:00)1박
-5일(월): 기상(06:00) >조식(07:00-07:30) >은진면소(0km, 07:30) >방축사거리, 1번국도, 논산딸기랜드, 태극주유소우측갈림길(안심로), 농공단지삼거리(2.5km, 08:10), 연무대 터미널(4.5km, 08:50), 연무읍소(5.5km, 09:10) >한방길, 왕릉로갈림길, 견훤왕릉(7km, 10:00-10:40) >마산천 다리건너(황화천 합류), 황화천변, 장항교 동쪽, 수철천 합류점 지나 다리건너, 수철천변(남쪽), 황화교 남단, 황화로, 민박촌, 야황교(천안논산고속 밑), 연무농협(12km, 12:00), 중식 및 휴식(12:00-13:50), 가람로, 여산고교, 여삼삼거리, 여산교회, 동헌, 여산면소(16km, 15:10) >뒤풀이(15:20-17:10) >시외버스 탑승(17:30) >인천(21:00), 서울(20:30), 양평 도착(22:00)
8. 기타: 참고자료 제공. 우천 예보 시 하루 전에 취소 공지

11.1 목숨 걸고 참가
  권 대사는 고혈압으로 약을 먹고 침을 맞는 중이다. 그런 사람이 8월 초 가장 뜨거운 대낮에 몇 시간씩을 걸어야하는 순례에 참가하겠다니 온 가족이 반대를 했다. 가족은 여름철 기온이 오르면 뇌졸중 발생 확률이 30%증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더욱 말렸다. 그러나 권 대사는 충무공이 온갖 문초를 받은 몸으로 갔던 고난의 길을 내 몸이 아프다고 아니 갈 수는 없었다. 그는 기능성 워킹 화를 구매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날을 기다렸다. 초등학생이 소풍가는 날 기다리듯이...
마로니에회의 정 회장은 권대사가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었다. 그는 금오랑에게 전화를 했다.
“권 대사가 고혈압 약을 먹고 있는 것 아는가?”
“그래요? 사실 땡볕이 제일 걱정이오. 현지 사정 봐가면서 대처하려고 해요. 알려주어 고맙소.”
용산역에 모인 순례자는 6명이었다. 그들은 7시45분발 무궁화호를 탔다. 금오랑이 사전에 일괄 예약해서 1호차에 함께 앉았다. 각자 예약한 두 순례자는 영등포에서 탔다. 금오랑은 A4용지 6쪽 분량의 참고자료와 김밥을 나누어 주었다. 참고자료에는 지도와 일정 그리고 현지의 주요 문화재 정보 등이 들어 있다.
“여기 대동여지도를 자세히 보셔요. 노성에서부터 노성천의 단포와 논산천의 사교를 건너 은진미륵의 동편으로 길이 나 있지 않습니까? 스카이뷰 지도에 그 길로 비정하는 길을 표시해 드렸습니다.”
금오랑은 순례에 처음 참가한 권 대사에게 ‘공통 참고자료’를 추가로 주면서 설명을 했다. 순례 참고자료에는 구간별 자료와 전 구간 공통자료가 있다.
“여기 순례자 건강수칙을 보셔요. 제1항에 보면 ‘자기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빠르기로 걷는다. 남이 한다고 따라하지 않는다.’로 되어 있지요. 10개 항목 중에서 이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금오랑은 내심 걱정이 되어 이점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순례 중에 몸에 이상이 오거나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면 스스로 알아서 대처하라는 수칙이다. 그런데 실제로 권 대사는 수칙대로 대처했다. 그는 처음 한 시간을 걸으니 벌써 땀이 무척 났다. 옷이 흠뻑 젖어 밖으로 땀이 줄줄 흘렀다. 그럴 때 권 대사는 알아서 적절히 쉬었다. 그는 보조를 맞추기 위해 필요시 버스나 택시를 타고 앞에 가서 기다려 주었다. 금오랑은 이렇게 대처하는 권 대사가 참으로 고마웠다. 그는 억지를 쓰지 않고 물 흐르듯 자기 몸에 맞추어 순례했다.

11.2 순례자 마음가짐
  백의종군로 순례를 100% 걷기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순례의 목적은 걷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공통참고자료에는 순례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1) 백의종군하는 장군의 신체적 고통을 체험한다.
2) 백성을 사랑하는 공의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
3) 국토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4) 지방의 독특한 문화를 즐긴다.
5) 생명의 자유로운 삶을 존중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참가하면 된다. 죽어도 끝까지 100% 걸어서만 간다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 사실 충무공은 대부분의 길을 말을 타고 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일기에 보면 말을 먹였다는 기사가 있고, 하루에 간 거리를 보면 도저히 걸어서는 갈 수 없는 먼 거리를 갔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순례자는 되도록 걷는 것이 좋다. 걷기는 상기 5개항 달성에 도움을 준다. 천천히 가면 시야가 넓어진다. 차를 타고 가면 앞만 보이고 도로만 보이지만 걸으면 360도 광활한 지역을 다 볼 수 있다. 차로 가면 자동차 길로만 가지만 걸으면 시골길, 농로, 둑방길, 산길, 논둑길, 밭둑길로 갈 수 있다. 장거리를 걸으면 자연히 신체적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 걷는 중에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 공의 정신적 고통을 느끼기도 좋다. 걸으면 국토의 아름다움, 지방의 문화를 접하기도 좋다. ‘생명체의 자유로운 삶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함’이 순례의 궁극적 목표라고 볼 수 있다. 길 가다 만나는 사람들과 동식물의 자유로운 삶을 존중하는 마음은 충무공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통한다. 백의종군로 순례는 자기의 육체적 건강 증진, 정신적 치유는 물론이요, 생명을 존중하자는 보편적 가치를 선양하는 운동이다.

11.3 쏟아지는 비

 논산역에 가까이 가면서 빗방울이 열차의 창가를 두드렸다. 10시반경에 역에 내리니 사람들이 비 때문에 역사를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였다. 순례자들이 비를 피하는 동안 권 대사는 휴대전화의 배터리를 충전한다고 우산을 받고 편의점에 갔다. 20분 정도 지나니 비가 좀 잦아졌다. 금오랑이 일행을 버스 정거장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시내버스로 20분쯤 달려서 노성면 사무소까지 갔다. 버스로 간 그 길을 다시 걸어서 와야 한다. 그들은 노성 향교와 명재고택에 도착했다. 순례자들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면서 명재 고택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검암이 전에 와 본 곳이다. 처마 밑에서 검암이 어느 문화해설사 못지않게 설명해 주었다.

“노성 상여꾼이라는 말이 있어. 옛날에 서울 사람이 지방에서 죽으면 서울까지 운구를 해야 하고, 서울에서 근무하던 시골 양반이 죽으면 고향까지 운구해야 하잖아. 노성 상여꾼이 가장 빠르게 상여를 메고 달렸다는 명성을 얻은 거야.”
  상여 이야기가 나오자 금오랑이 끼어들었다.
“충무공이 백의종군 중에 모친상을 당했잖아. 충무공의 노모가 순천에서 배를 타고 아산을 향했는데 도중에 돌아가셨던 거야. 공이 노모의 관을 상여에 올리고 통곡하며 따라갔던 길을 함께 걷는 행사를 하자고 아산시에 건의했어.”
금오랑이 최근의 건의내용을 설명했다.
“건의가 받아들여졌나?”
“담당자의 회신을 받았어. 좋은 제안이라면서 적극 검토하겠데. 상여 제작 예산을 반영해야 할 텐데...”
“얼마나 드는데?”
“수천만 원은 들 걸? 양주시가 공연용 상여를 제작했는데 그것은 엄청 큰 상여야. 아산시는 가볍고 견고한 상여를 만들어야 할 걸. 한번 제작하면 매년 행사에 사용해야 하니까. 가벼운 이유는 운구용 상여면 족하기 때문이야. 장례용 무겁고 화려한 상여가 아닐 거야.”
“노성 상여꾼이 메고 달렸던 그런 상여겠지?”
“확실한 모양을 알기 위해 고증이 필요해.”
“담당자 앞으로 쓴 건의문을 나도 보았는데 ‘시장님께 올립니다.’로 했다면 더 좋았을 걸...”
  백산(白山)이라는 호로 불리는 순례자가 거들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100대 명산을 다 오르겠다고 공언한 등산 베테랑이기에 검암이 이 호를 지어 주었다. 순례자들은 비가 그치자 명재 고택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출발 사진을 찍었다. 고택에는 고르바초프가 2008년에 방문해 식수했다는 표지석이 있었다.

11.4 논산평야로는 고행의 길
  12시가 지나서 본격적인 걷기가 시작되었다. 23번 국도의 서편에 옛 국도가 있다. 논산평야로란 이름의 길이다. 십리 쯤 걸으니 허기가 졌다. 순례자들은 마침 소나무 많은 공원을 만나 자리를 펴고 점심 식사를 했다. 풀숲이라 모기가 많았다. 각자 지참한 음식을 내 놓았다. 김밥, 빵, 양평의 옥수수, 연신내의 감자, 순례 도중에 슈퍼에서 구입한 막걸리 등이다.
  권 대사는 자기의 걸음이 느림을 알고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먼저 출발했다. 노성천 뚝은 높았다. 그 위는 23번 국도이고, 서편이 순례자가 걷는 논산평야로다.
  권 대사는 15시 경에 무궁화 피어 있는 노성천 뚝을 좌로 두고 계속 땀 흘리며 힘들게 걸었다. 점심 후 한 시간 이상을 걸었다. 쉴만한 그늘도 없는 너른 평야가  서쪽으로 펼쳐져 있는데 많은 비닐하우스가 그 평야를 덮고 있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어 땡볕이 아님이 천만 다행이었다.
  백의종군로 구간 중 이 구간은 가장 매력 없는 구간일지 모른다. 그냥 너른 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 대사는 한가롭게 경치 감상할 상태가 아니었다. 오른쪽 좌골이 아파오기 시작했고, 땀으로 풍하니 젖어 있는 옷이 귀찮고 거북했다. 순례자들은 광석교차로의 육교 밑에서 잠시 휴식을 했다. 다리 밑은 아침의 폭우로 물이 고여 있었으나 바람이 잘 통해 시원했다.
  금오랑이 위로 올라가 노성대교를 건너자고 제안을 했다. 4번 국도의 이 다리를 건너면 노성천을 건너서 논산천 북쪽지역으로 가게 될 것이다. 검암은 금오랑이 뭔가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논산 시내로 가는 방향을 잡아 주었다. 일행은 잠시 후 논산천 뚝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시야가 넓어지고 멀리 논산대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4시 5분 전에 마로니에 정 회장이 전화를 했다. 그는 아무래도 권대사의 건강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11.5 논산 시내에서 은진 가는 길
  논산대교를 지나 1km쯤 직진하면 기차 길 아래의 굴다리를 통과하여 논산오거리에 이른다. 거기에서 좌회전하여 10분쯤 가면 관촉사 가는 도로 표지판이 있는 관촉사거리다. 길을 건넌 순례자들은 편의점 옆 골목에 털썩 주저앉았다. 금오랑이 팥빙수, 캔 맥주, 생수를 공급했다.
  은진미륵을 보려면 아직도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관촉사 가는 643지방도는 직선으로 곧게 난 통학로로서 인도 구분하는 가드레일이 있다. 모처럼 너른 평야가 보기 좋고 풍광이 수려한 지역이다. 다음 모이는 목적지가 분명하므로 순례자들은 자기의 페이스대로 갔다. 빠른 사람은 저 멀리 앞장서 가고 힘든 사람은 택시를 타고 갔다. 장거리를 걷는 사람은 남은 한 시간이 가장 힘들게 느껴진다. 걷는 사람은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9할을 걸으면 이제 겨우 반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반야산 은진미륵은 조각의 상하 균형이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고려 광종 때 건립한 거대 석불로서 구름타고 내려온 미륵보살을 상징한다. 순례자들은 시원한 물로 몸의 열기를 식혔다. 검암은 이곳도 전에 와 본 곳이므로 오르지 않고 아래서 쉬고 있었다. 국내에 그가 안 가본 곳이 어디일지 궁금하다.
“여기서 건양대 캠퍼스로 곧장 가는 길이 있나요?”
금오랑이 지도에서 본 지름길을 종무소에 물었다.
“전에 있었는데 지금은 문을 닫아 폐쇄했습니다.”
담당자가 실망스런 답을 주었다.
  순례자들은 오른 길을 다시 내려가야 했다. 그들은 건양대 정문을 지나 은진면사무소를 향해 계속 걸었다. 19시가 지나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금오랑은 지친 순례자들이 묵을 곳을 정해야 한다. 이곳 교촌리에서 은진 면사무소는 2km 쯤 더 가야 한다. 권 대사가 차를 타고 먼저 가 있었기에 금오랑은 그에게 전화를 했다.
“권 대사, 그 곳에 묵을 만한 민박이나 모텔이 있는지 좀 알아 봤나요?”
“여기는 식당도 없고 모텔도 없어요. 완전 촌입니다.”
“그러면 거기 가만히 계십시오. 택시 잡아서 갈 테니...”
금오랑은 주유소에 문의했다.
“이 동네 식당 잘하는 집 없나요?”
“저기 추어탕 집, 하나 있는데요. 오늘 일요일이라 할지 안할지는 자신 없네요.”
“어디로 가면 모텔과 식당이 있을까요?”
“시내에 들어가세요. 알프스 모텔이 깨끗하다고 해요.”
“그러면 택시 두 대만 좀 불러 주실 수 없을까요?”
10분 쯤 지나서 택시가 도착했다. 한 대는 네 명이 타고 시내로 직행하고, 다른 한 대는 세 명이 타고 권 대사를 픽업하여 시내로 들어갔다.
  모텔은 더블베드 2인실이 4만원이다. 순례자들은 짐을 풀고 식사를 하기로 했다. 검암이 먼저 나와 식당을 찾았다. 휴가철이라 많은 식당이 문을 닫았기에 모처럼 영업을 하는 이 식당에는 손님이 많았다. 금오랑이 건배를 제의했다.
“순례자 여러분, 오늘 더운 날씨에 이렇게 무사히 잘 도착해 참으로 기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건강히 순례를 잘 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건배를 제의합니다. 이런 것을 위하여!”
“위하여!” “짝짝짝”
금오랑이 권 대사에게 건배 제의를 청하고 다른 순례자들에게도 인사와 순례소감을 청했다. 양평에서 참가한 나 여사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전주가 고향이다.
“저는 광고말씀 드리겠습니다. 다음번 순례 구간은 전주라고 알고 있는 데요, 전주 가면 막걸리 맛있는 집 있습니다.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충무공이 백의종군하던 때에 비록 죄인의 몸이지만 지나는 길마다 그 고을의 원이 찾아와 은근하게 대접을 했습니다. 나 여사가 이것을 본받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

11.6 견훤왕릉 가는 길
  충무공은 노성을 일찍 출발해 낮에 은진, 저녁에 여산에 도착했다. 충무공이 하루에 간 노성에서 여산까지의 거리는 대략 35킬로미터이다. 보통 사람이 걸어서 하루에 가기에는 힘든 거리이다. 충무공은 많은 거리를 말 타고 갔을 것이다. 현대의 말은 자동차다. 그렇다고 전 구간을 자동차 타고 간다면 이것을 순례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되도록 걸어서 간다. 충무공은 양반이지만 죄인이므로 좋은 방에서 잘 수 없었다. 천민의 집에서 자야했다. 반면에 현대의 순례자들은 노비의 집이 아닌 좋은 모텔에서 잔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는 알베르게라고 하는 저렴한 숙소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숙소가 있으면 좋겠다.
  5일 아침 6시에 기상한 순례자들은 모텔 옆의 식당에서 찌개백반을 시켰다.
“권 대사님, 오늘은 멋진 옷을 입으셨습니다.”
“어제 논산 시내에서 구입하신 거예요.”
나 여사가 권 대사 대신 대답했다. 어제 낮, 권 대사는 면으로 된 상의가 흠뻑 젖었기에 눈에 띄는 K2매장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상황을 판단하고 적절히 대처했다.
“그 옷 입으면 땀이 덜 찰 겁니다.”
“자꾸만 내 옷 가지고 이야기 하는데 그 의미를 잘 알겠소.”
“착복식 하라는 얘기 아닙니다. 하하하.”
권 대사는 순례자들에게 자기의 저서를 한권씩 보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금오랑은 점심을 위해 주인에게 김밥을 말아 달라고 했다. 시골에서는 식당을 만나기 어렵다. 그래서 점심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순례자들은 논산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출발점인 은진면 사무소까지 갔다. 그들은 현수막을 펼치고 출발을 기록했다.
  8시가 좀 지나서 연서리의 시골길을 걷기 시작했다. 곧게 뻗은 방축천 둑길을 1.5km쯤 걸으면 1번 국도와 만난다. 1시간 반쯤 지나서 주유소에 도착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여기서 견훤왕릉까지 걸어서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십리가 안 되니 한 시간 안 걸립니다.”
“저희는 여산 가는 순례자인데 그 방향으로 농협 있지요?”
“연무농협 황화지점 있습니다.”
“여기 환자가 한분 있어서 농협까지 곧장 가게 택시 좀 불러 주세요.”
금오랑은 권 대사가 어지러움을 느끼므로 견훤왕릉 가는 것을 말렸다. 견훤왕릉 가는 도중에 서재필 박사 본가터가 있다. 그리고 500미터 쯤 가면에 기차 길을 건넌다.
“이 기차 길이 연무대역에서 훈련소로 통하는 길이야. 보급물자를 영내까지 운반하기 위한 지선이지.”
검암은 무심히 지나칠 기차 길도 해설해 주었다.
“그래, 저기로 가면 추억의 논산훈련소로구나!”
  더위가 한창이나 가끔 비를 뿌려주어 땡볕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다. 견훤왕릉은 낮은 산 위에 있다.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오르니 목백일홍(배롱나무)이 붉게 피어 있는 사이로 왕릉이 보였다. 먼저 온 관람객이 몇 명 있었다. 순례자들은 수도 가에서 몸을 식히면서 충분히 쉬었다.

11.7 벌판에서 만난 소나기 
“저 벌판에 마산천이 흐릅니다. 저기 보이는 길로 가면 다리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 황화천변을 걸을 겁니다.”
금오랑이 왕릉에서 내려다보면서 벌판을 가리켰다.
“구름이 있어 뜨겁지 않아 다행이야.”
마산천변을 걸으며 이런 이야기를 한지 1분도 안되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례자들은 뛰어서 비 피할 곳을 찾았다. 앞선 순례자들은 농공단지의 창고 건물로 들어갔고 뒤처진 순례자들은 벌판의 물건 쌓아 놓은 곳으로 갔다. 옆에서 들이치는 비라도 피하기 위함이다. 황순원의 소나기 이야기가 생각났다.
“물레방아 간에서의 사랑은 그래도 있는 사람들 이야기야. 없는 놈들은 상여 집에서 사랑을 나눴데.”
옛날에는 마을이 사용하는 상여를 묘지 근처에 조그만 집을 지어 보관했는데 이를 상여집이라 했다. 비는 10분 만에 그쳤다. 그야말로 소나기다.
  농공단지 창고건물은 지붕이 높고 넓었다. 한 남자와 세 여자가 배추 씨를 묘판에 넣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방 20센티미터 쯤 되는 묘판에 한 변이 2센티미터쯤 되는 정방형 플라스틱용기가 100개쯤 들어 있는데 한 구멍에 씨 한 개씩만 넣어 김장 배추 묘판을 만드는 것이다.
“저 사람들은 4인 1조가 되어 농사일을 돕는 거야. 밭 가지고 있는 농부는 저런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것이지.”
검암은 별 것을 다 해설한다.
  잦아진 비를 맞으며 황화천 둑방의 굽은 길을 걷는데 오토바이를 탄 할아버지가 순례자들을 빗겨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바퀴가 갓길 풀숲에 빠졌다. 할아버지가 손잡이 엑셀을 돌려 엔진 소리를 높이면서 나오려고 했으나 헛바퀴만 돌았다. 할아버지는 왼발을 땅에 딛고 오토바이를 밀어내려하다가 중심을 잃고 그만 넘어졌다. 할아버지는 풀이 우거진 뚝방의 비탈에서 한 바퀴 돌고 멈췄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순례자들이 다가오면서 할아버지를 일으키려 했다. 할아버지가 스스로 일어나 둑 위로 올라왔다. 더 이상 미끌어져 내려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할아버지 정말 괜찮으세요?”
“내 신발.”
금오랑이 할아버지 신발을 찾으려고 풀숲을 뒤졌다. 풀의 키가 50센티미터나 되고 비탈진 곳이라 찾기가 어려웠다. 그동안에 나 여사가 반창고를 할아버지 무릎에 붙여 주었다. 찰과상을 입어 피가 흐르고 있었다. 머리를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금오랑이 슬리퍼를 찾았다. 할아버지는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
“약주 드신 것 같아.”
“경적을 울려 피하라 하지 않고, 옆으로 가다가 그만 그렇게 되었어.”

11.8 신사도가 필요해
“임 박사, 언제 쯤 오나?”
11시 15분경에 황화농협에서 권 대사가 순례자의 위치를 물었다.
“오다가 소나기를 만나고 오토바이 탄 할아버지를 구출하느라 지연되었어요. 한 시간 쯤 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어디 좋은 곳이 있는지 알아봐 주셔요.”
  황화천을 건너야 하는데 첫 번째 다리는 폭우로 물이 고여 있었다. 검암은 멀리 보이는 다른 다리의 상태를 알아보려고 앞장을 섰다. 백산은 등산화를 벗어들고 맨발로 다리 위의 웅덩이를 지나갔다. 그는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건네 주었다. 순례자가 그의 손을 잡고 다리의 좁은 난간을 디디면 그는 물웅덩이를 가는 방법이다. 백산은 신사도를 발휘해 두 여인을 건네주었다.
 
  권 대사는 황화농협에 미리 도착했는데 할 일이 없어 지루했다. 좋은 곳을 물색하라는 금오랑의 지시(?)를 받고 슈퍼의 주인에게 잘하는 식당을 물었다.
“요 앞의 식당이 잘 혀유.”
  순례자들은 봉곡서원을 지나 12시 넘어서 도착했다. 금오랑이 농협 건너편 초등학교 폐교에서 점심을 할 것인지 둘러보았으나 마땅치 않았다.
“저기 우체국 근처 노인정에 가셔유. 할아버지 한분 계실 거니께, 그 분께 말하면 될 거유.”
 한옥으로 크게 지은 황화노인회관에 아무도 없어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마침 옆집에 들어가 사정을 말하니 그냥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여기서 두 시간 가까이 충분히 쉬겠습니다.”
  금오랑이 안내를 하자 순례자들은 마루와 소파에 멋대로 앉아 아침에 싼 김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노 작가는 김밥 대신에 맨밥과 반찬을 내 놓았다. 그녀는 아침에 식당에서 김밥대신 맨밥을 시켰던 것이다.
“여름철에 김밥은 상하기 쉬워요. 그래서...”
30분 쯤 지나니 노인 한 분이 들어왔다.
“어르신, 인사드립니다. 저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했던 길을 따라 걷는 순례자입니다. 오늘 아침에 은진을 출발해 여산으로 가는 중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분들이군요. 잘 오셨습니다. 편히 쉬다 가셔유.”
노인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이제 오전 근무를 끝내려는 참이다.
“한 시부터는 여자들이 옵니다.”
노인은 이 말을 하고 나가버렸다.
  잠시 후 할머니 한 분이 왔다. 노인회관은 남녀 이용시간이 오전 오후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할머니 이것 드셔요.”
백산이 삶은 계란을 드렸다. 1시가 지나자 순례자들은 충분히 쉬었기에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마지막 한 시간을 남겨둔 것이다. 여산고등학교를 지나니 여산동헌과 숲정이 성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1번 국도의 육교에 이르자 또 소나기가 내렸다. 다리 아래 그늘에서 비를 피하고 여산면사무소에 도착하니 날씨가 너무 더워 버스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논산이나 연무대로 가는 시내버스가 있네.”
“그러네. 여기는 전라북도인데 충청남도 논산의 시내버스가 도경계를 넘어 오네.”
검암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산에는 논산 가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의 민원을 논산시가 해결했을 것이다.
  순례자들은 학교 앞 그늘로 갔다. 근처에는 여산 동헌이 있는데 문을 걸어 잠가 들어가지 못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여산 동헌은 전화로 담당자에게 연락하면 문을 열어 준다고 했다.
  여산은 현감보다 한 계급 위의 부사가 관할했던 큰 고을이다. 동헌 옆에 백지사(白紙死)터가 있다. 박해당시에 천주학쟁이의 얼굴에 백지를 대고 물을 뿜어 착 달라붙게 한다. 잠시 후면 죄인은 숨이 막혀 질식사하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여산에서 연무대를 거쳐 논산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들은 연무대에서 시외버스를 탈 것인지, 논산에서 기차를 탈 것인지 망설였다. 금오랑이 연무대에서 시외버스를 타자고 제안했다. 그는 모처럼 힘들게 멀리 왔는데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뒤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연무대 터미널에 도착해 버스출발 시간을 알아보았다. 15분 후, 30분 후, 한 시간 30분 후 등, 여러 편이 있었다. 순례자는 터미널 매점에서 즉석 생맥주를 마시고 빨리 상경하는 팀과 좀 더 오래 앉아서 즐기는 팀으로 나뉘었다. 금오랑은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남기를 원했으나 남은 사람은 노작가와 백산이다. 셋은 치킨 체인점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한가했으나 매우 시원했다. 생맥주는 순례의 피로를 푸는 특효약이다.

11.9 에필로그
  나는 이 순례기를 마로니에회 카페에 올렸다. 정 회장이 아래와 같은 댓글을 달았다.
“순례자들의 순수성과 애국심 그리고 같은 순례자로서의 우정은 정말 감동적이다. 어쩌면 요즘 같은 물질세계, 자아의 세계에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역사 속의 위인을 추모하는 행사를 할 수가 있을까.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이번 순례 참가자 7명 가운데  임 박사, 권 대사, 검암은 우리 마로니에 회원이다. 이제 나이가 들만큼 들어서 몸과 마음이 식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 세분을 보니 몸과 마음이 스무 살 청년보다 더 뜨거운 것 같다. 이 무더위에 끝없이 노상 행군을 하다니. 정말 무모할 정도다. 감격할 뿐이다. 순례에 참가할 뜻을 밝힌 바 있었으나,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맨 적이 있어서 불참했다
  뇌경색의 1년 이내 재발율이 18%이고, 5년 이내 재발율이 25%라고 의서에 적혀 있다. 더 무서운 것은 재발되었을 때가 훨씬 더 강력하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사망에 이른다. 김정일이 한방에 간 것이 바로 이 재발이었다. 나는 고혈압으로 알려진 권 대사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뜻이 워낙 강하니 본인에게 말할 수는 없었고, 임 박사에게 특별 관리를 전화로 부탁하였다. 세 분 동기생님들에게 여기 순례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그분들을 향하는 우리들의 열렬한 성원과 존경을 전한다. 장하다, 위대하다, 세분 동기분들이여! 
  순례가 끝나면 우리 동기생들이 조금씩 갹출하여, 이 위대한 순례의 성공을 축하하는 모임을 가지겠다. 신 동문이 막걸리 사시겠다는 것을 날씨가 더워서 조금 더 기다리자고 달래고 있다. 신 차관에게 이야기하여 시간 조정을 하겠다. 우리 다 참여는 못하지만, 당신들은 외롭지 않다. 그 뜻은 참석하지 못하는 우리도 똑 같다! 믿어다오, 우리의 문리대 우정을! 우리는 돈벌이 수단으로, 출세의 수단으로 공부하지 않았다. 우리는 진리를 위해, 그것에의 갈증 탓으로 입학했고 공부했다! 이런 일, 우리 나이에 뗑 볕에 죽어라 걷는 일, 우리가 아니면 누구도 못한다!
  나는 이러한 격려를 받고 아래와 같이 답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아름답고 즐거운 여정이오.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사실이나 기꺼이 참을 만하오. 온 국민이 걷고 싶은 길, 세계인이 찾아오는 길이 될 때까지 순례는 계속될 것입니다. 권 대사는 순례에 참가한 것으로 충분히 일조를 하였고 그 보다 더 큰 후원은 없습니다. 다른 순례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