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평초등학교
대전 둔산동을 향해 달리던 천마가 오는 도중 풍수학상 아주 뛰어난 명당 몇 군데를 만들고 오는데요. 그중 하나가 월평동입니다.
월평동은 풍수학상 월굴형 명당자리(뭔 뜻인지 정확히는 몰라요.^^)를 품고 있어서 월평이라고 했다는 말이 있고요. 또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보면 갑천을 끼고 꽤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데 모양이 반달 형태예요. 그래서 달(月) 모양의 들(平)이다 해서 월평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어요.
그리고 이 월평동에는 월평 산성이 있어요. 당연히 여기는 삼국시대 백제의 영토였으니 백제의 성이고 따라서 백제의 유적과 유물이 나와야 되겠죠? 1990년과 95년에 충남대학교와 공주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했는데 백제식 토기와 기와 말안장 등이 다수 발굴되었대요. 지금은 여기를 개발 하는냐 마느냐로 많이 시끄럽죠? 선생님들 생각은 어떠세요?
그런데 이 월평산성은 고대사뿐만 아니라 현대사에서도 중요한 격전지가 되었어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당시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내준 유엔군은 7월 12일 대전방어선(금강라인)을 구축하고 도로 및 다리를 폭파하는 등 탱크 장애물을 설치하고 유엔군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방어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만 7월 18일 금강 방어선이 뚫리고, 7월 19일 갑천에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이때 미군 24연대 지휘소가 설치된 바로 이곳 월평산성 아래 예요. 갈마동에서 유성 만년교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하늘문교회가 보이지요. 바로 그 앞에 유성선화교회가 있어요. 바로 그 자리예요. 이때 지휘관이 월리엄 F 딘 소장이었어요.
그러나 이들은 북한군의 공세에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7월 20일 갑천 방어선을 내주고 옥천으로 후퇴를 하지요. 그런데 그만 길을 잃고 헤매다 산내에서 포로로 잡혔어요. 아시는 바와 같이 대전역에서 옥천을 가려면 인동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운전병이 길을 몰라 그냥 산내 쪽으로 쭉~ 직진, 부관 클라크 중위와 함께 1953년 9월까지 포로로 잡혀 있다가 풀려났어요.
이때 미군은 포로로 잡힌 딘소장을 구출하고자 미군 33명과 한국기관사 3명이 기관차를 타고 대전으로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들 36명중 기관사조수 한명을 제외하고 35명 모두 전사하고 말았어요. 이 전투의 트라우마로 미군은 7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경부선 철길을 따라 피난 중이던 우리 민간인을 향해 전투기 2대를 동원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합니다. 이때 약 50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해요. 이유는 산내에서 딘소장이 북한 정규군이 아니라 피난민으로 가장한 북한군 선발대한테 붙잡혔어요. 그래서 의심나는 피난민을 사살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특히, 7월 79일 자행된 노근리 학살 사건은 철로 아래 굴다리에 숨어있다 빠져 나오는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 적으로 자행된 학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도 철길 아래 굴다리에 가면 수많은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힘없는 나라 국민이 겪은 또 다른 아픔의 비극이지요. 우리 역사에 더 이상 이 같은 아픔은 없어야 겠습니다. 그래서 전 매일 이곳 앞을 지나면서 가끔은 노근리를 생각한답니다.
만년초등학교
만년초등학교는 만년동에 있어요. 만년 뭔가 있을 거 같죠? 천년 백년도 아닌 만년, 그래요 월평동에 이어 만년동까지 갑천을 끼고 넓게 들이 펼쳐져있어요.
지금이야 빼곡히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그 예전엔 여긴 드넓은 벌판이었어요. 제가 80년대까지만 해도 논길로 갈대숲을 헤치고 갑천으로 고기 잡으러 다녔었거든요. 그때는 주변이 다 논이었어요. 그러니 여기서 나오는 곡식으로 만년동안 편안히 먹고 살 수 있지 않겠어요. 등 따시고 배부르고 먹을 양식이 풍부한데 뭔 걱정이 있겠어요. 백년, 천년이 아니라 만년동안 편안하겠죠? 그래서 지어진 이름 만년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