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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웅부 蘭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청계(淸溪)
가일수곡고택[佳日 樹谷古宅]
1792년(정조 16년) 권조(權眺)가 할아버지인 수곡(樹谷) 권보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종가로서, 50여호 되는 마을의 북쪽에 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가이며 부속 문화재로 안채, 사랑채, 별당, 대문채, 사당, 화장실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튼 ‘口’ 자형을 이루며 남서향으로 배치되었고, 앞마당 왼쪽에 별당채인 일지재(一枝齋)가 남향으로 있다. 안채의 왼쪽 뒤쪽으로 약간 높은 터에 사당이 있으며 그 뒤로 야산이 있다. 안채는 ‘ㄷ’ 자형으로 안마당 쪽 정면 4칸 가운데 2칸은 전면이 개방된 대청이며, 왼쪽 2칸은 안방이다. 대청 전면에만 원주를 사용하였고 지붕은 5량가(五樑架)로 제형판대공을 높게 세워 종도리를 얹었다. 전면부 상부에는 널문 2개를 설치하여 환기와 채광이 잘 되도록 하였다. 안채 좌측면에는 2.5칸의 부엌과 1칸의 고방(庫房)을 마당 쪽으로 배치하였으며, 대청의 우측면에도 고방ㆍ윗방(새댁방)ㆍ부엌방을 두었다. 사랑채는 ‘一’자형으로 정면 8칸 가운데 오른쪽 4칸은 큰사랑채이며, 전면 우측 2칸은 앞과 우측이 개방된 마루로서 헌함(軒檻: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깐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을 두었다. 왼쪽의 온돌방 1칸은 마루 사이의 벽을 외여닫이 달린 온통 넓이의 들문으로 처리하여 개방되도록 하였다. 일지재는 ‘一’자형으로 자손들의 학문과 교육을 위해 만들었으며, 대문채는 ‘一’자형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자연석 덤벙주초석 위에 각기둥을 세웠고 가구는 3가량이다. 권보는 연산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를 당한 권주(權柱)의 8대손이자 권구(權九)의 셋째 아들로 평생 도학(道學)에 전념하였다. 일생 동안 검소하였으며, 사랑채 지붕을 맞배지붕으로 소박하게 처리한 것도 이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수곡고택이 위치하고 있는 가일마을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권행의 후예 15개파 가운데 한 갈래인 안동권씨 복야공파가 5백년동안 세거해온 동성마을이다. 우선 마을의 생김새를 보면 안동의 진산(鎭山)인 학가산의 줄기가 서남으로 뻗다가 풍산 평야의 모서리에서 우뚝하니 정산(井山)을 일으켜 두 봉우리가 나란히 맞섰으니 곧 동은 좌청룡 서는 우백호다. 뒤에는 정산의 암벽이 병풍처럼 둘렀고 앞에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동서로 누벼 흘러 웅혼가려(雄渾佳麗)한 풍광과 아울러 산수(山水)의 이(利)를 골고루 갖춘 천혜(天惠)의 마을이다. 고려 때 왕씨에 이어 류씨가 살아 왔다는 이 마을에 권씨가 깃들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였다. 그 터전을 열기는 세종 때 정랑(正郞)을 지낸 권항(權恒)이다. 그는 이 마을 호부(豪富)였던 장인 류서(柳壻)로부터 부근의 임야와 많은 전답을 물려받음으로써 이곳에 전거(奠居)하게 되었다. 인하여 그 후손들이 여기에 500년을 세거하면서 문한(文翰)이 연면(連綿)했으나 영달을 탐하지 않고 맑은 기풍을 이어 내려온 주로 실천 도덕의 선비들이었다. 구한말 구국운동에 이바지한 지사들이 여러분 있고 그중 이역에서 광복대업에 생애를 바치면서 어쩌다 좌익에 가까이 했던 까닭으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아까운 분들도 있었다. 자연 환경이 이토록 아름다워 풍요로움 위에 풍속이며 인정은 더욱 순후하고 두터운 가일의 지주집들은 추수 때 곡수를 아무리 박하게 가져오거나 혹 사정에 의하여 전혀 못내는 소작인이 있어도 따지거나 독촉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몇몇 큰집들은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오가는 과객들을 맞이하여 며칠씩 묶어가도록 하였으며 떠날 때는 반드시 노자까지를 주면서 적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항상 느긋하고 훈훈한 인정으로 온 이웃이 함께 화기(和氣)가 넘쳤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을 태양처럼 아름답다고 가일(佳日)이라 하였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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