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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력 | 金沢藩 (加賀国) | 仙台藩 (陸奥国) | 鹿児島藩 (薩摩大隅) | 岡山藩 (備前国) | 津藩 (伊勢国) | 德島藩 (阿波国) | 庄內藩 (出羽国) | 二本松藩 (陸奥国) | 盛岡藩 (陸奥国) |
16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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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061) | 308,8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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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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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5,635 |
168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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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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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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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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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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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년 |
| 599,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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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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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4,126) |
| 126,3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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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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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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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년 |
| 617,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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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3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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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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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6,412 |
17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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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7,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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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년 | 551,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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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2년 | 576,734 | 647,427 | 339,955 | 396,469 | 287,242 | 470,512 | 131,164 | 75,747 | 322,109 |
조사대상 | 15세~ | 0~ | 0~ | 2세~ | 0~ | 2세~ | 0~ | 0~ | 0~ |
領地石高 | 1,025,000 | 630,056 | 605,000 | 340,200 | 333,950 | 257,000 | 140,077 | 100,700 | 100,000 |
단, 통계에는 한계가 있다. |
9군데의 번 중에 8군데의 번에서 인구증가가 보이면서 전국인구 조사 실시된 에도중기 이후에 비해 에도시대 전기는 상당한 인구증가가 있었다.
요시다 토오고(吉田東伍, 1910년)은 11석이라는 가정 하에 1598년의 게이쵸 이시다카(石高)에서 1600년 추정 인구를 1850만 명으로 어림잡았다.
② 하야미 아키라(速水融, 1966년)은 겡나 2년(元和, 1622년)의 고쿠라 한(小倉藩)의 人畜改帳(인구와 가축조사)를 바탕으로 1600년 추정인구를 622만 980만 명으로 추정했다. 이후에 150년에 인구가 3배가 되는 성장 패턴으로 1600년 추정인구를 1230만 명으로 개정한다.
③ 키토오 히로시(鬼頭宏, 사회 공학 연구소 편 1974년)의 1600년부터 1750년까지 추정인구는 에도시대 전반의 인구성장 패턴이 150년간 3배가 된 논리 함수에 의하여 가정하여(50년 후에 1.41배, 100년 후에 2.67배, 150년 후에 3배) 17세기의 인구 증가율을 0.58~0.65%/년으로 1600년 추정 인구를 1432만~1547만 명으로 조정했다
④ 사이토 우오사무(斎藤修, 2000년)은 1600~1721년 인구 증가율을 겨우 0.51%로 가정해 1600년 추정인구를 1700만명으로 산출하고 있다.
⑤ 후지노 쇼자브로(藤野正三郎, 2008년)은 17세기 전반의 영지가 큰 번의 인구 증가율(0.4%)로 1600년 추정인구를 1940만 명, 1650년의 인구를 2365만 명, 1700년의 인구를 2888만 명으로 추산했다.
교호(1730년대), 덴메이(1780년대), 덴표(1830년대)의 3대 기근과의 관계
에도시대의 인구는 교호(1730년대), 덴메이(1780년대), 덴표(1830년대)의 3대 기근시기 인구감소와 연결지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 있다.
① 마비키 역할
에도시대 중기 이후 영주의 금령이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기근 때에 농촌 등에서 압살·교살, 생매장 등의 방법으로 영유아의 살생이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당시 7세 이하 어린이는 신의 자식으로 알려져 언제든지 신에게 답례한다(즉 죽인다) 수 있는 것으로 돼 있었다.
② 장남만 필요한 사회
에도 막부는 농지의 세분화, 농민의 영세화를 막기 위해 1673년에 분지제한령(分地制限令)을 내고 이에 따라 농민 사이에서도 적자 단독상속이 정착했다.
③ 잉여 인구의 쓰레기통으로서의 도시
농촌에서 끊임없이 창출된 잉여 인력은 도시로 흘러들어온다. 도시에서 고용살이하는 곳의 대부분은 에도와 오사카를 비롯한 도시임을 알게 된다.
에도시대의 도시에서는 사망률이 출생률보다 높고 반대로 농촌에서는 출생률이 사망률보다 높았다. 이것은 농촌에서 태어난 잉여 아이가 도시에 와서 목숨을 잃는 것으로 전체 인구가 일정하게 유지된 것을 의미한다.
각종 도시의 기반이 되는 시설(施設). 공중위생, 의학병원 등에 근대과학기술이 적용돼 사망률이 낮아지기 이전에는 도시가 농촌보다 사망률이 높았으며 출생률은 낮아 도시 이외에서 인구를 빨아들이는 필요가 있었다. 인구 밀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돌림병이 전염하기 쉽다는 것이다. 인구밀도가 높으면 페스트의 유행에 따라 자동적으로 재고 정리 처분인 셈이다.
여자의 경우 도시에서 고용살이를 하면 마을에 가서 결혼하는 시기가 늦어져 많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 현대와 마찬가지로, 에도 시대의 후기에도 여성의 만혼화와 저출산 화가 진행되었던 것이 여러 조사부터 알 수 있다.
④ 에도중기의 감소는 벼 농사의 한계 - 전란도 없고 안정되고 있었던 에도시대 중기에 인구가 줄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하여 교호에서 카세이키에 이르는 에도 중기의 인구는 1732년 3230만명을 정점으로 1790년경까지 60년에 걸쳐 줄어들고 있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짐에 따라 호레키(宝暦), 안에이(安永), 덴메이(天明)기에 대기근이 발생한다. 문제의 본질은 이 시대를 지탱하던 집약농업 문명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실 쌀을 중심으로 한 경제에 따라 추위에 약한 벼농사를 아오모리의 끝까지 벌린 것이 큰 문제였다. 에도 막부말기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1730년경에도 중기까지 경지면적에서 92%, 쌀 생산량에서 70% 이었다. 이 무리한 미작확대가 기후변화의 영향을 극대화한 것이다.
덴메이 대기근에 따라 동북의 인구는 절반가량 줄어든다, 농민들은 자신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낙태나 마비키에 따른 출산억제를 했다. 고령의 부보를 산에 버리는(姥捨て山) 등도 이때 시작된다. 에도나 오사카 등의 도시에서는 문화의 성숙화에 따라 만혼화나 독신 화가 확대해 출산율이 감소했다. 인구밀도가 높아 위생 상태도 나쁘기 때문에 자연 재해나 유행병 사망률도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