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중해의 진주 몰타
푸른 지중해에 밖혀있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섬,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지중해의 중심 요지등의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몰타는 작은 면적을 가진 외딴 섬임에도 불과하고 그 전략적인 위치로 인해서 과거부터 수세기에 걸쳐서 강대국간에 지중해의 제해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수많은 격전의 중심에 있었으며, 몰타를 거쳐간 여러 제국들이 남겨놓고 간 특유의 문화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을 남겨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항공교통의 발달로 평화롭고 친근한 자연과 태양을 사랑하는 여행객들을 위한 최고의 휴양지로 손꼽히고 있는 곳이다.
[ 몰타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있는 전략요충지로서 시칠리, 판텔리아, 리노사, 람페두싸등의 이탈리아 령으로 완전히 둘러쌓여 있는 것을 잘 볼 수 있다.
현재 몰타는 1800년 이래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아오다가 2차대전이 끝난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몰타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몰타 공화국은 크고작은 6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북쪽에는 두번째로 큰 섬 고조(Gozo), 중앙에는 조그만 세번째 섬 코미노(Comino), 남쪽에는 가장 큰 섬인 몰타(Malta)가 있다. 이들 섬 이외에 3개의 작은 무인도가 있다. 몰타의 총 면적은 316㎢이며 이는 제주도 면적의 1/6에 불과한 정도로 작은 섬으로서 최근에는 인근해역에 많이 서식하는 참치잡이를 위해 한국인들이 많이 진출해 있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작은 섬 몰타는그 전략적인 위치로 인해서 2차 세계대전중에 단위 면적으로 계산하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폭탄이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엄청난 고난을 겪었다. 평화롭던 지중해의 휴양지 몰타는 무솔리니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의 패권을 꿈꾸게 되면서 그야말로 이탈리아군의 눈엣가시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몰타섬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서 비행기로 20분정도 거리인 남쪽으로 약 93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고 그 주위에는 이탈리아령의 섬들에 둘러쌓여 있고 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는 북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거리에 있는데, 문제는 이탈리아에서 지중해 어느방향으로 횡단하건간에 몰타섬의 인접 해역을 통과할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 몰타의 세부지도, 6개의 섬중에서 몰타섬에만 주로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북부지역은 암석지대로 이루어져 주로 중부와 남부에 비행장과 시가지가 있었다. 붉은 색으로 표시된 타칼리, 루카, 할파 비행장이 이탈리아군의 최우선 공격목표였으며 동부의 발레타 항구도 주요 목표가 되었다. ]
따라서 리비아 지역에 전개된 이탈리아군은 이 몰타섬 근처의 해로를 통해 지중해 너머의 아프리카로 전쟁물자와 증원병력을 수송해야 했기 때문에 몰타섬이 영국군의 수중에 있는 한 해상으로의 모든 움직임이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영국군으로서도 이 몰타섬이야말로 이탈리아의 목전에 들이댄 칼날과도 같은 존재로서 이탈리아의 군사적 행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방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아무리 큰 희생을 치루더라도 이 작은 섬을 전혀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결국 몰타섬은 전화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군의 앞마당에 밖혀 발을 걸고 있는 짱돌과 같은 존재 - 몰타는 이제 이 짱돌을 빼 버리고자 하는 추축국의 공군과 이에 맞서는 영국공군간에 벌어지게될 처절한 항공전의 무대가 될 운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보다도 3개월이나 빨리 항공전이 시작되었다.
* 몰타의 땅은 영국, 그러나 하늘은 이탈리아
사실 영국은 1939년부터 이탈리아와 적대적인 관계가 시작되자 영국해군 지중해 함대의 근거지로 사용하고 있던 몰타섬이 시칠리의 이탈리아공군기지와 너무 가까워 이탈리아공군의 쉬운 공격목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영국해군기지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옮긴 상태였다. 이후 영국공군은 몰타에 4개 전투비행대를 전개하고 170문의 대공포화를 배치하여 이탈리아를 압박할 예정이었으나 1940년 초부터 유럽전의 상황이 악화되고 독일공군의 위협에 직면하여 본토방위를 위한 전투기의 소요가 급박해지면서 몰타에의 군사적인 지원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프랑스마저 무너지고 영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40년 6월에 이르러 무솔리니가 영불에 선전포고를 했을때, 이 작은 섬은 고작 42문의 대공포와 1기의 레이더만이 배치된 상태였다. 이때의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몰타는 그야말로 호랑이굴앞에 내던져진 개밥그릇 같은 신세나 다름없었다.
[ 몰타 공략의 주역, SM.79 폭격기대 - 몰타 상공에서 상당한 위세를 떨쳤다. ]
1940년 6월 10일, 무솔리니가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이탈리아공군에게는 이 몰타를 박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사실 이탈리아군의 입장에서는 영국군의 전력이 바닥으로 떨어져있는 이 작은 섬에 본격적인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하거나 공수부대를 투입해 점령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지만 아무리 본토가 궁지에 몰렸다고는 하지만, 세계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며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영국해군의 존재에 큰 부담을 느껴 함대를 동원한 상륙작전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군의 수준에서는 공수부대의 투입작전 같은 고난이도의 전술은 꿈도 꿀 수 없었다.
[ 시칠리의 비행장에서 시동을 걸고 있는 CR.42 전투기편대 ]
그러나 무솔리니는 그가 자랑하는 이탈리아공군을 투입해 몰타섬을 무자비하게 폭격해서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공군력으로 해상을 봉새하면 몰타의 영국군은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탈리아공군도 몰타섬을 공격하는 임무에는 자신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정보에 의하면 영국공군은 몰타에 전혀 공군전력을 보내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 몰타섬의 방공전력은 전무한 상태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공군기들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작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자신감이 넘치던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들은 다음과 같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출격했다.
"비록 몰타의 땅은 영국이 차지했을지 몰라도 이제 그 하늘은 우리 이탈리아공군의 것이다. 우리가 무자비하게 폭탄을 퍼부으면 얼마안가 영국놈들은 두손들고 항복할 것이다."
무솔리니의 갑작스런 선전포고와 몰타섬 공격명력이 떨어지자 시칠리섬에 주둔하고 있던 이탈리아공군은 선전포고 다음날인 6월 11일부터 즉시 공습을 시작했다. 시칠리섬에 배치된 주력 폭격기 사보이아마르께티 SM.79 편대가 제일먼저 출격했으며 이들은 CR.42 복엽전투기의 호위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신념과 희망 그리고 사랑
한편, 이탈리아의 침공위협이 고조되고 있었던 1940년 4월까지 몰타에는 아무런 방공전투기가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무렵 몰타에 잠시 정박한후 이집트로 떠난 영국 항모 HMS 글로리어스호에 탑재되어 있던 함재전투기 씨글라디에이터 (Sea Gladiator) 4기가 행정착오로 항구 근처의 부둣가에 컨테이너 포장된 상태로 남겨지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된 몰타섬의 영국공군 사령관 메이나드 준장은 즉시 이 4기의 씨글라디에이터를 몰타 방공군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영국해군에 요청했다. 당시 항모 글로리어스는 노르웨이작전에 참가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영국해군은 이들 기체를 다른 항모 HMS 이글로 이동시킬 예정이었지만 몰타섬의 상황이 급박해짐에 따라 공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들 4기의 씨글라디에이터를 몰타섬으로 넘겨주었다. 이로서 몰타섬은 비록 구식 복엽기이기는 하지만 4기의 전투기를 보유할 수 있었으며 이들은 영국공군 261 비행대대소속으로 배속되어 몰타섬의 방위를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 몰타방어전이 시작된후 약 2개월간 몰타의 운명을 떠맡았던 씨글라디에이터 전투기 ]
그러나 갑작스런 이탈리아공군의 폭격이 시작된 1940년 6월 11일에 SM.79 폭격기들의 기습적인 공습을 받은 발레타항구에서 씨글라디에이터 1기가 폭탄에 맞아 크게 파손되어 비행불능 상태가 되 버리면서 해체시켜 보조부품용으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었고 따라서 몰타섬에는 3기의 씨글라디에이터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날부터 이 3기의 복엽기들은 용감한 조종사들과 함께 날아올라 이탈리아공군에 맞서게 된다. 이들은 수적으로는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었지만 적기접근의 경보가 울리면 쉴새없이 날아올라 이탈리아 폭격기들을 요격하고 폭격을 방해했다. 몰타섬의 방공능력을 얕잡아보고 있던 이탈리아 폭격기대는 전투기의 엄호도 없이 날아오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들은 이 3기의 씨글라디에이터들로부터 집요한 도전을 받아 대형이 흐트러지기 일쑤였고 따라서 주요 목표지역인 발레타항과 3군데의 비행장을 정확하게 폭격할 수 없었지만 고작 3기의 전투기로는 내습해오는 이탈리아공군기들과 수적으로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나고 있어서 몰타섬은 폭탄세례를 면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군의 공습이 연일 계속되자 몰타섬의 사령부는 본토에 신형 허리케인 전투기의 지원요청을 했지만 독일공군의 위협에 직면한 영국공군 사령부는 본토방위를 위한 전투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즉각적인 지원이 곤란하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따라서 몰타섬은 희망이 없는 암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 신념, 희망 그리고 사랑 - 몰타상공에서 글라디에이터 전투기들의 활약상을 주제로한 항공아트 ]
개전 첫주가 지나면서 3기의 씨글라디에이터와 이를 조종하는 용감한 조종사들은 몰타시민들 사이에 영웅이 되었으며 이들의 사진은 크게 인쇄되어 거리에 나붙여졌다. 그리고 이들이 조종하는 3기의 씨글라디에이터에는 신화속에 나오는 세여신의 이름을 따서 각각 '신념 (Faith)', '희망 (Hope)', '사랑 (Charity)'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게 되었다. 1800년대 이래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영국정부는 몰타섬의 주민들에대해 후한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몰타시민들은 자신을 대영제국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몰타섬을 반드시 이탈리아군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내겠다 결의를 다졌다. 이런 몰타시민들에게 이 씨글라디에이터 3총사는 신념과 희망을 주었으며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무렵부터 후에 허리케인이 도착하는 3주간의 기간동안에는 사실상 이들의 어깨에 몰타섬의 운명이 걸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 몰타섬 공략작전이 어려움을 겪자 급히 동원된 신예전투기 MC.200 - 뒤에는 CR.42도 보인다. ]
한편, 개전 첫주간 연일 계속된 공습에도 불구하고 몰타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게된 무솔리니는 격분하여 더욱 공습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이무렵 이탈리아공군이 전병력을 시칠리아에 집결시켜 대대적인 공습에 나섰다면 몰타섬은 중대한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지만, 몰타방위군에게는 다행하게도 이탈리아공군은 시칠리아섬에 모든 전력을 집결시킬 수 없었다. 이탈리아공군이 그나마 불충분한 전력을 여기저기 분산시켜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상당수의 전력을 무솔리니가 뒤늦게 뛰어든 프랑스 전투에 참가하기 위하여 남부 프랑스와 코르시카 등지에 부대를 파견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이후 영국본토항공전에 대비하여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당수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을 주전장이될 이집트 침공을 위해 리비아로 이동시키기 시작했고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 공습작전에도 일부 부대를 참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몰타섬의 공습에 투입할 수 있는 공군전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탈리아군은 몰타섬을 점령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놓지 않고 있었다. 상식적으로도 공군이 집중 폭격으로 몰타섬을 공략한후에는 이탈리아 해군과 육군이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해서 몰타섬을 점령했어야 했지만, 이런 계획도 없이 그냥 무작정 몰타섬을 폭격으로 굴복시킨다는 막연한 명령만이 떨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만일 이무렵 이탈리아군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했다면 방위능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몰타섬은 이탈리아군의 수중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 시칠리의 비행장에서 급히 재무장과 재정비를 받는 MC.200 - 지중해의 찌는 듯한 더위속에서 웃통을 벗어던지고 있는 정비사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
첫주의 공습작전에서 폭격기 조종사들은 전투기들이 제대로 따라주지 못해 영국공군의 씨글라디에이터에게 번번히 농락당했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이무렵 시칠리아에 신예전투기 MC.200 대대가 도착하면서 이들이 CR.42 전투기들과 함께 폭격기 호위임무를 맡아 출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씨글라디에이터의 조종사들은 주눅들지 않고 계속 요격행에 나서 이탈리아폭격기들을 계속 괴롭혔으며, 6월 22일에는 조지 버지 대위가 SM.79 폭격기를 격추시켜 첫 번째 격추를 달성했다.
이후 몰타섬 사령관은 소수의 복엽전투기들이 이탈리아공군에 맞서 맹활약 하고 있음을 본토에 보고했다. 그러나 이들의 용전분투에도 불구하고 몰타섬의 함락은 시간문제이며 허리케인 전투기들의 꼭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본토의 영국군 사령부도 이 요청을 받고 고민끝에 본토방어전력에서 4기의 허리케인 차출해서 몰타섬에 공급하기로 결정했고, 이들은 폭격이 시작된지 21일후인 6월 28일에 드디어 몰타섬에 도착했다. 단지 허리케인 전투기 4기가 더 도착했을 뿐이지만 몰타섬의 방위력은 급상승했으며 이 허리케인은 이탈리아공군의 신예기 MC.200을 압도하면서 씨글라디에이터들과 함께 날아올라 이탈리아 폭격기대에 반격을 계속했다.
[ 발레타항의 상공을 경계하는 대공포 사수 - 이들은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
이후 약 한달이상을 이들 7기의 몰타섬 방공 전투기들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공습해오는 이탈리아공군기들에 맞서싸우기위해 쉬지 않고 날아올라 악전고투를 펼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적인 열세는 어쩔 수 없었고 상황은 역부족이었다. 항상 10배 이상이나 많은 적기들과 싸워야했기 때문에 이들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몰타섬에는 연일 수많은 폭탄이 떨어졌으며 도심은 폐허로 변해갔고 해상보급이 봉쇄되면서 몰타섬의 방어군과 시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7월 28일, 3기의 씨글라디에이터중 '사랑'호가 공중전중 피탄되어 추락하면서 전열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조종사였던 존 워터스 대위는 탈출했으나 심한 화상을 입어 많은 몰타 시민들을 안타깝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