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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개의 질문에 대답한 복음
10. 누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성찬 접시가 점점 다가옴에 따라 나는 두려움으로 가득해 졌다. 조금 전까지 정죄의식에 빠져 있었다. 왜 나는 두려워하는가? 나는 나의 인생에서 해결되지 않은 죄가 있었다. 나는 열 살이었고, 교회에 오기 전에 누이랑 다투었다. 나는 심판을 무릅쓰고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성찬을 받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성경이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전 11:27~30)
감사하게도 내가 틀렸다.
위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잘못 이해되는 본문 중 하나다. 성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거부하는데 흔히 사용되며 열 살 아이를 겁나게 하는 본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장차 보겠지만, 이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본문 중 하나다.
성찬이 어떤 문제를 처리하는가?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 11:23b~25)
성찬은 상당히 간단하다. 단지 빵과 포도주뿐이거나, 얇은 빵과 포도 주스이거나, 당신이 손에 든 무엇이거나 그뿐이다. 성찬의 중요성 또는 주의 만찬 또는 성만찬 또는 떡을 떼는 것 등 당신이 무엇이라고 그것을 부르든 간에, 그 중요성은 당신이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당신이 그것을 행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성찬은 주님에 대한 것이지 우리에 대한 것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성찬식 때 당신 자신에 집중한다면, 당신은 성찬을 잘못 하고 있는 것이다. 성찬은 당신 자신이 죄가 있는지 검사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은 예수님을 기념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떤 측면을 우리는 기념해야 하는가? 바울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들려준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6)
예수님은 많은 좋은 일을 하셨지만 궁극적으로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죽으러 오셨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며 슬퍼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것이 성만찬Eucharist의 문자적인 의미다: 감사를 드리다giving thanks. 성찬식은 죄를 고백하는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시간이다.[1]
떡은 왜 중요한가? 그것은 예수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요 6:48, 51). 성찬떡을 먹는다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찔리시고 깨어진 주님의 몸으로 인하여 제가 진실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잔은 왜 중요한가? 잔은 우주에서 가장 보배로운 물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새로운 언약을 맺게 하는 예수님의 피를 나타낸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7~28)
성찬의 잔을 마시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기회를 가지는 셈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피가 저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셨고요 눈처럼 희게 씻어 주셨습니다.”
그 피가 없었다면, 복음은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는 나무 두 개를 포개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찬송가 작시자 로버트 로리Robert Lowry가 쓴 것처럼, 우리는 “오직 예수의 피 밖에 없다.” 우리의 정결하게 됨, 우리의 온전하게 됨, 우리의 죄 용서, 우리의 희망, 우리의 평화, 우리의 의로움, 우리의 승리가 모두 가능하게 된 이유는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이 잔 속에 들어 있는 기쁜 소식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성찬을 합당하지 않는 방식으로 받게 되는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은 기쁨과 축하의 시간이어야 한다. 파티를 열어 축하해야 할 이유가 있는 일 중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었는가? 전에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자유하게 되었다. 우리는 죽었으나 이제는 살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성찬식은 축하의 시간이 아니다. 근심 어린 내적 성찰과 두려움의 시간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부분적으로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1:27)
내가 열 살 때 전전긍긍하게 된 것도 성찬을 합당하지 않게 받으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이 마크 타이슨처럼 나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먹고 마심으로 나를 기념하라.” 그러나 나는 나를 기념하느라 너무 바빴다. 나는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대신에 나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수정할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고 나는 생각했다. 교회 오기 전에 나를 깨끗하게 할 시간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것이 스스로하라식 종교DIY religion의 사고방식이다.
육신의 본성은 수고하고 고치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깨뜨리고, 우리가 그것을 사온다. 우리가 죄를 지었고, 우리가 회개한다. “이제 모두 수리되었다. 나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 나 스스로 해결했다.” 이런 무화과나무를 조심하라!
우리는 때때로 성찬을 받기 전에 스스로 죄가 있는지 점검해 보라는 말을 듣는다. 마치 우리의 죄가 우리로 하여금 성찬을 받을 자격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다. 주님은 잃은 영혼과 가장 작은 자들, 그리고 상처 입고 흠이 있는 영혼들을 위해 죽으셨다. 주님은 우리들 중의 가장 악한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교회에 오는 도중에 싸운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
당신이 예수님께 나아오기 전에 자신을 깨끗하게 할 필요를 느낀다면, 당신은 거짓말에 속고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주의 성찬을 받으려면 최소한의 자격 기준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십자가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마다 아담처럼 숨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면, 당신은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들을 필요가 있다.
너 스스로 하라(DIY) 종교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죄의 고백과 회개라는 무화과나뭇잎이 있어요. 받아서 부지런히 꿰매세요.” 그러나 은혜는 이렇게 말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오세요. 예수님의 피가 당신의 죄와 죄책으로 무거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너 스스로 하라(DIY) 종교는 당신에게 달아나 숨으라고 하겠지만, 은혜는 당신을 은혜의 식탁으로 인도하여 자비를 받게 하고 당신에게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를 발견하게 한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고전 11:28)
여기서 살핀다는 단어는 “시험해 보고 암시적으로 승인을 받다”[2]는 의미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당신 안에 자격을 잃게 하는 죄가 있는지 점검하고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옛 언약에서는, 대제사장이 희생 양을 살펴보는 것이지, 그 양을 데려온 사람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다.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흠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이시다(벧전 1:19). 주님을 살펴라. 주님 안에서 당신 자신은 시험을 받았고 승인되었음을 알라.
성찬식은 죄를 살피는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피는 시간이다. 다음 번에 당신의 양심이 당신이 합당하지 않은 자라는 정죄를 한다면, 합당하지 않음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음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켜 주라.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의롭게 되었고 거룩해졌다. 내가 의롭게 된 것은 내가 한 일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 때문이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내 모든 죄를 단번에 영원히 옮기셨다. 그리고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나는 영원히 용서받았다.”
합당하게 성찬을 받는다 것은 당신이 가진 최고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 테이블로 나아오는 것이 아니다. 성찬을 합당하게 받는 것이란 겸손히 경배를 하면서 십자가 앞에서 놀라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저를 살리시려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몸과 피에 대해 누가 죄를 짓는가?
고린도교인들이 성찬을 너무 나쁘게 했기 때문에 2,000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여전히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그들은 돼지처럼 먹었고, 마셨고, 나눠먹을 것을 가져올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했다(고전 11:21~22 참조).
고린도교인들은 그들의 행동에 분명히 부끄러운 일을 했다. 그러나 바울이 2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주의 살과 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심각한 기소charge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는 단어는 성경 어느 곳에도 성도들에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죄 없다고 영원히 결정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찬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우리는 이를 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을 나누는 위대한 기준이다. 예수님이 사랑할 사람과 미워할 사람을 나누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스스로를 나누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떤 사람들을 화나게 한다. 그들은 그 안에 있는 은혜를 보지 않는다. 몸과 피에 죄를 짓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무관한 것으로 그것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예수님이 필요 없어요. 그의 죽으심은 나와 무관하다고요.”
고린도인들이 이렇게 말했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성찬도 중요하다. 당신은 갈보리에서 술에 취해서 돼지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왜 성찬식 때 그런 짓을 하겠는가?
자기의 죄를 마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전 11:29)
이 본문에서 죄를 마신다(자신을 심판한다)는 말은 거의 항상 부정적인 심판을 의미한다. 킹제임스 성경은 그것을 “영벌을 마심drinking damnation”으로 번역했다. 다시 말하면, 주의 식탁에 완고하고 불신앙의 마음으로 오는 것은 나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반대하는 표를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는 은혜가 필요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심판이라는 말에 관하여 이해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바울은 믿는 자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불신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 고린도인들은 틀림없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한 일로 규정되지 않는다. 당신은 예수님에 의해 규정된다. 정의로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실 수 없다. 성령을 훼방할 때뿐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바울이 설명하는 심판은 자기가 자신에게 주는 고통을 말한다.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거만한 자들에게 영벌의 인을 치지 않으신다. 그들은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이다.
유다를 생각해 보라. 그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지는 않았다. 주의 만찬에서 유다는 떡을 먹고 잔을 마셨지만, 그의 마음은 불신앙으로 가득 차서 이것들이 상징하는 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리스도라는 진리에 자신의 눈을 감아버리고 눈 먼 바리새인들 편에 서버림으로써 유다는 자신을 정죄한 것이다. 수년 동안 행동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목격한 후에,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를 알아볼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인정하지 않았고, 예수님은 유다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눅 22:22).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성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을 들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완고하게 한 사람들은 주의 피와 살에 죄를 짓는 것이다. 성찬을 받음으로 그들은 알지 못했다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저는 예수님이 저를 위하여 죽으신 줄 몰랐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그 죽으심을 기념하여 먹고 마셨기 때문이다.
성찬을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 아들의 죽음에 감동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것은 당신이 결코 알 수 없을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동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을 말한다. 당신의 눈을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감아버리고 유다를 따라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심판의 날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당신은 근본적으로 예정보다 앞서 당신 자신을 심판한 셈이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유다와 바리새인의 편에 서겠어요.” 그렇게 하면 당신은 정죄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매우 중요한 질문으로 인도한다.
누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성찬식 시간입니다. 제가 여기로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우리를 처음 방문하여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분은 이 시간을 조용한 묵상의 시간으로 자유롭게 지내면 됩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말들을 다시 받을 수만 있다면! 내 말에 충격적인 무자비함을 찾아볼 수 없을까? 나는 성찬을 받는 사람들과 받지 않는 사람들 사이를 나누는 거룩하지 않은 선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는데 모든 사람이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자리에는 초대되지 않았다. 은혜는 다 포함하는 것이지만 젊은 목사로서 나는 배타적인 성찬식을 행했던 것이다.
나 혼자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많은 교회들이 떡을 받을 수 있고 없는 사람을 규정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어떤 교회는 불신자들이 참가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고 그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초대장에 주의사항을 명기한다. 불신자들은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그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죄를 먹는다”는 그의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안다면 흥미롭지 않는가? 그는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불신자들은 성찬에 참여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대신에 그는 사람이 자신을 살핀 후에 성찬에 참여하라고 말했다(고전 11:28).
합당하지 않은 방식(십자가의 완료된 사역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으로 성찬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죄를 먹고 마실 수 있기 때문에(우리를 구원하는 은혜를 거절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살피는 시간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자신을 살피는 적당한 방법은 무엇인가? 대답: 십자가의 빛 가운데서 살피라.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자신을 살피는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그리스도만큼 의롭고 거룩하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어떤가? 은혜에 대하여 한번도 감사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가? 이것이 그들에게 기회다! 성찬식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모든 일을 잠시 짬을 내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다. 그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면 당신은 그들에게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된다. 당신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복음에 대해 반응하지 마세요.”
어떻게 됐든지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한 말이 왜곡되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 테스트가 되어버렸다. “먹고 마시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는 말은 종종 “내면의 죄를 살펴보고, 혹시라도 죄가 있으면 참가하지 마십시오”로 해석된다. 어떤 교회는 참가 자격의 최소 요건을 명시한 곳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이 신자이어야 하거나 세례를 받아야 하거나 투표권이 있어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러한 기독교 카스트제도가 있어서 맨 바닥에는 더럽고 불가촉 죄인들이 있어서 절대로 성찬에 참여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분명히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내가 우리 교회에서 한 말이었다. 방문객들에게(그들이 죄인일 수도 있다-누가 들인 거지?) 성찬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다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는 어울릴 정도로 선하지 않습니다.” 나는 암시적으로 그들을 살과 피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런 용어로 말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생각에 나는 주님을 존중하고 죄인들을 심판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여겼다. 점차 천천히 나에게 새벽의 여명이 밝아왔고 죄인들에게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고 한 것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죽으신 것 아닌가?
바울은 성찬에 대해 합당한 사람 테스트를 하라는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중대 사건이다. 그러니 잠시 짬을 내어 그것에 대해 생각하라. 만약 예수님의 죽으심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면 성찬식은 즐기고 축하할 시간이 된다. 그러나 만약 그의 죽으심의 의미가 당신에게 처음이라면, 여기서 좀 더 나아갈 기회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기회가 된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심판)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고전 11:31)
모든 사람에게는 심판의 날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심판의 날은 과거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거울을 들여다보았거나 자신의 양심이 하는 정죄를 들었으며, 자신에게 부족함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고, 예수님이 주시는 값없는 은혜를 받아들였다. 그의 심판날은 그렇게 해서 구원의 날이 되었다. 그러나 은혜를 거부하고 계속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심판날은 여전히 미래의 일로 남아 있다. 만약 그가 계속 은혜를 조롱한다면 그의 심판날은 정죄의 날이 될 것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1:32)
죄와 사망이 다스린 옛 세상의 질서는 정죄를 받았다. 미래에는 없다. 새로운 질서는 은혜와 용서에 기초한 것으로 이제 솟아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옛 것과 새 것을 양 발로 밟고 서 계셔서 침몰하는 배를 포기하는 모든 사람들을 건지신다. 주님이 뻗으시는 손을 붙잡는 사람은 누구든지 정죄를 받지 않으며,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빠져들어갈 운명이다(요 3:18 참조).
이것은 교회에 등록하라는 말이 아니며 신앙 조사에 정답을 기입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며 예수님과 함께 당신이 할 일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선물은 주어졌다. 우리의 몫은 단지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 것뿐이다.
불신자도 성찬을 받을 수 있는가?
불신자는 성찬식에서 배제되어야 하는가? 바울은 이 질문이 가당치 않은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물어보는 것과 같다: “불신자들은 복음에서 배제되어야 합니까?” 성찬식은 주님의 죽으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십자가가 복음의 심장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찬을 시행할 때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전 10:16)
복음의 전 핵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 아닌가? 그들을 초대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들을 성찬식 동안에 닫아버리는가?
“하지만 폴, 이런 죄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요.” 당신도 전에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누군가가 당신에게 은혜를 보여주었고 당신은 감사함으로 반응한 것이다. 성찬을 거부하는 것은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결코 하지 않으신 일이다. 유다조차도 성찬을 받았다.
옛 언약에서 죄인들과 부정한 사람은 격리되어 의인들을 더럽히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셨다. 주님은 그들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들과 떡을 떼셨다. 주님이 만나신 사람들은 도둑들, 간음자들, 살인자들이었으며, 그들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전염시키셨다. 죄인들은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변화되었다.
“성찬은 합당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새 언약의 축복을 옛 언약의 저주로 바꾸게 되며, 가장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기를 거부하는 셈이 된다. 종교는 우리와 그들 사이에 선을 그어 나눈다. 그러나 은혜는 나누는 벽을 허물어버린다. 성경 어디에도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제안을 하는 암시는 없다. 이것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루는 전통이다.
성찬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 그들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나는 늘 말하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은혜의 성령과 반대되는 일을 했다. 그러나 나는 회개했다. 나는 나의 분위기를 바꾸어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을 성찬식에 환영합니다.” 그때 나는 성령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기 시작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우리는 어떻게 성찬식을 가져야 하는가?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고전 11:33~34)
고린도교회의 성찬은 완전 대실패였다. 바울이 그들의 모임에서 한 말은 좋은 쪽으로보다는 나쁜 쪽으로 작용했다(고전 11:17).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들의 식탁 태도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불명예로운 것으로 홍보하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함께 모여서 먹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다”(고전 11:20). 참으로 그것은 성찬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옥에서 온 사람들이 각자 지참해 온 것을 먹은 식사였다.
바울은 그들의 가련한 행동을 고치라고 편지했다. 그는 그들에게 실제적인 지침을 주기에 앞서 성찬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자신의 희망을 피력하면서 그들의 모임이 “판단을 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마무리한다. 바울이 말하는 판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29절에서 말하는 심판(죄를 먹고 마심)과 같다. 그것은 불신앙이라는 스스로 자초한 정죄를 말한다. 당신이 성찬식을 너무 나쁘게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성찬이 아니다. 당신은 복음의 장애물이 되고 사람들은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을 것이다.
당신이 예수님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고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다 상상해 보자. 당신이 이렇게 술취하고 음식을 돼지처럼 먹으면서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본다 하자. 당신에게 남는 인상은 무엇일까? 당신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한심하다. 나는 그들과 그들의 그리스도와는 상관하지 말아야겠다.” 아니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음식 항아리를 치우세요. 저는 이런 술 취한 예수님에는 질렸어요!” 어느 쪽이든 당신은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그림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의 일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예수님을 나타내는 만큼, 즉 술 취한 예수님이든 사랑보다는 행동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진 예수님이든 간에, 우리는 말기적인 현재 상태를 부추기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 그것은 정죄 받는 세계의 거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세계의 기쁜 소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더 이상 끝이 아니다는 선언이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우리는 부활하신 왕의 은혜가 아니면 타락한 질서의 정죄를 풀어놓을 기회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하늘의 향기를 뿜을 수도 있고 타락한 세상의 술 냄새를 뿜을 수도 있다. 돼지처럼 행동을 하면서 고린도인들은 후자를 택했다. 그들은 감사하는 대신에 음식을 낚아채고 있었다. 그들은 은혜를 나누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모욕하고 있었다.
만약 고린도인들이 우리에게 성찬을 할 때 하지 말아야 할 모습을 보여준다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르게 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2~47)
우리가 은혜의 식탁에서 진짜 예수님을 나타낸다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안으로 이끌려 오고,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필요를 공급받고, 그 결과는 칭찬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다. 성찬식을 잘 하게 되면 어떤 모습이 될까? 그것은 천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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