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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아내
원작 서성란
극본 이상락
연출 김호상
진행 김갑수
라디오 독서실 서성란 단편소설 <소설가의 아내>
*시그널 + 타이틀
진행자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라디오 독서실의 김갑수입니다.
날씨가 무척 덥습니다. 바다로 계곡으로 피서를 다녀오신 분들도
있고, 지금 피서지에서 이 방송을 들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행계획을 세우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요. 여행가방 꾸리실 때
책 한 권쯤 챙기셨는지 모르겠네요. 출발할 때는 배낭에 넣고 가지만
돌아올 때는 머리나 가슴에 담고 오는 게 책 아니겠습니까.
금년 여름이 유난스럽게 덥다는데요, 이 무더위를 독서로 한 번 이겨
내 보시죠. 전에 사두고 읽지 못한 책이 집에 있으면 그걸 읽으시면
되겠지요. 서점에 책을 고르러 가실 분들은, 성우 이은정씨가 소개해
드리는 금주의 신간안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음악> UP & BG
*신간 안내
진행자 오늘 함께 감상하실 작품은 서성란 단편 소설 '소설가의 아내'입니다.
이 자리에 소설가 서성란씨 나오셨습니나.
작가 서성란
-1967년생.
-서경대학교 국문과 졸업. 중앙대학교 문창과 박사 졸업.
-1996년 '할머니의 평화'로 제3회 실천문학 신인상 수상.(등단)
-장편소설 '모두 다 사라지지 않는 달'
-소설집 '방에 관한 기억'
단편 '소설가의 아내'는 창작집 '방에 관한 기억'(문이당)에 수록된 작품임.
대담
-이 작품 '소설가의 아내'가 수록된 창작집의 제목이 '방에 관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에서 '방' 얘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소설가의 아내'만 해도 갓 등단한 신인 소설가가 혼자 시용할 수 있는 방 한 칸
이 없어 아쉬워 하다가 계약결혼 비슷한 혼인을 하게 되는데요,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방'은 그냥 현실적인 생활공간입니까 아니면 주변의 구속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추상적인 영역입니까?
-우리가 감상할 작품 제목이 '소설가의 아내'인데, 얼핏 현진건의 빈처를 떠올
리게 합니다. 작품집의 표제작인 '방에 관한 기억'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작품들
이 가난 때문에 겪는 고초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작가 자신의 실제 가족사로
보이는데요?
진행자 그러면 서성란씨의 단편소설 '소설가의 아내'를 감상하고나서 얘기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오프닝)
<효과> (전화 거는-10자리 누른다)
(안내원 목소리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신
후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나 (송수화기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앉으며) 흐음-.
나 (해설)그가 사라졌다. 그가 사용하던 휴대전화 번호는 존재하지 않는,
의미 없는 숫자가 되어 버렸다. 내가 살고 있는 서른 평 남짓한 공간
속에 그의 존재를 증명해 줄 단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이제 내가 쓰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에 불과할 뿐이다.
<효과> (작은 주전자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레인지 불 켜고)
(트스터에 식빵 넣고 누르고)
(냉장고 문 열었다 닫고)
-주인공 왔다갔다하며 위 효과들 차례로- BG
나 (해설)가스레인지에 찻물을 얹고, 토스터에 식빵을 끼우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파장 뒤의 시장바닥처럼 을씨년스러운 냉장고 속에서 재빨리
딸기잼을 꺼낸 뒤 문을 닫아버렸다. 그가 집을 나간 뒤 하루 두끼는
빵이나 라면을 먹었다.
도자기 찻잔에 커피가루를 덜고 (찻잔에 물 따르는)뜨거운 물을 붓다가
무심코 시선이 식탁 위에 놓인 신문으로 쏠렸다. 아침이면 습관처럼
현관문을 열고 우유와 함께 집어 와서 펼쳐보지도 않은 채 며칠씩 식탁
한 쪽에 쌓아놓던 신문이었다.
나 (신문 펼치고) (혼잣말)신문을 보지 않았다면 오늘 밤이 지나면 해가
바뀐다는 사실도 모른 체 넘어 갔을 것이다.
나 (혼잣말)이 집을 떠나야 할 날짜를 한 달이나 어긴 셈이네. 내가 이 집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지. 그 사람이 언제 집을
나갔더라? 맞아, 12월 1일, 우리의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이었어. 몇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해가 밝는다…(신문 접고)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지.
<음악> (카페-잔잔한 최신 샹송이나 팝송 중 적당한) 2소절 쯤 후 BG
나 (해설)그를 처음 만난 건 카페 슈에서였다.
<효과> (여자 넷, 떠들며 맥주 마시는)
J 내 고등학교 친구 중에 소설가가 탄생했다… 이건 사건이야 사건!
Y 자, 다시 한 번 미월이의 등단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건배!
나 그래, 까짓것 그 축하 일단 접수해 주지.
<효과> (네 사람 잔 부딪치는)
A (술 들이켜고)아이고 배불러. 나,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 (일어서 나간다)
나 (해설)우리는 한 시간 가까이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문단 등단
기념으로 내가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저녁을 사고 2차로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민장우 (뚜벅뚜벅 걸어와서)제가 괜찮은 제안을 하고 싶은데…앉아도 되겠
습니까?
나 (해설)함께 술을 마시던 Y와 J가 불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높은 회전의자에 앉아 웨이터가 따라주는 위스키를 마시던 그가 잔을
들고 내 자리로 오기 전까지, 나는 그가 카페에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민장우 (자리에 앉으며)저는 민장우라고 합니다. 이 카페는 친구놈이 하는
곳이라 종종 들릅니다.
J 미안하지만 그 자리는 임자가 있어서요. 그리고 오늘은 우리 친구들
끼리 축하해 줄 일이 있으니까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좋겠네요.
A (걸어와서)어, 여기 내 자린데…
민장우 (일어서며)아, 그래요? 그럼 이 쪽 테이블에서 의자를 하나…(의자
끌어다 앉는)저는 미월씨에게 볼일이 있는데 지금 불편하실 경우
내일이라도 시간을 내주신다면 괜찮은 제안을 하겠습니다.
A 무슨 제안을 하시려고요? (빈 잔에 맥주 따르며)내일까지 기다릴거
뭐 있어요? 지금 말씀해 보세요.
나 (해설)좌석을 잃었다 되찾은 A가 빈 잔에 맥주를 따르며 물었다.
A는 유리 넷 중 유일하게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고 벌써 권태기를
이야기하는 전업주부였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J도 잡지사 기자인
Y도 그 난 데 없는 불청객이 못 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민장우 먼저 미월씨의 등단을 축하합니다. (술잔에 맥 주 따르며)제가 한 잔
따라도 되겠습니까?
Y 미월이가 등단한 걸 댁이 어떻게 알죠?
민장우 허허허, 제가 앉았던 자리에서도 이쪽에서 하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Y 문학에 관심이 많은가 보죠?
민장우 문학은 잘 모르지만 소설가에게는 관심이 많습니다.
J 대체 그 제안이라는 게 뭡니까?
민장우 미월씨가 방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제가 그 방을 제공해 드리고
싶습니다.
나 (해설)그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자 Y와 J와 A는 일제히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민장우 글 쓰기 위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제가 그 방을
드리고 싶어서 이 자리로 온 겁니다.
Y 어머 세상에. 어떤 조건으로, 무슨 까닭으로 우리 친구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가요?
민장우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방과 글 쓰는 데 필요한 돈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저와 함께 사는 조건입니다. 저는 미월씨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미월씨는 무조건 글만 쓰시면 됩니다. 자, 여기 (명함 탁자에 몰여
놓으며)….
<효과> (일어서 나간다)
나 (해설)그가 명함 한 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자리를 뜨자 Y와 J와 A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명함을
가방 속에 찔러넣었다.
<음악> (브릿지)
<효과> (전화벨 소리)
언니 (송수화기 들고)여보세요. 아, 미월이요? 잠깐만 기다려요. (방 노크
하고) 얘, 미월아, 친구 전화다.
나 알았어, 언니. (방문 열고 나와서) 여보세요?
J (전화)응 나야. 어젯밤에 그 남자 말이야. 그 남자 명함보고 설마
전화한 건 아니겠지?
나 그 남자라니…아, 어젯밤에 슈에서 만났던? 그런데 내가 명함을 받았던가?
J 이런 기집애. 조심해야 돼.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너?
나 (웃음 터트리는)
J 웃을 일이 아니야 얘.
나 알았어. 고맙다.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안녕.(끊는다)
언니 (부엌에서 설거지 하며)이제 등단했으니까 글만 열심히 쓰면 먹고
살 걱정 안 해도 되는 거냐?
나 어이구 언니, 이제 갓 등단한 신출내기 작가야. 누가 나같은 햇병아리한테
글 써달라고 청탁이나 한대?
언니 그러게 잘 다니던 잡지사는 왜 그만 두고 그래. 대학까지 나왔다는
애가 실업자로 지낸 지가 얼마냐. 니네 형부 보기 민망해 죽겠어.
차라리 시집이나 가든지.
나 아이고, 또 우리 언니 잔소리 발동 걸렸네.
나 (해설)나는 직장을 갖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은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껴서 쓰면 상금으로 두어 달은 버틸수 있었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봐야 했다. 나는 대학 다니는
동안 해보지 않은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짬짬이
분식집에서 라면 삶은 일을 했고, 강의가 끝나는 오후부터 늦은 밤까지는
대학 근처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일했으며, 방학 때는 동사무소나 백화점에
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을 1년 쉬는 동안 일했던 집 근처 부동산
사무실은 내가 일한 곳 중 가장 조건이 좋았었다.
<음악> (카페 '슈'-잔잔한)BG
나 (해설)책과 노트를 챙겨 들고 카페 슈에 갔다. 조명이 어둡기는 해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에는 집보다 그것이 나을 것 같았다.
민장우 (걸어와 앉고) (커피잔 탁자에 놓으며)커피, 함께 마시죠.
나 누구 신지…아, 어제 저녁에…
민장우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지요? 작가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제가 방을 마련해 드리고 싶은데…
나 왜요? 싸게 나온 방이라도 있나요?
민장우 허허, 미월씨는 글을 쓸 방이 필요하고 저는 함께 살 여자가 필요하니까
서로 궁합이 잘 맞는 거 아닌가요?
나 농담을 즐기시는 모양이네요.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같이 산다는 거죠?
민장우 처음부터 서로 아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평생을 함께 살아도 서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하루를 만나도 느낌이 통하는 사람이 있는
것 아닌가요?
나 나는 그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든 기분이 들었지만 호기심과 장난기
또한 억누를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저녁때까지 술을 마시고 결국 잔뜩
취해서 집으로 향했다.
민장우 (두 사람 비틀걸음)어, 조심해요. 넘어지겠어요.
나 (취한)다 왔어요. 여기가 우리 집, 아니, 언니네 집이에요.
민장우 그래요? 그럼, 들어가십시오. 내일 슈에서 다시 만납시다.
<음악> (위 음악) UP & OUT
나 (해설)세 번째 만났을 때 그는 내게 모자를 사주었다. 챙이 긴 흰색
모자였다. 그는 마치 오래된 연인에게 하듯 내 머리 위에 모자를 씌워
주고 한참을 들여다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모자 따위를 써보지
않았기 때문에 거울을 들여다보라는 가게 주인의 말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효과> (승용차,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 멈추는)
민장우 자, 여기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십시다.
나 (해설)그는 저녁 식사를 하자며 회 센터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웠다.
나는 한 번도 회를 먹어보지 않았지만 차마 회를 먹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효과> (횟집-두 사람 앉는)
민장우 아, 미월씨, 모자 벗지 마세요. 그대로 쓰고 있어요. 으음…좋아요.
아름답습니다.
나 (해설)그러나 나는 머리에 얹혀 있는 모자가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민장우 (젓가락질 하며)미월씨와 한집에서 살게 되면 매일 이런 음식을 먹게
되겠지요? 이게 광어횝니다. 상추에 이렇게 싸서…자, 특별 써비습니다.
드세요.
나 내가 할 줄 아는 음식은 김치찌개하고 된장찌개밖에 없어요. (젓가락으로
회 집어다) (킁킁 냄새 맡는)
나 (해설)나는 그의 손을 무시하고 젓가락으로 회를 한 점 집어 냄새를
맡았다. 생각처럼 비린내는 나지 않았지만 왠지 날것을 먹는 게
내키지 않았다.
민장우 회는 이렇게 먹는 거지 냄새를 맡는 게 아닙니다.
<효과> (상추쌈 입에다 넣고 먹는)
민장우 자, 소주 한 잔 더 하시죠. (술 따르는)난 운전을 해야 하니까…
나 (소주 들이켜고)요리를 잘 하는 여자를 찾는다면 잘못 짚은 것 같네요.
민장우 돈과 시간만 있으면 맛있는 음식은 언제든 먹을 수 있지요. 저는
요리사를 구하는 게 아닙니다. 저와 함께 맛있게 음식을 먹어 줄 사람
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나 (해설)내가 혼자서 소주 한 병을 다 마시는 동안 그는 광어 한 마리와
민어 한 마리를 먹어 치우고 매운탕에 밥 한 그릇까지 비웠다.
민장우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남자가 서른이 되도록 여자
한 명 사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미월씨처럼 미인이었는데
한 일 년 가까이 사귀다 헤어졌습니다.
나 전 미인이 아닌데요. 그거야 뭐 그렇고, 어떤 여자…였는데요?
민장우 그림을 그리는 여자였습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걸 알고 만난
것은 아니지만 처음 만났을 때 그 여자의 몸에서 물감 냄새가 났지요.
일 년 가싸이 날마다 그녀의 화실을 드나들었어요. 나는 그녀가
내 얼굴이나 몸을 그려 주길 바랐습니다. 원한다면 기꺼이 누드 모델이
돼 줄 수도 있었는데…
나 (해설)그를 만나는 동안 그의 가족이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건 내 쪽이었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부모님과 고아처럼 자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도 담담했다. 그는 내 유년의 이야기를 듣고 눈시울을 적시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민장우 원한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방을 옮겨도 좋습니다.
<음악> (브릿지(
J (에코)뭐라고? 그 남자하고 결혼을 해?
A (에코)세상에, 그 때 만났던 그 남자한테 시집을 간다고?
Y (에코)미월이 너 장난하는 것 아냐? 카페에서 만났던 그 남자하고?
나 (해설)결혼 날짜를 잡았다고 전화했을 때 A와 J와 Y는 모두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유일한 혈육인 언니만이 내 결혼을 적극적으로 밀어붙
이고 축하해 주었다.
언니 (부엌에서 요리하며)그래도 부모님 예단 정도는 해가야 하는 거 아니니?
나 아니야, 언니. 예단이고 뭐고 혼수 준비할 필요 하나도 없어. 캐나다에
살고 있는 그 사람 부모님 못 오신다 했거든. 책하고 컴퓨터만 가져가면
되니까 언니는 걱정 붙들어 매시라구.
언니 그런데…느이들 살 집이 어디야?
나 (가방에 이것저것 넣으며)저 저기 동대문 운동장 뒤편에 있는 상가
건물 3층인데, 1층엔 아귀찜 파는 음식점이 있고, 2층은 무슨 기획사
사무실이 있어. 한 30평은 될 걸. (가방 지퍼 닫으며)바이 세 개고,
거실이 아주 넓어.
나 (해설)거실엔 하루 종일 누워 뒹굴어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은 푹신한
침대와 소파가 놓여 있고, 32인치 평면 텔레비전과 일제 소니 오디오와
크리스털 컵이며 도자기 접시 따위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진열장이
한 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민장우 (방문 열고)이 쪽이 미월씨 방이야. 짐 정리 혼자 할 수 있겠어?
나 (가방 한 쪽으로 밀쳐놓으며)짐이라야 책하고 옷가지 조금, 그리고
컴퓨터 뿐인걸요. 천천히 할게요.
나 (해설)그가 내게 반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함께 잠을 잔 뒤부터였다.
그를 따라 횟집에 들어가 광어회를 앞에 놓은 채 먹지 못하고 냄새만
맡으면서 회를 못 먹는단 말은 하지 못한 것처럼, 그와 함께 여관에
들어갔을 때도 나는 처음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민장우 으음, 잠깐만. (노트북 컴퓨터 들어다 놓으며)집들이 선물이야.
새 글은 새 컴퓨터에 써야 되겠지? (노트북 지퍼 내리고)노트북을
샀어. 안타깝게도 나는 컴맹이야. 최신형이래서 제일 비싼 걸로 샀어.
가방 속에 안내 책자랑 시디가 들어 있을 거야. 그럼, 난 거실에
나가 있을게.
<효과> (문 여닫고 거실로 나간다)
나 (해설)노트북을 부팅시킨 채 책장을 정리하다 말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문 열고 나가는)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비디오를 보고 있던
그가 방에서 나오는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민장우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나 아니, 뭐, 그냥…
<효과> (돌아서서 방문 열고 들어오는)
나 (해설)나는 차를 마시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
와버렸다. 그는 내가 방에서 나갈 때마다 왜 왔느냐고 물었고 나는
차를 마시고 싶다는 말을, 침대에서 쉬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 (해설) 함께 살던 5년 동안 그에겐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상가1층과
2층에서 나오는 월세와 통장에 들어있는 저축이 있었기 때문에 생활에는
불편이 없었다. 그는 월말이 되면 월세를 받아 오고, 꼬박꼬박 은행에 가서
직접 세금을 냈다. 전기세와 수도세, 도시가스 요금은 물론이고 신문값과
유윳값까지 내 손을 빌리지 않았다.
<효과> (쇼핑백 들고 거실에 들어오는)
민장우 (쇼핑백 내려놓으며)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했어. (화장품 병들 꺼내
놓으며)주문한 화장품 여기 사왔고, (쇼핑백에서 옷가지 꺼내며)
아, 속옷은 여기 있어. 브래지어는 A컵에다가 팬티 사이즈는 75.
나 (해설)따라서, 필요할 때 쓰라고 그가 내 이름으로 된 신용카드를
만들어 주었지만 쓸 일이 생기지 않았다.
<음악> (카페-잔잔한)BG
나 (해설)나는 가끔 카페 슈에 갔다. A와 J와 Y는 그가 있는 집이 불편
하다고 밖에서 만나길 원했다.
A (차 마시고 찻잔 내려놓으며)미월이 너 얼굴이 몰라보게 좋아진 거 알아?
J 글쎄 말이야. 그런데 너 정말 글만 쓰고 사니? 빨래나 부엌일도 안해?
나 으음…아침이면 파출부가 와서 오전에 청소며 세탁을 해놓고, 간단한
반찬하고 국을 만들어놓고 가고…가끔 그 사람이 직접 요리를 하기도 해.
글쎄, 설거지 정도는 내가 하지. 집안일 할 시간에 글을 쓰라고 하니까.
Y 야아, 그럼 애는 누가 낳고 키우니?
나 글쎄,그런 얘기 안 하던데? 내가 서재에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소파에
앉아서 볼륨을 죽여 놓고 비디오나 텔레비전을 볼 뿐, 같이 자고
나를 침실로 끌고 가진 않거든. 새벽에 그 사람이 누워 있는 침실로 가서
잠이 들면 날이 훤하게 밝도록 날 안 깨워.
A 그럼 그 사이에 남편 혼자서 아침밥을 먹고?
나 으응.
나 (해설)그의 집에 들어간 지 열 달이 지났지만 나는 한 줄도 글을 쓰지
못했다. 등단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청탁은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소설가라는 걸 아는 사람은 언니와 친구 몇 명이 고작이었다.
유림 엄마가 아니었으면 나는 등단작이 된 그 소설을 쓰지 못 했을것이다.
<효과> (지하철 역 입구-사람들 왔다갔다)BG
유림모 자, 이것 좀 받아가세요. 신시가지 요충지에 제일빌라 70세대 특별
분양입니다! (달려가며)아저씨, 혹시 집 보러 오신 분 아니세요?
나 (해설)신축 빌라의 분양을 알리는 전단지를 전철역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손님을 부동산 사무실로 데리고 오는 것이 유림 엄마의 일이
었다. 기본급에, 손님을 데리고 오는 만큼 수당이 붙는 그 일은 보수보다
고되고 여자들끼리 알게 모르게 분쟁도 잦았다. 유림 아빠가 소설가라는
걸 알게 된 건 여자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여자1 유림 아빠가 소설가면…야, 그러니까 예술가의 아내로구먼.
여자2 그런데 그 고상한 작가분께서 어찌 마나님한테 이런 험한 일을 시키시나.
나 (해설)좀처럼 크게 웃지 않는 유림 엄마는 여자들이 남편 이야기를
꺼낼 때면 얼굴 가득 미소를 담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여자들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갔다. 사장은 근처 사우나나 다방으로 가고, 비가 그칠 때까지
유림 엄마와 내가 사무실을 지켰다.
나 유림이 아빠가 소설가라면서요?
유림모 신춘 문예로 등단한 지 오래됐지요. 아직 등단 이후로는 작품을 내놓지
못했지만.
나 (해설)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무명의 작가를 남편으로 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황금알을 낳는, 대단한 소설을 쓸 작가라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싶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유림모 방이 둘 있는 지하에 세 들어 살아. 소설가에게 햇빛은 목숨과
같은건데…
나 유림엄마가 바깥에서 밥벌이를 하시니까 아이들은 아빠가 돌보겠네요?
유림모 내가 아침에 준비해 놓고 나오면 야들이 학교 갔다 와서 지 아빠 밥도
차려주고 심부름도 하고 글 쓰는 데 방해 안 되게 밖에서 놀아. 그리고
작가들은 밤에 글이 잘 써진다고 하잖아. 나는 집에 가면 일찌감치
치우고 애들 방에서 자. 그래야 애 아빠가 작업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나 (해설)나는 등단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아직 창작집 한 권 내지 못한
무명의 소설가를 그토록 배려하는 그녀가 놀랍고 대단해 보였다.
유림모 내가 지독히 따라다녔어. 죽어도 결혼은 안 할 거라는 그이를 조르고
졸라서….자기는 가족을 부양할 능력도 자신도 없다고 말했었지,
십 년 동안 안 해본 일이 없어. 파출부며 음식점 찬모며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달려들었어. 내가 선택한 거니까 후회는 없어.
나 (해설)유림엄마의 얘기를 듣고나서도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 (해설) 5년이란 기한을 정한 건 나였다. 나는 날마다 글을 쓰지 않을
핑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여름에도 감기에 걸려 며칠을 침대에
누워 앓았다. 그가 외출했다 돌아오는 기척이 들리면 머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렸다. 서재에는 먼지가 쌓이고 환기조차 시키지 않아 벽지에
곰팡이가 슬었다. 컴퓨터 활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짐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를 사랑하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할 것 같았다.
<효과> (멀리서 갈매기 울음 소리)
(파도 소리 은은하게 들려오는)
민장우 미월이라는 소설가가 세상에 알려지려면 몇 해를 기다려야 하지?
나 (해설)신혼 여행 겸 동해에서 3일을 묵고 설악산에서 1박을 하게 됐을 때,
바다가 보이는 콘도에서 그가 물었다.
나 길게 잡으면 오 년 안에 내가 소설을 팔아 여행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민장우 소설을 팔아 돈을 벌지 않아도 좋아. 돈은 내게도 충분하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소설가 강미월의 남편 민장우야.
나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민장우 나는 사랑을 미래에 투자한 사람이지. 나는 누군가 나를 발견해 주기를
기다려왔어. 가능하다면 당신의 첫 번째 소설책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가능하다면 말이야.
나 (해설)그는 천천히 내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오랫동안 입을 맞추었다.
나 (해설)캐나다에 있다는 그의 부모에게서는 5년 동안 전화 한 통 걸여
오지 않았다. 그에게는 동생이나 형도 없는 것같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부탁과 달리 그는 아무것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 중에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카페 주인 오빈 뿐이었다.
<효과> (나, 컴퓨터 자판 한 참 두드렸다가)
나 에이, 이게 아니야. (자판 거칠게 두드려 지우고) 으휴-.(한숨)
나 (해설)내가 한 줄의 문장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노트북 앞에 매달려
있는 동안 그는 마치 수험생 자녀를 둔 어머니처럼 거실에서 떠나지
않았다.
<효과> (책상 위의 노트북, 책, 커피잔 등 바닥에 내려놓고)
(나, 책상위에 올라가서 눕는다)
나 나는 책상위에 놓인 책과 커피잔과 노트북을 바닥에 내려놓고 길쭉한
원목 책상 위에 길게 누웠다. 형광등 때문에 눈이 부셨지만 그렇다고
불을 꺼버릴 수는 없었다. 그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기척과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까지 들으며 엷은 잠에 빠져들었다.
<음악> (꿈속-잔잔한, 환상의 분위기)BG
나 (해설)꿈속에서 소설가 T를 보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그가 쓴
작품 한 편 읽은 적 없는 소설가의 뒷모습이 현실인 듯 생생했다.
내가 알지 못하지만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소설가 T는 내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10년 동안이나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단 한 편의 작품도 쓰지 못했던 사람.
그가 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아내 때문이었다. 빠듯한 수입으로
여행경비를 마련할 수 없었던 아내는 은근히 추파를 던지는
부동산 사장에게 제 발로 찾아가 하룻밤을 보낸다.
T는 돌아오지 않는다. 한 달 뒤 아내는 실종 신고를 내고 남편의 방에
쌓여 있던 책더미 속을 뒤진다. 컴퓨터를 알지 못하는 아내는 파일 속에
담긴 남편의 글과 편지를 찾아 읽지 못한다.
나 (해설)우림 엄마가 사무실에 나오지 않자 사장은 새로 여자를 구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여자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우르르 사무실 안으로
몰려와 도시락을 먹었다.
여자1 (여자들 대여섯명 웅성)유림이 엄마가 왜 그만뒀다면, 유림이 아빠가
드디어 베스트셀러를 써서 팔자를 고쳤기 때문이래.
여자2 에이, 아니야. 소문 듣자하니 (목소리 낮추고)유림 엄마가 어떤 사내
하고 눈이 맞아서 도망을 쳤댜.
여자3 에이, 거짓말. 유림 아빠가 죽을병에 걸려서 옴짝달싹 못한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나 (해설)여자들은 앞뒤도 맞지 않고 신뢰도 가지 않은 얘길 저마다
한 마디씩 쏟아놓았고, 부동산 사장 역시 그녀들보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주지는 못했다.
내가 유림 엄마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무척 불안정해 보였다.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고 아무런 연락도 없는 남편이 혹시 사고를
당한 건 아닌가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방정맞은 상상을 했다.
나 (하품하고)
<효과> (방문 열고 거실로 나가는)
민장우 여행 가고 싶으면 언제라도 말해.
나 (해설)서재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문밖에서 내가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서 있었다. 나는 책상에 누워서 소설가 T를 생각하고 있던 걸
그에게 들킨 것같아 놀랍고 두려웠다.
나 가고 싶지 않아요 아직은.
나 (해설)나는 바다가 보이는 콘도에서 그와 며칠 머무는 것보다 물건을
사려는 상인과 손님 사이에 실랑이가 오가는 재래시장이나, 아무것도
사지 않더라도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쇼핑센터를 돌아다니고 싶었다.
늘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이나 말끔하게 정돈된 욕실은 머리를 아프게
했다. 꼭 그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입신을 하고 입덧을 해보고 싶은
욕구가 속는 걸 주체하기 어려웠다.
민장우 (소파에서 일어나며)그럼, 난 들어가 잘게.
나 부탁이 있어요.
민장우 그래. 뭐든지.
나 이제부터 집안일은 내가 할게요. 장을 보는 것도요.
민장우 그럴 필요 없어.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열심히 글만 써.
나 글이 잘 쓰이지 않아서 그래요 생각처럼….
민장우 힘들어하고 있다는 거 알아. 글을 쓰는 게 물건을 찍어내는 일도 아닌데
마음먹은 대로 뚝딱 되는 건 아니겠지. 당신에게 방을 주고 돈을
주겠다는 약속, 아직 유효기간이 많이 남았잖아.
<효과> (민장우, 침실로 들어가고 문 닫는다)
나 (해설)그러나, 난 아침에 일어나 파출부가 오기 전에 아침밥을 차렸다.
그는 처음엔 놀라는 눈치더니 결국은 화를 냈다.
민장우 나는 파출부와 살기 위해서 너와 결혼한 게 아니야!
나 (해설) 그러나 나는 그를 무시했다.
나 아주머니, 오늘부터 내가 집안일을 할 거니까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나오세요. 자, 세탁기부터 돌리고…
<효과> (세탁기 단추 누르고)
(세탁기 돌아가는)
나 빨래가 되는 동안에 청소를 해야지?
<효과> (진공 청소기 돌아가는)
나 (콧노래 흥얼거린다)
나 (해설)그는 밥도 먹지 않고 외출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청소를 하고 식탁을 치우고 개수대에 잔뜩 쌓인 그릇들을 닦았다.
나 (해설)집안일을 끝내고나서 외출 준비를 했다. 샤워를 하고 속옷 바람으로
화장을 했다.
<효과> (장롱 열고)
나 어떤 것을 입을까. 으음…좋아, 오늘은 청색 재킷을…(걸쳐보고)어이구,
어림도 없이 작네. 으휴-, 아기를 낳은 적도 없는데 어쩌다 이렇게 뚱보가
돼버렸나. (바지를 낑낑거리며 끼워보다가)바지도 작고…맞는 옷이
있어야지…(옷 팽개치고) 으휴-, 거울에 비친 저 여자가 나란 말이지?
목덜미에 두 겹으로 주름이 잡힌 돼지 같은 여자가 나, 강미월이라고?
결혼한 지 5년이나 지났는데, 에어로빅이나 수영을 함께 다닐 이웃 하나
사귀지 못한 한심한…. (핸드백 챙겨들고 나서며)그래, 백화점에 가서
옷부터 사는 거야.
나 (해설)나는 그가 만들어준 신용카드로 다섯 벌의 옷을 사고, 지하 식품
매장에서 고기며 생선이며 야채, 그리고 과일들을 잔뜩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 (컴퓨터 자판 두드리며)그렇지! 요리법이 아주 상세하게 나와 있네.
노트북이 이제야 한 구실을 하는구먼. 먼저 생선을 씻어서 한 쪽에
놓고 생강을 갈아서…
나 (해설)요리 사이트 속에는 여자들의 수다가 감초처럼 끼여 있었다.
컴퓨터는 글을 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이제 요리를 위한 도우미 이거나
한낮의 농담이 되었다.
<효과> (지지고 볶고 요리하는)
나 (해설)나는 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요리를 만들기 위해 땀을 뻘뻘
흘려가며 부엌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만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나는 이미 식어버린
탕과 샐러드를 호자 꾸역꾸역 먹고, 남은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효과> (설거지 하는)
민장우 (화나서 버럭 내지르는)왜 아이처럼 떼를 쓰는 거지?
나 (묵묵히 설거지 하며 담담하게)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하루 종일
부엌에 서 있었어요.
민장우 니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요리였니? 소설을 쓰겠다는 미월이는
어디간 거야!
나 (해설)나는 '소설을 쓰겠다는 미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기가
손가락 끝으로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글을 쓰려 했던
나 자신을 요리해서 눈에 띄지 않게 먹어 치우고 싶었다.
<효과> (나, 거실에서 생각에 잠겨 왔다갔다)BG
나 (해설)그가 사라진 뒤, 나는 그를 찾을 아무런 방법도 알지 못했다.
나 내가 그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게 뭐지? 그 사람은 오빈이라는 사람이
주인으로 있는 '슈'라는 카페에 자주 간다…그거 말고는? 없잖아.
그 사람을 어디서 어떻게 찾지? 어쩌면 그 사람한테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지도 몰라. 좋아. 글을 쓰는 거야. 그 사람 이야기를…
<효과> (서재 문 열고 들어가고)
(먼지 낀 컴퓨터 후후 불고) (닦는다)
나 (해설)나는 비로소 굳게 닫힌 서재문을 열고 들어가,서재 구석에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인 585 컴퓨터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정성 들여
먼지를 닦아냈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내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율했다. 그러나 컴퓨터만 열면 당장이라도 아우성을
치며 터져 나올 것 같던 글은 웬일인지 머릿속에 회오리바람만 만들 뿐,
좀처럼 문장이 되어 빠져나오지 않았다.
<효과> (커튼 치고)
(침대에 벌렁 눕는)
나 (해설)나는 식료품을 사기 위해 외출을 하지 않았고, 하루 종일 커튼을
쳐놓았다. 졸음이 쏟아지면 침대에 쓰러져 자고, 다시 눈을 뜨면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았다.
<음악> (브릿지)짧게
나 (해설)등단작이었던 '소설가의 아내'를 쓰게 된 계기는 유림 엄마의
갑작스런 실종 때문이었다. 그녀의 실종은 소설가 남편이 사라졌기
때문일 거라는 개 내 추측이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소설가
T는 마치 내 몸속에서 나온 사람처럼 친숙하고 자연스런 존재였다.
나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암시를 하면서 소설을 끝냈었다.
<음악> (브릿지) 짧게
나 (해설)5년을 함께 살았지만 그는 내게 너무 낯선 존재였다.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쓰다가 결국 나는 오빈을 만나기 위해 카페 수로 갔다.
<효과> (카페 문 밀고 들어가는)
종업원 어서오세요. 아, 안녕하세요?
나 (들어가서)주인 아저씨 어디 계시죠? 아, 저기 있네.
오빈 오, 어서 오세요.
나 (자리에 앉고)우리 그이 여기 안 왔나요?
오빈 오늘이요?
나 오늘이고 언제고…. 그 사람이 지금 며칠 째 종적을 감췄다구요.
오빈 (대수롭지 않게)글쎄요. 우리 카페에도 며칠째 안 왔는데요? 그 친구
종종 아무 연락도 없이 며칠씩 안 오다가 나타나기도 하고 그래요.
나 그 사람 갈만한 데가 어디지요? 캐나다에 계신다는 부모님 말고
다른 가족들은 어디 살지요?
오빈 글쎄요. 나도 그런 건 모르는데요.
나 (화나서 소리 버럭 지르는)아니, 친구라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게
이상하네요. 그럼, 그 사람 이름이 민장우라는 사실은 아세요?
오빈 왜 이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친구도 있는 법이죠. 나이차이가
열 살이나 나는 사람들이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 (해설)나는 고개를 들고 오빈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늘 조명 아래서 보았던 탓인지 오빈의 나이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오빈도 나도 그에 관해 아는 것 너무 없었다.
나 (에코)그림 그리는 여자가 벌거벗은 그의 몸을 그려 주지 못 했던 것처럼,
나도 그의 얘기를 쓰지 못했어. 아마 그는 지금쯤 어떤 여자를 만나서
또 다른 주문을 걸고 있는 건 아닐까?
<효과> (밤거리-자동차 다니고 사람들 왕래하는)BG
나 (터털터덜 걷다가)도대체 집이 어디 있는 거야? 그러니까 저 쪽이
운동장이고, 저 쪽이 장충단 공원 가는 길, 저어 쪽이 동대문…맞잖아.
그런데 여기서 어디로 가지? 내가 비록 외출을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5년을 살았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다니…
아이고 다리야.
나 (해설)동대문 운동장 부근을 몇 바퀴나 돌았을까? 더 이상은 한 걸음도
걸을 힘이 없어 길바닥에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장사를 하는 대형 쇼핑센터 분식과 차를 파는 노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나 (휘장 걷고 들어가며)아주마 요기할 것 좀 주세요. 저 할아버지
드시고 있는 거…아, 저도 칼국수 한 그릇…(혼잣말-에코)아니,
저 아줌마는 유림 엄마?
유림모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따끈따끈한 국수 드시고 가세요!
나 (해설)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아무리 늦은 밤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10년이 지났지만 유림 엄마는 별로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올이 풀린 스웨터 위에 두툼한 조끼를 받쳐 입고 낡은 털목도리를
목에 두른 채 오가는 손님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내게 가져다준 칼국수 그릇 속에는 바지락에다 호박이며 감자가
넘칠 듯 푸짐하게 담겨 있었다.
<효과> (후후 불어가며 칼국수 먹는)
나 (혼잣말-에코)틀림 없는데…유림 엄마가 틀림없는데…. (일어서며)
아줌마 국수값 여기 있습니다.
유림모 예에.
나 (해설)끝내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칼국수값을 내고 나오려는데
웬 남자가 그녀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남자를 보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유림모 (소곤거리듯)에이, 그러지 마시고 속 든든하게 한 그릇 잡수고
가시라니까요.
나 (해설)칼국수 한 그릇 먹고 가라는 그녀와, 그냥 돌아가겠다는 남자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고, 결국 남자는 앉은뱅이 의자에 앉았다.
나 (혼잣말)오늘 내가 만난 그 여자가 정말 유림 엄마였을까?
나 (해설)집에 돌아온 뒤 한동안 내 머릿속에서 남자의 굽은 등과
나무젓가락을 쥐고 있는 길고 따뜻해 보이던 손가락이 지워지지 않았다.
<효과>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BG
나 (해설)유림 엄마를 만나고 동라온 낭부터 나느 밤낮을 가리지 않고서
컴퓨터 앞에 매달렸다. 내가 쓴 소설은 유림 엄마나 소설가 T의 얘기가
아니라 사라진 그의 이야기였다. 한 달 사이 나는 몰라볼 만큼 살이
빠졌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매달렸던 소설은 원고지 1천 매 분량이
넘었다. 소설이 책으로 나온다 해도 그는 읽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나 (마지막 자판 두드리고)됐다, 끄으읕!
나 (해설)소설을 탈고하는 순간 나는 그를 떠나보냈다. 이 집을 나서는
순간 그의 존재는 완벽하게 사라지고 오로지 활자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효과> (프린트 출력하는)
나 (해설)나는 완성된 소설을 프린트하고 디스켓에 복사해서 가방에 넣는다.
나 (장롱 열고)여기 있는 옷들도 그 사람의 신용카드로 산 거니까 가져갈
필요 없고…(장롱문 닫고) (걸어와서)노트북에다가는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으니까 (노트북 책상에 올려놓고) 여기 두고 가면 될 것이고…
(가방 지퍼 잠그고)이게 전부인가?
<효과> (양손에 가방 들고 거실로 나오는)
(거실 창문 여는)
(거친 바람 불어닥치는)
나 아이고, 날씨 한 번…
<효과> (창문 재빨리 닫고)
(커튼 치는)
나 길을 떠나기에 그리 좋은 날씨는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떠나기 좋은
날은 없다.
<효과> (현관문 열고 밖으로 나오는)
(계단 걸어내려간다)
나 (에코)어쩌면 그 사람은 집으로 오는 길을 잃어버렸는지도 몰라.
내가 카페에서 오빈을 만나고 돌아오다가 집을 찾지 못해 한밤중까지
헤매고 다녔던 것처럼.
<음악> (엔딩)
진행자 지금까지 출연-------, 음악--------, 효과-----였습니다.
-이 작품은 형식상 전형적인 소설가 소설인데요, 신인 작가 강미월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창작에 전념하지 못하다가, 막상 여유로운 공간과 돈 걱정을
안 해도 될 만큼 풍족한 환경이 주어졌는데도 5년 동안 단 한 줄의 글도 못
씁니다. 그런데 민장우라는 남자가 실종된 뒤에 창작 의욕을 불태운다는 내용
인데, 작가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창작 행위와 삶의 경험
은 서로 떼놓고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메시지인가요?
서성란씨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 작품집이 금년 4월에 나왔는데, 지금 쓰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는 작품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진행자 라디오 독서실 오늘은, 서성란 단편소설 '소설가의 아내'를 함께
감상하셨습니다. 저는 다음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시그널 + 클로징
나오는 사람들
나 - 여. 강미월. 20대중반. 신인 소설가.
J - '나'의 여고 동창
Y - 위와 같음
A - 위와 같음
민장우 - 30세. 화가나 소설가를 애인 혹은 아내로 맞아들여서 그들의 창작 행위를 통해
정체 모를 성취감을 맛보고자 하는 복잡한 사고를 가진 인물
언니 - 30대( 주인공 '나'의)
유림모 - (30대 중후반)유림 엄마. 무명작가인 남편을 절대 숭앙하고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인물.
여자1 - 부동산 분양 전단을 나눠주고 일당 받는 주부
여자2 - 위와 같음
여자3 - 위와 같음
오빈 - 30대. 민장우의 친구. 카페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