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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를 확인해야 산다.」
말씀: 갈라디아서 1장 1-10절
Ⅰ. 자기 뿌리와 영향권을 확인라! (From, By)
사울이 바울이 된 사건은 외적 행동의 변화나 성격의 변화만이 아니었다. 사울에서 바울로의 변화는 이름을 넘어선 전인격의 변화요. 근본 뿌리의 변화였다. 바울에게 일어난 변화는 갈리디아서 1장 1절에서 전치사 ‘From’과 ‘By’를 통하여 분명하게 표출되고 있으며, 말씀 앞에 서있는 우리들에게 문법 넘어의 풍성한 영적 변화를 읽어내도록 한다.
바울은 갈리디아에 있는 교회들을 향하여 편지를 쓰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밝힌다. 바울의 자기소개는 매우 떨리고 긴장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우선, 바울은 예수를 추종하던 자들을 고발하며 죽이던 적대자요, 원수였다. 게다가 갈라디아 지역은 로마의 속령지로서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헬라인, 로마인, 유대인등이 섞여 살고 있었기에 바울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 하나. 갈라디아 교회가 이미 복음이 인도하는 ‘자유의 삶’을 저버리고 옛 유대교의 규칙 즉, 안전한 체제를 따라간다는 사실이 이미 바울을 예민하게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정황 가운데 바울은 자신에 대한 소개를 그 어느 때 보다도 신중하고도 분명히 표출해야 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말해야 했다.
NIV 성경은 바울의 첫 인사부분을 이렇게 번역한다. <Paul, an apostle-sent from men nor by man, but by Jesus Christ and God the Father, who raised him from the dead->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영어 전치사 ‘From’은 X가 Y에서 떨어져 있고, Y가 X의 시작 지점일 때 전치사 From을 사용한다. 그래서 전치사 From은 근원, 인과관계, 추리의 바탕 등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전치사 ‘By’는 X가 Y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 있을 때 쓰인다. 어느 연못에 돌 하나가 떨어졌다고 생각하자, 떨어진 자리로부터 파문이 퍼져나가다가 그칠 것이다. 돌인 Y가 그리는 파문 안에 X가 있으면 X는 Y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향권 안에 있으면 X는 당연히 영향을 받는다. 즉 X by Y는 X가 Y의 파문이 뻗치는 곳에 있는 관계를 나타낸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사람에 뿌리를 둔자도 아니요, 사람의 영향을 받아 사도가 된 자도 아님을 천명한다. 그러면서 바울 자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영향권(계시, 사랑, 은혜) 안에서 종이 된 자라고 말한다.
바울의 바울됨은 하나님께 뿌리를 둔 것이며, 바울의 삶과 일상의 행동, 가치, 사유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향권(관계망) 속에서만 이루어진다는 놀라운 고백이다. 그런 바울, 뿌리 의식과 삶의 힘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를 직시한 바울, 진리를 직시했던 자였기에 세상의 시험과 죽음도 그를 넘어뜨릴 수 없었던 신앙의 영웅으로 확고히 살았던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뿌리 의식을 통하여 자기 정체성과 그로인한 안정을 찾기 마련이다. 경제 불황과 취업란, 전쟁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2009년 우리들은 과연 어디에 뿌리를 둔 삶인가? 과연 우리의 근원, 뿌리, 영향력의 모태는 어디인가?
요즘 ‘엄마를 부탁해’가 母性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소설가 신경숙씨의 장편 소설로서 작년 11월초 책이 나오자마자 첫달에 9만 8000부가 팔리더니, 이후 매달 12만~13만부씩 나가면서 순식간에 50만부를 돌파했다. 베스트셀러 종합순위 1위를 차지고하고 있다. 1만권 넘기는 책이 가문에 콩 나듯 하는 극심한 출판 불황 속에 그야말로 ‘신드롬’이다.
‘엄마를 부탁해’는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왔다가 지하철역에서 실종된 엄마를 찾아나선 아들과 딸, 남편이 각자 회상을 통해 엄마의 삶을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는 형식을 취한다. 문단에서는 ‘엄마를 부탁해’신드롬이 경제 위기를 맞아 사회적으로 모성애를 갈망하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엄마’라는 말에 친근감만이 아니라 ‘나 좀 돌봐줘’라는 호소가 함께 배어 있다는 것이다. 즉, 경제적 위기 속에 자신의 뿌리(근원), 모태를 그리워하며 안정을 되찾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넘어서길 원한다. 인간의 근본 뿌리, 영향권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진리를 깨닫는 자가 진정한 평안과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는 자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 12:1)”고 말했던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넘어섬이 맹종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자 하나님’의 비밀은 ‘불합리’가 아닌 ‘비합리’의 영역이요. 믿음의 결단이 요청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창조자의 비밀을 온전히 알 수 있는 자가 누가있는가? 나의 사지백체는 분명 나의 것이다. 나의 것이라면 두말 할 것도 없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 머리카락은 분명히 내게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돋아나는 흰머리를 스스로 막아낼 수 는 없다. ‘창조’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의학의 높이가 하늘로 치솟아도 사람이 만든 인조뼈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창조해 주신 뼈의 완전성을 대신할 수 없다. 마음만 먹으면 못 만들 것이 없는 인간의 과학도 인간의 생명인 피는 만들 수 없다. 그렇기에 무한한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이 도저히 파악하며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겸손히 그분 앞에 설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자, 뿌리이심을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인생의 과정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뿐이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인간이란 지극히 우연하게 태어난 존재일 뿐이고 이 경우, 인간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가 되신다. 그분이 우리의 영혼의 뿌리, 근원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모태의 영양분, 영향력 안에 살아가길 소망한다.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화는 우리 안에 풍요로 넘치게 될 것이다.(갈라디아서 1:3)
Ⅱ.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는 자
바울은 자신이 자신되게 하는 근원, 뿌리를 명시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로서 고백한다. 예수와 그리스도, 하나님과 아버지. 기실 A와 B는 ‘지시 대상’과 ‘고백언어’의 관계라 말할 수 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다. 이 짦은 문장 안에는 조직신학의 신론과 기독론의 복잡한 관계와 설명을 일축시키는 놀라운 신비가 숨어 있다. 이 짧은 문장을 살펴봄으로써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재확인하길 바란다.
1) 예수 + 그리스도
공관복음의 기자 마태는 1장 16절에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을 가르켜 그리스도라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란, 히브리어 ‘메시아’와 같은 뜻의 헬라어로서 <구원자>란 의미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예수께서는 친히 우리의 죄값을 치러주시므로,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본질적인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셨다. 그래서 그 분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 받은 속죄양이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 죄값을 대신 치를 자격과 능력을 갖고 계셨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된 것이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복음 1:29)”
바울은 예수를 성인이나 정치 혁명의 한 선동자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자로 고백한다. 십자가의 피흘림과 살아나심이 자신의 구원과 연결 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인하여 바울은 새롭게 태어났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향해 말씀하셨던 ‘중생’의 경이로움이요. 새로운 탄생의 시작인 것이다. 이제 사람에게 뿌리를 두고, 그 속에서 주어지는 영양분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뿌리가 변하니 삶의 방식과 열매가 변하는 것이다.
2) 하나님 + 아버지
오랜 시간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목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다. 유목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참으로 적합했던 그림 언어라 생각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편 23)” 그런데 놀라운 혁명이 일어났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이다. 넘어 설수 없는 선, 질적인 차이가 붕괴된 것과 같다. 어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가?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한다는 말인가? 아버지라 명명함은 동시에 발화자의 신분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 4:6)”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위력적이고 엄하신 남성상으로 이해해왔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도 그 선상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 중 한부분일 수는 있겠으나 전체로서의 하나님 형상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하나님을 남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당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만의 형상이 아님을 뜻함과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여자의 형상만도 아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라는 고백을 가부장적 틀거리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함이 가족 관계성의 수준까지 이르렀음으로 받아들임이 적합하다. 하나님은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지니신 아버지이시다.
고열에 시달리는 어린 자식이 밤잠을 자지 못할 때, 어머니는 그 아이의 침상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만 듣고서도, 그 표정만 보고서도,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차린다. 철길에서 노는 아이를 향해 기차가 덮쳐들 때, 그 사지로 뛰어들어 아이를 살려내고 대신 죽는 사람은 언제나 어머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이처럼 부드럽고 포근하고 그윽하면서도 끝없이 깊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위력적인 부성뿐 아니라 모성을 가지신 분이다. 그런분을 우리는 우리의 창조자로 고백하며 그 위에 터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3-4)”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소망하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기를 기도한다.
Ⅲ.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삶을 살자!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과 구별된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삶이다. 일상의 사람들은 자기와 가족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기쁨과 유익을 위하여 살아간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엄밀한 기준과 조명 속에서 보면 자기 중심주의의 확장이다.
그리스도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자다.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며 드러내시는 계시의 분량을 삶아내는 삶이다. 하나님께 생의 뿌리를 내린 사도 바울은 담대히 선언한다.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사람에게 좋게 하랴?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맞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터를 둔 자며, 성령으로 거듭난 자이기에 세상의 기쁨을 위해 살 수 없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드렸던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열매를 맺고자 살 뿐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자신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많은 당대 갈라디아교인들은 하나님으로 뿌리를 내렸으나 그 줄기와 열매는 세상의 기쁨을 향해 기울어갔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책망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라디아서 3장 3절)”
우리는 하나님께 뿌리를 내린자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뿌리가 바뀐 만큼 그 줄기와 열매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성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분별력을 향상시키며, 말씀이 육신이 되셨던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 마르코 야코보니가 쓴 「미러링 피플」을 보면,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내는 본능적인 능력이 있다고 한다. 더욱이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느낀다. 다른 사람의 몸짓을 보거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치 자신이 직접 행동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우리 뇌에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과학자들은 거울 뉴런이 발견되자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준 비밀이 밝혀졌다고 흥분했다. 감정의 공감이나 문화, 언어, 기술의 습득 등 인간이 인간이 되는 비밀이 숨겨 있다고 다들 환호성을 쳤나보다. 그런데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거울에는 어두운 뒷면이 있다. 바로 폭력성의 감염이다. TV, 영화, 비디오 게임에서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는 폭력과 모방 범죄, 모방 폭력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기쁨을 향하는 자들은 세상을 모방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성품을 모방하며, 말씀의 삶을 모방하고자 힘쓴다. 이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요. 그분의 아들, 딸로 귀히 여김을 받게 된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왜냐? 우리의 뿌리와 영향권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기에 그리스도의 성품,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자 하는 삶은 자연스런 귀결인 것이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별된 능력의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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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들의 영원한 본향을 찾게 하시려 대속하신 주님의 은혜 감사드립니다. 그곳에 뿌리를 단단히 내려 세상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