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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2005년 한 해 동안 나눈 말씀 가운데 어떤 말씀이 가장 마음에 남아 있습니까? 말씀을 준비하고 함께 나눈 제 입장에서는 사도행전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습니다. 특히 22장 이후의 말씀은 더욱 그렇습니다. 행22장 이후에는 바울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해서 얼만큼이나 거룩한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3차 선교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박과 환난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구금생활은 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받았던 공식적인 재판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재판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받은 것이었습니다. 벨릭스에 이어 가이사랴의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밀려있는 소송을 마무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했던 그는 산적한 문제들을 원칙대로 잘 풀어갈 수 있었지만, 바울의 소송 건만큼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지역 유지들의 압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사차 찾아온 아그립바 왕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청문회가 시작되자 바울에게는 다시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저와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에 대해서 변론하고 싶은 유혹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때 그는 철저히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었는지,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께서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그리고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체험한 이후 어떻게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진술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거 했습니다. 그것은 변론이나, 진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간증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마치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베스도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26:24b)고 소리치며 막아섰습니다. 그는 바울이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미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또 베스도가 바울의 폭넓은 지식과 논리적이고 막힘이 없는 달변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과 소명에 대한 철저한 헌신이 바울로 하여금 미쳤다는 말을 듣게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소리에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그립바 왕을 향해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행26:26-27)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은 유대 땅 어느 한쪽 구석에서 이루어진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인근 지역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역사에 밝은 아그립바 역시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울의 간증을 통해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이유가 종교적인 갈등 때문이라는 것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아그립바 만큼은 소송의 쟁점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혹시 총독 베스도는 모를지라도 아그립바 당신만큼은, 내가 말하는 내용들이 역사적인 사실인 것을 알지 않느냐”는 물었던 것이고, 그 순간 그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역시 정치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행26:28b)라는 말로 회피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바울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그를 향해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26:29)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 미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의 말과 행동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그립바를 위해 준비된 청문회에는 가이사랴의 거의 모든 고관 대작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반면 그들 앞에 서 있는 바울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초라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사슬로 묶여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권세 잡은 자들을 향해, 자신의 마음에 가득 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침없이 전했습니다. 자신은 지금 미결수의 신분이지만, 그래서 2년째 갇혀 지내는 형편이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진 하나님의 비전을 드러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 담긴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비전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고, 위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안전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명에 충성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감동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정도는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 채워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류의 빛과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득 채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에 가득 채워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바울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져 있었던, 오늘 우리의 마음에 가득 채워져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올라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2절입니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였던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는 제국을 다스리는 탁월한 통치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점령지를 무력으로 다스리지 않고,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문화와 종교와 생활 풍습 등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한 인정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과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정책과 통치를 바탕으로 로마에는 오랫동안 없던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요, 로마의 대부”라는 칭호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고 승원장 또는 대제사장”이란 칭호를 받아들인 그는 모든 종교의 최고 자리까지 차지했습니다. 게다가 피살된 외 증조부인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하고,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섬기도록 명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그는 수많은 업적을 세운 위대한 인물인 동시에 하나님께는 돌이키리 어려운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탁월한 정치인이면서 행정가이기까지 했던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로마를 비롯해서 속한 모든 나라들까지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또 그 인구 조사를 하게된 배경에는 군인을 징집하고, 세금을 거둘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의 전체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은 물론 로마에 속한 모든 나라, 곧 지중해 전역의 유럽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모든 백성들이 움직여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통적으로 인구조사를 싫어했습니다. 다윗의 잘못된 인구 조사로 인해 7만 명이나 죽은 저주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도 아닌, 지배국인 로마의 황제가 인구 조사를 위한 강제적인 칙령을 내리자 크게 반발했습니다. 바로 이때 생겨난 것이 열심당입니다. 그들은 로마 정책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임신해 이미 만삭인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3-5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미5:2절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인류의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떡집 곧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구스도의 칙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구스도가 호적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내렸어도 로마 제국 내에만 내리고 식민지에는 내리지 않았더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128km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걷는 것이 교통수단의 전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황제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만약 황제가 조금만 빨리 그 명령을 내렸었다면, 마리아와 요셉은 호적을 등록한 후에 다시 나사렛으로가 가서 아기 예수를 낳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좀 더 늦게 내렸다면 역시 나사렛에서 아기 예수를 낳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을 등록했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인구조사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당신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이용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① 그것은 인구조사의 때를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로마 황제가 인구조사의 때를 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그 때를 정하셨던 것입니다.
갈4:4-5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로노스”(khron'-os)는 갈4:2a절의 “아버지의 정한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작정한 기간이 지났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인간의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 것입니다. ② 또 하나님께서 주목하신 사람은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 황제가 아니라 이름 없는 요셉과 마리아였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당시에 오늘날과 같이 신문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떤 기사가 났겠습니까? 로마 황제가 인구 조사 명령을 내린 것이 대문짝 만하게 났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국고가 얼마나 늘어날지도 기록되었을 것이고, 그 인구조사에 응하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지도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비하면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낳은 것은 아무런 기사거리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신문에 몇 줄로 기사화 되었다해도 거기에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인구조사가 자기 나라의 정치와 경제 등에 미칠 영향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로마 황제에게 집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함께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집중하셨고, 그들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주연이었고, 로마 황제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작년 크리스마스 때에 요셉과 마리아에게 임했던 위대한 사명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 벽촌까지 그들을 찾아가셨던 이유를 생각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만큼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 줄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들이 비록 가난하고, 소외되어 있는 볼품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당신의 뜻을 이루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믿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의 뜻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그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이름 없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집중하셨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일은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믿음대로, 당신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있는 그들을, 당신의 섭리를 통해, 당신께서 인류에게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장소인 바로 그 떡집으로 요셉과 마리아를 이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저와 여러분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인도를 구하십시오. 믿음으로 순종하십시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는 마리아와 요셉을 받아줄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6-7절입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셨던 예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과 성장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한편 본문은 “해산할 날”이 현재대로 12월 25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전승에 따라 보통 겨울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킨 것은 336년부터였습니다. 여기서 “사관”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탈뤼마”(katal'oomah)는 “객실, 여관”등을 뜻합니다. 그런데 해산할 날이 다가왔을 때 보잘것없는 젊은 부부에게 주어진 공간은 객실이나 여관이 아니라 가축 우리였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곳간(cave)이었을 수도 있고, 또는 집이나 사관의 일부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인류의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곳에 있던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요1:9-11절은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말씀합니다. 또 사1:2-3절은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황제나 총독이나 위대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셨다면, 사람들은 주님을 그렇게 대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히 소외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후8:9절은 예수께서 그렇게 오신 목적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 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철저히 낮아지신 것은 우리가 어떤 비천에 처할지라도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짐승의 구유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루종일 일하셔서 피곤하신 순간에도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돌아갈 집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철저히, 정말 철저히 낮아지셨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철저히 낮아지셨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철저히 낮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에 가득 채워진 그 소원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동방의 박사들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그들은 각자 선물을 준비하고 아기 예수를 찾아가 경배했습니다. 마2:11절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전승에 의하면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한 박사들은 개스퍼(Gaspar)와 멜쵸(Melchior)와 벨사살(Balthasar)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먼저 도착한 개스퍼는 부자였습니다. 가브리엘로부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는 선물을 가져와야 한다”는 말을 들은 그는 깔끔하게 포장된 상자를 꺼내며 “순금 덩어리들을 가져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 자신을 보여주는 소중한 것이어야 한다”는 가브리엘의 말에도 “자신이 준비한 것이 바로 그것”이라며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기 예수께 내민 두 손에는 황금이 아니라 크고 흉칙한 망치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당황한 그에게 가브리엘은 “당신의 손에 들려진 망치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당신 자신만을 위해 휘둘렀던 탐욕의 망치”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자 부끄러워진 그는 도망치듯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이 그를 막으며 선물을 드리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당황한 듯 “어떻게 그런 부끄러운 망치를 드릴 수 있겠느냐”고, “아기 예수는 그것을 들어올릴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브리엘은 “그분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탐욕의 망치를 두고 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당신을 멸망시킬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개스퍼가 허둥대며 나감과 동시에 학자 멜쵸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는 가브리엘의 질문에 “신비한 왕국의 향수인 유향”을 가져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선물은 당신 영혼의 가장 소중한 것이어야 한다.”는 가브리엘의 말을 들은 그는 가져온 은 호리병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그 손에 들려진 병은 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거칠고 얼룩진, 투박한 토기 병이었습니다. 또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본 그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유향이 아니라 식초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가브리엘은 그에게 “그것은 당신의 마음을 아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사무친 비통함과 분노와 화가 이것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추구했던 당신의 삶은 독소로 채워졌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실망한 멜쵸 역시 부끄러움에 병을 감추려 했지만, 가브리엘은 그것을 두고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떻게 그 수치스러운 것을 두고 가겠느냐고, 또 어린 아기의 입에 닿기라도 하면 어떡하겠느냐”고 말하는 그에게 “그 염려는 하늘에 맡겨야 합니다. 식초도 쓰일 때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재판관 벨사살은 놋쇠로 테를 장식한 상자를 내놓으며, “몰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은 가장 용감하게 싸운 전쟁에서 얻은 가장 귀한 노획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그의 본질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용감한 전사였던 그가 내민 손에는 날카로운 창이 들려져있었습니다. 순간 깜짝 놀란 그는 “아니, 이럴 수가! 원수들이 저주했구나.”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때 가브리엘은 “그렇습니다. 수천 명의 원수들이 당신에게 저주를 퍼부어 당신의 영혼을 창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일으킨 전투는 또 다른 전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정복하며 살아온 당신이 정복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창은 아기가 찔릴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기에 가져가겠다”는 그에게 “두려움은 하늘에 맡겨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이 가져온 선물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인류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되기 위해서는 흉칙한 망치가 필요했습니다. 식초로 변한 쓴 포도주가 필요했습니다. 날카로운 창이 필요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져 있던 그것들로 인해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결론 이제 이틀만 지나면 성탄절입니다. 잠4:23절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인격 활동의 중심인 마음을 잘 지키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크고 최우선적인 과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마음에 가득 채워진 것대로만 예수 그리스도께 선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가득 채워진 저와 여러분을 위해 아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 가득 채워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무엇을 선물로 드리려고 하십니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준비한 선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마음에 채워진 것으로만 선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만한 선물을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