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프게의 숨은 일화
1967년 <낙도 가는 연락선>제목으로 작곡 작사. 당시 정홍택 한국일보 기자가 <가슴아프게>로 바꿔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남진 노래인 <가슴아프게>는 1960년대 나온 인기대중가요 가운데 하나다. 4분의 4박자 트로트로 부르기가 쉽고 멜로디연결이 자연스럽다. 더욱이 맑으면서도 굵직한 목소리의 미남가수 남진이 젊은 시절 취입한 노래로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노래는 남진이 가요계데뷔 후 1년 만에 부른 가요다. 1966년 가수가 되기 위해 가출하다시피 집을 나와버린 남진은 <울려고 내가 왔나>를 데뷔 곡으로 가요계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는 처음엔 대중들의 눈을 끌진 못했다.
그랬던 그가 <가슴아프게>를 불러 단번에 뜨는 가수가 됐다. 연정의 대중적인 노랫말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바람을 타고 남녀간 만남이 자유스런 분위기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던 무렵의 시대상황을 잘 반영했던 까닭이다.
50대 이상 장․노년층들이 즐겨 부르는 이 노래의 원제목은 <가슴 아프게>가 아니었다. 노래제목이 바뀌어 탄생한 이 노래의 얽힌 사연은 이렇다.
1966년 남진이 서울 경복고를 막 졸업한 후 어느 날이었다. 남진이 국내연예기자 1호인 정홍택 당시 한국일보 기자(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전 한국일보 부장/월간 편집국장)를 우연한 기회에 만난 것이다. 그 땐 레코드취입 전으로 짧은 머리에 자주색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 나눈 대화를 보면 꽤 재미있다.
자네 가출했지?
네! 부모님들이 가수 되는 걸 하도 반대하셔서 나와 버렸습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부모님 속 썩히지 말고 공부나 하지 그래!……
남진은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없었다. 끝까지 가수가 돼야한다며 막무가내였다. 최희준 씨처럼 훌륭한 가수가 되는 게 꿈이다면서 오히려 좀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정 씨는 자신의 말이 도무지 먹혀들지 않자 겁을 주기로 했다.
자네 실력으론 가수 되긴 틀렸으니 일찌감치 그만둬!
그래도 더 노력할 테니 도와 주십시오.
결국 정 씨는 남진의 집념과 성의에 손을 들고 말았다. 남진이 가수가 될 수 있는 쪽으로 힘을 써준 것이다. 음반을 낼 수 있는 지구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연결시켜 주고 작사가, 작곡가와도 선이 닿게 했다.
경남 하동 출신의 작사가 정두수(본명 정두채/시인 정공채 선생의 동생)씨가 노랫말을 만들고 이미자 노래 등을 작곡, 인기를 끌었던 작곡가 박춘석 씨가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남진을 위한 음반취입 준비작업이 하나 둘 이뤄지고 있을 때 정 씨는 레코드사로 부터 연락을 받았다. 남진이 부를 노래작곡이 끝났으니 한번 들어봐 달라는 전화였다. 정 씨는 서울 충현동에 있는 작곡가 박 씨 집으로 갔다. 작사가 정두수, 지구레코드사 임정수 사장, 그리고 노래를 부를 남진이 와 있었다.
2층 작곡실에서 박춘석 씨가 남진이 부를 곡을 피아노로 쳐주며 의견을 내달라고 했다. 노래제목은 <낙도 가는 연락선>. 부드럽게 이어지는 멜로디와 그 시절 대중들 취향에 맞는 노랫말은 좋다고 느꼈으나 노래제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같은 의견에 작사가 정 씨 역시 동감한다며 제목을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노래제목들 대부분이 명사로 끝나는 게 전통이었으나 과감하게 부사나 형용사로 만들어보기로 하고 몇 가지 가제목들을 달아봤다.
최종적으로 정해진 건 <가슴 아프게>였다. 아프게란 부사로 노래제목을 단 것이다. 부사로 끝나는 제목이 드물었던 터라 노래는 나오자마자 눈길을 모았다. 방송전파를 타면서 남진 노래는 크게 히트했고 1967년 <가슴 아프게>란 제목의 영화까지 나왔다. 남진은 그 영화에서 남정임과 함께 주연을 맡아 가수 겸 영화배우로 날개를 달았다. 미남형 가수와 미모의 여배우 연기가 화제를 모아 노래는 영화와 더불어 상종가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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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프게.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