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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환영하자
우리가 부처님을 찬탄하며 지칭하는 명호 중 하나는 ‘세상의 지자’이다. 물론 우리는 이 명호가 부처님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호칭은 좀 더 실질적인 면에서 보면 ‘붓다’라고 불리는 존재의 긍정적 특성들을 단순히 찬탄한 것이라기보다 세상의 모습, 즉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상황을 숙고하는 자임을 의미한다. 이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묘사하기보다는 삶을 경험하면서 관조하고, 숙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성주의자라면 ‘사물이 어떻게 존재해야하는가’에 관한 논리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려 깊은 알아차림으로 사물을 대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에 보다 주목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호흡 자체를 알아차리게 될 때 호흡은 이와 같은 것이다. 여러분에게 어떻게 호흡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적이며, 우리 모두 추구해야 할 호흡의 기준은 분명히 있다. 감수성의 실상에 대한 경험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눈, 귀, 코, 혀가 있는 인간의 육체는 민감하고 그 삼수성은 ‘이와 같다’는 사실을 주목하면, 우리는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감수성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느끼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고, 기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주시한다. 우리는 느끼고 있는 것에 대한 생각 즉 ‘자신만의’ 감수성을 가질 수 있고, 또 이를 결함으로 여겨 스스로 둔감해지려고 애쓸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너무 민감하다는 것은 나약함의 신호이기도 하다. 우리는 감수성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다만 감수성이 이와 같음을 주목할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환경을 있는 그대로 주목할 때, 그것이 의식적 경험의 덧없는 본질과 만물이 어떻게 생겼다 사라지고 시작했다 끝나는가를 인식하는 쪽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세상을 아는 것’이다.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이와 같다’는 것 즉 세상은 감성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세상은 탄생과 죽음, 만남과 이별, 오고 감,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에 관한 것이며, 우리가 종속되어 있는 다양한 경험의 단계들과 특성에 관한 것이다.
여러분의 인식에는 이것이 분명한 현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몇 사람이나 실제로 경험의 관점에서 이러한 세상을 알고 있을까? 우리는 다분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한다. 개인의 한계성, 개인적 감정 혹은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것이 보통 세상을 이해하는 습관적인 방식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우리는 세상이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음 알게 된다. 개인이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에 구속되게 마련이다. 만일 우리의 정서적인 조건 안에서만 세상을 다룬다면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거야” 혹은 “나는 착하고, 나쁘기도...”라는 식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세상을,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인식하고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매우 인상적인 경험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끊임없는 불안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지*수*화*풍 4대 원소로 구성된 인간의 몸과 같은 형태로 의식이 존재함을 곰곰이 생각하라. 출생에서 사망까지, 태어나는 순간 즉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와 울음을 터뜨린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소리치기 시작한다. 이어서 감수성과 충격 그리고 초조함이 최후의 순간까지 이런 민감한 형태를 통해 생겨난다. 나는 여러분이 나름의 이상이나 생각에 근거해 판단하기보다 차라리 어떻게 출생하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길 권한다. 이것이 깨달은 알아차림의 상태라는 것이다. ‘눈을 뜨는 것’은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실상은 종종 우리의 비판적인 마음속에서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는 것으로 비춰질 것이다. 여러분이 국가와 정부는 어떠해야 하고 부모와 동료 등등은 어떠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면, 우리는 이상에서, 즉 ‘만일 모든 것이 완벽하다면...’이라는 너무 높은 기준에서 출발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이상적 세계의 완벽함은 우리가 절정의 순간이라 여기는 경험 속에도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절정의 순간은 이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 즉 절정의 순간들은 그 나름대로 경이로운 것이지만 지속적인 것은 못 된다. 우리 삶의 흐름과 움직임은 이런 의식적인 형태로 우리를 침해하고, 우리를 거기에 개입시킨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조건 지워진 세계의 ‘변화성’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접촉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괴로운가를 주목하라. 못마땅한 것들을 늘 있다. 날씨가 너무 춥거나 너무 덥고, 두통이나 요통을 앓기도 하며, 원치 않는 소음과 악취를 등과 맞닥뜨리고 접촉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끼고 쾌락과 고통을 경험한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쾌락조차도 괴로움이다. 우리가 쾌락을 좋아하긴 하지만, 지나친 쾌락을 즐기는 것 역시 피곤하고 괴로운 일이다. 이는 비판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몸을 가진다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임을 주목하라는 것뿐이다. 호흡은 이와 같고, 의식은 이와 같은 것임을 주목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과 생각에 얼마나 민감한지 고려해 보자. 특이한 음색으로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이도 있다. 어떤 말들은 상대방을 괴롭힐 수도 있다. 우리는 유쾌하거나 불쾌했던 과거를 기억한다. 우리는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들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실수, 실패 혹은 미숙했던 행동에 대해 많은 죄책감을 갖거나 후회하기도 하고 자기혐오감을 갖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20년 전에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에 완전히 사로잡혀 신경과민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의기소침해지고 극단적인 절망적인 상태로 내몰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탄생의 경험, 인간의 경험, 그리고 우리가 겪고 있는 민감한 상태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으로서 태어난다는 것은 진정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자살을 생각해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일어나는 초조함과 죄의식, 후회, 그리고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은 참고 견디기엔 너무나 힘겹고 과분한 일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심한 우울을 느끼며, 자실하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눈을 뜨고,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이러한 상황을 기회와 도전으로 여겨 깨우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항상 최선책이 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조건과 경험 속에서 지혜를 증장시킬 수 있다. 대부분 살면서 많은 좌절과 실망, 환멸, 그리고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런 상황을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인다면 어서 그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세상을 세상 그대로 보는 맥락 속에 둔다면 어떠한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가장 부당하고 끔찍하며 고통스럽고 난처한 상황에서도 배울 수 있는 믿기 어려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것들은 깨달음의 장애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깨달음을 얻는데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의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순탄한 삶을 살고 부유한 부모와 높은 지위, 아름다운 용모, 지성, 안락한 삶, 온갖 혜택과 축복, 좋은 물건들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선업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좋은 공덕이고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믿을 수 없는 도전이 다가와 나를 뒤흔들어 놓고 실제로 격분하게 했으며, 나를 좌절시켜 자살을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도록 했다. 오직 “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야. 이렇게 세월을 보내고 싶지 않아. 난 받아들일 수 없어”하는 생각만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러한 상황에서 눈을 떠서 삶에 제시된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무언가 배워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곧 도전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시련의 상황을 인간으로서, 즉 의식적인 존재로서 우리가 갖는 기회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도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그러한 것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가르침은 여러분을 지배하기보다 여러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고수해야 하는 이론적인 입장으로서 가르침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성된 알아차림, 마음 다함, 그리고 직관을 증장시키고 장려하는데 이용하는 방편으로서 가르침을 파악하는 것이다. 감정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진정으로 그 상황에 마음을 열라, 있을 수 있는 고통이나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쓰기보다 차라리 완전히 민감해져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부정적인 면에서의 단념이 아니다. 마치 세상은 나쁘고, 세상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기 마련이라는 식의 단념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앎’이란 연구하고, 관심을 갖고, 조사하며, 경험을 검토하고, 실제로 경험의 부정적인 면도 기꺼이 보고 느끼려는 자세이다. 이는 감각적인 쾌락이나 즐거운 경험의 추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가장 실망스런 경험들조차도, 즉 최악의 실패를 배움의 기회와 깨달음의 기회로서 간주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천상의 메신저로서 우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눈을 떠라!”고 말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로병사를 두려움과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천상의 메신저로 여긴다. 빨리어 두따는 일종의 메신저, 데바는 ‘천사의’ 혹은 ‘천상의’라는 뜻이다. 그들은 우리를 경각시키기 위해 보내진 천상의 메신저라 할 수 있다. 일전에 어떤 기독교인이 나에게 불교에도 천사가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천사가 있어요. 하프를 연주하는 희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며, 매우 눈부시고 밝은 모습을 하고 있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 불교의 천사는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늙은이, 병자, 그리고 주검의 모습으로 나타나지요! 그리고 네 번째 천상의 메신저는 수행자, 즉 정신적 깨달음을 실현하고 있는 인간입니다.”
이것은 늘 나에게 관심사항이었다. 노인을 천사로 보고 병자, 정신장애자, 시체 혹은 비구와 비구니를 천상의 메신저로 본다는 사실이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로를 천상의 메신저로 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낱낱의 인간에 그치고 만다. 삭발한 머리와 노란 가사를 걸친 모습을 볼 때, 그들을 비구와 비구니, 선후배와 후배 등의 관점으로 - 이는 개인적 견해가 된다 - 보기보다는 천상의 메신저로 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서로를 깨닫도록 돕는 존재로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한 인간으로서 바라보고 있는가?
“이 비구는 이렇고, 저 비구는 저래.”
우리는 서로를 매우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수도 있고 시각을 바꿔 천상의 메신저로 볼 수 있다.
여러분은 나 같은 노인을 천상의 메신저로 볼 수도 있다. 나는 며칠 있으면 67세가 된다. 출가자란 면에서 천상의 메신저일 뿐만 아니라 노인이란 면에서도 역시 그렇다! 병들고 노쇠하면 보다 나은 천상의 메신저가 될 것이다. 여기다 죽기까지 하면 그 네 가지가 모두 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삶을 관조할 때, 어떻게 삶을 이용할 것인지를 알게 된다. 즉 인간 마음의 유연성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문화적 배경의 영향으로 이원론적인 사유로 틀이 정해지고, 조건 지워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기독교적인 배경에서 자란 까닭에 모든 것을 극히 이분법적으로 보도록 양육되었다. 사물을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며, 선하거나 악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유는 매우 틀에 박힌 방식으로 일체를 바라보는 태도였다. 여러분은 마음을 매우 제한적으로 이용해왔는데, 그것은 마음이 그다지 많이 움직이려 하지 않고 이런 양극단 사이에서만 움직였기 때문이다.
불교의 명상수행 중에 마음을 구상화하는 방식, 즉 사물의 형상을 창출하고 몸의 32상을 관조하기 위해 마음을 이용하는 방식에 주목하라. 태국에서 처음 이 수행법을 접했을 때, 몸의 32상을 서양 과학에 따라 생리학적으로 정확하게 생각하려고 계속 애썼던 기억이 난다. 내 자신의 32상을 관조할 때면 해부학 책을 뒤지거나 사진을 보는 게 보다 수월했다. 그러나 내 자신이라고 부록 있는 이것, 이러한 형태로 여기 지금 존재하고 있는 인체의 기관과 상태의 실상을 곰곰이 살펴보면, 그것은 내 자신으로 추정하는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이는 다양한 배움의 활용으로서 우리에게 마음을 다소 융통성 있게 쓰도록 요구하고 있다.
나는 지난주에 우리 자신을 긍정적인 특성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에 관해 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부정적 특성의 입장에서 보는 시각, 즉 무엇이 그르고, 무엇이 잘못인지 파악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서양 사람들인 유럽인과 미국인을 주목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비판하고, 자신의 잘못이나 선하지 않은 면 혹은 취약하다고 느끼는 점에 골몰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럴 때면 자신의 좋은 특성을 인정하는 것조차 그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느끼곤 했다. 나의 약점과 실수를 인정할 때는 정직했지만 정작 나의 미덕을 인정함에 있어선 자만이 될 수 있다고 느꼈다. 이곳 영국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돈을 벌며, 가진 학위이나 직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자랑하는 것은 아주 나쁜 습성으로 취급된다. 태국에서 몇몇 승려들은 학사, 석사, 박사, 차오쿤, 교구장, 세계불교도우의회 및 세계불교도회 부회장, 이런저런 단체의 이사 등 갖가지 직함이 적힌 명함을 가지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업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곳 영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러분은 자신의 학위를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둔 영국의 가정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 그것이 자랑처럼 보이기 때문에 매우 당혹스러워 한다. 여기에는 상당히 아름다운 영국인의 겸손한 의식이 배어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분의 선행을 알릴 방법이 없는 경우에 극단적인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고, 혹은 여러분 자신의 성공과 미덕, 그리고 좋은 점들을 평가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될 수 있다.
좋은 것을 좋아한다고 인정한다면 우쭐거리는 이기적인 괴물이 되는 것인가? 나는 왜 비구가 되었는가? 나는 왜 수도원 교단에서 독신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했는가? 나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었다.
“난 내 자신을 추스르고, 발전시키며 행동을 가다듬어야 한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이를 해낼 수 없다. 내 스스로 이루기 위해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나는 이를 나약하고 무능력하다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혼자서는 해낼 수 없기 때문에 외부의 조건들로부터 지원을 필요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이를 선하며 덕스럽고 아름다운 것에 이끌린다는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양자의 시각은 그 나름대로 강조하는 면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저속한 것들과 삶의 어두운 면에 매료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면들에 확실히 더 큰 매력을 느꼈다. 그렇다고 내가 지극히 선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밝고 아름다운 것들에 끌렸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밝은 것, 선한 것,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선호하는 개인적 성향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관심을 가지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일종의 지향점이다. 이는 매우 좋은 것이며, 바람직한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내 성격의 긍정적인 면의 하나로 생각한다.
이것을 개인의 성격으로 설명하면 이는 정직해지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 인간성과 개성을 인정하고 사려 깊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비판적인 시각과 자신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강박감을 느끼거나,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거나, 심한 죄책감을 느낄 경우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을 부여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비판적인 사고방식과 구별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하며, 각각의 사물을 분석하거나, 비교할 뿐만 아니라 경험의 관점에서 조사하고 연구할 수 있게 한다. 그로부터 우리는 호흡에 눈을 뜨고 “이것은 이와 같구나.”라고 알아차릴 것이고, 우리가 처한 민감한 상태에 눈을 뜨고 “이것은 이와 같구나.”라고 알아차릴 것이다. 또한 우리는 감각과 접촉해 자극하는 경험으로서의 초조함에 눈을 뜨고, 우리 자신의 강박증과 정서적인 습관에 눈을 뜰 것이다. 그러한 강박증과 감정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을 제거해야할 무엇으로 간주하기보다는 그대로 시야 속에 멀찌감치 던져두는 것이다. 이것은 눈을 뜨는 것, 수용하고, 환영하는 쪽으로의 변화라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사성제의 첫 번째로 고(Dukkha)가 있음을 선언하셨다. 고성제는 단순히 비참한 현실을 지적한 것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진리’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고를 비참한 현실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
“삶은 오직 고통이며, 삶은 온통 고통뿐이다.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는다. 모든 친구들을 잃어야만 한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 사랑스럽고 즐거운 모든 것은 변하고 내게서 떠나갈 것이다.’ 이것이 삶의 전부이다. 삶이란 시작부터 끝까지 고통일 뿐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 고상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은 “난 그것을 좋아하지 않아. 고통을 원하지 않아. 이런 혼란을 창조하고서는 그 속에 나를 내던져 그저 이렇게 늙어가게 하다니. 이 얼마나 불순하고 고약한 신의 장난이란 말인가? 나는 왜 살고 있을까? 그저 늙고, 병들고 죽을 뿐이야.”라는 관점에서 고통을 보는 비관적이고 우울한 시각에 불과하다. 당연히 이런 시각은 사람을 아주 우울하게 한다. 이것은 ‘거룩한 진리’가 아니다. 여러분은 사물의 실상 주변에서 문제를 만들고 있다. “고가 있다”라는 ‘거룩한 진리’를 들이대면서 말이다. 따라서 이런 고통을 다루는 처방으로서 내가 해주고 싶은 충고는 고통을 환영하고,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에 마음을 열고, 고통을 인정하고, 고통을 지켜보고, 고통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좋아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인 온갖 고통과 좌절과 불안 등을 기꺼이 감싸 안고 배우려는 마음을 자아내게 할 것이다.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고통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는 고통을 이해한다, 고통이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고통을 합리화하려 든다면 그것은 고통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아니다. 고통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좌절, 절망, 괴로움, 분노, 지루함, 두려움과 욕망 등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고통을 기꺼이 환영하고 감싸 안는 것이다. 즉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저 환영하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이것은 ‘거룩한 진리’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의 인간성은 고결한 것이다. 이것이 거룩한(Ariya) 진리이다. 아리야라는 단어는 ‘거룩한’이란 뜻이다. 영어에서 ‘거룩한’(Noble)은 무엇인가? 이것은 일종의 장엄한 특징을 말한다. 이 말은 상승의 의미를 갖는다. 만일 여러분이 거룩하다면 여러분은 상승하는 존재가 된다.
“오, 삶은 비참해. 이 비참한 삶에서 숨고 싶어. 삶을 참을 수 없어.”
단지 이렇게만 말하지 말라. 그런 말에는 거룩한 구석ㄱ이 없다. 만일 여러분이 기독교인으로 자랐다면 고통을 준 신을 비난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이런 혼란에 빠뜨리셨나요? 이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나는 신에게 분노를 느끼곤 했다.
“만일 내가 신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냈을 텐데.”
만일 내가 신이라면 고통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여러분은 넘어져 상처를 입었을 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왜 신은 이러한 상황을 허락할까? 왜 ‘신’은 이리도 고통이 많은 세계를 창조했을까? 만일 내가 만물을 창조하는 신이었다면 고통은 만들지 않았을 텐데.”
나의 어머니는 이런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고통이란 있어서는 안 될 그 무엇이고,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다면 고통은 ‘거룩한 진리’인가? 늙음은 ‘거룩한 진리’인가? 상실, 이별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러한 형태로 이런 인간 세계에서 겪어야만 하는 이런저런 경험들이 ‘거룩한 진리’란 말인가? 불평과 비난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거룩한 진리’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 이것이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지적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단지 하나의 프로그램과 이에 대한 희생만을 고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태어난 문화와 가족들로부터 프로그램을 얻기만 한다면, 사실 이것은 매우 좋은 프로그램이 아닐 수도 있고, 때로는 꽤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현실을 탐구하고 조사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러한 고정된 프로그램과 경험에만 국한시켜 생각한다. 깨달음은 멀리 있거나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정작 스스로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채, 깨달음을 다다를 수 없이 아주 높이 매달아 놓고 목표로 삼는 어떤 추상적인 상태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대체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자신을 그러한 종류의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만일 내가 개성에 의존했다면 어떤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개성은 나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개성은 내게 무슨 잘못이 있을까하는 관점에서 나 자신을 생각하도록 틀지어져 있다. 그런 관점은 누가 더 낫고 못한지, 누가 더 위에 있고 아래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경쟁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개성을 신뢰할 수 없다. 나의 개인적인 습관은 틀지어져 있는 것이어서 본래 융통성이 없다. 만일 여러분이 자의식을 통한 경험에만 집착하고 해석하면서 다른 방법으로 사물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편협한 견해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이 삶을 살아가는데 매우 우울한 면이 될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눈을 뜨기 시작한다면 청교도적인 엄격한 이원론, 혹은 가족과 사회적 배경을 통해 얻은 고정된 프로그램을 초월해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직관적인 깨달음을 신뢰하라. 그리고 여러분 자신과 불교 혹은 세상 등에 대한 여러분의 시각과 견해를 신뢰하지 말라. 이런 견해들은 흔히 너무나 편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상당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인종적인 편견, 계급의 정체성, 민족적인 편견,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사회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들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 항상 습에 밴대로 사물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부처의 마음을 매우 융통성 있고, 유순하며 우주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 그런 마음에는 빛나는 특성이 있다. 의식에도 이런 빛나는 광채가 있다. 의식은 빛 자체를 갖는다. 그래서 우리가 조건 지워진 정신상태의 왜곡을 통해 항상 스스로를 제한하던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보기 시작하게 된다. ‘법’ 즉 깨달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멀리 있는 것도 동떨어져 있거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깨달음에 대한 여러분의 개인적 견해를 고수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러분은 깨달음을 아득히 높은 곳에 매달아 두고서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라고 여길 수 있다. 이것은 여러분이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여러분은 단지 모든 사물을 조건 지워진 관점에서 보고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고통이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환영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해석이다! 통상적인 번역은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지만, 나의 새로운 해석은 “고통을 환영해야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렇게 한번 시도해 보라. 여러분은 여러 단어들을 실험해 볼 수 있다. “빨리 경전에는 ‘이해한다’로 되어있지 ‘환영한다’로 되어있지 않아”라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빨리어 경전에는 ‘이해한다’로 되어있지 않고 ‘이해한다’로 번역하는 빨리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해한다’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해한다’라는 단어의 특별하고 좁은 견해에 갇혀 있어 실제 다른 의미로 확대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보다 넓은 관점을 가진다면 다른 단어들을 실험해 볼 수도 있다. 일단 그 효과를 주시하라.
“나는 그 단어의 제대로 된 번역어를 찾았고 그래서 이제 ‘환영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해한다’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는 사람은 약간 문제가 있다. 나의 시각, 즉 나만의 독특한 번역은...” 이런 생각은 또 다른 고정된 오만한 접근이 되고 만다. 나는 내가 옳다거나, 내 번역이 최고임을 증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단지 그 단어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지금 이 자리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를 아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나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알 권리와 자유를 갖도록 권장하는 방식으로 여러분과 이 사실을 공유하고 있다. 특정한 시각과 관점에 자신을 맞추려고 항상 노력할 필요는 없다. 설사 그것이 관습적인 형식과 정의를 가진 우리의 전통이라 해도 말이다. 그런 것들은 사물을 바라보는 특정단계의 방식일 뿐이다.
“고통이 있다. 그 고통을 환영해야 한다. 고통은 환영받아왔다.”
“그건 어떤 것일까?” 한번 해보라. 여러분도 그럴 필요가 있는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그럴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내 성격이 고통을 떨쳐버리려는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조건, 즉 나의 개성이다.
“고통? 그 따위 떨쳐버려. 고통을 원하지 마.”
누군가의 고통, 나는 누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그들 근처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의 고통을 떨쳐버리고 싶다. 누구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아잔 수메도, 내게 문제가 생겼어”
“떨쳐 버려. 나는 문제를 원하지 않아.”
이것이 저항하려는 나의 성향이다.
“난 고통에 관해 알고 싶지 않다. 내겐 좋은 것만 말해.”
“오늘은 어떠세요?”
“좋아요, 아잔 수메도. 여기 아마라와띠의 분위기가 그저 좋아요. 전 스님이 되고 싶어요. 전 ‘법’과 테라바다 전통과 계율을 경배할 뿐이에요. 전 이 모든 것이 너무 좋아요.”
오, 이 말은 나를 아주 기분 좋게 할 것이다. 좀 더 해주었으면 할 것이다.
“오늘은 어떠세요?”
“아! 이런 삶은 너무나 비참하고 끔찍하네요. 넌덜머리가 나요. 옷을 벗고 싶어요.”
반면 다른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대답한다면 그것은 참 당황스러운 이야기일 것이고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말았으면 할 것이다.
우리는 기분 좋은 일만 찾아다닐 수 있다.
“좋은 것만 이야기하세요. 그런 말을 기분 좋게 하니까. 나쁜 말은 내게 하지 마세요. 날 기분 나쁘게 하니까. 난 기분이 나빠지는 걸 원치 않아요. 난 고통을 원치 않아요. 난 고통을 환영하지 않아요. 난 고통을 없애고 싶어요. 따라서 나쁜 것은 떨쳐버리고 좋은 것만 가능한 많이 얻기 위해 애써 삶을 살아갈 참이에요.”
그러나 ‘고통이 있다. 그 고통을 환영해야 한다’라고 새롭게 해석하면 고통의 의미는 변한다.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은 자신이나 타인의 문제, 어려움 등등의 고통을 회피하고, 떨쳐버릴 것으로 보지 않고 환영할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난 주 동안 안거를 가졌다. 나는 참으로 정규적인 수행을 좋아하고, 여리게 앉아 불단을 바라보길 좋아한다. 나는 사원을 좋아한다. 앉아 명상하기에 매우 유쾌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 척추를 지탱해주는 세모난 방석에 앉으면 오랜 시간 동안 매우 편안하게 좌선을 할 수 있다 불단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참 차분하고 고요해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여러분과 마주칠 때, 내가 여러분 모두를 바라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것은 단지 묵상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불단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불단의 모든 사물들이 평화로움과 차분함을 가져다준다. 여기에는 양초와 향, 그리고 불상이 있는데 이것들은 나에게 괴로움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들은 영감을 주고, 즐거움을 주며, 초조함을 느끼게 하지 않고, 어떤 불쾌감도 주지 않는다. 만일 특별히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저 눈만 감으면 된다. 그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돌아보면 여러분이 모두 이 자리에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여기에는 꽤 많은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이 여러 사람들, 그들 가운데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이도 있고, 또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나는 여러분 몇몇에 대해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을 저렇다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게는 여러 가지 기억이 있고, 각각의 사람들은 유쾌하거나 불쾌한 기억들을 내게 상기시킬 것이다. 어떤 이들은 특이한 움직임과 행동양식, 언어습관을 가지고 있어 내 마음 내 의식 속에 독특한 느낌들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내가 “오, 이건 견딜 수 없어”라고 생각하면 세상은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럴 땐 즉각 얼굴을 돌려 불단을 바라보아야 한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자극이 없는 상태에 의존하거나 집착이 없는 상태를 얻기 위해 내가 여러분을 외면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아니다. 반면에 알아차림이 나를 집착이 없는 상태, 즉 집착이 없는 실상으로 가는 것이 허용되기 시작한다면 나는 다시 여러분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진정으로 이러한 것을 알아차린다면, 다시 그 시선을 사회로 돌릴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의존하게 되는 한정된 경험을 향하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각성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승가에 대한 귀의를 이야기한다. 그 승가는 네 쌍, 여덟 부류의 고귀한 존재라고 정의되고는 한다. 과연 몇 명이나 이런 설명에 들어맞을까? 여러분 중 과연 몇 명이나 자신을 여덟 부류의 성인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을까? 예류향이나 예류과, 일래향이나 일래과, 불환향이나 불환과, 아라한향이나 아라한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이 중 어느 경지에 있는가? 어떻게 네 쌍, 여덟 부류의 고귀한 존재에게 귀의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매우 추상적인 이야기이다. 이러한 현자들, 이상적인 존재들은 어디에 존재할까? 혹 그들이 여기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비구 스님일까, 아니면 저 비구니 스님일까? 그렇다면 승가에 귀의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우리는 이것이 추상적인 이야기가 되길 바라는가? 누가 수다원이고, 누가 사다함인지 등등을 결정하는 것, 내가 누구에게 귀의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다시금 내 자아의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 있는 나, 바로 이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어떤 존재인가를 결정하려 애쓰고 있다.
‘승가’라는 말처럼 단어로 한정지어지는 것들은 그 자체로도 이미 여러분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실용적이도록 하라. 우리에게는 동일한 귀의처가 있다. 우리가 승가이다. 우리가 귀의하는 것은 부처님, 법, 승가 즉 삼보이지 개인의 태도나 기호, 습관이나 관점, 견해가 아니다. 우리가 서로를 승가로 보고 천상의 메신저로 본다면 이것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존경하는 것이며, 개인의 기호, 개인의 관점 개인의 반응을 초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의 기호와 관점 등 일체를 없애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환영하는 고통은 모두 개인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분노를 느낄까? 나는 왜 질투를 느낄까? 나는 왜 거절당하거나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까?” 그것은 이런 기분들을 깨끗이 잊어버리려고 애쓰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깨달음의 상태를 신뢰한다면 어리석은 감정, 신경과민의 습관들과 같은 자신의 감정들은 기꺼이 환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개인의 허물로서보다는 ‘거룩한 진리’의 관점에서 환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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