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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유년 시절
기원전 100년~기원전 94년(카이사르 탄생~6세)
<태어난 곳>
- 수부라에서 태어나 37세 최고 제사장에 뽑혀 포로 로마노 안에 있는 관저로 이사.
* 수부라 : 서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중에서 도심과 가깝고 포로 로마노와 이접한 지역.
<집안 배경과 환경>
- 알바롱가의 유력자 킨틸리우스, 세리비우스, 율리우스 들 중의 한 가문인 율리우스 씨족 가문.
공화정 초기에는 상당한 활약을 했다가 300년 가까이 기록이 끊김.
2차 포에니 전쟁 중 율리우스 씨족에 속하는 한 사람이 카르타고 군을 무찔러 그 공로로 카이사르(코끼리)라는 별칭을 얻음.
기원전 1세기에 삼촌 뻘인 루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정관으로 선출됨.
아버지는 법무관(프라이토르)을 지냈고 총독으로 취임 전 사망.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집정관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누이 동생.
- 생가는 인술라(임대용 공동 주택)가 아닌 개인 주택.
주상 복합 주택, 에세드라에 베누스 제단이 있었슴.
- 로마가 건국된 지 653년, BC100년 7월 12일 수부라에 있는 집에서 태어나
누나와 누이 사이에 낀 와아들로 자람.
제2장 소년시절
기원정93년 ~ 기원전 84년 (카이사르 7세 ~16세)
<가정교사>
- 카이사르의 가정교사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한 갈리아 인이었다.
* 당시에는 그리스인 가정교사가 1급으로 여겨졌슴.
- 과목: 아르테스 리베랄레스(문법, 수사학, 변증학, 산수, 기하, 역사, 지리 등 7과목)
기타 천문학, 건축, 음악
<체육>
- 오전애는 공부 오후에는 키르쿠스(원형경기장)나 스타디움(공설 운동장)에서 체육.
- 카이사르가 다닌 키르쿠스(키르쿠스 막시무스,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
- 카이사르가 잘한 체육 : 말 타기
<현장 교육 1>
- BC91년 동맹시 전쟁 발발
아저씨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고모부 마리우스가 사령관으로 참전.
BC90년 겨울 민회에서 루키우스가 제창한 "율리우스 시민권법" 가결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 취득을 인정.
cf)"리키니우스 법" ... BC367년 귀족층과 평민층에 국가 요직에 앉을 기회를 균등하게 인정.
- 로마군 지원제를 도입한 고모부 마리우스의 위세가 내리막 길을 타기 시작
술라와의 권력투쟁이 시작됨.
<현장 교육 2>
-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정벌
BC88년 "술라"를 원정 총사령관으로 임명.
마리우스가 호민관 술피키우스와 손잡고 평민집회에서 이 결정을 번복하는 법 입법.
"술라"가 쿠데타를 일으켜 술피키우스는 처형되고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도피.
BC87년 "술라"가 오리엔트 원정을 떠남.
집정관 킨나가 변심, 마리우스 일파의 명예 회복 법안을 성립시켜 마리우스 귀국
마리우스는 또 다른 집정관 옥타비우스 등 원로원파를 잔인하게 숫청
루키우스, 가이우스 등 카이사르의 두 삼촌이 희생됨.
BC86년 마리우스가 일곱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됨.
1월 13일 마리우스가 70세로 임종하자 킨나의 독재 치하로 들어감.
BC84년 카이사르의 아버지 별세.
16세의 카이사르가 가장이 됨.
<결혼>
평민파인 킨나는 술라의 귀국에 대비, 원로원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자기 딸 코르넬리아와 루키우스의 조카인 카이사르를 결혼 시키고자 함.
어머님 아우렐리아의 뜻을 따라 아버지가 정해준 배필과 파혼을 하고 킨나와 손을 잡았다.
술라가 그리스에 도착하자 성년도 되기 전이었지만 서둘러 결혼식을 거행.
이로 인해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에서 민중파로 완전히 기울게 됨.
<성년식>
BC84년 킨나가 군단 편성 과정에 일어난 혼란에 휘말려 목숨을 잃음.
BC83년 술라가 브룬디시움에 상륙
통상 17세에 성년식을 치루었지만 카이사르는 결혼식을 서두르느라 16세에 성년식을 치룸.
공화정 시절에 들어서는 시민권을 가진 성인들만 토기를 입게 되어 있었음.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부터 투니카에 두르는 허리띠나 토기 주름에 신경을 많이 써서 멋쟁이로 유명했다.
제3장 청년 시절
기원전 83년 ~ 기원전 70년(카이사르 17세 ~ 30세)
<독재자 술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가장 큰 특징은 좋든 나쁘든 언행이 분명하다는 것.
BC88년 오리엔트 원정군 사령관 자리를 마리우스에게 빼기자 쿠데타를 감행
BC83년 오리엔트 원정을 끝내고 브린디시에 상륙
군단을 해산하지 않고 민중파 세력을 타도 하기로 결심.
메텔루스 페이우스와 폼페이우스의 지원을 받음.
BC82년 11월 1일 원로원파인 술라가 압승을 거두고 민중파 숙청이 시작됨.
해방노예 전위부대("코르넬리")를 이용 민중파 소탕작전을 벌임.
카이사르도 술라의 살생부에 이름이 오름.
카이사르가 소년 사제로 있던 유피테르 신전의 여사제(베스탈레)들과 술라의 측근들이 구명운동을 벌이자 술라는 킨나의 딸과 이혼을 하는 조건으로 목숨은 살려 줌.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하고 이탈리아 전역을 도망쳐 다니다 소 아시아로 도망.
<망명>
아시아 속주 총독인 미누키우스 진영에 가서 입대를 지원.
미누키우스 총독이 즉석에서 참모본부의 막료로 받아 줌.
카이사르를 비타니아 왕국에게 레스보스 섬 공방전을 군선을 지원 요청토록 함.
카이사르는 레스보스 공방전에 참여한 공적으로 "시민관"이란 훈장을 받게 됨.
BC78년 세르빌리우스 휘하의 킬리키아 군단으로 전출을 요구
킬리키아 군단으로 옮기자 바로 술라가 사망을 했고 카이사르는 전역을 신청하여 로마로 향함.
<귀국>
BC75년에 외삼촌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집정관에 선출됨.
전 집정관 레피두스가 총독으로 부임하기 위해 편성한 군단을 이용 술라 체제를 전복 시도.
폼페이우스의 군단에게 순식간에 궤멸됨.
<변호사 개업>
23세에 변호사 개업
카이사르의 문장과 연설은 늘 단도직입적으로 문제점을 찌르는 것이 약점임.
첫번째 고발 사건 패배함.
두번째 소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낸 돌라벨라를 부정 축재로 고발했으나 실패.
이 실패로 주위 사람들에게 민중파로 몰리는 것은 아직은 위험하다고 생각
로도스 섬으로 유학을 떠남.
<국외 탈출>
로마 공화정 하에서는 30세가 되어야 공직에 출마할 수 없어 24세인 카이사르는 충전기를 가져도 되리라 생각되지만 카이사르보다 6살 위인 폼페이우스가 총사령관직을 맡아 4만명의 군사를 끌고 에스파냐로 마리우스파인 세르토리우스와 레피투스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선 것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로도스 섬으로 가던 카이사르가 타 배가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됨.
<해적>
카이사르는 자기 몸값이 20탈렌트로 매겨지자 자신이 50탈렌트로 몸값을 높히고 나서 신변 안전과 몸값 마련의 가능성의 밸런스를 만들었다.
종자들이 38일 후에 몸값을 만들어 와 해방됨.
밀레투스로 달려가 배를 빌리고 사람들을 모아 해적을 소탕함.
속주 총독에게 몰수한 재물들은 넘기고 해적들은 교수형에 처함.
<유학>
카이사르는 로도스섬에서 머무는 동안 서아시아에 무슨일이 생기면 사병을 모집해 달려 가곤 하느라 유학생활이 중단되기도 했다.
BC74년 외삼촌인 아우렐리우스 코다가 비타니아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
카이사르는 미련없이 로도스 섬을 떠나 비타니아로 감.
아우렐리우스 코다는 폰투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의 군에 밀려 비타니아에서 도망치다 병사.
집정관 루쿨루스를 비타니아에 파견하고 카이사르는 이우렐리우스 코다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제사장에 임명됨. 돌라벨라 사건의 열기가 식음.
<귀국>
바로 귀국을 한 27세의 카이사르 대대장(트리부누스)에 입후보하여 당선됨.
같은 해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의 진압군으로도 참전을 못함.
다음해인 BC72년 크라수스가 토벌의 책임을 맡아 출전을 했으나 카이사르는 계속 로마에 머뭄.
BC71년 스파르타쿠스 반란은 진압되고, 에스파냐의 세라토리우스 전쟁도 종식됨.
에스파냐에서 개선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세력 다툼이 벌어짐.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 BC70년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에 집정관 출마 인정 요청.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의 축재를 경멸했고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의 명성을 시샘.
크라수스는 인망이 없어 원로원에서 집정관 당선이 의문시 됨.
크라수스가 폼페이우스의 출마를 인정하도록 원로원에 손을 써주는 대신에 폼페이우스는 지지자들의 표를 크라수스에게 나누어 지기로 협상을 맺어 두 사람이 집정관으로 선출됨.
- BC 69년 카이사르는 회계감사관에 선출됨. "쿠르수스 호노룸"(명예로운 경력)이 시작됨.
이듬해 에스파냐에 근무
※ 카이사르는 화려한 생활방식과 막대한 부채로 유명인사가 됨.
제4장 장년 시절
기원전 69년 ~ 기원전 61년 (카이사르 31세~39세)
<출발점>
- 카이사르의 막대한 부채의 용도
첫째, 자기 자신을 위한 소비 ...책 구입, 옷치레
둘째,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씀.
세번째, 애인들에게 주는 선물 값...여자를 기쁘게 해주는 선물
<선언>
-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
카이사르가 친족 대표로 추도사를 함 ... 혈통을 신격화
추도 행렬에 역적으로 몰려 있는 마리우스의 초상화를 세움.
<폼페이우스의 대두>
- 킬리키아 지방을 본거지로 한 해적들이 이탈리아 근해까지 출몰.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의 지원을 받게 되자 더욱 그 영향력이 커짐.
BC67년 호민관 가비니우스가 폼페이우스가 구상한 해적 소탕을 위한 작전을 민회에 제안.
20개 군단과 군선 500척에 14명의 원로원 의원 막료를 투입.
총 사령관은 폼페이우스로 한다.
총 사령관은 바다와 해안에서 80키로 내륙에까지 "절대 지휘권"을 가진다.
암무 수행 기간은 3년을 준다.
원로원은 키케로와 카이사르 등 몇명을 제외하곤 다 반대의 입장 표명.
민회에서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됨.
폼페이우스는 89일 만에 해적을 소탕함.
폼페이우스는해적 소탕 후에도 수도 로마로 돌아가지 않음.
- 호민관 가비우스가 민회에 새로운 제안을 내 놓음.
오리엔트 전선의 최고 책임자인 루쿨루스를 해임하고 폼페이우스를 총 사령관으로 한다.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의 토벌에 필요한 시간까지 절대 지휘권 연장.
원로원의 입장은 저번과 다를 바 없었으나 민회에서는 만장일치로 가결.
<안찰관 취임>
- BC65년 35세의 카이사르가 안찰관(아이딜리스)에 선출됨.
아피아 가도를 대대적으로 보수
화려한 규모의 검투사 시합을 주최
국고 보조를 받기 위한 원로원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자비로 사업을 진행
마리우스의 승전 기념비 복구
부채는 엄청나게 불어 났지만 평민층의 호감을 얻음.
<37세에 출세하기 시작하다>
"카탈리나의 역모"가 일어난 BC63년을 카이사르가 37세로 출세를 하기 시작한 해로 볼 수 있다.
<최고 제사장>
- BC63년 최고 제사장 메텔루스 피우스 사망.
- 카이사르가 후보로 나섬
대립한 후보는 BC79년 집정관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와 BC78년 집정관이며 원로원의 "제일인자"(프린켑스)였다.
당시 최고 제사장은 제사장들이 합의하여 결정하게 되어 있었음.
카이사르는 친구인 호민관 라비에누스를 시켜 한가지 법안을 제출했다.
BC104년에 제정된 후 유명무실해진 "도미티아누스 법"을 다시 제안 가결 시킴.
최고 제사장은 35개 선거구 가운데 추첨으로 결정된 17개 선거구에서 투표로 선출하게 됨.
BC64년 키케로가 집정관에 출마할때 썼던 선거운동을 그대로 답습하여 선거 운동을 벌임.
- 국외 탈출의 위험을 무릎쓰고 승부를 벌인 카이사르가 최고 제사장으로 선출됨.
종교계의 최고 책임자
유일하게 파트너가 없는 자리
다른 공직과 겸임 가능
종신직
관저를 제공 받음(포로 로마노 중앙에 위치)
<반체제 활동의 첫걸음>
- 원로원 의원 라비리우스를 고발
BC100년에 급진 개혁파인 호민관 사투르니누스가 호민관에 재출마.
"원로원 최종 권고"(세나투스 콘술툼 울테리움)를 공포하여 사투르니누스 일파를 살해한 혐의
- 시민들이 연로한 라비리우스를 동정하기 시작하고 키케로가 변호를 맡음.
- 불리해진 카이사르와 라비에누스는 자니콜로 언덕에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는 헛소문을 퍼트려 재판정을 해산되도록 해 위기를 모면.
<카틸리나 역모 사건>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는 술라가 주도한 민중파 숙청을 선두 지휘한 인물
- BC65년 겨울 카틸리나가 부채를 전액 탕감한다는 공약을 걸고 집정관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원로원의 방해로 출마 승인을 받지 못함.
- BC64년 출마는 했으나 키케로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에게 패배.
- BC63년 10월 20일에 다시 도전했으나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리키니우스 무레나에게 짐.
무레나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 당해 카틸리나가 당선될뻔 함.
그러나 원로원과 키케로 변호의 덕으로 무레나가 무죄 판결을 받아 또 실패.
이에 불만을 품은 카틸리나의 추종자들이 봉기를 계획함.
비밀이 키케로에게 누설되었으나 물적 증거는 없었다.
- 배후 인물로 크라수스와 카이사르가 지목 됨.
크라수스는 발송인 불명의 편지 사건을 조작하여 혐의를 벋어남.
카이사르는 본의 아니게 브루투스의 어머니이자 소 카토의 처형인 세르빌리아와의 연애 편지를 소 카토가 카틸리나 일당의 비밀 메시지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공개 되어 배후 인물 의혹이 사라졌다.
- 10월 28일 원로원 회의에서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
- 11월 7일 카틸리나 측에서 키케로 집으로 자객을 보냈으나 키케로는 방문객을 사절해 실패.
- 11월 8일 키케로가 원로원을 소집 "카틸리나 탄핵"을 시작. 카틸리나 로마를 떠남.
- 12월 어느날 키케로의 집에 갈리아 북부 대표라는 사람이 찾아와 반란군들이 자기에게 접촉해 온 사실을 알림. 반란군 대표에게 서명을 받으라고 지시.
- 12월 2일 밤 반란군 대표들의 서명이 들어 있는 서약서를 손에 넣은 키케로는 서명자들을 체포.
- 12월 3일 원로원을 소집. 키케로가 음모를 공표.
- 12월 5일 키케로가 반란군 대표들을 처리하는 문제를 원로원의 결정에 맡김.
카이사르는 즉각 사형하는 것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가 민중들에게 뭇매를 맞음.
이날 밤 재판도 없이 사형 집행함.
- 집정관 안토니우스와 메텔루스기 군단을 이끌고 반란군 토벌에 나섬.
- 동지들 중 3천명만을 남겨 항전하던 카틸리나는 파스토이아에서 포위 당해 몰살됨.
<"위대한 폼페이우스"(폼페이투스 마그누스)>
- BC62년 카이사르는 법무관에 취임.
원로원의 "제1인자"인 카툴루스가 연로하여 직무에 태만하다며 해임을 건의.
대신 폼페이우스를 "제1인자"로 임명하자고 민회에 제안. 원로원의 반대.
<스캔들>
- 12월 1일 카이사르의 집에서 보나 여신제가 열리고 있었다.
- 카이사르의 후처인 폼페이아를 짝사랑한 푸블리우스 클르우디우스 풀케르가 여장을 하고 잠입
- 스캔들이 나자 카이사르가 폼페이아와 이혼.
- 클라우디우스가 법정에 세워졌으나 중거가 불충분.
- 키케로가 위증의 증고를 대고 유죄로 몰고감.
- 크라수스가 배심원들을 내수하여 무죄를 선고 받음.
※BC61년 카이사르가 "먼 에스파냐"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으나 채권자들의 농성으로 출발을 못하고 있자 크라수스가 보증을 서서 해결해 임지로 떠날 수 있었다.
<카이사르와 여자>
-카이사르의 애인들
크라수스의 아내 테우토리아
폼페이우스의 아내 무키아
폼페이우스의 부장 가비니우스의 아내 로리아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
클레오 파트라
- 카이사르의 애인들이 서로 질투를 하거나 싸우지를 않았고 카이사르를 원망도 하지 않았다.
첫째 여지들에게 화려한 선물로 공략.
둘째 애인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
세째 옛 애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지 않음.
<카이사르와 돈>
카이사르가 막대한 부채를 지고도 채권자에게 발목이 잡히지 않은 이유는 그 돈을 사복을 채우는데 사용하지 않고 구가 개조와 권력을 향해 달려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강한 처지에 놓인 채무자가 될 수 있었고 남의 돈으로 혁명을 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