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조선귀족은 일본제국에서 일본의 귀족 계급인 화족에 예에 따라 총 네 가지 훈등으로 각각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계급으로 나눠 황족이 아닌 종친, 문지, 훈공이라는 기준에 맞춰서 대한제국의 고위급 인물들로 정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먼저 남작에 봉작된 인물들부터 차례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금일은 첫 번째로 김사준에 대해 알아보겠는데, 참고로 김사준은 김수덕이라는 이강공비의 부친으로 의친왕에게는 장인이 되시는 분이셨습니다.
지난 작년 조선귀족 거부자 여덟 분들의 면면을 살펴보았었는데, 그 중 조정구와 조경호 인물 모두 흥선헌의대원왕의 사위였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같은 의미에서 김사준 역시 흥선헌의대원왕의 집안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흥선헌의대원왕에 대한 일본제국의 관심과 대한제국에 있어서 흥선헌의대원왕의 영향력 등은 양국에 모두 가장 컸었다고 보시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귀족의 수작을 거부했던 조정구와 조경호, 그리고 남작의 작위는 수작했지만 1915년 조선보안법위반사건으로 작위를 박탈당한 점을 생각한다면 김사준 역시 조선귀족 거부자 여덟 분과 더불어 존경받아야 할 분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특히 작위 박탈의 이유가 되었던 1915년 조선보안법위반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최초로 고종황제의 해외망명을 가장 먼저 추진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1914년 이상설을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최초의 망명정부 대한광복군 정부였습니다.
이상설은 이준, 이위종과 더불어 고종황제께서 1907년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했던 신하들이었습니다. 이후 1914년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 제국령 안의 모든 한인들을 규합하여 망명정부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웠고 여기에 이상설은 정통령으로 선임되었습니다.
당시 이상설은 이후, 1917년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훗날 병사했는데, 그는 죽기 전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였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이런 이상설과 함께 1915년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유동열, 이춘일 등 후에 신한혁명단을 조직하는데, 당시 신한혁명당 본부장이었던 이상설이 외교부장이었던 성낙형을 국내로 잠입시켜 고종을 신한혁명당 당수로 받들어 중국과 '중한의방조약'을 체결하려고 계획하였고 이것이 바로 조선보안법위반 사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해외 망명의 시도는 고종황제께서도 무척 바라시는 일이었는데 직접 성낙형에게 '중한의방조약안'을 직접 가지고 알현하라시며 정조께서 사용하셨던 '온여기옥' 인영까지 찍어주셨었는데, 불행하게도 망명 시도는 고종황제를 알현도 하기 전에 성낙형을 비롯하여 김사준, 김사홍, 김승현 등의 다수 관련자가 일본제국에 의해 검거되면서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금일 언급하고 있는 남작 김사준 역시 고종황제 해외망명 시도였던 조선보안법위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명목으로 봉작이 박탈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고종황제께서는 1차 실패 후, 1918년 2차 해외망명을 추진하셨지만 마지막 시도가 되었던 1918년 이회영이 중심이 되었던 망명 시도는 결국, 일본제국의 고종황제 시해로 인해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본 카페에서도 언급해 드렸던 조선귀족 거부자 민영달을 통해 당시 북경에 고종황제의 행궁조성 자금으로 5만원을 민영달이 크게 기부하시기까지 하였는데, 당시의 이회영은 1918년 말 이득년, 홍증식을 통해 북경에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지만, 1919년 1월 20일 고종황제의 급서로 뜻을 마지막으로 결국 이룰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고종황제의 병세가 깊다면서 숙직시킨 인물들이 바로 당시 자작이었던 이완용과 이기용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바로, 독살설의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3.1운동 직후 일본제국이 총독부를 통해 1919년 3월 15일과 16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이왕직 명의의 해명기사를 개진하게 되는데, 궁녀 두 명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두 궁녀는 바로 침방나인 79세 김춘형, 그리고 덕수궁 나인 62세 박완기 궁녀로 각각의 궁녀는 1월 23일, 그리고 2월 2일에 각각 다른 이유로 사망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총독부의 설명에 대해 전체 한국 백성들은 전혀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따라서 일본제국에 의한 고종황제 독살설은 더 증폭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매우 불행한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안타까운 전체 민족의 슬픔이었습니다.
사실, 김사준은 1910년 이후에는 한일합방 조약 체결에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 2만 5천원까지 수령한 매국노였습니다. 심지어 1912년 8월 1일 한국병합기념장과 12월 7일 종 5위의 서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까지 받은 대표적 친일의 매국노였지만, 사실 겉으로 확인할 수 있는 김사준의 모습은 사실 결론적으로 본다면 위장된 모습이었다는 점이 더 분명하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본심은 다른 분이었던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겉으로 일본제국에 협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정받아 의심을 피하고자 했던 뜻이 별도로 있었다고 지금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002년 발표되었던 정부의 친일파 708인 명단에는 작위를 받은 사실 때문에 친일파로 포함이 되었지만,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작위 박탈 사실을 인정받아 친일파 명단에서 빠지게 된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모두가 불행했던 망국의 설움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대종교도 지금은 많은 어려움과 문제점이 있지만, 문제를 문제로서만 간직하는 것이 아닌 새롭게 일신하고 개혁해나가며 근본적인 문제점부터 해결해나간다면 분명히 우리 민족과 한국을 대표하는 대표적 민족종교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종교 백봉대종사 숭모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