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물 포기한 삼성장로교회…신원규 목사 고백 [LA중앙일보]
|
||
|
개척교회 초심으로 돌아가 |
이것은 신원규 목사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고언이요 조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모르고 세상의 정신과 가치관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추구하고 기도하고 애써온 결과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제 복음으로 재조정되어야 합니다. 그 생각도, 그 가치관도, 그 목표도, 그리고 그 꿈도 다시 그려져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조건 없이 용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저 주시는 은혜(엡 1:6)입니다. 구원이 선물이듯이 용납하심도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조건 없이 용납하셨습니다. 인간은 모든 일을 다 이룬 후에 그 업적을 보고 인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세례 때 하늘로부터 이런 말씀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 3:17). 아직 한 사람도 고치지 않으실 때, 아직 복음을 한 말씀도 전하지 않으셨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런 용납하심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성전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직종의 사람이나 인종, 또는 성별, 또는 질병 등의 조건에 맞는 사람들만 성전에 올 수 있다고 정해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직종의 사람들을 용납하셨습니다. 외국인도, 남녀도 가리지 않고 다 맞아주시고 환영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마저도 높여주시면서 두팔 벌려 환영하셨습니다. 복음은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수님의 용납하심을 받은 사람은 서로서로 용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모르면 거짓말에 속아넘어가기 쉽습니다. 오늘날 이단종파 신천지는 사람들을 속여 자신들의 모임에 들어오지 않으면 144,000명의 구원 받는 대열에 들어갈 수 없고 지옥 간다고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잘 모르면 사람들의 간증이나 거짓말에 속기 쉽습니다. 그래서 진리 아닌 것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내면 복을 받습니다. 십의 이조를 내면 더 복을 받습니다. 시험해 보십시요.’ 이런 말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 십일조를 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복음으로 다시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에게 참 복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이신 사도 바울께서는 구약성경에 능통하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었지만 우리에게 이렇게 복음을 들려줍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러니까 어떤 분은 이 말씀은 가지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인 복을 받고 십일조를 하거나 주일성수를 하면 생활의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까?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로마서 8:32)
복음은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셨다는 것이며, 그 선물을 결코 다시 빼앗지 않으시며,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려고 우리와 하나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환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알고 믿으면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물질에 매이지도 않습니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나눌 수도 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어쩌면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을 돕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편에 맞게 각자 마음에 원하는 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으로 헌금을 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에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과 이웃을 묶는 쇠사슬이 될 것입니다.
용납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실수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르시겠습니까? 내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수에 대해 놀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과거 허물과 현재 모습과 미래의 실수를 다 아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배신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끝까지 용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하면서 모의를 진행중인 가룟유다의 생각을 다 아시면서도 예수께서는 그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마 26:50). 그를 용납하시고 함께 떡을 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용납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십시요.
예수께서는 우리를 혹독한 주인처럼 대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친히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그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조건을 따라 사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경기나 시합 또는 무슨 일에 뛰어난 사람을 VIP라고 인정하고 특별하게 대우합니다. 아예 그런 사람들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가게 이름도 상품에도 그런 내용을 담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정은 조건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문을 열고 환영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외국인, 또는 어떤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는 교회라면 그것은 세상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 모두가 VIP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십니다.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믿는 사람은 더 게을러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면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사자굴에도 풀무불에도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승진의 문제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님을 알기에, 아니 나는 더 위대한 분의 인정을 받았기에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비굴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지극히 큰 자존감으로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삶을 살아갑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이렇게 백성들에게 축복을 했습니다(민 6:24~27):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 얼굴을 환한 미소와 함께 우리에게 비추십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용납하심을 알고 믿으면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용납하심의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좋은지 누리면서 그 은혜를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더욱 풍성히 누리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리시고, 더 많은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새소망교회 주일 메시지 2015-04-11
복음 시리즈 (06) 거룩하게 하심(성화)
설교를 위한 질문:
1. 복습: 복음이란 무엇인가?
2. 성화가 왜 복음인가?
3. 성화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4. 성화와 하나님 나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5.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10회에 걸쳐 다루기로 하고 그 동안 다섯 번 설교를 했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정리하고 오늘의 주제를 다루겠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죄로 무거워진 양심을 가지고 고통 중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무엇이 기쁜 소식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 큰 기쁨으로 맞아주는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맞아주시고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께 나오는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며 그 구원의 선물을 결코 빼앗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주님께 나아온 우리를 자신과 하나된 것으로 여기십니다. 마치 남편과 아내처럼,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그리고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영원히 하나가 되십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우리 낮은 자들을 존중하시고 인정하시고 용납하십니다.
교회에 오면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내가 무엇을 하는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주셨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는 이야기가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다른 이에게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처럼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을 잘 요약해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아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은 무엇일까요? 영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적 생명을 말합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생명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영생을 얻는 것을 성경은 달리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것을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또는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이 영생입니다. 이것을 구원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출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골 1:13-현대인의성경).
우리가 구원 받은 것, 우리가 누리는 영생은 달리 말하면,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출 받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통치를 받는 어두움에서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빛으로 이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사탄의 통치를 받는 삶은 그 자체로 지옥이며,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은 그 자체로 천국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예수님의 사랑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 사탄에게 굴복하여 그를 따르는 길을 멈추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려고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이미 천국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곧 예수님의 나라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요, 용서 받은 자요, 구원 받은 자요,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된 자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믿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놀라운 일을 알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하는 메시지가 곧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 안에서 자신을 찾은 사람은 그에 맞게 살아갑니다.
이제 복음의 여섯 번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10장 10절을 통해 시작됩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거룩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거룩함, 또는 성화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민감한 주제이기도 하고 무거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선입견을 다 내려놓고 성경에서 말하는 바에 귀를 기울입시다. 오늘 본문을 현대인의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뜻에 따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번에 드려짐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속한 것 또는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비바람과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볼품 없이 자란 싯딤나무(조각목)도 성막의 언약궤를 만들기 위해 잘 깎아 금으로 입히고 지성소에 두면 그것이 거룩한 물건 곧 성물이 됩니다. 바닷속을 헤엄치고 다니던 해달(돌고래)도 성막의 덮개로 쓰기 위해 그 껍질을 벗겨 하나님께 바쳐지면 거룩한 물건 곧 성물이 됩니다. 성막에서 사용하는 염소털, 양의 가죽, 올리브 기름도 모두 거룩해집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민족이 되니 거룩한 민족 곧 성민(聖民)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단번에 희생제물로 드리실 때, 그의 공로를 힘입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그의 통치를 받는 사람, 곧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됩니다. 그를 가리켜 거룩한 사람 곧 성인(聖人)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무리를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습적으로 한 사람도 성도요 여러 사람도 성도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으므로 성도입니다. 볼품 없는 싯딤나무도 성물이 됩니다. 돌고래도, 염소털도, 모두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께 바쳐지면 성물입니다. 거룩해집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된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삼으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집 곧 성전(聖殿)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 만을 주님이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아무리 세상 권세나 재물이나 쾌락을 가지고 사탄이 우리의 육신을 자극하여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주님이시다!”고 고백하며 육신의 생각을 물리치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그의 피로 씻김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설교하는 이 강대상은 성물입니다. 거룩합니다. 매주일 닦습니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강대상보다 더 거룩하며 정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요일 1:7). 사람이 스스로 얼마나 거룩한지를 모르면 거룩하게 살 수 없습니다. 거룩하게 살기를 포기하며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을 통해 미혹하는 마귀의 속임에 빠져 자신의 거룩한 몸을 부정한 일에 내어주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거룩하며 얼마나 존귀하며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는지를 모르고 육신의 생각에 굴복하고 살아가면 어떤 열매가 맺히는지 보여줍니다(갈라디아서 5:16~21):
저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고뇌를 했는지 모릅니다. 내 스스로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보려고 애쓸수록 점점 더 악에 빠져가는 자신을 보면서 얼마나 좌절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의 진리를 잘 모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누리기보다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힘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언제나 이런 탄식으로 마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거룩함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조각목이 스스로 거룩하지 않습니다. 해달이나 염소털이 스스로를 거룩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쳐졌을 때 거룩해졌습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경건하게 산다고 해도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성도라고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베드로 사도께서도 우리를 거룩한 나라라고 일깨워줍니다(벧전 2:9).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은 이미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 더 거룩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과거에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입어 거룩하게 된 우리는, 현재에도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성경은 우리에게 거룩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전에는 우리의 몸을 부정과 불법에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에게 복종하여 거룩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장차 최후의 심판대에서 거룩한 자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당부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이 왜 복음입니까? 우리가 성화된 것이 왜 그렇게 좋은 소식입니까? 이 세상의 문제는 거룩함의 부재가 그 원인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재물과 권력과 쾌락이라는 미끼를 통해 이 세상 사람들을 육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도록 부추깁니다. 그의 썩어져 갈 유혹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재 사탄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두움의 권세 아래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좀비와 같이 달려드는 사탄의 유혹 앞에 넘어져 쓰러져 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로 요란합니다. 많은 청춘 남녀가 그렇습니다. 많은 가정이 깨어져 지옥 아닌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정부도 통제불능, 학교 교실도 통제불능, 자신의 삶도 통제불능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종 된 삶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마귀를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귀의 종으로 보이지 않은 쇠사슬에 묶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부정과 불법에 내어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거룩한 백성으로, 거룩한 나라에서 살게 하십니다. 사탄이 통치하는 어두움의 권세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십니다. 주님의 통치를 받으십시오.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갑니다. 인생의 행복은 거룩함에 있습니다. 거룩한 양심이 행복합니다. 거룩한 가정이 행복합니다. 거룩한 나라가 건강하고 진정 살맛 나는 복지국가입니다. 거룩함이 없는 재물은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거룩함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경은 그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성령의 열매를 이렇게 소개합니다(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개역개정)
그러나 성령님이 지배하는 생활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친절과 선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런 것을 막을 율법은 없는 것입니다. (현대인의성경)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은 노력에 의해 된 것이 아닙니다. 전에는 노력해도 거룩함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다시 만드셨습니다. 그 아들을 보내셔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새 생명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만나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그들에게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19~22).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우리를 다시 창조하셨습니다. 첫 창조 때도 인간의 육체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며 창조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재창조 때에는 우리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거룩한 백성이요, 성화된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어떤 유혹 앞에서도, 어떤 위협에도 “오직 예수님 만이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천국의 백성들을 격려하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그런 우리에게 베드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4~16)
우리는 거룩한 성도입니다. 거룩한 백성입니다. 거룩하게 살아갑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거룩합니다. 할렐루야!
새소망교회 주일 메시지 2015-04-19
복음 시리즈 (07) 의롭다 하심(칭의)
설교를 위한 질문:
1. 복습: 큰 기쁨의 소식, 복음-사랑, 용서, 구원, 연합, 용납, 성화: 그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것이 복음인 이유
2.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이 필요한 까닭-실낙원의 비애, 인간의 허망한 노력,
3. 칭의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과 그 의미
4. 칭의와 하나님 나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5.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고도서: The Gospel in Ten Words(Paul Ellis, 2012), 성경의 제사(박철수, 2012, 대장간)
우리 교회 이치훈 집사님과 김민경 집사님의 딸 태희는 올해 네 살입니다. 아버지 이치훈 집사님은 십 년 동안 교제를 하다가 결혼 6년차인 지금도 연애시절과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강한 교제를 하면서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태몽에 의하면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름도 이삭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딸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을 기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올릴 때는 하나님의 큰 기쁨이 되라고 태희(太喜)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태희는 지금 때로는 큰 기쁨이지만 아빠의 목에 오르고 등에 오르고 머리카락을 잡는 등 원기 왕성한 활동력을 보일 때에는 큰 기쁨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큰 짐도 될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본래 살던 곳은 기쁨의 동산이라는 의미의 에덴동산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큰 기쁨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400년 전 영국의 사상가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은 하나님의 임재 자체다”고 말했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임마누엘의 처소요, 최초의 성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곳에서 인간은 최대의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곳에서 인간은 네 가지의 조화(harmony)를 누렸는데, 먼저,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과 막힘이 없는 친밀한 교제를 누렸으며, 둘째는,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어 불안, 초조, 염려, 열등감 등이 없는 평온한 삶을 살았으며, 이웃과 조화를 이루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공동체를 누릴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어 모든 만물이 인간의 다스림과 관리 속에 말 그대로 낙원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먹는 죄를 범하여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여러분이 집에 귀가할 때, 어떤 소리를 가장 듣고 싶어하겠습니까? (1)문이 열릴 때 나는 기계음, (2)집안에서 달려오면서 짖는 강아지 울음소리, (3)사랑하는 아내나 자녀가 웃는 얼굴로 맞으며 “수고하셨습니다. 다녀오셨어요!”하는 소리. 인간만이 인격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형상)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이런 의미입니다(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그런 존귀한 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자신에게는 거짓말하면서 불안하여 숨는 정신분열적인 존재가 되고, 이웃과 갈등하는 존재, 그리고 온 피조물도 인간으로 말미암아 신음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불의하게 된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Crooked and twisted 빌2:15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죄로 오염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유대인 수백만 명을 죽인 히틀러의 앞잡이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이라는 사람이 오랜 도피생활 중에 붙들려 법정에 섰습니다. 그의 만행을 증명할 재판장에 유대인 생존자 예힐 디누어라는 사람이 그를 만나기 위해 방에 들어섰을 때, 그는 그만 절규하면서 주저앉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수백만의 동족을 죽인 그 원수의 얼굴이 너무나 평범하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그렇게 나쁜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수백의 사람들을 남겨두고 홀로 도망친 선장을 비난합니다. 그리고 흉악범들의 범행을 들을 때, 그들은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며 짐승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죄성(罪性)은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의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가엡 2:16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겪게 된 것은 수치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수치를 가립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자신의 공허함과 비참함을 가리기 위해 인간은 치마와 같은 것을 고안합니다. 그런 것으로는 종교, 교육, 과학, 정치, 경제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빌딩을 지을 수 있고, 아무리 정교한 비행기를 만들 수 있을지라도, 자신을 제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땅콩회항’이라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렇듯 몸부림을 치다가 인간은 사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의롭지 못한 불의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하여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주셨습니다.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그들의 수치를 덮어주시고 가려주신 것입니다. 불의한 인간에게 다시 오셔서 그들의 수치를 덮어주시고 가려주시겠다고 하는 의지를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들려주신 돌아온 탕자 이야기누가복음 15장에도 잘 나타납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께서는 제일 좋은 옷을 입혀주십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로 말미암아 불의하게 된 우리, 수치와 비참함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를 가려주시고 새 옷을 입혀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씻어주시고 수치를 가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죄 용서 받은 사람은, 자신이 노력하던 나뭇잎 치마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가죽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입고 있던 누더기 옷을 벗어버리고 아버지께서 주신 제일 좋은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불의한 자가 의롭다 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말은 이제 다시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함께 웃고 함께 살 수 있는 아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을 가리켜 의롭게 되었다 또는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시리즈 중에서 일곱 번째 내용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립니다.로마서 5:1 하나님과의 조화와 교제가 회복됩니다. 그러면 자신과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쉼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조화도 회복됩니다. 나아가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아들들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복입니다. 그들은 이런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찬양/414장 <이 세상은 요란하나>
1. 이 세상은 요란하나 내 마음은 늘 평안하다 구주의 뜻 준행하니 참 기쁨이 내 것일세
2. 이 세상은 늘 변하고 험악한 일 참 많으나 주 은혜만 생각하니 참 기쁨이 내 것일세
3. 육신의 눈 못 볼 때에 신령한 눈 곧 밝히사 저 천성문 보게 하니 참 기쁨이 내 것일세
4. 내 마음과 내 영혼이 모든 욕심 다 버리고 주 은혜로 성결하니 참 기쁨이 내 것일세
5. 이 육신의 복락보다 신령한 복 더 좋으니 내 맘과 뜻 다 합하여 저 천성만 향해가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로마서 14:17).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여기서 의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것이요 그런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평강이요, 기쁨의 삶이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나라의 복락을 이미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사람은 천국의 기쁨, 에덴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누가 불의한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옷을 거부하고 자신이 만든 나뭇잎 치마를 고수하는 사람입니다. 실상 그의 옷은 누더기처럼 여기 저기 해어지고 낡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의 옷은 자신의 행실, 자신의 업적, 자신이 모은 재산과 명성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쉽게 깨어지는 것인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눅 18:25고 하셨습니다. 불의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의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불쌍한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에게는 의의 옷을 입혀 주셨으므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 화평을 누리며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조금이라도 잘못 선택하거나 실수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큰 벌을 내리실지도 모른다고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용납하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지 모르고 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다른 사람의 평판에 기대어 살아가기 바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한 생활의 회계장부가 있어서 죄와 허물을 기억하고, 잘한 행동을 기억하면서 그 죄의 값에 대한 채무의식으로 살아갑니다. 나의 일주일은 하나님께 얼마나 빚을 졌는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자신에 대한 죄목록을 정산하느라고 무거운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런 사람에게 일러줍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개역개정]. 이것을 새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빚문서를 지워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빚문서를 제거해 버리셨는데 나는 여전히 그 문서를 붙들고 자책하고 두려워하면서 채무의식으로 살아간다면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더 이상 우리를 대적하고 불리하게 하기 위하여 작성된 빚문서가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두 가지 문서를 주십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과 생각에 주셔서 우리가 마음과 생각으로부터 주님을 따를 수 있게 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크기만큼의 원대한 비전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그런 위대한 꿈을 꾸게 하십니다. 성경으로 이 말씀을 확인해 봅시다:
히브리서 8: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죄의 빚문서를 버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라고 하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두시고 기록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읽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미 그것을 우리 안에 기록하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인생에 대한 계획과 청사진을 그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꿈과 환상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가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께 기도 드릴 때마다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행하시면서 우리 마음에 소원을 주셔서 인생에 멋진 일들을 하고 싶은 마음과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빛나도록 하십니다. 그것을 찾아 빛나는 인생을 살아갑시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을 가리켜 의인이라고 합니다. 의인은 그가 가면 곧 길이 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끊임없이 그에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려주시고 인도하십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릅니다(잠 4:18).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은 그의 품속에 노예해방문서를 간직하고 주님의 자유인으로서 천국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면서 당당하게 걸어갑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거니와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합니다(잠 28:1). 이것이 의롭다 함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우리를 책망하신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6:8~11을 보면, 예수께서 보내실 성령께서는
이것은 믿는 자들을 책망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세상이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세상을 말합니다(요 15:18~19).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우리들을 통하여 세상에게 예수님을 믿지 않음이 죄요, 부활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분이시며눅 23:47, 벧후 1:1, 예수님께서 이 세상 임금을 십자가로 승리하셨고 만 왕의 왕이 되셨다고 선포하고 알게 하도록 책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를 깨닫고 생각나게 하는 것은 율법입니다롬 3:2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죄책에 눌려 자유하게 하시고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신 주님의 은혜와 화평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설령 우리가 범죄에 빠졌을지라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대속의 은총을 바라보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죄로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별명은 보혜사(保惠師)입니다. 위로자comforter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배우면서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우울증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찾아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홀로 있을 때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홀로 있는 시간이 불안하거나 두렵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복음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자신에게 당당하고, 다른 사람과 화평하며, 그리고 그가 하는 일들을 통해 세상은 밝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의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의인들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갑시다. 우리가 의롭다 인정을 받았으니 의롭게 살아서 마지막 심판날에도 의의 세마포를 입는 우리들이 됩시다(계 18:6~8). 성자 어거스틴은 다음의 말씀을 통해서 회심하고 의의 옷을 입고 평생을 살아간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2~14).
새소망교회 주일 메시지 2015-05-03
복음 시리즈 (08) 죄에 대하여 죽었다(죽음)
설교를 위한 질문:
1.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고통
2. 고난의 원인과 성도들의 반응
3. 성경이 일깨워주는 진리는 무엇인가?
4. 나의 본성은 어떻게 된 것인가? 사탄의 거짓말은 무엇인가?
5. 내가 또 넘어지면?
참고도서: The Gospel in Ten Words(Paul Ellis, 2012)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 6:6~7)
1.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고통
이런 은혜송가가 있습니다:
구주를 알 때 행복 있네 그 사랑 안에 거하므로 내 맘이 참 변화되었네 주는 나의 행복
거듭난 생에 행복 있네 예수와 나는 하나되어 구원의 사랑 나 얻었네 주는 나의 행복
오 내 기쁨 또 눈물이 두렵잖네 나 발견했네 이 보배 예수를
용서받을 때 행복 있네 값있는 생을 살게 한 주 하늘나라로 인도하네 주는 나의 행복
주는 나의 행복 주는 나의 행복
그리스도인의 삶에 행복을 발견하고 누리고 살아가는 삶은 정말 좋습니다. 우리가 은혜 충만할 때 그런 삶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것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 받아 좋았는데 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부담스럽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가장으로서 떳떳하지 못하고 대인관계에도 자신이 없습니다. 아예 가족으로부터 또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아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교회에 나올 때와 집에 있을 때 자신의 삶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어떤 때는 다시 또 죄에 빠지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2. 고난의 원인과 성도들의 반응
이런 고통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에 대하여 인식하고 회개하고 돌이킨 이후에 경건하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의인이 되었고 성도가 되었는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진리를 알 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알고자 목마른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통해서 더 큰 자유와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무지와 불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지는 진리를 모른다는 것이요 불신앙은 진리를 배워도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지와 불신앙이 깊을수록 그의 삶에 어두움도 깊어지고 진리를 믿어 순종할수록 그의 삶은 빛 가운데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은 죄에 빠져 살아가게 되거나 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이미 전쟁은 끝났는데 그것을 모르고 29년 동안이나 필리핀에서 고난 중에 세월을 허송한 히루 오노다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진리를 듣지 못해서 또는 진리를 믿지 않아서 그와 같이 세월을 허송하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3. 성경이 일깨워주는 진리는 무엇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죄에 매어 종 노릇하던 우리 자신이 죽었다고 일깨워줍니다.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알려줍니다. 아담의 생명으로 살던 나, 하나님과 원수 된 나, 세상과 짝하던 나, 마귀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던 나,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던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말씀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나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대신에 죄에 물든 자신을 죽이기 위해 평생을 허송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에 다니다가 그만 둔 사람들 중에는 이 싸움이 너무 힘들어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면 좀 더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데 그 일이 쉬운 게 아니거든요.
우리의 옛 자아는 고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는 깨어졌고 타락했고 완전히 비뚤어졌습니다. 인간이 교육이나 훈련 또는 수양으로 고칠 수 있는 존재였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는 대신에 교육에 필요한 방법이나 교재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구제불능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심으로써 그 구제불능인 옛 자아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생명으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수양 방법이나 고행 또는 노력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만신창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고 이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고행하는 종교적인 삶이 아니라 옛 자아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것임을 우리에게 늘 기억하라고 세례를 제정하셨습니다. 로마서 6장에는 그리스도인의 세례가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늘 내가 저기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도 저기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과 더불어 나도 부활하여 새 생명으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몸은 아직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아담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새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요새 젊은이들 가운데 유행하는 복음성가는 이 사실을 그림으로 그려주듯이 설명합니다: http://blog.naver.com/smile2yagi/30156099204
유은성 -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주님께서 십자가에 한 번 달려 죽으신 것처럼 진실된 그리스도인도 한 번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을 믿으십시오. 이것을 예로 들어 보면 이렇습니다: 한 조직폭력배 무리가 있습니다. 많은 죄를 짓게 하는 두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직 안에 똑똑한 사람이 있습니다. 두목의 말을 듣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미 그에게는 현상금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형사들의 추적을 받지만 지금까지 잘 피해 왔습니다. 그런데 두목은 계속해서 범죄를 행하게 합니다. 이 똑똑한 사람이 생각해 보니 이렇게 살다가는 언제 죽을지 몰라 이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수하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두목의 말을 듣지 않고 달아나면 금방 붙들릴 것도 압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이 똑똑한 사람은 차량 폭파사건을 위장해서 자신이 죽은 것으로 하고 먼 나라로 도망합니다. 이것이 영화에서 말하는 그림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미 죽은 자로 여기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4. 나의 본성은 어떻게 된 것인가? 사탄의 거짓말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면 왜 죄를 짓는 것일까요? 그것은 죄에 대하여 자유하게 된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내가 육신적으로 살던 삶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육신적이라는 말은 내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얻으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만져지는 육감적인 경험에만 근거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면 죄 없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육신적인 경험에만 의지하고 사는 것은 불신자들에게는 정상적인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이라는 옛 삶의 방식을 따라 살 것인지 아니면 성령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살 것인지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속이는 교활한 전략을 구사할 것입니다. 그 전략이란, 우리의 마음에 죄의 소욕이라는 씨앗을 뿌려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 소욕이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죄의 생각이 들어오면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사탄이 갖다 준 것이니 내쫓아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이럴 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체 하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것을 우리에게 힌트로 보여줍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성적인 유혹을 해 왔을 때 그를 잡고 설득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반응이 없을 수 없지요.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주님의 거룩한 아름다움에 반응하여 살아갑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본성은 옛 사람의 본성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본성과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우리가 아직도 옛 사람이 좋아하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가운데 살기를 좋아한다고 마귀의 속임을 받는 사람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고 하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존귀하며 거룩하며 신의 성품을 가진 사람입니까? 그가 무엇에 반응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까? 예수님의 아름다움에 반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지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알 때 행복 있네 그 사랑 안에 거함으로 내 생활이 참 변화되었네 주는 나의 행복이라는 찬양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께 반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경 시편 119편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95. 악인들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나이다
96.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98.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99.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100.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04.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악한 생각에는 반응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리고 예수님께 대해서는 언제나 “아멘!”하며 살아갑시다. 인생의 성패는 바로 이곳에서 결정됩니다.
5. 내가 또 넘어지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두 가지 일이 생깁니다. 먼저 형제들의 참소자가 와서 정죄의 막대기로 우리를 내려칠 것입니다: “네가 한 짓을 보아라! 너는 악한 사람이다. 네가 그렇게 하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나 우리가 마귀의 이 정죄에 우리의 마음 집을 열어주면 그는 우리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돕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어질지라도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유를 얻었으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은 마귀의 정죄를 들을지 아니면 성령의 위로를 들을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속삭일 것입니다: “그것 보아라, 너는 별 수 없는 죄인이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웃기지 마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신뢰하라!”
우리 모두는 때때로 넘어집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넘어진 횟수를 세면서 마귀가 달아주는 꼬리표를 붙이면, 우리는 이전의 무지한 자신처럼 행동하는 셈입니다. 우리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감사하는 믿음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는 진정한 회개 가운데서 일어서서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행하면 당신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새롭게 하심 가운데서 행하면 당신은 패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옛 자아가 죽었고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다는 계시 가운데서 당신이 행한다면, 죄는 우리를 건드릴 수 없고 인생은 승승장구의 시나리오가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새소망교회 주일 메시지 2015-05-10
복음 시리즈 (09) 새롭게 됨
참고도서: The Gospel in Ten Words(Paul Ellis, 2012)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1.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정체성(正體性)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긍심과 자국의 문화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정체성이 뚜렷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와 민족 문화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잘 말해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헷갈려 한다면 그는 성정체성(性正體性)이 흐릿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다른 사람에게 언제나 당당하게 자신을 신자로 밝힐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고 살아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성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민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타산지석이 되어 오늘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그리고 시편을 읽으면서 옛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기도한 것처럼 새로운 백성된 우리들도 하나님께 고백을 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이런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고백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하게 됩니다. 나아가 오늘 본문과 같이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에 관하여 더 선명한 메시지를 듣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 곧 하나님께서 새롭게 나를 만드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외에도 성경을 읽으면 우리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수 많은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l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이다.
l 나의 모든 죗값은 영원히 지불되었고 내 모든 죄는 완전히 씻겨 졌다.
l 나는 구원 받았으며 주님의 손에서 나를 빼앗아 갈 자 없다.
l 나는 그리스도께 연합되었고 주님께서도 내 안에 계신다.
l 나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기뻐하시는 사람이다.
l 나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갈 수 있는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l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성자가 되었다.
l 나는 더 이상 죄에 순종하는 옛 아담의 종족이 아니고, 옛 사람이 죽은 사람이다.
2. 군인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
이것은 지난 8주 동안 설교한 주제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군대에 들어가면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군대에 입대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입고간 사복이나 소지품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이제 너는 군인이기에 사회에서 지내던 옛 사람의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군인정신이 투철한 건강한 군인은 가장 먼저 자신이 이제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라는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그 정체성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새로운 신분으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군대에 가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처음에는 무척 서투르고 어색해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아 군대에 들어온 사람도 그리고 사회에서 박사학위를 받느라 늦게 군대에 온 사람도 자신보다 훨씬 어린 상관 앞에서는 그렇게 실수 연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일단 군대에 들어와서 군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나면 세월이 감에 따라 군인다움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먹는 밥을 가리키는 속칭 먹은 짬밥이 늘어가면 걸음걸이도 군복을 입은 옷 매무새도 제법 폼이 납니다. 그리고 사격도 자신의 주특기도 발전하여 일병이 되고 상병이 되면서 어엿한 군인이 됩니다. 그리고 후임병들을 지도할 수 있는 분대장이 됩니다. 그렇게 성숙해 가는 군인을 보노라면 갓 군에 입대하던 시절의 어수룩함은 온데 간데 없고 오로지 군인으로서의 늠름한 모습이 배어나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도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지만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는 동안에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께 속해야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으면 그는 금방 자라나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교제를 통해, 성경공부를 통해 그는 점점 그리스도인다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이 없다면 이런 모든 활동에도 불구하고 성장은 나타나기 어렵습니다. 배우고 훈련을 받으면 군인이 군인다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3. 훈련소 교관과 성령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에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이전에는 미련하게 보였던 예배 생활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새 마음을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마음에 더 큰 아픔이 생기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 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사모하게도 하시고 깨닫게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런 사실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으리라(겔 36:26상).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이 들어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교회로 인도하고 예배로 인도하고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이제 밤의 사람이 아니라 낮의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마음 곧 새롭게 심장을 이식 받은 사람과도 같습니다. 새로운 열정이 일어나고 그 심장이 새롭게 고동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3:6)
이것이 성경말씀입니다. 이것은 죄를 범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우리를 꾸짖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는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훈련소 조교가 이렇게 말합니다: 군인은 울지 않는다! 군인은 시간에 늦지 않는다! 군인은 책임을 다한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는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군인으로서 훈련을 받고 성장하여 군인다운 군인이 되면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군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전에 아담에게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은 옛 피조물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성도다운 성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개인을 가리키는 말로서는 사실 성도보다 성자가 더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가운데 살면 주님의 의로운 성품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살면 주님을 닮아갑니다. 군대의 짭밥이 늘어가면 군인다움이 배어납니다. 요한은 다시 한번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다음과 같이 일깨워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한일서 3:9)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습니다. 사과 속에는 사과씨가 들어 있습니다. 호박 속에는 호박씨가 들어 있습니다. 성도 안에는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습니다. 성도 안에는 하나님의 유전자(DNA)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를 짓지도 못하는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현재 아무리 자주 넘어지고 깨져도 그는 점차 하나님의 유전자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다움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4. 천국에는 거짓말쟁이가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처럼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자임을 일깨워줍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개역개정)
의롭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속지 마십시오. 음란한 사람과 우상 숭배자와 간음하는 사람과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과 동성 연애자와 도둑과 탐욕이 많은 사람과 술 취하는 사람과 욕설을 일삼는 사람과 착취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현대인의성경)
요한계시록에서도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천국에는 거짓말쟁이가 없습니다. 다만 전에 거짓말쟁이였으나 이제 새롭게 된 자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천국에는 음행하는 자들도 없습니다. 다만 전에 음행하였으나 이제 새롭게 된 자들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깨지고 추하고 상한 사람들을 새롭고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들로 만드십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비방하는 자들과 사기꾼들이 주님 안에서 성자들과 하나님 자녀들로 변화됩니다.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에는 신앙의 명예의 전당이 있습니다. 야구를 빼어나게 잘하는 사람들을 뽑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립니다. 신앙에도 빼어난 사람들의 이름이 히브리서 11장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라합, 다윗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노아는 한 때 술주정꾼이었습니다. 아브라합은 한 때 하녀와 동침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전형적인 사기꾼이었습니다. 모세는 살인자였습니다. 라합은 기생 출신입니다. 그리고 다윗왕은 겉과 속이 다른 왕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하 장수의 아내를 빼앗고 그의 남편을 죽이고 거짓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가면 다윗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토록 죄인인 다윗도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을 믿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 사람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5. 걷는 법을 배우라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갓 태어난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군대에 갓 입소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성장이 필요합니다. 성도가 자주 죄를 범하는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생명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새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 걷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지만 운전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것과 유사합니다. 모든 배움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걷다가 넘어진 아이를 붙들고 한탄하면서 우리 아이는 걸을 수 없는 소아마비라고 탄식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자녀를 칭찬하면서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께서도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성도로서 걸음마를 배우라고 격려합니다: 너희 마음에 띠를 띠라! 빛 가운데 행하라! 예수를 본 받으라! 새 사람을 입으라! 이런 말씀들은 우리를 격려하는 주님의 격려입니다. 우리가 넘어진다고 곧 진리를 거절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말씀 가운데서 걷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구해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주님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께서는 끈기 있게 우리를 도우십니다. 또한 우리 교회에서 실시하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로 걷는 훈련을 할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우리는 늠름한 군인처럼 성도다운 성도로 성장하여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새소망교회 주일 메시지 2015-05-17
복음 시리즈 (10) 왕
참고도서: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Surprised by Hope, Tom Wright, 2007, 2009)
The Gospel in Ten Words(Paul Ellis, 2012)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다 (벧전 2:9)
도입: 임금님 놀이
제가 어렸을 때 즐겨 하던 놀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내에서 하던 놀이로서 나이가 어린 시절에 하던 것입니다. 아마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3년 정도 있으면 이 게임은 유치해집니다. 그래서 저의 자녀들이 어렸을 때 이 게임을 가르쳐 주었는데 정말 즐거워합니다. 아마 태희가 내년쯤에는 좋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게임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을수록 좋습니다. 옛날에는 한 가정에 자녀들이 많아서 더욱 좋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사촌들이 함께 하면 좋습니다. 그 이름은 ‘임금님 놀이’입니다. 아이들이 나이 순서나 가위바위보를 하여 이긴 순서대로 방 한편에 벽을 기대고 폼을 잡고 앉습니다. 그러면 제일 나중에 앉은 사람이 일어나 자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신하처럼 큰 절을 하면서 말합니다:
신하: “임금님, 가게 보러 왔습니다.”
임금: 무슨 가게냐?
신하: 가위바위보 가게입니다.
임금: 네가 나에게 이길 수 있겠느냐?
신하: 네 그렇습니다.
임금: 그래? 그럼 어디 한번 해 보자.
이렇게 해서 가위바위보를 합니다. 임금이 이기면, 신하는 물러났다가 다시 도전합니다. 신하가 이기면 임금님의 자리에 앉습니다. 이렇게 해서 계속 이기면 제일 높은 왕에게 도전하고 마침내 가장 큰 임금님이 되면 신나고 즐거워합니다. 여기에는 나이 차이가 나도 좋습니다. 아빠가 아이에게 큰 절을 하면서 예를 표하는 모습을 보는 아이는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께서는 우리들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왕족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어린 시절에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기억할 것입니다: 왕왕왕왕 나는 왕자다! 공공공공 나는 공주다! 하나님 나라에 나는 왕자다! 내가 비록 어릴지라도 나는 왕 나는 왕 나는 왕자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자, 모두다 물리치리라! 이세상을 앞장서가는 나는 왕 나는 왕 나는 왕자다!
저도 어린 시절에 이 찬송을 부르고 율동을 하고, 청년이 되어서는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때 내가 왕이라는 말이 천국에 가면 나는 왕이 된다는 말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니 우리가 믿음을 잘 지키면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리라(계20:6)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누구인가 하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은 이 의미가 무엇인지 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메시지는 복음시리즈 중에서 열 번째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먼저,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인간을 만들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인간에게 어떤 임무를 부여합니까? 그들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기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그 지으심을 받을 때부터 하나님의 작품인 세계를 다스리는 왕의 임무를 맡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지으시고 보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일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그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관리할 때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할 것이었습니다. 조화로운 세계가 더욱 질서와 평화로 가득할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왕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형상을 하고 나타난 마귀의 유혹을 받아 그만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가지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동산 모든 실과는 임으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그것을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날 아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으리라 하시던 아담은 그 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인간은 가장 아름다운 땅에서 쫓겨나 유배된 것입니다. 그 유배지에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신음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본래 왕 같은 존귀한 자로 지음을 받았으나 스스로 짐승 같은 자존감과 행실을 하는 비참한 지경에 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파괴하고 서로 헐뜯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곳으로 세계를 만들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부름 받은 민족, 이스라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유배지에서 돌이켜 본래 가진 존귀한 신분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계획의 출발점은 바로 우상의 도시에 살던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창 12:1~3).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언약을 맺으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열왕이 나올 것을 말씀하십니다(창 17:16). 즉, 많은 왕들이 그에게서 나올 거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땅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요 그들이 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충실하시고 신실하셔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신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던 그 때부터였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기에 철권통치를 하던 파라오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언약을 맺으십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 19:4~6)
아브라함에게 맺은 언약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열방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방의 축복을 위한 제사장의 나라요, 아브라함은 열방을 위한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담처럼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생각대로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먼 나라로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열방을 위한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들의 자랑거리였던 성전도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마침내 그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마태는 이를 확인하듯이 그의 복음서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태 1:1). 예수께서는 나시면서부터 동방의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을 때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그 백성을 회복하실 분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예수님의 죄패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기록되어 붙여졌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언약을 따라 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다 의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왕좌에 앉게 된다는 말입니다(엡 2:6).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우리를 향하여 베드로 사도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우리의 신분을 일깨워줍니다.
열방의 빛으로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우리를 가리켜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자신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피조 세계를 다스리라고 아담을 지으셨듯이, 열방의 축복을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듯이, 열방을 위한 제사장의 나라가 되라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셨듯이, 그리고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으셨듯이,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세상을 위한 빛으로, 축복의 통로로 열방을 제자 삼기 위해, 나아가 열방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기 위해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은 지극히 작은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큰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거부가 되게 하셨지만, 처음부터 그를 부르실 때 그를 위할 뿐 아니라 그를 통하여 열방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부르셨지만, 이보다 더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를 보아도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기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속히 우리의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의에 빠진 엘리야만이 그렇게 기도할 따름입니다.
아담을 통해,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을 통해,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을 위한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셨듯이,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서 할 일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혼돈된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다스리실 것이며 이 저주와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끝이 났다고 하는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소식을 들고 가는 발걸음이 아름답다고 이사야는 노래합니다(사 52:7).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우리 교회 달력에도 인쇄된 것처럼,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바로 우리 왕 같은 제사장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도 한 때는 어두움 가운데 앉아있었으나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으로, 그리고 사람들을 제자 삼는 일을 함으로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빛이 될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도 실패하고, 이스라엘도 실패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을 영광 받으심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 보여주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말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소임을 맡은 자라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재림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따라 우리들이 주의 일에 힘쓸 때 그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고전 15:58).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창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됩니다. 바울도 이것을 에베소서 2: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
하나님 나라를 위한 빛이 되는 일, 우리가 할 선한 일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작은 자들의 친구가 되는 일입니다. 서로 감사하고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 일은 어쩌면 작은 미소로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하며 만들어진 모든 미술, 음악작품과 문학작품을 의미합니다. 심한 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가 글을 읽거나 걸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보낸 시간을 의미합니다. 또한 인간들을 위한 또한 인간이 아닌 피조물을 위한 돌봄과 양육, 위안과 지지의 모든 행위를 의미합니다. 기도와 성령의 인도를 받은 가르침, 복음 전파, 교회를 세우는 일, 예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존경 받게 하는 모든 행위들을 포함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왕이다!
이런 일을 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우리를 왕이라고 성경은 부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방관자가 아니라 문제를 보면 해결하는 왕입니다. 대통령이 오면 마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왕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실 것을 믿기에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해 나갑니다. 그들 스스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24시간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접근권이 있습니다(히 4:16).
구약성경에서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오니,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봅니다(대하 20:12). 왕은 이 문제 많은 세상에서 하늘의 해결책을 가져옵니다. 그 왕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의 편에 서며, 아픈 자들과 눌린 자들을 해방시켜줌으로 마귀가 하는 파괴적인 일에 맞섭니다. 또한 백성들의 자리에 서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미술과 과학, 산업과 정치 등의 영역에서 창조적인 표현을 함으로써 왕들은 하늘의 문화를 이 땅으로 가져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왕 같은 제사장들은 이런 선한 뜻을 이루지만, 이 세상 정욕을 따라 산 사람들은 마귀의 도구가 되어 세상과 사람들을 파괴하는 일에 사용됩니다.
이런 왕 같은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백인과 흑인이 극한 대립과 갈등 가운데 서로 죽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진리와 화합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어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를 일구어내는 일에 앞장섭니다. 우리나라의 지역 갈등은 이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입니다.
우리 시대의 갈등과 악을 봅시다. 종교 갈등, 핵무기, 아동성매매, 강대국의 교만, 인간의 상품화, 인종의 우상화 등으로 온 인류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치료하고 회복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교회를 세우셨고 우리들을 왕으로 임명하셔서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는 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다른 예는,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해 노력한 존 울만(John Woolman, 1720~1772)과 윌버포스(1759~1833)이 감내한 무시와 타협의 태도, 그리고 위협을 들 수 있습니다.
지구적 고통의 순간에 자신의 구원과 자기의 문제에만 심취한 평민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담처럼 기회를 받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할 왕들입니다. 주님의 재림 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 노릇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하게 만드신 이 세상의 신음하는 현장에서 어두움에 빛으로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뜻을 따라 왕으로 살아갑시다.
나를 세상의 빛으로
나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주님
비추소서 나도 주님의 빛을 비추리라
어둠을 밝히는 빛
온 세상을 비추는 빛
산 위의 마을이 숨기지 못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