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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선왕께서 정관 22년에 입조하여, 태종 문황제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으니, 그 조칙에는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매번 침해를 받아 편안한 날이 없음을 가련히 여겼기 때문이다. 산천도 토지도 내가 탐하는 것이 아니며, 재물도 자녀도 모두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 백제의 토지는 전부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고 하면서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의 동원 기일을 정하여 주었다. 신라 백성들이 모두 이 은혜로운 조칙을 듣고,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동원되기를 기다렸었다. 그러나 대업이 끝나기도 전에 문제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지금 황제가 위에 오르자, 선대 황제의 은혜가 이어져, 지난 날보다 더욱 자주 은덕을 입었다. 나의 형제와 아들이 귀한 선물과 관직을 받았고, 영광스러운 총애는 지극하였으니, 이는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에 따라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지도록 시키는 일을 다하려 하였으며, 비록 우리의 간과 뇌가 평원을 덮더라도, 은혜의 만분지 일이나마 보답코자 하였다. 현경 5년에 황제는 선대 황제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겼으니, 전일에 남겨 둔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전함을 띄우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대부대의 수군을 동원하였다.
백제원정
당시 무열왕은 늙고 힘이 없어 행군을 견디기 어려웠으나, 예전의 은혜를 추모하는 감정으로, 억지로 국경까지 나왔으며, 나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귀국의 군대를 영접하게 하였다. 동서가 호응하며 수륙 양군이 함께 진격하여, 수군이 겨우 강 어구에 들어올 즈음 육군은 이미 대부대의 적군을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두 나라 군사가 함께 백제의 수도에 이르러 백제 전국을 평정하였다.
평정 후에 선왕은 소정방 대총관과 함께 뒷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당 나라 군사 1만을 머물게 하고, 신라도 또한 아우 인태에게 군사 7천을 주어, 그들과 함께 웅진을 지키게 하였다.
백제부흥운동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적의 신하 복신이 강의 서쪽 지방에서 봉기하여 백제의 유민을 모아 부성(사비성)을 포위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를 부수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부성(사비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상황이 되었다. 또한 부성(사비성) 부근 네 곳에 성을 쌓아, 부성(사비성)을 포위한 채 수비하고 있으므로 부성(사비성)에 출입할 수 없었다. 이 때 나는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포위를 풀고, 사면의 적의 성을 한꺼번에 모두 격파하여, 우선 그들의 위급함을 구원하였고, 다시 군량을 수송하여 마침내 1만 명의 당 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범의 아가리에 든 위험을 면하게 하였으며, 그 곳에 남아 수비하던 굶주린 군사들로 하여금 자식을 바꾸어 잡아 먹는 참상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661년에 이르러 복신의 도당이 점점 증가하여 강의 동쪽 땅을 침탈하였으므로, 웅진의 당 나라 군사 1천 명이 가서 적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적에게 격파 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 이후 웅진으로부터 구원병의 요청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그 당시 신라에는 전염병이 많이 돌아 군마를 징발할 수가 없었으나, 그들의 애타는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파견하여 주류성을 포위하였다. 적은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나와 공격하여, 우리의 군마는 크게 손상 당했고, 결국 우리는 승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쪽 지방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반란을 일으키고 복신에게 복속하니, 복신이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사비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따라 웅진으로 가는 길이 즉시 차단되어 소금과 된장이 떨어졌으므로, 건장한 청년들을 모집하여 다른 길로 몰래 소금을 보내 곤핍해진 그들을 구원하였다.
661년 6월에 이르러 선왕이 돌아가시자 장례를 겨우 끝냈는데, 상복도 미쳐 벗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군사를 웅진으로 보내지 못하였던 바, 황제의 칙서가 내려 군사를 북방으로 보내라고 하였다. 그 때, 함자도 총관 유 덕민 등이 왔는데, 그들은 신라로 하여금 평양으로 군량을 운반하게 하라는 황제의 칙명을 전하였다.
이 때 웅진에서 사람을 보내와 부성(사비성)이 고립되어 위태롭다는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유 총관이 나와 함께 일을 처리하면서 스스로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 길이 차단될 것이오, 웅진 길이 차단된다면 그 곳에 주둔하고 있는 당 나라 군사가 바로 적의 손아귀에 들어 갈 것이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유 총관은 드디어 나와 동행하여 우선 옹산성을 공격하였다. 옹산을 점령하고 이어 웅진에 성을 쌓고, 웅진 길을 개통시켰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군량이 모두 소진되었다. 그러나 먼저 웅진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칙령을 어긴다는 문제가 있었고,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의 군량이 끊길 것이 염려 되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노약자를 시켜 웅진으로 군량을 운반하고, 건장한 장병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웅진으로의 군량 수송 도중에 눈이 내려 사람과 말이 모두 죽어서 백 명에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용삭 2년 정월, 유 총관이 신라 양하도 총관 김 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보냈다. 이 때 궂은 비가 한 달 이상 계속 내리고 눈과 바람으로 날씨가 몹시 추웠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동상을 입어 군량을 전할 수 없었다. 평양의 당 나라 군사들은 귀국을 원했다. 신라 군사들도 양식이 떨어져 역시 귀환하였다. 군사들은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손발에 동상이 걸려 도중에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행군이 호로하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가 뒤를 따라와 언덕에 진을 쳤다. 신라 군사들은 오래도록 피곤한 상황이었으나, 적이 멀리까지 따라 올까 염려하여,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가서 접전을 벌였는데, 선봉대가 잠시 교전하는 사이에 적이 와해되고 말았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 온 군사들이 집에 도착한 지 한 달도 못되어, 웅진 부성에서는 여러 차례 곡식을 요청하였다. 이 때 앞뒤에 보낸 곡식이 수만여 곡이었다. 이와 같이 소국 신라가 남으로는 웅진, 북으로는 평양으로 소국 신라가 두 군데나 공급을 하고 보니, 인력은 극도로 피로하고 소와 말은 모두 죽었으며, 농사 지을 시기를 놓쳐서 흉년이 들고, 저축해 두었던 창고의 양식은 두 지역의 수송으로 모두 없어졌으므로 신라의 백성들에게는 풀뿌리도 모자랐는데, 웅진에 있는 당 나라 군사들에게는 식량이 남아 돌았다. 또한 진에 주둔하는 당 나라 군사들은 집 떠난 지가 오래되어 옷이 헤어져 몸에 걸칠 성한 의복이 없었다. 이에 따라 신라에서는 백성들을 독려하여 철에 맞는 의복을 지어 보냈다.
도호 유 인원은 멀리 고립된 성을 수비하는데,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항상 백제의 포위를 당하였으므로 언제나 신라의 구원을 받았다. 1만 명의 당 나라 군사가 4년 동안 신라의 식량을 먹고 신라의 의복을 입었으니, 유 인원 이하 모든 병사들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 땅에서 났으나,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었다. 당 나라의 은택이 비록 대단하다고 하지만, 신라가 바친 충성도 또한 가볍게 여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용삭 3년에 이르러 총관 손 인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부성을 구원할 때, 신라의 병마도 역시 참여하여 행군이 주류성에 이르렀었다. 이 때 왜국의 수군이 와서 백제를 돕게 되어, 왜선 일천 척이 백강에 머물러 있었으며, 백제의 정예 기병들이 강가에서 배를 수비하고 있었다. 신라의 정예 기병들이 당 나라 군의 선봉이 되어 먼저 강가의 진지를 격파하니, 주류성은 사기를 잃고 마침내 항복하였다.
남쪽 지방이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방을 치는데 임존성 한 곳이 미욱하게도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두 군대가 협력하여 그 성을 함께 공격하였으나, 그들이 성을 굳게 수비하고 강력히 저항하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없었다. 신라는 즉시 회군하고자 하였으나 두대부가 '칙령에 의하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는 모두가 함께 맹약을 하게 되어 있으니, 임존성 하나가 비록 항복하지 않았더라도 모두 모여 맹약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신라는, 칙령대로라면 '완전한 평정' 이후에 맹약의 회합을 가져야 하며, 임존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완전한 평정'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신라는 또한, 백제는 모든 행동이 간사하여 향후의 행동 변화를 예측할 수 없으니, 지금 비록 함께 모여 맹약을 하더라도, 뒤에 가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 염려되므로, 맹약을 하지 않겠다고 황제에게 주청하였다. 인덕 원년에 다시 엄한 칙령이 내려 맹약하지 않은 것을 질책하였으므로, 나는 즉시 사신을 웅령으로 파견하여 제단을 쌓아놓고 모두 함께 모여 맹약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맹약을 한 지역을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다. 맹약의 행사는 비록 우리가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령을 어길 수 없어 행한 것이었다. 또한 다시 취리산에 제단을 쌓고 칙사 유 인원과 마주하여 피를 입에 머금으면서 산하를 두고 맹약하였는데, 맹약의 내용은 경계를 확정하고 봉토를 쌓아서 이를 영원한 국토로 삼아, 백성들이 거주하고 저마다 생업을 경영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고구려원정
건봉 2년에, 대총관 영국공이 요동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한성주에 갔으며, 그 곳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에 집합하도록 하였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들어가서는 안되겠기에 먼저 3회에 걸쳐 정탐을 보내고, 배를 잇달아 보내 당 나라 군사의 상황을 알아 보았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한결같이 '당 나라 군사가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을 공격하여 길을 열어 놓고, 당 나라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할 때, 영공의 사자인 강심이 와서 '신라 군사가 반드시 성을 공격할 필요는 없으니, 평양으로 조속히 군대를 파견하여 병기와 군량을 공급하라는 대총관의 명령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명령을 내려 군대를 모아 행군하여 수곡성에 당도하자, 당 나라 군사가 이미 회군하였다는 말을 듣게되어 신라 군사도 그 곳을 즉시 빠져 나왔다.
건봉 3년, 대감 김 보가를 시켜 해로를 통하여 요동에 들어가 영공의 명령을 받아오도록 하였는데, 그는 신라 군사를 평양에 집합시키라는 분부를 받아 왔다. 5월에 이르러 유 우상이 와서 신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함께 평양으로 갔다. 나도 역시 한성주로 가서 군사들을 검열하였다. 이 때 번군 한군 모두가 사수에 집결하니, 남건도 출병하여 결전을 하고자 하였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을 격파하니, 평양 성중의 기세가 꺾였다. 그후 영공이 다시 신라의 정예 기병 5백 명을 선발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신라 군사들이 모두 '정벌을 시작한지 9년이 이미 지나 인력은 소진되었으나 마침내 두 나라를 평정하여 누대에 걸친 소망을 오늘에야 이루었으니, 나라는 충성을 다한 은혜를 입은 것이요, 백성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영공이 '신라가 이전에 군사의 동원 기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반드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있어, 신라 군사들이 이 소문을 듣고 더욱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또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당 나라 서울에 전달되었는데 '지금 신라에는 아무런 공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그 장군들이 돌아오자 백성들의 공포심이 더하였다. 또한 비열성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빼앗은지 30여 년 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회복하여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관리를 두어 수비했으나, 당 나라는 이 성을 다시 빼앗아 고구려에 돌려 주었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할 때부터 고구려를 평정할 때까지, 충성을 바치고 힘을 다하여 당 나라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가 있기에 하루 아침에 이렇게 신라를 저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라는 비록 이와 같은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배반할 마음은 없었다. 총장 원년에 백제는 앞서 모여 맹약하였던 곳에서 경계를 옮기고, 경계 표시를 바꾸어 전지를 침탈하였으며, 우리의 노비들을 달래고 백성들을 유혹하여 내지로 데려가 숨겨 놓고는, 우리가 여러 번 찾아도 끝까지 돌려 보내지 않았다. 또한 '당 나라가 배를 수리하면서 밖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려오니,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 하면서 불안하게 지냈다. 또한 백제 여자를 데려다가 신라의 한성 도독 박 도유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음모하여 신라의 병기를 훔쳐서 어떤 한 주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다행히 일이 발각되어 즉시 도유를 참수하였기에 음모가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함형 원년 6월, 고구려가 모반하여 당 나라 관리를 모두 죽였다. 신라는 바로 군사를 출동시키고자, 먼저 웅진에 알리기를 '고구려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반드시 함께 흉적을 토벌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군사의 출동은 상호 토론해야할 문제이니, 청컨대 관인을 이 곳에 파견하여 함께 토벌을 계획하여 보자'라고 하였는데, 백제의 사마 니군이 이 곳에 와서 의논하는 중에 말하기를 '군사를 동원한 뒤에 서로가 의심할 수 있으니, 응당 신라와 백제의 두 편 관인을 상호 인질로 교환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김 유돈과 부성의 백제 주부 수미, 장귀 등을 부로 파견하여, 인질 교환의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백제는 인질의 교환에 찬성하기는 하였으나, 성 안에서는 여전히 병마를 모아 성 아래에 있다가 밤이 되면 나와서 공격을 했다.
7월에 당 나라에 갔던 사신 김 흠순 등이 귀국하여, 장차 경계를 확정할 것인데, 지도에 의하여 백제의 옛 국토를 조사하여, 백제의 국토는 백제로 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황하가 아직 마르지 않았고, 태산이 아직 닳지 않았거늘, 3,4년 사이에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이 모두 원래 바라던 바가 아니라고 실망하면서, '신라와 백제는 누대에 걸친 철천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정황을 보면 스스로 별도의 한 국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니, 백년 이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 의하여 멸망될 것이다. 신라는 원래 당 나라의 한 지방이므로 두 나라로 나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원컨대 이를 한 집안으로 만들어 영원히 후환을 없애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작년 9월에 이러한 사정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상주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바다에서 표류하여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역시 당 나라에 도착할 수 없었다. 그 후에는 바람이 차고 풍랑이 심하여 결국 상주를 올리지 못했다. 백제는 거짓으로 '신라가 반역한다'고 상주하였다. 신라는, 앞으로는 당 나라 고관의 심정적 후원을 잃고, 뒤로는 백제의 참소를 당하여, 어떻게 행동하든 언제나 질책만 당하였으므로 충성심을 보일 길이 없었다. 황제는 이와 같은 참소를 날마다 들었으므로, 변함 없는 충성을 한 번도 황제에게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자 임 윤이 전하는 편지를 보니, 총관이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에서 왔다하므로, 도리상 사신을 교외에 파견하여 영접하고 고기와 술을 올려야만 할 것이나, 다른 지역에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예를 갖추지 못하고 영접을 못 한 것이니, 청컨대 크게 탓하지 말라. 총관의 편지를 보면 전적으로 신라가 반역을 한 것으로 취급되어 있으나, 이는 본심이 아니었으니, 걱정스럽고 놀랍고 두려운 심정이다. 우리가 기울인 노력을 조목 조목 말하면 욕된 꾸지람이나 들을까 걱정되어 입을 다물고 질책을 받으려 하였으나, 이리하면 또한 사정을 모르는 당 나라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으므로, 이제 억울한 사정을 대략이라도 설명하여 우리가 반역할 뜻이 없었음을 상세하게 글로 쓰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당 나라는 사신 한 명 보내어 근본적인 사유를 물은 적이 없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의 터전을 뒤엎고자 수만의 군사를 파견하였으니, 병선은 창해를 덮어 배의 수미가 강 어구에 줄을 이었고, 저들 웅진을 독촉하여 우리 신라를 공격하려 하고 있다. 아아!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기 전에는 사냥개처럼 심부름을 시키더니, 들짐승이 없어진 지금에는 도리어 삶아 먹히는 사냥개의 박해를 당하고 있도다. 잔악한 백제는 오히려 옹치의 상을 받고, 당 나라에 희생 당한 신라는 이미 정공의 죽음을 당하였도다. 태양이 비치지 않건마는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오히려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총관은 영웅의 기상을 받고 태어났으며,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재기를 갖추었고, 일곱 가지 덕을 겸비하였으며, 아홉가지 종류의 학술을 섭렵하였는데, 삼가 천벌을 주는 데 있어 함부로 죄없는 자에게 죄를 주려 하는가? 황제의 군대가 출동하기 이전에 그대는 먼저 그 근본 이유를 물었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보내는 편지를 계기로 우리가 배반하지 않은 사정을 설명하노니, 청컨대 총관은 깊이 생각하여 실상을 정리하여 황제께 상주하라. 계림주대도독좌위대장군개부의동삼사상주국신라왕김법민이 말하노라."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9월, 당 나라 장군 고간 등이 번병 4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 대방을 침범하였다.
겨울 10월 6일, 당 나라 수송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 겸이대후와 군사 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다. 이 싸움에서 급찬 당천의 공로가 제일이었으므로 사찬의 직위를 주었다.
12년 봄 정월,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2월에 백제 가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가을 7월, 당 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이근행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동시에 평양에 와서 여덟 개의 군영을 짓고 주둔하였다. 8월에 한시성과 마읍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그들은 군대를 진군시켜 백수성으로부터 5백여 보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그들과 격전을 벌여 수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고간 등이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여 석문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고, 대아찬 효천·사찬 의문·사찬 산세·아찬 능신·아찬 두선·일길찬 안나함·일길찬 양신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으니 둘레가 4천 3백 60보였다.
9월, 혜성이 일곱 번 북방에 나타났다.
얼마 전 백제가 당 나라에 가서 호소하고 군사를 빌려 우리를 침략하자, 왕은 사세가 급박하여 황제에게 알리지 않고 출병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이 때문에 당 조정에 죄를 지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원천·내마 변산과 억류했던 병선낭장 겸이대후·내주 사마 왕예·본열주 장사 왕익·웅주 도독부 사마 니군·증산 사마 법총과 군사 1백 70명을 당 나라에 보내면서 청죄하는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렸다.
"저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말씀 드립니다. 예전에 제가 위급하여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을 때, 먼 곳에서 와서 구원해주어 제가 멸망을 면했습니다. 그러하니 몸을 부수고 뼈를 갈아도 그 크나큰 은혜에 보답하기가 부족할 것이며, 머리를 부수어 재와 먼지가 되더라도 어찌 그 자비의 덕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철천지 원수 백제는 우리의 변경을 핍박하고, 황제에게 청병하여 우리를 멸망시키고 원수를 갚으려 하였습니다. 저는 파멸이 두려워 우리의 생존을 추구하려다가,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취급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은 셈이 되었습니다. 제가 일을 저지른 의도를 말하지 않은 채 먼저 형벌을 당한다면, 살아서는 명령을 거역한 신하가 될 것이요, 죽어서는 은혜를 배반한 귀신이 될까 염려되어, 삼가 사실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마음을 기울여 들어 주시고 근본적인 사유를 밝게 살펴주기를 원합니다. 저는 선대 이래로 조공을 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근자에 백제 때문에 두 번 조공을 하지 않아 마침내 황제의 조정에 의론을 일으키고, 장수에게 명하여 저의 죄를 성토하게 하였으니, 죽은 후에도 받아야 할 벌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남산의 대나무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요, 포야산의 나무도 저의 착고를 만드는데 부족할 것이니, 종묘와 사직을 연못으로 만들고, 저를 죽여 몸을 찢어 버리더라도, 이 사정을 듣고나서 친히 판단하여 주신다면 기꺼이 형벌을 받겠습니다. 저는 부왕의 관과 상여를 옆에 두고, 머리의 진흙이 마르지 않은 채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며 삼가 형벌에 관한 명령을 듣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의 밝음이 해와 달 같아서 그 광명이 세상 어느 곳이나 골고루 비치며, 덕은 천지와 같아서 동식물이 모두 그 덕으로 자라나며,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은 멀리 곤충에게도 미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어진 마음은 날짐승과 물고기에게도 미치고 있습니다. 만일 용서를 내려 머리와 허리를 베지 않는 은혜를 베푸신다면, 제가 죽어야 하는 날이 오히려 태어나는 날로 변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어려우나 감히 생각한 바를 아뢰옵자니 황공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삼가 원천 등을 보내 글을 올려 사죄하며, 엎드려 칙명을 듣고자 합니다. 황송하고 황송하여 저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립니다."
이와 동시에 은 3만 3천 5백 푼, 구리 3만 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백 20푼, 금 1백 2십 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진상하였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13년 봄 정월, 큰 별이 황룡사에 떨어지고, 재성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강수를 사찬으로 임명하고, 해마다 벼 2백 석을 주기로 하였다.
2월, 서형산성을 증축하였다.
여름 6월, 호랑이가 대궁 뜰에 들어오자 잡아 죽였다.
가을 7월 1일, 유신이 사망하였다.
아찬 대토가 모반하여 당 나라에 붙으려다가, 사건이 누설되어 사형을 받았으며, 처자는 천인에 편입되었다.
8월,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사열산성을 증축하였다.
9월, 국원성[예전의 난완성]·북형산성·소문성·이산성·수약주의 주양성[혹은 질암성]·달함군의 주잠성·거열주의 만흥사산성·삽량주의 골쟁현성을 쌓았다.
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수비하게 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아홉 번 전투에서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호로·왕봉 두 강에 빠져 죽은 당 나라 군사가 이루 셀 수 없었다.
겨울에 당 나라 군사가 고구려 우잠성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거란과 말갈 군사가 대양성과 동자성을 쳐서 멸망시켰다.
처음으로 주에 2인, 군에 1인의 외사정을 두었다. 애초에 태종왕이 백제를 멸하고 수자리 군사를 없앴던 것을 이 때 다시 두게 되었다.
1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갔던 숙위 대내마 덕복전이 역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 때까지 사용하던 역법을 새 역법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당 나라에 반기를 든 고구려 백성들을 왕이 받아 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관리로 하여금 수비하게 하였다. 당 나라 고종이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없애고, 당 나라에 있던 왕의 아우 우효위 원외 대장군 임해군공 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 동중서문하 3품 유 인궤를 계림 방면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 필과 우령군 대장군 이 근행을 부관으로 삼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해왔다.
2월, 대궐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기한 새와 짐승들을 길렀다.
가을 7월, 큰 바람이 불어서 황룡사 불전이 훼손되었다.
8월,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월, 의안 법사를 대서성으로 삼고,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였다.[10년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는데, 지금 두 번째 봉하였으니, 보덕이라는 이름이 귀명 등과 같이 불교적 용어인지 아니면 지명인지 알 수 없다.]
왕이 영묘사 앞길에 나가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 수진의 육진 병법을 관람하였다.
15년 봄 정월, 모든 관청과 주와 군의 인장을 구리로 주조하여 나누어 주었다.
2월, 유 인궤가 우리 나라 군사를 칠중성에서 격파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 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그 곳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한 사죄하니 황제가 이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귀국하던 김 인문이 당 나라로 돌아가자, 그를 임해군공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빼앗아 마침내 국경이 고구려 남쪽 지방에 이르렀고, 그 곳을 주와 군으로 만들었다.
당 나라 군사가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침범한다는 소문을 듣고, 구군(九軍)을 출동시켜 이에 대비하였다.
가을 9월, 설 인귀가 숙위 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 진주가 본국에서 사형을 당했다고 하여, 그것을 빌미로하여 풍훈을 향도로 삼아 천성을 공격하였다. 우리 장군 문훈 등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 1천 4백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설 인귀가 포위를 풀고 퇴각하매, 우리는 전마 1천 필을 얻었다.
29일, 이 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하자, 우리 군사가 그들을 격퇴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3만 3백 80필의 전마와 그 이외에 이에 상당하는 병기도 얻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안북하를 따라 관문과 성을 건설하고 또한 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에 들어와 약탈을 시작하자, 성주 소나가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거란 및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 탈기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또한 석현성을 포위하고 이를 점령하려 하자,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전력을 기울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또한 우리 군사가 당 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6천 47명의 머리를 베고 2백 필의 전마를 얻었다.
16년 봄 2월, 고승 의상이 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가을 7월, 혜성이 북하와 적수 두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6,7보 가량 되었다.
당 나라 군사가 도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현령 거시지가 전사하였다.
양궁을 지었다.
겨울 11월, 사찬 시득이 수군을 이끌고 설 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우다가 패하였으나, 다시 크고 작은 20번의 전투에 나아가 승리하고 4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재상 진순이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17년 봄 3월, 강무전 남문에서 왕이 활 쏘기를 구경하였다.
처음으로 좌사록관을 설치하였다.
소부리주에서 흰 매를 바쳤다.
18년 봄 정월, 선부령 한 명을 두어 선박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좌우 이방부경 각 1명을 증원하였다. 북원을 소경으로 하고, 대아찬 오기로 하여금 그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3월, 대아찬 춘장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5월, 북원에서 이상한 모양의 새를 바쳤는데, 깃털에 무늬가 있고 정강이에 털이 나 있었다.
19년 봄 정월, 중시 춘장이 병으로 사직하자 서불한 천존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2월,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경략하였다.
궁궐을 다시 수리하였는데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여름 4월, 화성이 우림을 지키고, 6월에 금성이 달에 들어가고,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가을 8월, 금성이 달에 들어 갔다. 각간 천존이 사망하였다. 동궁을 처음으로 짓고 안팎의 모든 문의 현판 이름을 지었다. 사천왕사가 낙성되었다. 남산성을 증축하였다.
21년 봄 정월 초하루, 날씨가 종일 밤처럼 캄캄하게 어두었다. 사찬 무선이 정병 3천을 거느리고 비열홀을 지켰다.
우사록관을 두었다.
여름 5월, 지진이 있었다.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6월 천구성이 서남방에 떨어졌다.
왕이 서울을 새로 꾸미고자하여 중 의상에게 물으니, 의상이 "비록 풀밭과 초막에 살지라도 바른 도를 실천한다면 복스러운 세업이 오래 갈 것이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비록 사람을 고생시켜 성을 만든다 할지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이 일을 중지하였다.
가을 7월 1일,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문무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속설에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변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고 불렀다. 왕은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마침내 원근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여,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편하게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하였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만 하였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 가는 데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현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위 왕의 서릉에는 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뭇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 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