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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화된 해안선, 자연이 준 곡선을 잃다
바다는 인간에게 두려움과 경외감을 주면서 동시에 생활공간이었다. 물고기를 잡으면서 단백질이 풍부한 식량을 얻을 수 있었고, 때로는 놀이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해안에 연한 얕은 바다는 바닷물이 밀려 나가면 어린아이도 조개를 채취할 수 있었다. 얕은 바다를 메워 육지로 만들어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고기를 잡으면서 바다는 어장(漁場)이 되었고, 미지의 세계로 가는 장애물 없는 교통로로 이용되면서 사람들은 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땅과 물이 힘의 균형을 이루던 이전의 해안선 모습은 바다로 진출하려는 인간이 개입하면서 변하기 시작하였다. 항구는 바다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이자 동시에 다른 세계와 만나는 결절지다. 해안선의 변화는 항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의 항구 규모는 크지 않았다. 선박도 소규모고 물자의 지역 간 교역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적인 곡선의 해안선을 이용한 항구로도 충분히 기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산업 혁명 이후 증기선이 등장하면서 선박의 규모가 커졌다. 20세기 들어 유조선·컨테이너선 등이 건조되어 이를 위한 대규모 부두가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해안선의 모습은 직선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항구의 성장과 함께 이루어진 도시 규모의 확대는 해안선의 변화를 가속화하였다. 바다에 연한 도시는 내륙 도시에 비해 성장 속도가 빨랐다. 제조업과 수산 가공업이 해안가에 입지하면서 공업 용지가 마련되었고, 도시인에게 주거지를 제공하기 위해 주택 지구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해양과 대륙 문화가 섞이면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내면서며 휴양 도시로서 변모하며 사람들을 더욱 불러 모았다. 도시 해안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밀집도는 높아지고, 해안에 연한 바다는 토지 자본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공유 수면이 매립되면서 바다는 육지로 변하였고, 그곳에 고층 빌딩이 들어섰다. 이제 해안가 대도시에서는 자연이 내려준 곡선의 해안선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근대 이전의 부산포 해안선은 곡선이었다. 당시 부산포의 중심지는 부산진성이었다. 성곽은 지금보다 훨씬 산지 쪽에 있었다. 평야가 거의 없었으며 자성대를 쌓고 첨영사(僉使營)을 두었다. 부근에 있는 영가대(永嘉臺)는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의 배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기원하던 곳이었다. 부산진에서는 매 4일·9일에 장시가 열렸으며, 쌀·보리·콩·삼베·무명 등 일상용품이 거래되면서 부산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어촌이 자리 잡았으며, 지금의 여느 한적한 해안에서 볼 수 있는 포구와 다르지 않았다. 해안의 조그만 어촌인 용호, 감만포, 우암동, 초량, 남천동 등은 조개나 미역을 채취하거나 연안 어업에 종사하는 어촌이었다. 지금의 용호동이던 분개[盆浦]에는 염전도 있었다. 절영도는 예부터 숲이 울창하였으며 목장이 있었다. 국마를 검사하던 고리장[環場]이란 지명도 아직 남아 있다. 지금의 부평동인 오해야향에도 목장이 있었다. 당시에 초량 왜관이 있었던 지금의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의 용두산 부근도 한산한 어촌이었다.
조선 시대 부산포는 초량 왜관과 공존하면서 적당하게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한가하고 아름다운 포구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부산포는 일본의 대륙 진출 거점이 되었으며, 일본 증기선의 출현은 위와 같은 놀라움으로 묘사되었다. 부산은 이러한 모습으로 한국 근대사에서 항구 도시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의 우리에게 부산은 바다로 가는 길목이지만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아시아 대륙을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부산 땅을 밟으면서 대륙의 냄새를 처음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부산에는 임진왜란 때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격렬히 저항했던 동래성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대륙 진출을 위한 항만 건설의 무대로 수영만 대신 초량 일대를 선택하면서 부산포를 중심으로 식민 항만 도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이 개항하면서 일본 전관 거류지가 설치되었고, 부산포는 이곳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일본은 자국민을 이주시키면서 토지를 점유하여, 개항 당시 36만 3636.36㎡[11만 평]에 불과했던 일본 조계지는 1905년(고종 42) 거의 50배로 확장하였다. 해안과 부민동 일대 도로망이 계획되고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영사관 건물을 중심으로 주변에 경찰서, 은행, 병원, 상업 회의소, 전신국 등 공공건물을 배치, 건설하여 흡사 일본의 도시를 방불케 하는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지금의 중구 동광동과 광복동, 창선동, 신창동 등 부산의 중심지를 이루는 지역이다. 일본은 조계지를 얻었으나 평지가 협소하여 해안 매립을 시도하였다. 부산항은 전면에 놓인 영도와 조도가 바깥 바다로부터 파도를 막아 주고, 수심이 깊어 항만으로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나, 대형 선박이 접안하고 대규모의 물류를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해안 매립을 통해 항만 시설을 확충하는 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철도 건설과 시가지를 조성하고 항만 시설을 확장하여 부산을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부산항 매립은 일본인들 간에 이권(利權)의 각축장이 되기도 하였다. 구한말 이후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 해안 매립이 시작되었다. 일본에 의한 부산항의 매립은 처음에는 북항 매축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나 이후 부산진, 남항, 적기만의 매축으로 전개되었다. 북빈(北濱) 매축 공사는 1897년(고종 34)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아 제1기[1902년 7월~1905년 12월]와 제2기[1907년 4월~1909년 8월]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북항 매축 이후 부산역, 세관, 잔교, 우체국 등이 세워졌는데, 이 중 잔교는 길이 200m, 폭 16m로 당시 부산의 유일한 부두 시설로 관부 연락선이 접안할 수 있었다. 1908년(순종 2)에는 경부선역의 출발지가 초량역[지금의 지하철 초량역 일대]에서 지금의 부산역 부근으로 이전하였다. 1909년(순종 3)부터 부산진과 초량 간에 영선산 착평 공사가 시작되어 양 지구가 연결되었다. 강점 이후 1911년부터 8개년 계속 사업으로 부산 축항 제1기 공사가 시작되어 지금의 제2 부두가 건설되면서 일본의 대륙 진출 거점이 되었다. 1919년부터는 9년간에 걸쳐 제2기 부산 축항 공사로서 제1 부두와 제2 부두를 확장하였다. 1925년부터 1939년까지 남항 매축 공사가 이루어졌다. 1928년부터 1931년 사이에 연안 시설 확장을 위해 영도 해안 매립 공사를 하였다. 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인 1941년에는 제3 부두, 1943년에 제4 부두, 1944년에 중앙 부두를 축조하고 임해 철도가 부설되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영도에 있던 일제의 원유 저장 시설 이전을 위해 1937년 적기만 일대가 매립되기도 하였다. 적기만의 매립 사업은 군수 물자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계획된 감만동과 대연동 일대의 도시 시가지 개발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와 같이 일제 강점기 초기에 부산항은 일본의 대륙 진출의 거점 구축을 위한 항만으로 건설되었으며, 후기에는 군사 시설 건설과 배후지의 도시 확대로 이어지면서 해안선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경제 개발, 변모를 거듭하는 항구와 해안선] 1960년대 서울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제 성장에서 수출 부문이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동남 해안에 위치한 부산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인천 등 다른 항만에 비해 수출 화물의 비중이 높았던 부산은 육상 교통과 해상 교통의 결절지가 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특히 항만에서 처리해야 할 물동량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이를 내륙과의 원활한 물동량 흐름을 위해 새로운 교통로 건설이 필수적이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