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관 시인이 본 53 시론 11, 10,, 홍성지역의 역사고찰 공민왕 5년에 왕사 보우의 내향
홍주에 대한 역사를 고찰함에 있어서 그동안 자료에 의하여 접힌 홍성의 역사를 바르게 고찰해 보려고 한다, 홍주에 대한 발전의 과정을 통해서 홍주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오늘날에 지론이다, 홍성이야 말로 민족에 유인들이 탄생한 지역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백제시대
웅천주의 군∙현, 우견현이라고 칭하던 지역이기도 하다,
웅천주(熊川州)註 256. 한편 웅진(熊津)이라고도 이른다.열야산현(熱也山縣)註 257, 벌음지현(伐音支縣)註 258, 서원(西原)註 259 한편 비성(臂註 260城)이라고도 이르며 한편 자곡(子註 261谷)이라고도 이른다, 대목악군(大木岳郡)註 262, 기매현(其註 263買縣)註 264 한편 림천(林川)이라고도 이른다., 구지현(仇知縣)註 265, 가림군(加林郡)註 266, 마산현(馬山縣)註 267, 대산현(大山縣)註 268, 설림군(舌林郡)註 269, 사포현(寺浦縣)註 270, 비중현(比衆縣)註 271, 마시산군(馬尸山郡)註 272, 우견현(牛見縣)註 273, 금물현(今勿縣)註 274, 구군(構註 275郡)註 276, 벌수지현(伐首只縣)註 277, 여촌현(餘村縣)註 278, 사평현(沙平縣)註 279, 소부리군(所夫里郡)註 280 한편 사비(泗沘)라고도 이른다., 진악산현(珍惡山縣)註 281, 열이현(悅已註 282縣)註 283 한편 두릉윤성(豆陵尹城)이라고도 이르고 한편은 두곶성(豆串城)이라고도 이르며 한편으로는 윤성(尹城)이라고도 이른다., 임존성(任存城)註 284,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註 285, 오산현(烏山縣)註 286,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註 287, 진현현(眞峴縣)註 288 한편 정현(貞峴)이라고도 이른다., 진동현(珍洞縣)註 289, 우술군(雨述郡)註 290, 노사지현(奴斯只縣)註 291, 소비포현(所比浦縣)註 292, 결이군(結已註 293郡)註 294, 신촌현(新村註 295縣)註 296, 사시양현(沙尸良縣)註 297, 일모산군(一牟山郡)註 298, 두잉지현(豆仍只縣)註 299, 미곡현(未谷縣)註 300, 기군(基郡)註 301, 성대혜현(省大兮縣)註 302, 지륙현(知六縣)註 303, 탕정군(湯井郡)註 304, 아술현(牙述縣)註 305, 굴지현(屈旨縣)註 306 한편 굴직(屈直)이라고도 이른다.이다.
신라시대
이산군, 백제의 우견현이었으나 목우현 .경덕왕 시대
이산군(伊山郡)註 049은 본래 백제(百濟)註 050의 마시산군(馬尸山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051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거느리는 현(領縣)이 2개이다.
목우현(目牛縣)註 052은 본래 백제(百濟)의 우견현(牛見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알 수 없다.
금무현(今武縣)註 055註 056은 본래 백제(百濟)의 금물현(今勿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덕풍현(德豐縣)이다.
신라 경순왕 시대 운주가 홍성이다,
운주 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 934년 09월(음) )
운주(運州)註 164 내의 30여 군현(郡縣)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결성군
결성군(潔城郡)註 115은 본래 백제(百濟)註 116의 결기군(結己郡)註 117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18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2개이다.
신읍현(新邑縣)註 119은 본래 백제(百濟)의 신촌현(新村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보령현(保寧縣)이다.
신량현(新良縣)註 122은 본래 백제(百濟)의 사시량현(沙尸良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여양현(黎陽縣)이다.
지심주와 그 속현
지심주(支潯州)의 9현(縣). 기문현(己汶縣)註 486은 본래 금물(今勿)이다. 지심현(支潯縣)註 487은 본래 지삼촌(只彡村)이다. 마진현(馬津縣)註 488은 본래 고산(孤山)이다. 자래현(子來縣)註 489은 본래 부수지(夫首只)이다. 해례현(解禮縣)은 본래 개리이(皆利伊)이다. 고로현(古魯縣)은 본래 고마지(古麻只)이다. 평이현(平夷縣)註 490은 본래 지류(知留)이다. 산호현(珊瑚縣)註 491은 본래 사호살(沙好薩)이다. 융화현(隆化縣)은 본래 거사물(居斯勿)이다.
나주도(羅州道) 제고사(祭告使)인 대부소경(大府少卿) 이당감(李唐鑑)이 아뢰기를, “중국[中朝]의 사신들이 왕래하는 데에 고만도(高巒島, 충남 보령)의 역정[亭]은 수로(水路)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서 배를 정박하기가 불편합니다. 요청하건대 홍주(洪州) 관할의 정해현(貞海縣, 충남 서산군 해미면) 지역에 역정 하나를 새로 설치하여 영송(迎送)하는 장소로 삼으십시오.”라고 하자, 제서(制書)를 내려 이를 따르게 하고, 역정의 이름을 안흥정(安興亭)이라 하였다.
9월 갑신 제서를 내리기를,“사신을 보내 여러 주목(州牧)‧자사(刺史)‧통판(通判)‧현령(縣令)‧현위(縣尉) 및 장리(長吏)의 정치 성과에서 근만(勤慢)과 청탁(淸濁)을, 또 백성의 빈부고락(貧富苦樂)을 조사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담당 관청이 관할 역(驛)의 백성과 역리가 영접에 피로할 것이므로 이를 정지하도록 요청하였다. 왕이 이르기를,“내가 생각건대 선조들은 자주 사신을 보내 백성의 고충을 묻고 찾았으므로, 여러 지방 관리가 모두 청렴에 힘써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근래에는 기강이 해이해지고 또 징계나 개혁이 없으므로, 〈지방관리가〉 공사(公事)에는 부지런하지 않고 사리(私利)만을 꾀하며, 권력가와 결탁하여 마을에서 많은 것을 수탈하고 논밭에서 양잠과 방적을 권장하지도 않는다. 어염(魚鹽)과 재칠(梓漆)이 생산되는 지방이나 축산(畜産)과 자재(貲財)가 있는 집은 모두 수탈당하고, 만일 주저하는 자가 있으면 곧 일을 빙자하여 엄하게 체벌하여 그 생명을 상하게도 한다. 〈백성은〉 원통함을 품고도 호소할 곳이 없으며, 가끔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자가 있어도 권귀(權貴)와 요로(要路)의 청탁으로 끝내 행할 수 없게 되니, 백성을 좀먹는 해독은 날마다 달마다 불어났다. 관리가 이미 이러하니 백성이 어찌 살아갈 길이 있겠는가? 나는 밤낮으로 힘써 그 폐해를 풀어줄까 하는데, 일을 맡은 당사자는 찬성하기는 커녕 논의가 분분하니 어떻게 된 일인가? 이제 겸시어사 형부원외랑(兼侍御史 刑部員外郞) 이유적(李攸績)을 산동(山東)과 산남(山南)의 충주(忠州)․경주(慶州)․상주(尙州) 3도무문사(三道撫問使)로, 겸어사잡단 병부낭중(兼御史雜端 兵部郞中) 김약진(金若珍)과 예부낭중(禮部郞中) 최상(崔尙)은 둘 다 산남(山南)의 진주(晉州)․나주(羅州)․전주(全州)․청주(淸州)․광주(廣州)․공주(公州)․홍주(洪州) 7도무문사(七道撫問使)로, 겸감찰어사 시전중내급사(兼監察御史 試殿中內給事) 안민보(安民甫)를 관서(關西)․관북(關北)․관내(關內) 3도무문사(三道撫問使)로, 감찰어사(監察御史) 민창수(閔昌壽)를 관내동도무문사(關內東道撫問使)로 임명하여 각각 파견하니 지체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나주도(羅州道) 제고사(祭告使)인 대부소경(大府少卿) 이당감(李唐鑑)이 아뢰기를, “중국[中朝]의 사신들이 왕래하는 데에 고만도(高巒島, 충남 보령)의 역정[亭]은 수로(水路)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서 배를 정박하기가 불편합니다. 요청하건대 홍주(洪州) 관할의 정해현(貞海縣, 충남 서산군 해미면) 지역에 역정 하나를 새로 설치하여 영송(迎送)하는 장소로 삼으십시오.”라고 하자, 제서(制書)를 내려 이를 따르게 하고, 역정의 이름을 안흥정(安興亭)이라 하였다.
무진 중도안찰사(中道按察使)가 보고하기를, 삼별초(三別抄)가 고란도(孤瀾島)에 침입하여 전함(戰艦) 6척을 불사르고 배를 만드는 장인을 죽였으며 조선관(造船官) 홍주부사(洪州副使) 이행검(李行儉) 및 결성(結城)과 남포(藍浦)의 감무(監務)를 잡아갔다고 하였다.
홍주는 고려 성종 시기에 운주도단련사를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백제 시대에는 어떠한 지역이었던가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홍주(洪州)는 성종(成宗) 14년(995)에 운주도단련사(運州都團練使)를 두었다. 현종(顯宗) 3년(1012)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태조실록(太祖實錄)』의 10년(928) 3월 기사 중 “왕이 운주(運州)에 들어갔다”라는 “곧 지금의 홍주(洪州)이다.”라고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목(牧)이 되었다. 〈공민왕〉 17년(1368)에 지주사로 강등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 다시 목이 되었다. 별호(別號)는 안평(安平)이고, 또는 해풍(海豊)【모두 성종[成廟] 때 정하였다.】이다. 또한 해흥(海興)으로 부르기도 한다. 속군(屬郡)이 3개, 속현(屬縣)이 11개이다.
조선 시대
충청도 결성현(結城縣)1493) 의 성을 쌓았다.,
2021년 11월 5일